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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4화 (4/110)

00004  짐승, 우리로 돌아오다  =========================================================================

“연아! 애비 왔다. 별일은 없었느냐? 아픈 데는 따로 없었고? 어디 보자.”

류충은 별채를 박차고 들어오자마자 화연을 감싸 안고 이리저리 얼굴을 살펴보았다. 그런 그를 화연은 환하게 웃으며 맞았다.

“아버지, 오셨어요?”

류충은 화연이 오늘따라 더 환하게 웃는 그 꽃 같은 모습을 바라보다, 더는 못 참고 자신의 볼을 화연에게 마구 비볐다.

“고럼, 고럼. 애비가 우리 딸 보고 싶어서 일도 손에 안 잡히고 아주 죽겠다. 어이구, 예쁜 것. 어이구, 내 새끼.”

“아이 참… 아버지, 간지러워요.”

목을 움츠리면서 까르르 웃는 화연을 보니 류충은 아침 내내 쌓였던 울분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오늘 류충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을 정갈하게 하고 마음을 단단하게 정돈한 뒤, 정자세로 앉아 글을 적었다. 사직서였다.

오늘이야말로 품에 고이 접어 넣어둔 이 사직서를 연제 앞에 던지고 오리라 마음먹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연이는 태어났을 때부터 건강하지 못했었다. 항상 시름시름 앓기를 반복하더니 6살 때쯤 갑자기 쓰러져, 그 뒤로 12년 동안 식물인간처럼 누워만 있었다. 미동도 없이 누워만 있는 것이 아니라 가끔 인상을 찡그릴 때도 있고, 식은땀을 흘릴 때도 있었다.

한참 괜찮은 것 같더니, 일어나기 전 한동안은 열이 심하게 오르면서 눈물까지 펑펑 흘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손쓰지도 못하고 그 모습을 보고만 있으려니 내장이 끊어지는 것같이 고통스러웠다.

점점 상태가 심각해지는 것이 이러다가 혹시라도 애가 잘못될까 봐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데……. 그러다 이제야 겨우 깨어난 딸 옆에 좀 있겠다는데 왜 이렇게 방해하는 것들이 많은지…….

류충은 짜증이 쌓일 대로 쌓여 누구 하나 걸리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내궁으로 들어갔다. 근데 궁 안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너도 나도 웅성거리면서 속닥거리는데, 왠지 마음이 불안해 종종걸음으로 지나가는 내관을 붙잡았다.

“여보게. 어! 진내관이구먼. 오늘따라 궁 안이 어수선 한데…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겐가?”

혹시 무슨 일이 있었다면, 기왕이면 연제가 어딘가 다쳤다는 얘기이기를 바라면서 물어봤다.

“아이고! 재상나리! 아직 못 들으셨습니까?”

“뭘 말인가? 모르니까 묻는 게지.”

“어제 저녁 태자마마께서 륜국(圇國)과의 전쟁을 마치시고 귀궁하신다는 전갈이 도착해서 궁 안이 난리가 났었는데 그걸 모르셨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서 저도 급하게 청룡궁(靑龍宮, 태자궁)을 정비하러 가는 중입니다.”

“그랬나? 어… 요즘 내가 퇴궁을 좀 빨리 하는 바람에…….”

“아! 그렇지! 재상나리, 넷째 자녀분께서 드디어 깨어 나셨다는 소문은 저도 들었습니다. 나리, 감축드리옵니다. 류가가 자리하고 있는 류현(縣)은 아주 축제 분위기라면서요? 잔치도 여신다고 들었는데……. 재상나리 안색도 활짝 펴진 것이 아주 좋아지셨습니다.”

“어흠, 자네도 들었구먼. 내가 요즘 그래서 살맛이 난다네. 그렇게 내 속을 끓이던 내 딸이 드디어 일어났지 뭔가. 혹시, 이런 소문도 들었나? 내 딸의 미색이 아주 나라를 울릴 지경이라는 소문 말일세. 그것뿐인가? 커흠… 12년을 누워 있었으면 성격이 모나게 변할 만도 한데 어찌나 다정다감하고, 온순하고, 착한지……. 보고만 있어도 아주 애간장이 녹네, 녹아. 저번에는 나와 점심 식사를 하는데 말이지…….”

그냥 두면 하루 종일 자신을 붙잡고 딸 자랑만 늘어놓을 기색이라 내관은 난감해졌다. 12년간을 누워만 있다가 이제 일어났는데, 미색이 뛰어나면 얼마나 뛰어나겠는가. 나 바쁘다니까…….

“저… 나리, 죄송하온데… 제가 청룡궁을…….”

“아차! 그렇지? 바쁜 사람 붙잡고 미안허이. 어여 가보게.”

“네, 나리. 다시 한 번 감축 드리옵니다.”

내관은 류충에게 허리를 깊게 숙여 인사하고는 뒤돌아 종종거리면서 바쁘게 걸어갔다.

류충은 그 모습을 보면서 아깝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본격적인 자랑은 아직 하지도 못했는데……. 뭐, 태자가 돌아온다니 내정 소속의 내관이야 바쁘겠지만,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얘기다.

사실, 그 망나니 태자가 돌아오든지 말든지 자신은 신경도 안 쓰였다. 아니 그놈은 왜 이럴 때 돌아오고 난리야? 그냥 거기에서 그 좋아하는 살인이나 하면서 계속 눌러 있지…….

오자마자 또 망나니짓 하느라 바쁘겠구먼……. 그거 처리하려면 내각에서도 머리 꽤나 아플 텐데…….

아니지,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자신은 오늘 품속에 지닌 사직서를 연제 앞에다 던지고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

류충은 가슴을 더듬어 안주머니에 들어 있는 사직서를 확인하고 내궁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것이 알현 신청을 몇 번이나 했는데도 연제를 볼 수가 없었다. 오늘에야말로 기필코 사직서를 내고 말리라는 자신의 굳은 다짐을 눈치채기라도 한 건지, 바쁘다면서 이리저리 피하는 것이 만나줄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았다.

편전과 대전까지 급습해 봤지만 연제의 코빼기도 볼 수 없는 것이, 아주 작정을 하고 내뺀 듯했다.

그 생각을 하니 다시 마음속에 울분이 커지면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는데, 화연이 자신의 손을 잡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버지… 어디가 불편하세요? 갑자기 안색이 안 좋아 지셨어요.”

딸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쳐다보는 모습이 너무나 예뻐서 감격스러워진 류충의 얼굴이 다시 맑게 개었다.

“아니다, 아니야. 내 딸. 너랑 이렇게 같이 있는데 불편할 리가 없지 않느냐. 어쩜 이리 곱누……. 식사해야지? 오전 탕약을 다 마셨고? 그거 많이 쓰던? 기해가 그러는데 맛이 무슨 연못 썩은 물 같다던데… 역하진 않았느냐? 애비가 의원한테 말 좀 해볼까?”

화연은 류충을 식탁으로 이끌며 작게 웃었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맛이 조금 고역스럽기는 하지만 참을 만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오냐, 내 새끼. 약도 잘 먹고 아주 다 컸어. 이제 시집만 가면 되겠네. 근데 이 애비 섭섭하니 시집은 아주, 아—주 천천히 가야 한다. 알겠지?”

화연은 흐뭇하게 웃는 류충을 바라보며 자신은 다시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아이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어두워지려는 얼굴을 억지로 펴고 일부러 류충에게 애교스럽게 말했다.

“아버지, 저는 그냥 아버지랑 살래요.”

“땍! 그런 소리 하면 못쓴다. 성혼은 해야 아비한테 손녀도 안겨주고 그러지 않겠느냐. 그러니까 시집은 가야지.”

이렇게 말하는 류충의 입은 헤벌쭉 벌어져 있었다.

“음… 시집은 나중에 생각해보자구나. 한 10년쯤 뒤에……. 그런데 그때 생각해 봐도 네가 이 애비랑 살고 싶다면야… 뭐, 그럴까? 하하하하하하핫.”

류충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별채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류충과 화연이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마치고 차를 따라 사이좋게 마시고 있는데, 별채로 기해가 들어왔다.

“가주 어르신, 밖에 누가 찾아왔습니다. 궁에서 오신 것 같던데요? 저번에 그 풍채 좋으신 그분 말이에요”

류충이 화들짝 놀라면서 벌떡 일어섰다.

“담하, 그놈이 벌써 왔다는 게냐? 으이그, 이 지독한 놈… 하루를 그냥 놔두지를 않지. 내가 어련히 알아서 갈까!”

“어련히 안 가시니까 왔겠죠. 어떻게 할까요? 오늘은 시간 맞춰 왔으니 아직 시간 있다며 차 다 마시고 나오시라는데요? 이리로 모실까요?”

“얘가! 누굴 모시긴 어디로 모셔! 기해, 너 제정신이냐? 그놈 아직 시퍼런 총각이란 말이다!”

기해가 뛸 듯이 기뻐하면서 박수를 쳤다.

“어머! 정말요? 그분 나이가 어떻게 되는데요?”

“둘째랑 같은 나이일걸? 아닌가? 셋째랑 같은 나이인가?”

“스물여섯 살이요? 어쩜, 나이 차도 아주 딱이다! 궁합도 안 본다는 네 살 차이!”

“무슨 소리냐? 우리 연이는 이제 스무 살도 안 됐는데……. 그리고 딱이긴 뭐가 딱이라는 게야? 설마, 너… 담하 저놈이 우리 화연이의 짝으로 딱이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기뻐하던 기해가 정색을 했다.

“어르신! 아니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씀이세요! 우리 아기씨를 어디 듣도 보도 못한 남정네와 엮으시려는 거예요? 어디 가당키나 하나요? 아기씨는 남자 만나시기에는 아직 한참 멀었어요! 10년은 이르다고요. 설마 벌써 혼처 자리 알아보시고 그러는 건 아니시겠죠? 조혼은 요즘 한물가도 한참 한물갔다고요. 유행이 지난 지가 언젠데……. 어르신, 요즘엔 조혼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러면서 두 팔을 걷어 올리는데, 그러기만 하면 가주고 뭐고 넌 이 자리에서 작살날 줄 알라는 그 흉흉한 기세에 류충의 마음이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의 집에서 그런 단매에 쳐 죽일 반역자가 나올 리가 없지. 깜짝 놀랐네. 내가 딸의 시비는 참 잘 골랐단 말이야. 류충은 흐뭇한 마음으로 턱수염을 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네가 말을 이상하게 해서 오해했지 뭐냐. 당연히 조혼 같이 말도 안 되는 일은 생각도 전혀 없으니 걱정일랑 접어 두거라. 연이는 아주 늦게 결혼할 거다. 아주 늦—게, 그것도 데릴사위로. 근데 우리 연이랑 어울릴 만한 청년이 이 나라에 있을지 모르겠구나……. 없으면 그냥 이 애비랑 살든가.”

“어머! 어르신, 그것 참 좋은 생각이세요. 데릴사위… 어감도 참 좋네요. 오호호호호호호호.”

“그렇지? 하하하하하하하.”

주거니 받거니 하며 만담을 하는 둘을 쳐다보는 화연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은 결혼할 생각도 없는데……. 식사 도중 무슨 생각을 그리 하시나 했더니, 손녀도 안아보고 자신도 곁에 둘 수 있는 묘안을 떠올리셨나 보다.

웬만한 남자라면, 아무리 위세 좋은 가문과의 성혼일 지라도 데릴사위로 오고 싶어 할 남자는 없을 텐데……. 아버지는 그렇게 해서라도 자신도 곁에 두면서 손녀도 안을 수 있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고 싶으신가 보다.

가만히 놔두면 둘이 손잡고 다른 나라에 원정을 가서라도 남편감을 물색해보겠다고 할 기세라, 화연은 주의를 돌렸다.

“아버지, 저 때문에 자꾸 하시는 일에 지장을 드리는 것 같아 송구스럽습니다.”

“응?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냐. 송구스럽긴 뭐가 송구스럽다고. 애비가 너 보고 싶어서 그런 건데……. 전혀 지장 없으니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거라.”

“저와 점심을 같이 드시기 위해 매번 이렇게 궁과 집을 오고 가시지 않습니까. 아무리 마차를 이용하신다고 해도 시간이 많이 걸리실 텐데…….”

“아니야! 전혀 그렇지 않아. 궁은 엎어지면 코 닿을 데 있지 않느냐. 여기서도 보이는데 뭘. 마차까지 타면 눈 깜짝 할 새에 오고 가니까 걱정하지 말거라. 어휴… 이렇게 마음이 착해서… 원.”

혹시라도 화연이 부담스러워할까 봐 한사코 부정하는 류충을 보며 화연이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 어차피 매일 오시는 건 이제 힘드시잖아요. 날짜를 정해주시면, 제가 점심시간에 맞추어 아버지 업무 보시는 곳으로 찾아갈게요. 저는 같이 식사도 할 수 있으니 좋고, 아버지는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아도 되니 좋고. 어떠세요?”

류충은 그러지 않아도 요즘 담하의 표정이 점점 안 좋아 지는 것이……. 가끔은 꽉 쥔 주먹을 슬슬 쓰다듬는데, 그냥 한 대 치고 사직서를 낼까 말까 하고 고민하고 있다는 게 눈에 훤히 보였다.

눈치도 보이고, 딸이 찾아오면 자랑도 좀 하고……. 딸의 꿩 먹고 알 먹고 하는 일석이조의 계책에 눈이 동그래졌다.

“네가 찾아온다고? 애비 일하는 곳으로? 그럼 나야 좋지! 암! 좋고말고! 그럼 그렇게 할까?”

“그 의견, 저는 반대인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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