00009 짐승, 꽃을 발견하다 =========================================================================
“경의 딸,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
이 능구렁이 같은 놈이 바빠 죽겠는데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나 했다. 그만두면 태자비 후보로 내 딸을 집어넣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다.
이, 이... 파렴치한 왕 놈 같으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크면서 내가 지 뒤를 얼마나 봐줬는데! 한창때 담 넘어 기생집 드나드는 걸 누가 망 봐 줬는데! 지가 누구 때문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은혜를 이렇게 갚아?
류 충이 연제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봤다.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연제는 우아하게 찻잔을 들어 올리며 태연하게 말했다.
“그럼 그만두지 말든가.”
“그럼 일을 좀 작작 시키든가”
“사람을 더 뽑으라니까”
“뽑으면 뭐해, 기껏 써먹을 만하면 다른 데로 보내는데. 남 좋은 일을 내가 왜 한담?”
“그럼, 너도 다른데서 데려와”
류 충이 드디어 폭발했다.
“아! 다른데서 데려오면 뭐합니까. 다시 처음부터 죄다 교육시켜야 하는데!”
“아버지. 목소리가 크십니다.”
류 강연은 이런 모습을 한 두 번 본 것이 아닌 듯 침착하게 말했다.
“목소리가 큰 게 뭐! 뭐?! 너 지금 못 들었어? 꽃 같은 우리 연이를 그 망나...태자한테 준다잖아! 누구 맘대로!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이 아니라, 흙이 들어와도 절대 안 돼!”
“아버지, 후보 중 하나로 선발되는 것뿐이지, 태자비로 간택될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연이는 12년간을 누워만 지내 기본적인 배움도 짧은 상태인지라 여러모로 보아 간택되기는 힘들 겁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태자전하의 의사이온데 전하께서 싫다고 하시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별일 아니니, 고정하세요.”
류 충은 시뻘건 얼굴로 집이 있는 방향 쯤을 향해 마구 손가락질을 했다.
“별일이 아니야? 야!! 너 집에 갔다 와! 지금 당장 집에 가서 연이 얼굴 보고 와!! 그 얼굴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내 두고 보겠다. 강이 니가 연이를 안 본지 너-무 오래 되서 그런 망발을 하나본데, 너 지금 큰-실수 하는 거다! 우리 연이를 보면 백이면 백 죄다 안 넘어 갈 수가 없어. 그런 일 따윈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그럼 불안하지도 않지.”
“저도 우리 연이가 곱다는 건 잘 압니다. 하지만 미인 경연대회도 아니고, 태자비로 간택 된다는 것은 미색만 뛰어나다고 되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태자비가 되기 위해 어렸을 때부터 교육까지 따로 받는 여식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저는 이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그래, 네 말대로 연이가 배움이 모자라다고 치자!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지만! 억지로 가정을 해보자고! 근데, 그 망!...태자가 연이한테 한눈에 반하면? 그럼 어쩔 건데? 그래서 같이 살겠다고 지라ㄹ...강짜라도 놓으면? 그 엄청난 사태를 어떻게 책임질 거냐고! 니가 책임질 거야? 니가 책임질 거냐고!”
누구든지 내 딸을 보기만 한다면 100이면 100 죄다 한눈에 넘어간다고 막무가내로 우기는 류 충을 보면서 류 강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버지의 걱정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우리 연이야 꽃 같이 예쁜 건 자신도 잘 안다. 어렸을 때부터 침상에 누워있는 모습만 보긴 했지만, 그 모습조차도 보고 있으면 이렇게 예쁜 아이가 내 동생이란 것이 믿기질 않았다.
갓난아기일 때는 자신이 만지다가 살짝 힘을 주기라도 하면 어디가 잘못될까 두려워, 어머니가 괜찮다고 하시는데도 손끝 하나도 건들이지 않았었다.
연이가 정신을 잃기 전 까지만 해도 후원에서 꽃을 따 누워있는 침상에 올려주면 환하게 웃으며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얼굴이 꽃보다 예뻐 넋을 놓고 볼 때가 많았다.
그 후로 7년 동안 눈 감고 있는 모습만 봤어도 하루라도 어여쁘지 않은 날이 없었는데 5년이나 지난 지금은 얼마나 고울지 상상도 안 될 지경 이었다.
이런 지경인데 보통 남자들 같았다면야 아버지 보다 내가 먼저 칼을...아니 차단을 했을 테지만, 상대가 태자라면 말이 달라진다.
태자가 어떤 사람인데... 그가 보통 남자들처럼 사랑에 빠진다고? 그것도 한눈에 반해서? 어림도 없는 소리!
5년 동안 전쟁터에서 같이 구른 류 강연은 그런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단언 할 수 있었다.
류 강연은 아무리 전쟁터지만 여자, 어린아이, 노인 할 것 없이 고민하나 하지 않고 단칼에 두 동강 내 버리던 태자를 떠올렸다.
전쟁 중 어느 날, 어떻게 들어왔는지 몰라도 륜국의 어린아이가 폭탄을 들고 진영 한가운데로 들어온 적이 있었다.
아이는 대, 여섯 살 정도 되어보였는데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였다.
그 추운 날, 걸레같이 헤진 어른의 저고리 하나만 걸치고 맨발로 서있었다. 추위에 얼굴이 퍼렇게 굳어 있었고, 작은 발은 이미 동상에 걸린 것처럼 까맣게 죽어 있었다.
아이는 사람들이 자신을 도와주리라 생각했는데 주변을 빙 둘러싸고 다가오지 않자 엄마를 부르면서 서럽게 울기 시작 하는데, 그걸 보는 나까지도 측은해 지면서 어떻게든 저 아이를 살려 보기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그때, 막사에서 태자가 어슬렁거리며 나왔다.
장죽을 빨면서 천천히 그 아이를 감상 하듯 훑어 내리더니, 눈을 돌려 우리들이 얼어붙어 있는 꼴을 보고는 피식 웃었다.
불안한 예감이 들어, 안 돼! 라고 소리치는데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아이의 머리가 목에서 툭 떨어졌다.
칼을 휘두르는 신형조차 보이지 않았다.
아이도 눈치 채지 못했는지 서럽게 울고 있는 얼굴 그대로 목에서 떨어져 나왔었다.
진영은 삽시간에 무거운 침묵에 휩싸였다.
산전수전 다 격은 거친 노장들 까지 헉! 소리를 내면서 굳어있는데,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그가 다음에 한 짓이 더 가관이었다.
목이 떨어진 아이가 그때까지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있던 폭탄을 집어 들어, 심지를 제거하더니 구르고 있는 아이의 머리를 잡아 입을 벌려 그 안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폭탄이 들어가면서 아이의 여린 입을 엉망으로 찢고, 작은 이빨을 두부처럼 뭉개버렸다.
보다 못한 몇몇의 군인이 토악질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차라리 살인마의 잔인한 표정이거나, 돌아버린 인간의 번뜩거리는 눈이라도 했다면 차라리 더 인간 같았을 것이다.
그는, 마치 장죽에 담배 잎을 쑤셔 넣듯 그 짓을 아무런 표정 없이 여상스럽게 했다.
그 후 상자를 가져오라고 하더니 머리를 그 상자에 담아 상대진영으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아이의 피가 묻은 칼과 손을 아이의 옷에 대충 닦았는데 매듭이 풀려있던 아이의 옷이 바람에 날려 벌어지면서 속옷도 입지 않은 아이의 알몸이 드러났다.
여자아이였다.
그는 그것을 보고도 태연했다.
놀라지도 않았고, 죄책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하물며 벌어진 옷을 여며 주지도 않았다. 알몸이 휑 하게 드러나 있는 채로 내버려 두고 그대로 뒤돌아 장죽을 빨면서 천천히 막사로 들어가 버렸다.
그에게, 죽은 아이는 그냥 버려진 인형 같은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가 그 모든 일을 할 때까지 거기에 있던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충격에 빠져 그 누구도 말을 하기는커녕 움직일 수조차도 없었다.
그가 막사로 들어간 뒤에도 한참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 진영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그때 승승장구 하던 우리진영보다 연패 당하던 상대진영이 더 활기차고 밝게 느껴질 정도였다.
무표정하게 칼에 묻은 피를 아이의 옷에 닦던 그 모습... 인간같이 않은 그 모습을 류 강연은 절대 있지 못한다.
사랑이건, 첫 눈에 반하건, 그런 건 다 인간의 영역이다. 태자는...인간이 아닌 짐...아니, 다른 무엇이었다. 설사, 인간일지는 몰라도 그에게는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져있었다.
“아버지...'그' 태자전하께서...그럴 일은 없지 않겠습니까.”
류 강연의 말이 무슨 뜻 인지도 모르고 류 충이 벌컥 화를 냈다.
“야!! 너 누구편이야!”
우아하게 차를 마시던 연제도 류 강연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고 피식 거렸다.
“누구 편이긴? 정의의 편이겠지. 그래도 네 집 둘째는 아직까지는 객관성을 잃지는 않았나 보다. 첫째는 아주 맛이 갔던데...상국한번 가랬다가 와...나, 신하한테 한 대 맞는 줄 알았잖아. 하여튼, 이래서 남자는 군대를 갔다 와야 해.”
“쟤가, 망나!...누구 옆에 오래있어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옵니다! 폐하!”
연제의 비웃음이 더 깊어졌다.
“너네 집에서 쟤만 제정신 같은데? 딸이 그렇게 예쁘다고? 참, 나... 저번에, 너 닮았다고 그러지 않았냐?.”
“......”
“너 한나라에 재상씩이나 돼서 그렇게 거짓말이나 하고 다니지 좀 마. 나나 되니까 이해해 주지...내가 남들 보기 창피해 죽겠어. 믿을 소리를 해야지”
류 충은 눈앞이 아찔해지면서 뒷목이 뻣뻣해 지는 것이 느껴졌다.
가까스로 연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화를 가라 앉혔다. 그래, 이러면 안 돼. 흥분하지 말자. 난 연이랑 천년만년 오래 살 거야.
“믿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시죠. 어차피 내 딸, 그 망...태자에게 줄 생각은 추호도 없으니! 나중에 달라고 울고불고 죽는다고 난리쳐도 절대 안 줍니다. 아니, 못줍니다. 꿈도 꾸지 마시죠.”
연제의 눈이 가늘어 졌다.
“왜? 우리 태자가 어디가 어때서? 그 얼굴에다, 그 몸에다, 그 실력에다, 가문이 떨어지기를 해? 학벌이 떨어지길 해? 돈이 없기라도 해? 제국 최고 신랑감인거 몰라?”
하긴, 한 나라에 태자인데 당연히 나라 최고의 신랑감이겠지. 하지만, 문제는.
“니 딸이면 주겠냐?”
“......”
거 봐, 지도 그러면서.
허우대만 멀쩡하면 뭐하냐고.
어렸을 때부터 도성에 있는 기방이란 기방은 죄다 출입하면서 섭렵하지 않은 기생이 없고, 나중에는 지방으로 원정까지 갔었지 아마?
술은 어찌나 많이 퍼 마시는지 궁내 술이란 술은 죄다 퍼마셔 동을 내기 일쑤였고,
어쩐 일로 자진해서 전쟁터에 간다고 해서 드디어 철들었나 싶었더니만, 가서는 무슨 피에 미친놈처럼 살육을 하면서 어찌나 잔인한 짓을 서슴치 않고 해대는지 륜국(國)이 걔 무서워서 전쟁 그만뒀다며?
협상 때마다 그런 상 미친놈까지 전쟁터에 내 보냈다고 우리 보고 상도덕도 없는 나라라고 얼마나 씹어댔는지 알아? 그 미친놈이 일단 격전이 시작되면 눈알이 홱 돌아가 가끔 같은 편까지 죽인다던데? 그래서 격전 중에는 걔 옆에 아무도 안 간가며?
오래 데리고 있으면 우리한테도 안 좋을 거라며 하루빨리 죽여 없애버리라는 소리까지 들은 거 아냐고! 다른 나라한테서 우리나라 태자가 상 미친놈이니 빨리 죽여 없애는 게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고 충고 까지 들은 내 심정을 니가 알아?
내가 차마 그 미친놈이 우리나라 태자라는 말은 못하고...어휴.
이런데, 너 같으면, 니 딸 주겠니?
라는 뜻을 가득 담아 류 충은 연제를 노려보았고,
연제는 자신도 태자가 어떤 놈인 걸 잘 알기 때문에 딸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차마 주겠다는 대답이 선뜻 나오지 않아 진 것 같은 기분에 류 충을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상을 뒤집어엎을 것 같은 험악한 기류가 오고가자, 류 강연은 태연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이런 고급차는 5년 만에 마시는 것이기 때문에 상이 뒤집히기라도 해 깨진다면 너무 아까웠다.
주제만 조금씩 다를 뿐 자신이 태어난 이후 27년간을 지겹게 봐왔던 일이었기 때문에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 조금 지루하기도 했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연이를 보고 싶었다.
류 강연은 연이를 생각하면서 차를 음미했다. 차 맛이 참 일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