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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8화 (8/110)

00008  짐승, 꽃을 발견하다  =========================================================================

“저...근데, 이제 안 올 건데요?”

남자는 먹이를 배부르게 먹고 한껏 나른해진 사자같이 배연에 눕다시피 기대어 장죽을 깊게 빨아들인 뒤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건, 두고 봐야지”

화연은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데 그 남자가 했던 말이 계속 생각났다.

‘아버지께서 계속 바쁘실 거라는 말일까?’

무언가를 아는 것 같은 그의 말투를 곰곰이 되새겨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얼굴 앞에서 흔들리는 나비가 답답하게 느껴져 살짝 들어 올렸지만 벗지는 않았다.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지.

찬합을 챙겨들고 돌아 가기위해, 아까, 그가 가지고 있다던 얼굴을 가릴만한 것을 달라고 말 하려는데 갑자기 생각난 듯 그가 말했었다.

“생각해보니 5년 동안 이곳에 없었기 때문에 지금은 그 쓰임이 바뀌었다는 것이 이제야 생각나는군. 얼핏 그런 말을 들은 것도 같아. 결혼 전 처녀들이 쓰고 다니는 거라고 한 거 같은데...”

“그렇죠? 아유... 아까는 깜짝 놀랐어요. 전에는 바ㄹ...음, 그런 용도로 쓰이긴 했었나 봐요.”

“그러니까 꼭 쓰고 다니도록 해. 평민도 아니고 재상의 딸씩이나 돼서 얼굴을 마구 드러내 놓고 다니는 것도 아버지 얼굴에 먹칠을 하는 것과 같으니”

“그래요? 그렇구나...알겠어요. 알려줘서 고마워요.”

기해는 처녀 중에 나비를 쓰는 사람도 있다고 말해줬지 꼭 쓰고 다녀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았었는데, 이 남자는 꼭 써야하는 것처럼 말했다.

아무래도 기해보다 궁에서 일하는 사람이 더 잘 알겠지. 화연은 들어 올렸던 나비를 다시 꼼꼼하게 덮어쓰고 빠르게 지나가는 거리를 구경했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기해는 마차가 도착하자마자 다가와 화연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아기씨!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어르신이 못 가게 잡으신 거예요?”

화연은 아버지는 만나지도 못했지만 사실대로 말하면 왠지 안 될 것 같아 얼버무렸다.

“어? 아니야...”

“어머, 찬합이 가벼워진걸 보니 식사는 다 하셨나 보네요? 제가 좀 많이 챙겨드렸었는데 다 드신 거예요? 어르신, 요즘 입맛 없다고 아침에도 몇 술 안 뜨셨는데.”

“어...다...드셨어...”

아버지 말고 다른 사람이...

화연은 말을 흘리며 장원으로 들어가는데 뒤따라 걸으면서 찬합 안에 있는 반찬통을 흔들어보던 기해는 깜짝 놀라면서 물었다.

“어? 고기까지 다 드셨어요? 요즘 고기 잘 안 드시잖아요.”

요즘, 류 충은 딸이 깨어났으니 오래오래 건강하게 200살 까지는 살아야 한다면서 육식을 줄이고 채식위주로 식사를 했다.

“어...조, 좋아하시던데...”

아버지 말고 다른 남자가...

“웬일이래요? 하긴, 예전에는 고기만 드시기도 했었죠. 아무튼 입맛이 다시 살아나셨나 보네요. 다행이다”

“응...”

기해야...미안...

화연은 죄책감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아버지 드리라고 정성껏 싸 주었을 텐데.. 웬 모르는 남자를 만난데다, 그 앞에서 나비도 벗어버리고, 찬합까지 다 줘버린 건 절대 들키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아기씨? 왜 그러세요?”

“응? 뭐가?”

“뭐, 저한테 숨기는 거 있으세요?”

“어? 아니? 없는데?”

기해는 아까부터 뭔가가 자꾸 신경에 거슬리는데 도무지 그게 뭔지 감을 잡을 수 가 없었다.

미심쩍은 눈으로 화연을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보았지만 뭐가 이상한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아기씨가 처음으로 혼자 외출하신 날이라서 신경이 예민해 졌나 하고 고개를 갸웃한 기해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훗날, 이 일을 생각하고 자신의 머리를 얼마나 쥐어뜯게 되는지 미리 알았다면 이렇게 쉽게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흠...아기씨, 목욕 하셔야죠? 물 받아 놨어요. 장미 말려둔 거 뿌려놨으니 지금 쯤 아주 적당하게 풀어졌을 거예요. 얼른 가세요.”

“응”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기해를 따라가는 화연의 몸에서 약하게 연초 향기가 흘러 나왔다.

그날 저녁, 류 가(家)가 류 충의 고함소리로 들썩 거렸다.

“만날 쓸데없는 생각만 하면서 헛짓거리만 하는 그 망나니 같은 놈 때문에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이번에야 말로 사직서를 내고야 말테다!”

류 충은 마차에서 내려 집으로 들어서자마자 고함을 버럭 지르면서 머리에 쓰고 있던 관모(冠帽) 벗어 땅바닥에 집어던져 내동댕이쳤다.

마중 나와 있던 기해와 화연은 깜짝 놀라 류 충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아버지, 고정하세요.”

“에구머니나! 어르신! 무슨 일 있으셨어요?”

류 가(家)의 총관(摠管) 한 울은 태연한 표정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관모를 집어 들어서 흙을 털었다.

“가주, 그럼 이 관모는 버려도 될까요? 아...참, 관복은 그냥 버리면 안 되지...불에 태우겠습니다.”

“그래!! 태워! 싸그리 태워버려!! 이, 이 그지 같은 옷도 그냥 죄다 태워 없애버려!!”

류 충은 입고 있던 관복까지 그 자리에서 찢어 벗으려고 온 몸을 뒤틀었다.

놀란 화연이 그런 류 충에게 매달렸다.

“아버지! 제발, 왜 그러세요. 고정하세요. 네? 들어가요. 아버지...여기서 이러시다 한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들어가세요. 네?”

놀라서 눈물까지 글썽거리는 화연을 얼굴을 보니, 화가 누그러지는 게 아니고 더 커지는 것 같았다.

‘내가 얘를 어떻게 살렸는데! 이제 꽃 같은 내 딸 얼굴이나 보면서 남은 생을 행복하게 보내겠다는데, 거기에 이딴식으로 똥을 싸?”

류 충의 이가 득득 갈렸다.

사건의 발달은 오후 쯤 이였다.

아침부터 입맛도 없었지만 걱정스레 쳐다보는 딸의 얼굴을 봐서, 대충 국에 밥 말아 후딱 먹고 집을 나섰다. 마차에 타서 오늘은 어떻게 하면 사직서를 낼 수 있을까 고민을 하는데 어찌나 깊게 생각했는지 벌써 저 지긋지긋한 궁에 도착해했었다.

마차에서 내려 터덜터덜 행궁으로 들어가니, 어제도 여기서 밤을 샜는지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담하가, 아침부터 서류 한 무더기를 품에 안고 서 있었다.

서 있는 그 놈 뒤에서 검은 기운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차 한 잔 정도는 마시고 시작하자는 쓸데없는 소리라도 지껄인다면 결코 가만두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찍소리도 못하고 아침나절 내내 서류에 도장 찍느라 손목이 아파와, 내가 그만두기 전에 꼭 산재(産災)를 신청하고 만다고 다짐하고 있을 무렵 오찬을 같이하자는 연제의 전언이 전해졌다.

드디어 때가 왔구나 싶어 항상 가지고 다니던 사직서가 잘 있나 다시 한 번 확인하고는 오찬만을 기다렸다. 시간이 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오찬장소로 가려는데 문득, 등골이 오싹한 것이 왠지 내 딸 에게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것 같은 하는 불길한 생각이 드는것이 아닌가.

그 불길한 예감을 애써 떨쳐버리고 걸음을 옮기는데 오늘따라 궁 안은 왜 이렇게 추운지... 고뿔이라도 들려나? 하는 생각에 옷깃을 더욱 꼭 여미고 걸음을 재촉했다.

오찬 장소는 내궁의 중앙연못인 후제연(后帝淵)위에 떠있는 연미정(演美亭) 이었다.

날도 추워죽겠는데 왜 정자위에서 하는지 구시렁거리며 다가가는데 연제는 누군가와 같이 있었다. 독대인 줄 알았는데...그래도 상관없었다. 누가 있는지 무슨 상관이람. 그냥 사직서만 던지고 오면 되지.

“신, 류 충. 인사드리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오, 우리 재상오셨구만. 이리 앉으시게”

고개를 숙이고 연제가 권하는 자리로 가는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 앉아있었다.

“어?”

“아버지. 그 간, 강녕하셨습니까.”

륜국(圇國)과의 전쟁에 참가해 5년 만에 보는 둘째아들 류 강연이었다.

“허...강이 너 왜 여기 있냐? 내일 오는 거 아니었느냐?”

“연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체할 수가 없어 바로 달려왔습니다.”

“망나...흠, 흠...태자전하도 안 모시고?”

“태자전하께서도 귀 궁을 서두르셔서 모시고 왔습니다.”

류 충은 연제의 눈치를 살짝 살핀 뒤 류 강연에게 작게 말했다.

“그럼 집으로 가야지 왜 여기로 와? 여기가 니 집이냐?”

조용히 있던 연제가 끼어들었다.

“짐이 불렀소. 오랜 기간 짐을 대신하여 전쟁터에 나가, 갖은 고충을 다 당했을 텐데 짐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소.”

류 충은 생각했다. 웃기시네, 지가 언제부터 그랬다고...

“......”

“그래서. 공을 치하하는 의미로 이번에 짐의 호위대의 수장으로 직위를 높여줄 생각인데 재상의 생각은 어떠하신가?”

류 충은 다시 생각했다. 그러든가 말든가...그나저나 사직서는 언제 올리지?

“뭐...네...성은이 망극하옵니다...하온데...”

“저는 아직 실력이 미천하여 자격이 부족하옵니다. 바라건데, 어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류 강연이 류 충의 말을 끊으면서 엎드려 절을 하며 관직을 고사했다.

그 청렴 강직한 모습에 흡족해진 연제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류 충은 마음이 급해졌다. 저 놈이, 왜 말을 끊고 지랄이야.

“그럼...그러든가...폐하, 신이...”

“재상께서 자식농사 하나는 참 잘 지으셨소. 하나 같이 다 인재들만 모여 있으니...헌데, 셋째한테는 아직 연락이 없소?”

“에?...예...아직...그러 하온데, 폐하”

“참, 걱정이 많으시겠소. 약초를 구하러 다닌다고 들었는데. 의술을 따로 공부했나 보오?”

“아, 뭐...조금...이게 중요한 건 아니고, 폐하! 제가...”

“아들 셋 다 어찌나 그렇게 잘났는지 참 부럽소. 첫째는 외교 쪽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둘째는 무쪽으로 잘났고, 셋째는 의술에 일가견이 있고...이제 넷째자녀도 깨어났으니 경은 이제 걱정할 일은 없겠소.”

류 충은 이때다 싶어 준비해둔 말을 빠르게 읊었다.

“황공하옵니다. 폐하, 신이 늘그막에 가진 딸이 그동안 자리에도 일어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헌데, 이제 딸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니 이보다 큰 경사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여생을 딸과 함께 오순도순 사는 것이 노신(老臣)의 소원이옵니다. 하오니, 관직을 파하고 물러남을 윤허하여 주시옵소서.”

이 말을 언제 꺼내나 했던 연제는 속으로 히죽 웃었다. 누구 맘대로?

“재상께서 그러하겠다면 그리하셔야지. 하나밖에 없는 소원이라는데 평생을 짐을 위해 몸 받친 경을 위해 내 그것도 못해주겠소이까. 걱정하지 마시오. 바로 수리(受理)해 드리리다.”

류 충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이렇게 쉬울 리가 없는데?

“...황공무지로소이다. 폐하”

갑자기 연제의 얼굴에 근심이 서리면서 흐려졌다.

“그런데, 혹시 태자 나이가 몇인지 혹시 아시오?”

“23세 아니옵니까.”

“맞소. 그렇지. 흐음...”

류 충은 물어보면 안 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연제가 대 놓고 물어봐달라는 티를 너무 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러시는지...”

“후...벌써 보령이 그렇게 됐는데, 태자비 맞을 생각은 안하고 아직도 그러고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짐이 답답해서 그러오.”

난 또, 뭐라고...하루 이틀도 아닌데, 뭘 새삼?

“심려가 크시겠습니다. 폐하”

“그러니까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길일을 받아서 태자비를 간택하는 경연을 벌일까 하는데 경의 뜻은 어떠시오.”

그러든가...난 이제 그만두는데 나랑 뭔 상관이람?

“명안이십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후보로 뽑히면 무조건 모두 다 참여해야 한다는 건, 혹시 아시오?”

“...그러 하온데...”

“경의 딸, 나이가 어떻게 되더라...”

“!!”

이 능구렁이 같은 놈이 바빠 죽겠는데 왜 이런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나 했다.

그만두면 태자비 후보로 내 딸을 집어넣겠다는 협박을 하는 것이다.

이, 이... 파렴치한 왕 놈 같으니라고!

어렸을 때부터 같이 크면서 내가 지 뒤를 얼마나 봐줬는데! 한창 때 담 넘어 뒷간 드나들 듯이 기생집 드나드는 걸 누가 망 봐 줬는데! 지가 누구 때문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은혜를 원수로 갚아?

류 충이 연제를 가늘게 뜬 눈으로 노려봤다.

“...너무 하신 거 아닙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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