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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을 문 짐승-3화 (3/110)

00003  나는 누구인가?  =========================================================================

연우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

“제발… 제발…….”

어디선가 벨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 소리에 이끌리 듯 다가가니 횡단보도 구석에 액정이 깨져 있는 핸드폰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의 핸드폰이었다.

연우가 멍하게 서 있다가 핸드폰으로 손을 뻗는데, 누군가 팔을 잡으면서 막았다.

“아주머니, 여기 사건 현장이라서 아무거나 막 건들이시면 안 됩니다. 임신하셨나 본데 날씨도 쌀쌀하니 얼른 집으로 들어가세요.”

연우는 말없이 잡힌 팔을 휘둘러 빼내고 기어코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아주머니! 이러시면 안 된다니까요. 이리 주세요! 아~ 거 참. 왜 이러세요. 어, 어?”

사람들이 그녀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연우는 깨진 핸드폰을 손에 꽉 쥐고 몸부림을 치면서 소리를 질렀다.

“놔!! 이거, 놔!! 내 거야! 내 거란 말이야! 이거, 내 남편 거라고요!!”

남편의 핸드폰이라는 그녀의 말에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직감한 경찰이 그녀의 팔을 놔주었다.

연우는 경찰이 팔을 놓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게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조차 되지 않았다.

넋이 나가 있던 연우는 벌떡 일어나서 난처한 표정으로 서있는 경찰에게 다가갔다.

“다친 사람 어디 있어요? 많이 다친 거예요? 어느 병원으로 갔어요? 저 좀 데려다 주세요. 제발 부탁이에요”

“저… 요 앞 신일 병원으로 가긴 갔는데……. 아… 나, 진짜 미치겠네…….”

“저 좀 데려다 주세요. 우리 그이한테 빨리 가봐야 해요. 제발 부탁할게요, 제발…….”

“네, 데려다 드릴게요……. 진정 좀 하시고요…….”

“빨리요! 제발, 빨리요!”

경찰은 막무가내로 잡아끄는 연우에 이끌려 경찰차에 그녀를 태웠다.

5분 거리의 병원에 도착해서도 한참 동안 미적거리던 경찰은 아무 말 없이 연우를 데리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정신이 나가 울고만 있는 연우를 끌고 어느 병실 앞으로 안내하더니, 급하게 들어가려는 연우를 막고 말을 꺼냈다.

“저… 마음 굳게 잡수셔야 합니다. 배 속에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저…….”

“놔요!! 이거 놔!!”

연우는 자신을 붙잡고 말을 이으려는 경찰을 뿌리치고 병실로 서둘러 들어갔다.

그 안에는 머리끝까지 시트로 덮고 누워 있는 사람 앞에서 어떤 젊은 남자가 차트에 뭔가를 끄적거리고 있었다.

“어? 오셨어요? 벌써 신원 확인 하신 거예요? 이 사람 너무 아까워요. 조금만 일찍 왔어도 살 수 있었을 텐데, 차에 치인 뒤에 길에 너무 오래 누워 있었어요. 고통도 심했을 테고… 출혈도 너무 심해 저희가 어떻게 손쓸 틈도 없었어요. 어? …근데… 이분은…….”

연우는 시트를 덮고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시트 군데군데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젊은 남자는 뭐라고 말하려다 뭔가를 눈치채고 뒤로 물러섰다.

연우는 얼굴을 덮고 있는 시트를 꽉 쥐고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피에 젖은 그의 얼굴이 보였다. 어딘가에 심하게 부딪친 것처럼 머리 한쪽이 함몰되어 있었다. 얼굴 여기저기가 엉망으로 쓸려 벌건 속살이 드러나 보였다.

코에서는 아직도 검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연우는 흐르는 피를 닦아 주면서 그의 볼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자기야… 여보… 나 왔는데… 나… 이거… 피… 어떻게 하지……. 자기야… 눈 좀 떠봐요……. 여보? 여보! 자기야! 눈 좀…….”

연우는 차갑게 식어버린 그의 몸을 붙잡고 얼굴에 입을 맞추고, 이렇게라도 하면 그가 다시 눈을 떠줄까 싶어 굳어가는 몸을 정신없이 이리저리 주무르다가 뭔가에 발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바닥에 고여 있는 핏물이 보였다. 떨어지는 핏물을 거슬러 올라가니, 시트 바깥으로 빠져나온 그의 손이 보였다.

평소에 자신을 다정하게 혹은 뜨겁게 어루만지던 그의 손가락은 이상한 방향으로 죄다 꺾여 퉁퉁 부어 있었고, 손가락 끝에서 핏방울이 한 방울씩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입이 벌어지면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도저히 멈출 수가 없었다. 경찰이 말리고 의사까지 말리는데도, 몸부림을 치면서 피를 토할 때까지 비명을 지르다 혼절했다.

깨어나 보니 그의 장례식은 이미 다 끝나버렸고, 자신이 기절한 사이 아이도 가버렸다. 그리고 자신만 홀로남아, 이 지옥 같은 현실 속에서 벌레처럼 기어 다니고 있었다.

그때를 회상하는 화연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그 뒤부터는 매일매일 지옥이었다.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매일 술에 절어 살았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술을 마시면서 울다가 쓰러져 자고, 다시 일어나 술을 마시며 울었다.

그의 가족들이 찾아와 그를 잡아먹은 년이라며 집을 때려 부수고, 머리채를 잡아 뜯으며 구타했다. 온몸에 멍이 들어도,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잡아 뜯겨도, 잘못 맞아 팔이 부러져도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 있었기에, 육체적은 고통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병원도 가지 않고 널브러져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소변조차 가릴 수 없었다.

숨 쉬는 것 자체가 바늘을 삼키는 것처럼 고통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 이것이 모두 꿈이라고만 해준다면, 목숨도 기꺼이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화연은 연우의 삶이 꿈이었는지, 지금의 삶이 꿈인 건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연우도 자신이었고,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던 화연도 자신이었다.

12년 동안 누워 있으면서 연우가 된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너무 고통스러운 나머지 이런 꿈을 만들어 자신을 도피시킬 정도로 미쳐버린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연우가 돼서 겪은 일들이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느껴졌지만, 화연으로의 인생도 생생했다. 아버지와 가족들이 모두 눈에 익었다. 심지어 일하는 사람들까지 누군지 알아볼 수 있었다. 희미하긴 하지만 6살 때까지의 기억이 분명히 존재했다.

“후…….”

화연은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차라리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우가 꿈이라면 그 고통스럽던 꿈에서 드디어 깨어나게 됐으니 다행이었고, 만약… 여기가 꿈이라면 연우로 돌아가 그 고통을 느끼느니 차라리 이 꿈속에서 살다가 이대로 죽기를 바랐다. 그 지옥으로 다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어머! 아기씨! 바람이 이렇게 찬데 창을 활짝 열어 놓으시면 어떻게 해요! 아직 몸도 약하시면서. 얼른 이리로 오세요. 빨리요.”

“기해야…….”

“예, 예. 저 기해 맞아요. 그렇게 애타게 부르셔도 창은 닫을 거예요. 어휴, 얼마나 내놓고 계셨기에… 얼굴이 하얗게 질리셨잖아요! 탕파 좀 몇 개 더 가져오라고 해야겠어요.”

기해가 화연을 이끌어 방 가운데에 있는 원형 탁자 앞에 앉혔다.

“추워서 그런 거 아니니까 탕파는 됐어. 지금도 너무 더워. 겨울인데 겨울 같아야지……. 저기, 꽃 핀 거 보이니?”

화연의 방에는 탕파만 10개가 넘었고, 화로도 5개가 넘게 있었다. 바깥 날씨는 한겨울이었지만, 방은 한여름 같았다.

기해가 속으로 웃으면서 차를 따랐다. 우리 아기씨는 말도 참 예쁘게 하시지. 조용조용, 차분차분, 소리 한번 높이는 적도 없고……. 어렸을 때도 그렇게 말도 잘 듣고 착하더니……. 참, 누가 데려갈지 부럽다.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을 유지한 채 화연 앞에 대접을 올려놓았다.

“네, 보이네요. 일단, 이거 먼저 드시고 말씀하세요.”

“응, 알았어.”

화연은 기해가 혹시 화났나 싶어 눈치를 살피다 잠자코 대접을 들어올렸다. 기해는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다 탕약을 다 마신 것을 보고 당과를 꺼내 들었다.

“자, 여기요.”

“아냐. 그건 안 먹을래. 저번에 먹어보니까 너무 달더라. 난 괜찮으니 기해 너 먹어.”

기해는 당과를 싸고 있는 한지를 벗겨 화연의 입에 밀어 넣었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는 하지도 마세요. 그 약이 얼마나 쓴지 제가 아는데 무슨 소리예요. 저는 이제 당과 같은 거 좋아할 나이는 한참 전에 지났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아… 그렇지. 후후… 나도 나이를 먹은 것처럼 너도 나이가 들었지……. 자꾸 잊어버린다니까. 기해 넌 계속 12살인 것 같아. 난 6살인 것 같고.”

“그러실 만하죠. 의식도 없이 12년을 누워만 계셨는데 벌써 적응이 되겠어요? 제가 도와 드리면 금방 익숙해지실 테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고마워.”

“참, 아기씨.”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열여덟 넘은 아기가 어디 있어? 사람들이 그렇게 부를 때마다 내가 얼마나 민망한 줄 알아? 이름으로 불러줘, 제발.”

“이건 입에 익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18년 동안 그렇게 불렀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꿔요. 닦달하지 마시고 요건 좀 기다려 보세요. 언젠가 바꿀 때가 오면 바꾸겠죠.”

말만 그렇게 하지 전혀 바꿀 생각이 없는 기해의 표정을 보고 화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알았어.”

기해는 온순한 표정으로 대답하는 화연을 꽉 끌어안고, 저 보송보송해 보이는 볼에 부비부비를 한 뒤, 얼굴 여기저기에다 마구 뽀뽀를 해대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점심 때 가주께서 식사 같이하자고 하셨어요.”

“아버지가 또? 그럼 일은?”

기해가 화연의 뒤로 돌아가 품에서 빗을 꺼내들더니 머리를 쓸어내렸다.

“뭐, 땡땡이치고 나오시겠죠. 그러다 황궁에 늦게 가시거나, 아님 아예 안 들어가시거나, 그것도 아님 저번처럼 궁에서 데리러 온 누군가에게 끌려가시거나… 뭐 셋 중 하나 아니겠어요? 여느 때처럼?”

화연은 한숨이 다시 나왔다.

화연이 깨어난 뒤 류가의 가주이자, 환제국의 재상인 류충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면서 하루도 떠나지 않고 그녀의 곁을 지켰다. 잠잘 때조차 화연의 침상 옆 바닥에 담요를 깔고 그 위에서 잘 정도였다.

그러던 중, 그 정도 했으면 이제 일 좀 하러 오라는 환제국의 황제인 연제의 전언을 받고 구시렁거리며 사직서를 내고 오겠다고 황궁으로 들어갔었다.

당연히 한 나라 재상의 사직서 수리가 그렇게 쉽게 될 리는 만무했고, 괘씸죄까지 적용됐는지 그 뒤로 매일 꼬박꼬박 시간을 맞춰 입궁해야만 했다.

아침마다 울먹이며 입궁하던 류충은 며칠 동안은 잘 참나 싶더니, 얼마 전부터 점심을 같이 먹겠다며 궁을 매일 빠져나왔다.

점심만 먹고 서둘러 들어가면 될 것을 후식을 먹자, 산책을 하자, 서책을 읽어주마. 갖은 핑계를 대면서 들어가질 않으니, 엊그제에는 궁에서 재상 밑에 있는 관료로 보이는 남자가 집으로 찾아와 데려가기까지 했었다.

기해가 잠깐 봤는데, 안 가겠다고 발버둥을 치는 가주의 뒷목을 사정없이 잡아 끌고 가는 그 남자의 뒷모습이 단호해 보이면서 등판도 참 널찍한 것이 너무 멋있었다고 했다.

“아기씨, 저는 이왕이면 세 번째였으면 좋겠네요. 그때 그 남자의 등판이 참 넓고 듬직했다는 말씀, 제가 드렸었나요?”

“응… 한 12번쯤.”

“어머! 오호호호호호~ 제가 주책이네요. 아무튼 조금 있으면 오실 때 됐으니 또 창 열어 놓고 계시면 안 돼요. 제가 가주께 혼난단 말예요. 그리고 이제 겨우 몸이 좋아지셨는데 다시 고뿔에라도 걸리면 큰일 나요.”

“알았어. 안 열어.”

“그럼 조금만 계셔요. 주방 좀 다녀올게요.”

기해만 왔다 가면 정신이 없었다. 다른 생각을 할 틈도 없었다. 정신없긴 하지만 유쾌해지기도 했다. 자신과는 전혀 다른 활발한 성격의 친구가 생긴 것 같았다.

거기서는 그렇게도 친구가 갖고 싶었는데도 안 생기더니, 여기서는 눈뜨자마자 친구도 생기는구나……. 뿐만 아니라 가족도 생기고, 좋은 집도 생기고…….

그러고 보니 이 집은 연우로 있었을 때 봤던 한국의 민속촌 같기도 하고, 중국의 고대 건물 같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까지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들이 신기해 보이기도 했다.

연우였던 일이 꿈이라면 거기서 보던 집이나, TV 같은 전자제품들은 다 내 상상에서 만든 거란 말인가? 반대로 화연이 된 지금이 꿈이라면 이 중국 복식도 아닌 것 같고, 한국 복식도 아닌 것 같은 이런 옷과 이런 집들 모두 내 상상이란 말인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은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 아닌데…….

그래. 이곳이 꿈이든지, 현실이든지 더 이상 갈등하지 말자. 어차피 거기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잖아. 그가 그립다고 살아나는 것도 아니고, 내 아이가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보다 못한 누군가 내게 던져 준 기회라고 생각하자.

화연은 흔들리던 마음의 갈피를 잡으니 조금은 후련해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리면서 눈물이 흐르긴 하지만, 당장 겪고 있는 일 같지는 않았다. 자신을 덮치고 있던 그 고통 속에서 빠져나온 것만 해도 살 것 같았다. 화연은 다시 눈물이 흐를 것 같아 눈을 꼭 감았다.

“자기야… 안녕……. 사랑아… 안녕.”

감은 눈 안에서 그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그는 아이를 한 손에 안아 들고는 괜찮다며 웃으면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화연의 꼭 감은 두 눈에서 결국 눈물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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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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