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7 짐승, 꽃을 발견하다 =========================================================================
“다른 걸 주지. 얼굴을 가려야 하는 거라면 나한테 적당한 게 있어.”
“어...정말요? 초면에 실례가 많았는데 참 친절하시네요. 이걸 꼭 쓰고 있으라고 해서 좀 난처했었거든요.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화연은 아무 의심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비를 벗어 들었다. 안 그래도 이 어두운 방안에서 나비까지 쓰고 있으려니 잘 보이지도 않고 답답했던 차였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창으로 걸어가더니 창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천을 잡더니 한 번에 뜯어 버렸다.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화연은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빛에 눈이 적응 할 때까지 기다렸다. 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잡아 내렸다.
“앗! 뭐하는 거예요?
“보려고”
눈이 빛에 적응한 것 같아 손을 움켜쥐고 있는 남자를 쏘아 보았다.
붉은 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 왔다.
햇빛을 등지고 서 있으니 금방이라도 타오를 것 같은 선명한 붉은색 이었다. 머리카락은 정돈한 지 오래된 모양으로 길게 자라 그의 이마와 목을 덮고 아무렇게나 헝클어져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눈동자는 금을 통채로 녹인 것 같은 황금색이었는데 그가 눈을 가늘게 뜨니 눈동자의 색깔이 오묘해 졌다.
건강한 빛깔의 매끈한 피부, 한쪽에만 쌍꺼풀이 있는 길고 깊은 눈, 높은 콧대와 깍은 것 같은 콧날, 그리고 붉은 입술. 신화에 나오는 피에 젖은 전쟁의 신과 같기도 하고, 결코 길들여 지지 않는 오만한 야수 같기도 했다. 잔인해 보이기도 하고 매혹적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아무도 범접 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해 보였다.
그는 이 겨울에, 여름에나 입는 얇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장옷을 느슨하게 걸치고 있었는데 그 안에 윗옷은 입지도 않은 맨몸 이었고 바지도 매듭이 풀어진 채 골반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었다.
장옷 사이로 그의 벌거벗은 가슴이 보였다. 선명하게 뻗어있는 쇄골 아래 근육으로 짜여 진 가슴은 탄탄했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상처자국이 있었다.
무심코 그 상처를 살펴보는데 영역을 나눠 정확하게 갈라져 있는 복근이 꿈틀거렸다.
내가 미쳤나봐! 화연은 화들짝 놀라면서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를 더 이상 쳐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려는데 남자가 턱을 잡아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시켰다.
“왜, 왜 이러세요. 이, 이거 좀...놔주세요.”
남자가 그녀의 얼굴을 한참동안 자세하게 내려 보다가 그녀의 검푸른 머리카락을 한 움큼 손에 쥐더니 냄새를 맡았다. 그의 입이 열리면서 풀 향이 짙게 풍겼다.
“정말, 류 가(家)의 혈통이군. 어설프게 접근하려던 사짜는 아니었어.”
“네, 맞아요. 그러니까 이거...”
“별로 안 컸군.”
“네?”
남자의 말이 무슨 의미 인지 몰라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가까이서 마주 본 그의 눈동자는 그냥 황금색이 아니었다. 머리카락을 쥐고 냄새를 맡는데 눈동자에 은색의 실이 생기면서 기묘하게 번들거렸다.
먹이의 냄새를 맡는 굶주린 호랑이 같기도 하고,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배부른 사자 같기도 했다. 그 압도적인 존재감이 온몸을 짓눌러 숨까지 막히는 것 같았다.
“무,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 이것 좀 놔주세요. 아파요”
남자는 한참동안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다가 천천히 입맛을 다셨다.
“흠...좋다 말았군. 얘들이 웬일로 시키지도 않았는데 좋은 일을 하나 싶었는데”
그는 생각에 잠긴 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턱을 놔주고 그녀 발치에 있는 찬합을 들었다. 빛이 들어오는 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서 바닥에 털썩 앉아 허락도 없이 멋대로 찬합을 열어 반찬통을 하나둘씩 꺼내 뚜껑을 열더니 바닥에 늘어놓았다.
화연이 아픈 턱을 만지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그 많은 반찬 통이 하나도 빠짐없이 죄다 열려져 있었다.
“젓가락은?”
“네?”
“젓가락”
“어...”
이 순간, 그거 우리 아버지 드릴 거예요! 건드리지 마세요!
...라고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화연은 자신의 답답한 성격에 속으로 한숨을 쉬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화연은 그의 맞은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찬합 통 밑바닥을 이리저리 돌려 젓가락과 숟가락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큼직한 배연(背軟 , 속에 솜을 가득 넣어 푹신하게 등을 받치는 천으로 된 주머니/ 쿠션)에 한쪽 팔을 기대고 비스듬히 앉아 한쪽다리는 죽 뻗고 다른 다리는 그 옆에 세운 방만한 자세로 화연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남자가 젓가락은 받지도 않고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나, 먹여줘야 하는데”
깜짝 놀라 그를 쳐다보는데 그가 다시 느릿하게 말했다.
“아까 수하들이 나한테 좋은 일 하려나 오해했다고 말했잖아. 손 다쳐서 옆에서 시중 들어줄 사람을 찾고 있었거든”
그가 들어 올리는 오른손에는 정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심하게 다쳤었는지 손 등을 감고 있는 붕대는 피가 번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장죽도 왼손으로 들고 있었고 반찬통을 잡은 손도, 자신의 턱을 잡은 손도 다 왼손 이었다. 좋은 일 어쩌고 했던 말은 그 말이었구나...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됐었는데 이제야 알 것 같아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가 창을 가린 두꺼운 천을 그 손으로 잡아 뜯은 것은 까맣게 잊은 화연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그러셨구나...근데 죄송해서 어쩌죠? 저는 빨리 가봐야 해요. 아버지 식사 챙겨드리러 온 건데...사실, 지금도 많이 늦었어요. 다른 분에게 부탁하셔야 할 거 같은데...”
그가 어깨를 으쓱하면서 장죽으로 바깥을 가리켰다.
“봤으니 알겠지만, 여긴 아무도 없어. 아무도 오려 하지도 않고.”
“네...그런 것 같더라고요...저... 근데, 여긴 어딘데 혼자계시는 거예요? 여기서 혼자 사시는 건가요?”
남자는 정말 모르냐는 듯 눈을 가늘게 뜨며 화연을 쳐다봤다.
“......”
“어...제가 일어 난지 얼마 안 돼서요... 잘 몰라서 물어본 건데...실례가 됐다면 죄송합니다.”
“음...여기는 잠깐 머무는 곳이야.”
“돌봐주시는 분이 아무도 안계세요? 왜요? 몸도 편찮으신데”
“몰라. 왔다가 다 갔어.”
화연은 왜인지 알 것 같았다. 궁 안에서 돌봐줄 사람이라면 거의가 여자일 텐데. 그것도 처녀. 그런데 남자가 저러고 헐벗고 있는데 누가 옆에 있겠나.
나야 연우였을 때, 별의 별일을 다 격은 데다 아이까지 가져 봤으니 남자가 이 정도 벗고 있는 것쯤은 부끄럽기는 하지만 대경질색하면서 도망칠 정도는 아니지만 여기 사는 대부분 여자들은 아마 뒤로 넘어갈 일이겠지. 기해조차도 이런 모습을 본다면 눈을 가린 채 그대로 도망갔을 텐데.
한숨이 나오면서도 난처해졌다.
사람도 없는 이 싸늘한 곳에서 손까지 다쳐서 홀로 지내야 한다니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만나러 가야 하긴 하는데... 어떻게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류 재상은 아바...폐하와 오찬을 갖는다고 하던데...”
화연의 눈이 동그래졌다.
“네? 정말이에요?”
“응. 들었어.”
“아, 그랬구나...그럼 오늘은 어쩔 수가 없네요. 지금 가 봐도 아버지를 만날 수는 없을 테니 집에 돌아가야 겠네요.”
“나는”
금속성을 띤 낮은 목소리는 그냥 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경고하는 듯 했지만, 화연이 듣기엔 혼자 있기 싫으니 가지 말라고 아이가 칭얼거리는 것 같이 들려 싱긋 웃었다.
“식사하시는 것은 도와드리고 갈 테니 걱정 마세요.”
젓가락을 화연에게 넘기는 남자의 눈이 순간 번쩍거렸다.
화연은 남자에게 밥과 반찬을 손수 떠 먹여주었다.
밥, 반찬, 국 번갈아 가며 열심히 먹여주었는데, 그 결과, 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지독한 편식쟁이다.
나물무침을 주거나 야채를 주면 입을 꾹 다물고 열지를 않았다. 밥과 고기종류를 줄때만 입을 열었다. 생선종류도 잘 먹지 않았고, 심지어 국도 고기만 건져달라고 할 뿐 국물은 마시지도 않았다.
“저...편식은 몸에 좋지 않아요. 고기만 드시는 건 영양이 불균형해지면서 비만의 원인이 되기도 해요”
그는 산적을 씹어 삼키고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 본 뒤 피식 웃었다.
그의 가지런 하지만 날카로워 보이는 하얀 치아가 희게 빛났다.
“비만? 내가?”
화연은 자신의 몸을 좀 보고 말하라는 듯 한 그의 행동에 무심코 그의 복근을 보았다가 얼굴이 다시 붉어지는 듯 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지금 말고요...나중에...나이가 들어 신진대사가 느려지면 그렇게 된다는 말 이예요.”
“의술을 배웠나? 그럴 시간이 없었을 텐데”
화연은 내심 뜨끔했다.
여기의 의술이 얼마나 발전한 상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정도는 다들 알 것 같은데...그의 눈치를 흘깃 보았다.
“아, 아니요...이 정도는 상식...이잖아요.”
“흠...밥”
그가 그냥 넘어가는 것 같아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고는 밥을 떠서 그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남자는 그녀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입에 든 걸 천천히 씹어 삼키더니 물었다.
“내가 풀 때기를 먹으면 뭘 해줄 건데”
“네?”
“이제까지 아무도 나한테 저 흐물흐물하면서 쓰기만한 풀 따위를 먹으라 하지 않았어.먹일 수도 없었고.”
“...그런데요?”
“그래서, 먹어주면 뭘 해줄 거냐고.”
화연은 기가 막혔다. 먹어주다니...참 내, 자기 좋으라고 말 해준 건데.
“해주긴 뭘 해줘요. 그 쪽 건강해지라고 말해준건데.”
“난 이미 충분히 건강해”
“지금이야 그렇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나중에도 건강해”
아...말이 안 통한다...
“그럼 드시지 마세요.”
“먹는다니까”
“그럼 드시던가요.”
“뭘, 해줄 건데?”
“......”
예전 연우로 있을 때 일했던 회계사 사무실에 회계사님의 6살짜리 조카가 놀러온 적 있었는데 딱 그때가 생각났다. 왜 미운6살이라고 하는지 그 날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었는데...
“...후- 뭘 원하시는데요.”
남자가 붉은 입술을 들어올렸다.
“매일 밥 먹여줘”
“네?”
“손 나을 때 까지”
“네? 그건 안돼요. 불가능해요. 아까 말씀드렸다 시피 저는 류 재상(宰相)의 자녀에요.”
남자의 눈이 가늘어 졌다.
“그래서, 이런 하찮은 일은 못하겠다는 건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게 아니고, 저는 여기에서 사는 사람이 아니란 말 이예요.”
“그런데?”
“오늘 하루 여기 오는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제가 깨어 난지 얼마 안돼서...다들 조금 과보호 하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매일 여기에 올 수가 없어요. 분명히 말릴 거예요.”
“그건 것도 마음대로 못해? 애도 아니고”
“모두들 제가 누워 있을 때 얼마나 걱정을 했겠어요. 이제, 더는 걱정 끼치기 싫어요.”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다 장죽을 다시 빨아들였다.
“재상을 만나러 자주오나?”
“아뇨. 오늘 처음 왔어요. 사실, 외출도 처음 하는 거예요.”
“어쩐지...그럼 이제 재상을 만나러 안 와?”
“저랑 점심을 같이 드시는 것을 좋아하시는데, 요즘 바쁘신지 점심에도 못 오시고 저녁에도 늦으셔서 같이 식사 못한지 며칠 됐거든요. 그래서 많이 침울해 하시는 것 같아 제가 말씀도 안 드리고 그냥 온 거예요. 원래, 궁에 드나드는 거 별로 좋아하지 않으세요.”
“흠...그럼 재상을 만나러 올 때마다 여기로 들리면 되겠군.”
“저...근데, 이제 안 올 건데요?”
남자는 먹이를 배부르게 먹고 한껏 나른해진 사자같이 배연에 눕다시피 기대어 장죽을 깊게 빨아들인 뒤 천천히 내뱉었다. 그리고 붉은 입술 사이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고는 흡족한 미소를 띠었다.
“그건, 두고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