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외전4. 눈따따 연애조작단 =========================================================================
둥근 해가 떴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세수하고 이를 닦고~
쾅!
“ 왜, 왜 이러세요?”
벽치기를 한다.
벽으로 밀린 비숏이 한 떨기 할미꽃처럼 가녀리게 떨었다. 그 눈뜨고 차마 봐주기 힘든 자태에도 난 아랑곳 않고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 비숏.”
“ 네, 네?”
“ 이상형이 어떻게 되죠?”
“ 네?”
“ 나열한다, 실시!”
“ 예, 예쁜 여자, 아름다운 여자, 뷰티한 여자, 프리티한 여자…….”
겁에 질렸으나 진심어린 목소리로 늘어놓는 것을 들으며 나는 결국 이마를 짚었다. 한숨이 저절로 입술 사이를 타고 흘러나왔다. 사람의 뚝심에 눈물이 나기는 처음이었다.
‘ 에슐라…….’
일의 발단은 얼마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에슐라는 나와 함께 마탑에서 기거했다. 귀족영애가 시집을 가면서 개인시녀를 한 둘 정도 데리고 가는 것은 거의 전통에 가까운 일이었는데, 그에 따라 나는 에슐라를 선택했던 것이다. 에슐라는 그럼 앞으로도 쭉 눈따따 아가씨와 함께 할 수 있는 거냐며-내가 눈따따에게 지다니-흔쾌히 나를 따라와주었다.
덕분에 결혼식이 있던 다음날 마탑의 주거인원은 세 명이 늘었다. 나, 에슐라, 눈따따……가 아니라 돌아온 막내 비숏까지. 한동안은 탑 내의 분위기가 축제마냥 시끌벅적했다.
비숏이야 원래 있던 곳이니 그러려니 해도, 에슐라 또한 못지않게 적응이 빨랐다. 알아들을 수 없는 비명을 지르며 비숏이 도망치고, 그 뒤를 카르댄밸과 넘나레드가 쫓고, 또 그 뒤를 메모리아와 에슐라가 추격하는 걸 목격했을 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에슐라는 고작 며칠 만에 자연스럽게 탑의 일원이 되었다.
그 후 시간이 한 달 정도 흘렀을 무렵이었다. 쌀쌀한 가을날씨에 옷감이 전보다 두꺼워질 쯤, 사건이 터졌다.
“ 아가씨.”
“ 응?”
“ 저 요즘 이상해요.”
“ 뭐가?”
“ 자꾸 가슴이 뛰고……얼굴에 열이 오르고……마주칠 때마다 떨리고.”
“ 응, 그래……응? 뭐라고? 어? 뭐?”
에슐라가 폭탄발언을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하더니 내게 저리 털어놓은 것이다. 그리고 난 앉아있던 의자채로 뒤로 넘어갈 뻔했다. 입주 이후 에슐라는 줄곧 마탑 안에서만 활동했다. 그, 근데 사랑?
“ 누……누구…….”
멀쩡한 사람이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충격에 휩싸인 내게 에슐라가 수줍게 고백했다.
“ 마법사님이요.”
탑에서는 발에 치이고 넘치는 게 마법사였다. 그러나 나는 에슐라가 가리키는 대상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예전 저택에서 지낼 때부터 그녀가 저렇게 호칭했던 건 한명 뿐이었다.
“ 설마…….”
“ 앗, 안주인님! 여기 계셨군요!”
마침 당사자가 등장했다. 짙은 고동색의 중단발머리를 귀 뒤로 쓸어 넘긴 남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비숏이었다. 비숏은 다과실로 후닥 들어오더니 밝은 어조로 말했다.
“ 다른 게 아니라 여쭐 게 있어서요. 숙수 아저씨가 저녁 디저트로 파이를 만든다는데 라즈베리랑 블루베리 중 뭐가 더 좋은지……어, 에슐라도 같이 있네?”
한참 용건을 떠들던 비숏의 시선이 에슐라에게로 닿았다. 저를 주목한 것에 화들짝 놀란 에슐라가 이내 볼을 새빨갛게 붉혔다. 나는 그 부정할 수 없는 광경을 지켜보다 그만 현기증이 일어 비틀거렸다.
“ 헉! 괜찮으십니까?”
탁자를 짚어 균형을 잡은 내가 천천히 눈길을 옮겼다. 온몸으로 설렘을 표현중인 에슐라를 한번 쳐다봤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고 있는 비숏을 한차례 응시한다.
그리고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 경찰 불러!”
*
나도 모르게 포돌이를 찾았다. 본능적이었다. 그도 그럴 게 얼굴로만 보면 에슐라와 비숏은 족히 열 살 이상의 차이가 났기 때문이다. 에슐라의 나이가 열여섯이었으니 범죄의 현장이라는 생각이 들어도 무리는 아니었다. 물론 실제로는 겨우 세 살 차이에 불과했지만.
‘ 비숏은 열아홉이다. 비숏은 열아홉이다.’
나는 마치 세뇌하듯 중얼거렸다. 알고 있었는데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까먹고 말았다. 비숏은 대체 뭘 먹고 그리 노안인가.
“ 비숏은 천재마법사다. 비숏은 천재마법사…….”
이번에는 대상의 장점을 반복해서 읊다가 난 힘이 빠져 탁자위로 엎어졌다. 노안이고 천재마법사고 사실 다 필요 없었다. 이 순간 그 무엇보다 중요한 건, 비숏이 극심한 얼빠라는 사실이었다!
소나무마냥 한결같이 미인만을 좇던 비숏의 지난 행적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예쁘면 다됨. 예쁘면 무조건 오케이. 오로지 얼굴만을 따지던 그 강철같은 취향. 전에는 그러든가 말든가 별 감흥이 없었는데 아오, 이젠 상관이 생겼다.
에슐라는 귀엽기는 했지만 미인소리를 들을 외모는 아니었다. 아기자기한 이목구비는 깜찍할망정 전형적인 미녀와는 거리가 멀었다. 비숏의 이상형과 교점이 없단 소리다. 얼굴 외엔 놀라울 정도로 아무것도 따지지 않는 비숏의 이성관을 생각했을 때, 공략가능성은 그야말로 절망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 어쩌지.”
나는 아파오는 머리를 감쌌다. 기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며 넘어가도 될 일을 내가 이 정도까지 신경 쓰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 에슐라, 너 전엔 연하남이 취향이라지 않았었니?’
‘ 맞아요.’
‘ 그런데 왜……그, 하필.’
‘ 외알 안경이 멋있었어요.’
‘ 뭐라고?’
‘ 어쩌다 외알 안경을 낀 채로 마법을 쓰는 걸 봤는데,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어요. 그래서 그때 이후로 그만…….’
비통함에 난 두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떠올리니까 다시 괴로워졌다. 외알 안경은 예전 에이레네의 밤 축제 때 내가 비숏에게 선물했던 물건이었다. 막장대회의 상품으로 타낸 거였지. 의미 없이 건넸던 선물이 이런 대참사의 발단이 될 줄이야!
전부는 아니더라도 반은 내 책임이었다. 오오 에슐라, 아임 쏘리 에슐라.
“ 눈따따님, 저는 이제 어쩌면 좋사옵니까.”
눈코입이 따로 놀 정도로 굉장한 지혜를 내려주옵소서! 상관없는 눈따따를 붙들고 웅얼거리다가 내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뭐라도 해야지.
비숏의 취향이 여전하다는 것은 아침에 확인을 끝냈다. 결혼 이후 마탑 서열 1위로 등극한(공동1위: 아윈)내게 비숏은 오들오들 떨며 모든 진심을 말해주었다. 변함없이 그는 미녀바라기였다.
이상형을 내 멋대로 바꿀 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고, 뭔가 다른 수를 써야한다. 나는 고민하다 아로브럭에게 상담을 해보기로 했다.
“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겠습니까, 허허.”
남자가 이상형을 넘어 사랑에 빠지게 하는 방법을 물어봤다. 아로브럭은 제 성성한 수염을 쓰다듬으며-이때 아로브럭은 아직 저주가 풀리기 전이었다-난감한 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창한 기대를 한건 아니었지만 나는 괜히 시무룩해졌다. 얼굴만 현자인 아로브럭이 안타까운 어조로 말했다.
“ 비숏의 일이지요?”
“ 어라……제가 말을 했던가요?”
“ 이미 소문이 파다합니다. 비숏 본인만 몰라요.”
“ 으음.”
비숏 빼곤 다 안다라. 하기야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만 불려도 토마토처럼 낯을 붉히는 에슐라는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을 만큼 티가 났다. 비숏? 비숏이 하늘이 내려준 연애 둔치라는 건 이미 겪어본 바가 있었다. 당연히 모르겠지, 저 혼자.
“ 망한 것 같은데요. 회생할 방법이 정녕 없을까요.”
에슐라는 내게 여러모로 고마운 사람이었다. 나 때문에 일이 벌어졌다는 책임감이 아니더라도, 온전히 그녀의 행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비숏도 마찬가지다. 얼굴 하나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날 옷가지만 남기고 털리는 수가 있었다. 집문서 날리고 뒤늦게 울지 말고 에슐라나, 에슐라라든가, 에슐라 같은 참한 아가씨한테 정착하란 말이야!
“ 죄송합니다. 이런 주제라면 차라리 저보다는…….”
“ 보다는?”
“ 넘나레드나, 카르댄밸 선배가 더 적합할 겁니다.”
“ 엥?”
듣던 중 뜬금없는 헛소리였다. 내가 얼굴 가득 불신의 빛을 띄우자 아로브럭이 헛기침을 한 뒤 설명을 보탰다.
“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두 사람이 한때 중매인 역할을 톡톡히 했다고 합니다. 탑에 들어오기 전에요.”
“ 흐음…….”
“ 성공률이 8할에 달했다며 자랑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둘이? 말마따나 믿기 어려운 노릇이었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떠올려보면 전생에도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정작 자기 연애는 번번이 실패하면서 신기하게 남의 연애만 귀신같이 성사시키는 인물들.
‘ 밑져야 본전!’
그래, 달리 방편이 없다. 나는 아로브럭의 조언을 받들어 넘나레드와 카르댄밸을 만나보기로 결정했다.
두 사람을 찾는 일은 힘들지 않았다. 마당 한구석에서 시끄럽게 엎치락뒤치락 하는 꼴이 먼발치서 봐도 두 놈이었다. 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 곱슬머리가 최고지!”
“ 생머리!”
“ 니 머리에서 길이만 길어지면 생머린데 그게 예쁠 것 같냐? 우웩!”
“ 이 개새끼가!”
오가는 주먹다짐을 구경하며 끼어들 틈을 살폈다. 늘 그렇듯 둘은 별 시답잖은 주제로 싸우고 있었다. 언성을 높이던 둘이 서로의 머리채를 잡았을 무렵-카르댄밸이 머리카락이 더 길어서 불리해보였다-내가 말을 걸었다.
“ 저기요.”
“ 미역줄기 같은 게 뭐가 이쁘다고 지랄이야! 외눈이냐?”
“ 닥쳐! 곱슬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넌 뒤져야한다!”
“ 저기요?”
“ 너야말로 생머리를 모욕한 죗값을 죽음으로 치러라!”
“ 그 전에 제사상을 먼저 보게 해 주마.”
“ 내가 할 소리!”
“ 저기요~?”
“ 유언장은 작성해놨겠지?”
“ 그러는 너나 지금 유언을 남기지 그러냐?”
둘은 이미 자기들만의 세상에 있는 것 같았다. 외부인인 내 목소리는 파고는 게 불가능한 듯했다. 나는 양상을 지켜보다 결국 얌전히 부르는 것을 포기하고, 필살기를 꺼냈다.
“ 앗, 아윈이다!”
“ …….”
“ …….”
효과는 대단히 좋았다. 무슨 짓을 해도 멈추지 않을 것 같았던 두 사람이 꿀먹은 벙어리처럼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난 과연 필살기라고 생각하며 둘에게 용무를 꺼냈다.
“ 안녕하세요. 갑작스럽지만, 도움을 구할 게 있어서요.”
“ 어……안주인님. 아, 네. 뭐든 말씀하시죠.”
반응은 카르댄밸이 빨랐다. 그는 눈 깜짝 할 새에 자세를 공손하게 고쳤다. 넘나레드도 이어 상대의 머리채에서 손을 떼고 나를 응시했다. 이 커플은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진짜 비글 같다.
나는 성실한 청취자가 된 두 사람에게 찾아온 연유를 요약해서 이야기했다.
“ (블라블라)”
“ 비숏이랑 에슐라요?”
“ 아아, 그 둘…….”
“ 근데 비숏이 노답이라서 안될 것 같은데.”
카르댄밸이 날카롭게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으음! 과연 굉장한 통찰력. 넘나레드 또한 곁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 맞습니다. 비숏은 지금껏 제가 보아온 수많은 노답 중에서도 가장 끝내주는 노답이거든요.”
“ 최고의 노답.”
“ 상노답.”
“ 노답 그랑프리.”
“ 노답이라면 그놈처럼.”
“ 노답대백과.”
공통된 대상을 욕할 때에는 죽이 척척 맞았다. 순간 비숏이 불쌍해져서 내가 둘의 말을 멈추게 했다. 비숏이 노답왕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에슐라가 좋아하니까 이어줄 방안을 찾고 싶었다. 쫄보에 얼빠에 둔치인 비숏은 전부나 다름없는 그 세 가지만 빼면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다.
“ 정말 방법이 없을까요?”
“ 그건…….”
“ 글쎄요, 무슨 수로 그 비숏에게 사랑을 일깨워줄지.”
“ 아!”
넘나레드가 손가락을 튕겼다. 뭔가 기발한 것이 떠오른 듯한 폼새였다. 머리 위로 전구를 띄운 넘나레드가 의견을 펼쳤다.
“ 이건 어떻습니까? 여타 로맨스소설에 쓰이는 장치를 따라하는 거죠.”
“ 로맨스소설이요?”
“ 네. 보통 소설에선 여주인공이 위험에 처하고 그런 여주인공을 남주인공이 구해주는 장면이 꼭 한번쯤은 나오지 않습니까?”
“ 그걸 비숏이랑 에슐라한테 적용하자고?”
“ 어. 백마 탄 왕자님 대신 백마 탄 공주님이 등장하는 거지!”
“ 정말 니 같은 생각이다.”
카르댄밸은 타박했지만 나는 감상이 달랐다. 듣고 나니 꽤 괜찮은 방법이란 생각이 들었다. 죽음의 위기, 절묘한 구출, 그리고 그 사이에서 피어나는 사랑!
좋다. 그거 괜찮다. 생각해보니 나도 그간 소설에서 종종 써먹곤 했던 연출이었다.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나를 구해주는 상대는 그야말로 빛의 현신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겪어봤으니 그건 확실했다. 바로 사랑에 빠지지는 않더라도 좋은 전환점이 되어 줄 것이다.
비숏을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뜨리자!
행보가 결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결연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금방 도로 고민에 빠져들고 말았다. 실천을 마음먹었더니 과제가 있었다.
‘ 어떻게?’
어떻게 비숏을 위험에 빠뜨리지?
비록 지금은 동네북처럼 욕이나 얻어먹고 있는 처지였지만 사실 비숏은 답지 않게 뛰어난 마법사였다. 건달 한둘이나 몬스터정도는 간단하게 찜 쪄 먹는 게 가능하다. 그 정도의 무력을 지닌 사람을 소시민이 위기에 밀어 넣는다는 건…….
‘ 아.’
남편의 힘은 곧 나의 힘. 나는 즉시 눈따따를 들어올렸다.
“ 남편! 남편 나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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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노답
노답 그랑프리
노답이라면 그놈처럼
노답대백과
노답에 칸타빌레 (?)
비숏 (19. 동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