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6 짐승, 우리로 돌아오다 =========================================================================
화연은 마차에 앉아 지나가는 풍경을 내다보았다.
마차나 말을 탄 사람만 가끔 보일 뿐 대부분의 사람들은 걸어 다녔다.
사람들은 비단처럼 보이는 광택나는 원단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었는데 복식이 한복과 중국옷을 섞은 것 같았다. 여자들은 대부분 풍성한 치마를 입었고 위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를 입었다.
시비를 데리고 다니는 여자들 중에는 자신처럼 통으로 된 비단치마를 입고 가슴아래에 넓은 리본을 맨 사람도 가끔 보였다. 옷의 여밈은 끈이 대부분이었고, 가끔 단추나 탄성이 있는 고무줄 같은 실로 되어있는 것도 있었지만 지퍼는 없었다.
그 위에 방한용으로 긴 두루마기 모양의 두툼한 겉옷을 걸친 사람도 있고 털 코트 같은 걸 걸친 사람도 있었다. 머리카락 색깔도 여러 가지로 대부분은 갈색이었지만 파란색, 노란색, 회색까지 보였고, 눈동자색은 대부분 머리카락 색과 동일했다.
마차가 지나가는 길은 돌바닥이었는데 마차가 크게 흔들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거칠지 않게 잘 깔려있는 것 같았다.
연우로 살았던 시간으로 인하여 비교대상이 생기니 알 수 있었다. 이곳은 과학기술이 그리 발전하지 않았다. 전기 조차도 없었다. 등불을 사용하거나 밝게 빛나는 돌을 사용했다.
6살 때에만 해도 그것이 전혀 불편하지 않고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전기가 없으니 참 불편하게 느껴졌다. 당장 칫솔이 없는 것도 불편하고 찝찝한 것이 이래서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꿈으로 다시 가고 싶지는 않지만 편리한 물건은 그대로 가져오고 싶다니...이 곳 한복판에다 자동차를 가져다 놓는다면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무엇에 쓰는 물건이냐고 하겠지.
“훗”
그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나왔다. 한참 소리죽여 웃고 있는데 마차가 멈추어 섰다.
“아기씨, 내 궁 안으로는 인가받지 않은 마차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인가를 지금 받으려고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아니에요. 그러실 필요까지는 그냥 저 혼자 다녀올게요. 보아하니 다른 마차들도 다 여기서 기다리는 것 같은데 저만 인가 받을 수는 없잖아요.”
“저...그래도, 아기씨”
“괜찮아요. 아저씨, 저 다녀올게요. 식사라도 하고 계세요”
화연은 마차에서 내려 곤란해 하는 마부에게 살짝 인사한 뒤 기해가 싸준 찬합을 들고 내 궁으로 들어갔다.
내궁은 말 그대로 궁 안의 궁으로 궁의 모든 중요한 기관들은 여기에 다 모여 있었다. 내궁의 출입문을 들어서면 앞에 큰 연못이 있고 연못 위에 있는 놓여있는 구름다리를 건너면 그 주변을 거대한 거각들이 둘러싸고 있는 형상이었다.
거각들은 나무로 이루어진 뼈대에 돌로 된 벽, 그 위에 기와가 몇 단으로 얹어진 형식으로 몇 층으로 이뤄져 갖은 장식으로 치장된 화려한 궁도 보였고 단층으로 이뤄진 고즈넉해 보이는 궁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웅장한 기운을 풍겼다.
연우였을 때 태형과 같이 고궁을 구경하러 간적이 있었는데 건물양식이 다르기는 했지만 그때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어디나 왕이 사는 곳은 비슷하구나...그리운 기분이 들어 화연은 궁 주변을 천천히 거닐었다.
나비를 쓴 여자가 혼자 다니는 데도 누구 하나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 행궁이 어디인지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오히려 모두들 바쁜 모양인지 혹시 눈이라도 마주치면 말이라도 걸까봐 고개도 숙인 채 바쁘게 걸어 지나칠 뿐 이었다.
난처한 기분이 들어 머뭇거리다가 직접 찾아보기로 마음을 먹고 거각들을 살펴봤다.
“아버지가 내궁 중앙에는 황제께서 거하시는 자룡(紫龍)궁이 있다고 했으니 저기 가운데 있는 자색 염료로 칠한 화려한 궁이 자룡궁 이겠고. 분명히 자룡궁 바로 옆에 있는 거각에서 일하신다고 하셨는데...그리고 3층까지 매일 오르내리느라 무릎이 아프다고 하셨으니까 자룡궁 바로 옆에 있는 3층 이상 되는 거각이겠네. 음...”
자룡궁 가까이 있는 3층 이상 되는 거각은 총 3개였다. 화연은 세 개의 궁을 자세히 관찰해 보고 그 중에 거리가 제일 떨어져 있는 궁으로 향했다. 그 궁은 지붕이 청색으로 칠해져 있었는데 그 색깔 때문인지 회사 같은 느낌도 들면서 다른 궁보다 수수해 보였다.
궁은 가까워보였는데 보기보다 꽤 멀리 떨어져 있었다. 무거운 찬합을 들고 한참을 걸어 슬슬 다리가 아파오기 시작할 때쯤 도착 할 수 있었다.
깨어나서 이렇게 오래 걸어본 적은 처음이라 궁 앞을 지키는 문지기 앞에서 헉헉 거리다 겨우 말을 꺼냈다.
“이곳이 행궁인가요?”
“엥?”
문지기는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나비를 쓴 여자를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정반대에 있는 행궁을 여기서 찾는걸 보니 알만 했다.
또 군.
또 기녀야.
이번엔 어디서 온 기녀냐.
태자가 환궁했다는 소식이 있고 난 뒤 하루도 빠짐없이 기녀가 찾아왔다. 전쟁 전에는 그렇게 기방을 드나들더니 이제는 그것도 귀찮으신지 직접 불러들이신다. 그래도 처음에는 사실대로 말하면서 들어 보내 달라고 하더니 얼마 전 부터는 은근슬쩍 돌려 말하는데......저렇게 꼭 티를 냈다.
저번에는 여기가 자룡궁이냐고 했었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청색기와가 저렇게 떡하니 보이는데 그게 말이 되냐고.
아니, 그건 그렇고......도대체 어떻게 들어오는 거지? 외궁에서 분명히 잡을 텐데 말이지. 어디 연줄이라도 있나? 무슨 기녀가 이렇게 황궁을 드나들어?
한숨을 깊게 쉰 문지기는 화연을 아래위로 훑더니 말없이 들어가라는 듯 비켜섰다.
“행궁이 맞아요? 그럼, 재상어르신에게 기별을 넣어주시는 건 안 되나요?”
의아하게 생각하며 기해의 말을 지키기 위해 아버지를 불러달라고 했으나 갑자기 문지기가 코웃음을 치더니 과장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예, 예. 행궁 맞습니다. 재상어르신께서는 저기 저 제일 높은 층에 계시고요. 됐습니까? 그쯤 하셨으면 됐으니 그만 하시지요. 어차피 안에 아무도 없으니 누가 방해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금방 나오셔야 하긴 할 겁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들어가 보시면 압니다. 아무도 없을 테니 놀라지는 마시고요.”
관료들이 다들 어디로 가서 자리를 못 비우신다는 말인가?
하지만, 기해 말대로 아무도 안 봐도 되면서 아버지 일하는 곳도 구경할 수도 있으니 그리 나쁜 일은 아니다.
뭔가가 미심쩍었지만 화연은 고개를 갸웃거리다 축 처지는 찬합을 품에 추슬러 안고 걸음을 옮겼다. 문지기는 화연의 모습이 더는 보이지 않자 불만을 터트렸다.
“외궁에 말 한마디 해야겠어. 여기가 기루냐고.”
“아서라, 보면 모르겠냐. 전하께서 통과시키라고 미리 언질을 해두셨겠지.”
“쯧. 그냥 예전처럼 나가시지 왜 불러들이시는 거야?”
“......부럽게 말이지.....”
“내말이”
궁 안은 정말 조용했다. 문지기의 말대로 아무도 없었다. 궁 안이라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춥진 않았지만 조금 서늘한 기분이 들어 옷깃을 여미면서 찬합을 추슬렀다.
“국이 식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따뜻할 때 드셔야 하는데...”
화연은 추운 날씨에 기껏 싸온 음식이 식을까봐 가슴에 끌어안고 걸음을 재촉했다.
3층으로 올라가는데 점점 느낌이 이상했다. 여기는 업무를 하는 곳이 아닌 것 같았다.
그림이며, 도자기, 칼, 활 이런 것들만 여기저기 놓여있고 그것도 정리하다가 급한 일이 생겨 도중에 그만둔 것 같았다. 결정적으로 책상이라 던지 서책, 종이, 하다못해 붓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쯤 되니 제대로 찾아온 건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문지기가 행궁이라고 했는데......
그래도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버지께서 계시다는 3층에 있는 방만 확인해보고 돌아가자 마음먹고 문을 살짝 열었다.
방안은 어둑했다. 창을 두꺼운 천으로 막아놓은 건지 햇빛하나 들어오지 않았고 군데군데 놓여있는 빛나는 돌과 등불 몇 개만이 넓은 방안을 희미하게 비추고 있었다.
화연은 망설이다가 방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방 안에서 희미하게 연초 냄새가 풍겼다.
벽에 뭔가가 그려져 있는 것 같아 그쪽으로 향하려는데 발에 무언가가 채여 들어보니 자기로 된 병이었다. 표면에 양각되어있는 무늬가 어찌나 정교한 용의형상을 띠는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이 느껴졌다.
도자기가 흔들리면서 물소리가 나자 화병이었나? 하고 병의 입구에 코를 가까이 대니 풀냄새 섞인 물 냄새 대신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윽!”
연우로 있을 때의 트라우마 때문인지 술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속이 울렁거렸다.
화연은 심호흡을 하면서 급격하게 울렁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병이 깨지지 않게 벽에 기대어 있는 좁은 탁자에 내려놓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이 잘못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되어 되돌아 나오려는데 갑자기 연초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냄새가 문 쪽에서 흘러들어오는 것 같아 몸을 돌리는데 자신이 들어온 문 앞에 누군가가 장죽을 들고 서 있었다.
“헉!”
깜짝 놀란 화연은 찬합을 놓치며 주저앉았다. 찬합이 열리면서 안에서 반찬이 들어있는 통이 빠져나와 데굴데굴 구르다 그 사람 발치에서 멈췄다.
그 남자는 장죽을 들고 있던 손을 내려 반찬통을 장죽으로 툭툭 건 들어 보더니 곧 손으로 주워 자세히 살펴보았다.
화연은 서둘러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반찬통을 주워 찬합에 넣고 그 남자를 쳐다보았다.
“저...죄송합니다. 잘못 온 것 같아요. 아래에서는 분명히 행궁이라고 그랬는데......여기......행궁, 아니지요?”
“......”
반찬통을 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세히 보던 그 남자는 이제 화연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서 무안함을 느낀 화연은 머뭇거리다가 손을 내밀었다.
“그거...좀, 주시면...”
“이게 뭐지?”
남자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굉장히 낮으면서도 약간의 금속성이 섞인 거친 느낌의 목소리였는데 으르렁 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화연은 남자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다.
꼭 야생동물이 사람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것 같았다.
“어...반찬이에요. 아버지가 여기 일하셔서 가져다 드리려고...”
“여기?”
“아...행궁이요.”
“흠...”
남자가 다시 눈을 가늘게 뜨고 화연을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의심쩍다는 듯이 물었다.
“아버지를 만나러 왔다고?”
“네”
“행궁으로?”
“네. 저, 아래 계신 분들이 이곳이 행궁이라고......”
“그래서, 행궁과 정 반대 방향인 이곳에. 나비까지 쓰고?”
“네...”
“흠...”
남자는 아무 말 없었지만 그의 말에 이상함을 느낀 화연은 되물었다.
“나비...이건 결혼하기 전 처녀들이 얼굴을 가리기 위해 사용하는 거 아닌가요?”
“글쎄...난 여자가 바람피울 때 쓰고 다니는 거라고 알고 있었는데...”
남자도 그녀에게서 화끈거리는 열기를 느낄 수 있을 만큼 화연의 얼굴은 삽시간에 시뻘겋게 변했다.
‘기해! 정말!’
“그, 그런 거 절대 아녜요. 저, 저는 아버지 만나러 와, 왔을 뿐 이예요. 바, 바람이라니...그런 거 아녜요.”
화연은 당황해서 말까지 더듬거리다 저 남자가 들고 있는 반찬은 포기하고 여기를 빨리 나가자고 생각하고 찬합을 닫는데 장죽을 길게 빨아들인 남자가 연기를 뱉으며 물었다.
“행궁에...아버지라면...혹시...류 재상?”
화연은 밀려드는 안도감에 그만 주저앉아 울 뻔 했다.
“네! 맞아요. 제 아버지세요. 어떻게 아세요?”
“행궁 관료 중에 여식이 이곳에 찾아올 정도로 가까운 곳에 사는 사람은 류 재상밖에 없어. 게다가 이곳이 행궁인줄 알만큼 상식이 없는 사람은 12년 만에 일어났다는 그 넷째 딸이겠지.”
“그, 그게......상식이었나요?”
“누구나 알걸?”
“......그런데 저를 아세요?”
“소문이 엄청 나더군. 아까워서 걸어 다니지도 못하게 한다던데?...잔치까지 벌린다며.”
졸지에 상식도 모르는데다 과보호까지 받는, 그런 여자가 되어버린 화연은 무안함에 벌겋게 변한 얼굴을 숙이고 찬합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건 아니에요...그냥...아버지가 크게 기뻐 하셔서요. 잔치는 그래서 그런 거예요.”
“흠...나비는 계속 쓰고 있을 건가?”
“네? 하지만, 이건 계속 쓰고 있으라고 했는데...”
“아까 말했잖아. 그대로 쓰고 갔다가는 주변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의심받을 텐데?”
화연은 그것도 아버지의 위신에 좋지 않는 영향을 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기해가 하도 신신 당부를 해서 벗어도 될지 고민하는데 남자가 장죽을 깊게 빨아드리더니 연기를 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다른 걸 주지. 얼굴을 가려야 하는 거라면 나한테 적당한 게 있어.”
“어...정말요? 초면에 실례가 많았는데 참 친절하시네요. 이걸 꼭 쓰고 있으라고 해서 좀 난처했었거든요. 그럼 좀 부탁드릴게요.”
화연은 아무 의심도 없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나비를 벗어 들었다.
안 그래도 이 어두운 방안에서 나비까지 쓰고 있으려니 잘 보이지도 않고 답답했던 차였는데 잘됐다 싶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남자가 그녀를 지나쳐 성큼성큼 창으로 걸어가더니 창을 감싸고 있는 두꺼운 천을 잡더니 한 번에 뜯어 버렸다.
정오의 햇살이 쏟아져 들어왔다.
화연은 눈이 부셔 손으로 눈을 가리고 빛에 눈이 적응 할 때까지 기다렸다. 창에 기대어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성큼성큼 걸어와 그녀의 앞까지 다가오더니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잡아 내렸다.
“앗! 뭐하는 거예요?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