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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5화 (5/110)

00005  짐승, 우리로 돌아오다  =========================================================================

“네가 찾아온다고? 애비 일하는 곳으로? 그럼 나야 좋지! 암! 좋고말고! 그럼 그렇게 할까?”

“그 의견, 저는 반대인데요.”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기해가 반기를 들었다.

“응? 네가 왜?”

기해의 얼굴은 어쩐지 한심해 하는 것 같았다.

“어르신… 방금 전까지 아기씨 시집은 늦게, 아주 늦—게 보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렇지.”

“그런데 아기씨를 궁으로 부르신다고요? 그것도 행궁(行宮, 환국의 중앙행정실)으로요?”

“응. 그런데?”

“거기는 이 나라에서 잘나가는 모든 남정네들이 다 모여 있는 곳 아녜요? 특히 어르신 밑에 있는 관료들은 그중에서도 특히 잘나가는 남자들이라면서요.”

“그렇긴 하지……. 그런데 그게 어때서?”

기해가 답답해 죽겠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때렸다.

“어휴… 그 사람들 다 미혼이잖아요!”

“헉!”

“거기 업무가 너무 많아서 기혼자들은 버텨내질 못한다고 저번에 그러셨잖아요. 그래서 결혼하면 다른 곳으로 배정받을 수가 있는데도, 업무가 많아 연애를 할 시간도 없으니 결혼은 꿈도 못 꾼다면서 쌤통이라고 하셨던 거 기억 안 나세요? 거기 있는 남자들이 병영(兵營)에 있는 남자들보다 더 여자 보기가 힘들다면서요?! 지나가는 나이 든 상궁 치맛자락만 봐도 그 얘기로 3시간정도는 떠들어대는데, 그 모습이 어찌나 주접스럽고 거지같아 보이던지 밥맛까지 뚝 떨어지셨다고 저번에 분명히 그러셨잖아요!”

자신이 왜 그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마터면 3년 정도 굶은 늑대들이 바글거리는 동굴 안에다 꽃 같은 딸을 제 손으로 집어넣을 뻔했던 류충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래… 그 귀신같이 일만 하다 일이랑 연애까지 한다는 그놈들이, 지나가는 궁녀 얼굴만 봐도 3일은 상사병을 앓는 그 늑대 같은 놈들이 우리 연이를 본다면… 당연히 그날로 전쟁이 벌어지겠지.

그놈들이 우리 연이에게 접근해 타국 외교 사절에게 하듯이 감언이설로 살살 꾀거나… 아니면 비리 저지르다 걸린 대신 다루듯 마구 윽박지르거나… 그것도 아님 죽는다고 진상이라도 부리면서 매달린다든가…….

안 그래도 마음이 비단결같이 착한 아이인데, 그 약한 마음이라도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그렇다면……!

“큭!”

류충은 자신의 가슴을 부여잡았다. 그 모습을 차가운 눈으로 주시하던 기해는 이제야 자신의 가주가 정신을 차린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기씨의 이 아리따운 자태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엄청난 난리가 날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그들이 목을 매달고 죽겠다고 하든지, 칼을 물고 꼬꾸라지겠다고 하든지 우리야 전혀 상관없는 일이지 만서도! 혹시라도, 만에 하나! 그놈들 중 하나에게 우리 꽃 같은 아기씨께서 흔들리신다면! 그러신다면! 그 사태를 어떻게 책임지실건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르신, 저번에 후회할 일은 저지르지 않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씀하셨죠?”

류충은 기해의 어깨를 잡았다.

“내가 생각이 짧았다. 고맙네.”

“별말씀을요. 전 이제 열흘 뒤로 예정되어 있는 잔칫날만 생각하면 벌써부터 걱정되어 잠도 안 와요.”

“응? 그건 왜?”

“아, 생각해 보세요. 아기씨의 쾌차를 축하하는 잔치인데 아기씨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을 수는 없을 거 아녜요.”

“그, 그렇지…….”

“아기씨께서 얼굴이라도 드러내신다면! 어휴… 전 생각하기도 싫으네요. 그러게 왜 잔치는 벌이신다고 하셔서…그냥 곡식이나 좀 나눠 주시지……. 어휴~”

“그, 그렇군……. 그때 너무 기뻐서 내 미처 생각지 못했군……. 실책이야… 쯧.”

“그러니까 우리는 이제부터 만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거 명심해 주세요. 저희는 사방에 적들을 두고 있는 형국이에요. 언제 누가 공격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래서 말인데요, 어르신. 잔칫날, 총각들은 아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배정하는 것이 어떨까요?”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구먼. 그날 우리 연이의 안전과 관련된 모든 전반적인 사항은 기해, 네가 맡아주렴. 그래.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귀하디귀한 보물을 적들에게 절대로 빼앗겨서는 안 되지. 암.”

언제 적들에게 공격받아 빼앗길지 모르는 보물이 되어 버린 화연은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 * *

“아기씨! 정말 가실 거예요? 거긴 정말 위험하다고요. 전 반대라니까요.”

“훗… 황궁 안이 위험하다면 세상천지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겠니. 괜찮으니까 걱정 마. 정 걱정되면 너도 같이 가면 되잖아.”

“둘째 도련님 오시는 것 때문에 오늘 비상 걸렸단 말예요. 그럼 내일 가시면 안 되나요? 내일 같이 가요, 아기씨. 네?”

“내일은 강이 오라버니 오시잖아. 12년 만에 보는 건데 오라버니 맞이해야지. 그럼 나 깨어나서 상이 오라버니만 못 본 거네……. 상이오라버니는 언제쯤 오실까?”

“아기씨 드실 약초 구하신다고 집 한 번 나가시면 몇 달이고 몇 년이고 들어오시지를 않으시니… 제가 아나요. 전갈을 넣긴 넣어놨는데, 보실지도 잘 모르겠고. 작년 가을에 뵈었을 때에도 아주 상거지 꼴로 오셨었는데……. 이 추운 날 어디에 계시는지… 밥은 잘 먹고 다니시는 건가… 어휴.”

어렸을 때 류가의 셋째 아들 류상연과 자주 놀았던 기해는 상연이 꽤 걱정스러운 눈치였다.

“너무 걱정하지 마. 몸 성히 금방 오실 거야.”

“그러셔야지요……. 아기씨 잔칫날에는 맞춰 오셔야 할 텐데.”

그런 기해의 손을 한 번 꼭 잡아주고 마차에 오르려는데 기해가 다시 화연을 잡았다.

“아기씨! 그럼 다음에 가시면…….”

“요 며칠 일이 바쁘신지 점심뿐 아니라 저녁도 같이 못할 때가 많았잖아. 오늘 아침 아버지 얼굴이 많이 어두우셨어. 가서 점심 식사만 챙겨 드리고 바로 올게. 응?”

기해가 치맛자락을 부여잡으면서 안절부절못하다가 화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럼, 아기씨. 행궁 안에는 들어가지도 마시고 밖에서 기별을 넣어 어르신만 만나신 뒤에 바로 들어오셔요. 그리고 이거요.”

기해가 안이 비추어 보일 정도의 얇은 실로 짜인 하얀색 천을 건네주었다. 약간 망사 같기도 하고 연우일 때 사용하던 스카프 같아 보이기도 했는데 쓰임을 쉽게 알 수가 없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예요. 나비(娜庇)지. 이리 줘 보세요.”

기해가 천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화연의 머리에서부터 씌웠다. 얼굴이 죄다 가려지고 눈만 희미하게 보였다. 중동에서 여인들이 쓰는 그것 같았다.

“아… 히잡(hijab)이구나…….”

“네? 해자비요? 그게 뭔데요?”

“아, 아니야……. 근데 어렸을 때에는 이런 거 못 봤던 거 같은데? 이걸 나비라고 불러? 이름 참 예쁘네.”

“그거 생긴 지는 좀 됐어요. 처음에는 지체 높은 마나님들이 남첩을 만나 외도를 하거나 꽃집에 갈 때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해서 쓰던 것이, 이제는 높으신 댁, 혼인 전 아가씨들이 외출할 때 얼굴을 가리기 위해 쓰기도 해요.”

“꽃집? 무슨 꽃집?”

“어… 그런 게 있어요. 아기씨는 모르셔도 되요. 암튼, 바람이 불면 나비 날개처럼 펄럭거린다고 나비라고 부른데요.”

“아… 그렇구나. 알았어. 이거 꼭 쓰고 있으면 되는 거지? 그럼 아무도 못 알아보겠네. 이제 된 거지?”

기해는 나비를 쓴 화연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입고 있는 옷부터 범상치가 않았다.

그녀가 입은 옷은 속이 비칠 정도로 아주 얇은 검은색의 최고급 원단을 수십 번 겹쳐서 만든 옷이었는데, 그 옷감은 한 필을 만드는 데만 해도 반년이 넘게 걸리고, 그 한 필의 가격은 일반 가정의 1년 치 생활비에 육박했다.

치맛단에는 난 꽃이 은실로 섬세하게 수놓아져 있었고, 그 사이를 노니는 나비는 금실로 수놓은 것이었다. 가슴 아래부터 허리까지 두껍게 감싸고 있는 허리띠는 검은색 비단에 금색 실로 가문의 상징인 불사조를 수놓아 그 위를 붉은 진주로 일일이 채워놓은, 어디서 구할 수도 없는 최고급 제품이었다.

마지막으로 어깨에는 하얀색 뮴 털로 된 비견(庇肩, 여자들이 겨울에 어깨에 두르는 소매가 없는 천, 망토)을 두르고 있었다.

이 비견은 예부(禮部, 환제국의 행정부 중 교육, 외교를 맞고 있는 부서)의 부 수장이신 첫째 도련님께서 선물하신 것이다.

아기씨가 깨어나자마자 연제께서 일을 내리셨다고 펄펄 뛰시다가 장소가 상국(祥國)인 것을 아시고는 군말 없이 가시기에 웬일인가 했는데, 며칠 뒤 인편으로 보내오신 거였다.

뮴이라는 동물은 사계절 내내 눈으로 덮여있는 고산에서만 사는 맹수과의 난폭한 동물이다. 경계가 심해 쉽게 잡을 수도 없지만, 운 좋게 잡더라도 공격받으면 온몸의 털을 가시처럼 날카롭게 세우고, 죽으면 털이 뭉텅이로 빠지기 때문에 저렇게 풍성하게 털을 유지한 채로 잡기가 여간 힘든 동물이 아니다.

그래서 뮴 털은 부르는 것이 값인 엄청난 고가의 제품이었다. 뮴의 주요 서식지인 상국의 왕족들조차도 입기가 힘들어 수출도 금했다고 한다.

웬만한 장원을 하나 사고도 남을 차림새는 그렇다 치고, 류가를 나타내는 저 빛나는 검푸른 색 눈동자도 감출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나비를 씌워 놨는데도 묘한 분위기를 풍겨 눈길을 더 사로잡는 것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저기서 웃으니까 저 검푸른 색 눈이 반달이 되며 휘어지는데, 그나마 적응되었던 나도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저걸 벗겨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일어나는 게 어째, 나비를 쓰기 전보다 더 문제인 것 같은데…….

“네……. 근데… 써도 문제긴 문제네요. 어휴… 진짜 제가 같이 가면 좋겠는데.”

“그 얘긴 이제 그만. 갔다 올게. 이러다 늦겠다.”

“네, 아기씨. 아무도 만나지 말고, 어르신만 만나신 뒤에 그대로 오시는 거 아셨죠?”

“응. 아버지만 만나고 바로 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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