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4 외전2. 케니스와 함께 춤을 (IF외전) =========================================================================
“ 어머, 아가씨. 벌써 일어나셨네요?”
머엉.
“ 오늘 아침은 특제 수프래요! 드푸 주방장님의 새로운 도전이라나?”
머엉.
“ 내보냈던 상단의 성적이 기대이상이구나. 돌아오는 대로 가게를 차리는 게 좋겠다.”
머엉.
“ 라테, 입에 맞니? 어릴 땐 그렇게 콩을 싫어했었는데……호호.”
머엉.
“ 아가씨, 바꾼 베개는 괜찮으세요?”
머엉.
“ 아가씨.”
머엉.
“ 아가씨?”
“ 으, 응?”
부르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초점을 잡으니 에슐라의 얼굴이 바로 코앞에 있다. 놀라서 고개를 뒤로 빼자, 자세를 바로 한 에슐라가 의문스럽다는 표정으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마치 탐색을 하는 듯한 시선으로 날 뚫어져라 응시한다.
“ 요새 계속 넋을 빼고 계시네. 무슨 일 있으세요?”
“ 으음.”
나는 공연히 머리카락을 매만졌다. 에슐라의 말마따나 내가 요즘 툭하면 정신을 빼놓고 있기는 했다. 정확히는 이틀째. 오늘도 점심때가 지나서야 넋이 돌아왔다.
“ 일은 무슨. 아무 일도 없어.”
사실 천지가 개벽할만한 일이 있었다.
내 친구 케니스가 나한테 고로 시작해서 백으로 끝나는 것을 한지도 벌써 이틀이 흘렀다. 노을이 지던 시각, 서로 마주보는 채였던 나와 케니스. 그리고 케니스의 고……고……고추티백!
“ …….”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회상하는 것마저 힘들었다.
백작저에서 케니스는 내게 ‘네가 특별하다’고 말했다. 긴장이 풀렸다더니 그새 도로 생겼는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였다. 착각일수도 있지만 어미에서는 초조함이 묻어나왔다. 난 그때 무슨 생각을 했더라? 아, 그래. 상대의 가면을 치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표정이 보고 싶어서.
‘ 특별…….’
지상최대의 난제마냥 느껴지는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본다. 사실 특별하다는 말이 늘 러브의 의미를 내포하고 사용되는 건 아니다. 사전적 의미를 따져보면 ‘보통과 구별되게 다르다’는 것뿐이니까. 아닌 말로 예전에 케니스가 저 소릴 했으면 ‘특별하게 나를 죽이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응, 그땐 그랬지.
‘ 분위기. 눈빛. 어조.’
지금은 그 표현이 고……크흠……백으로 느껴지는 이유를 하나씩 꼽아보았다.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걸 고르자면 역시 눈빛. 케니스의 진지한 눈빛은 당시 내가 ‘쪽팔려 게임인가’ ‘술 마셨나’ ‘오늘 만우절인가’ 따위의 생각을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그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깝죽거리면서 농담으로 받아쳤을 텐데.
“ 참, 아가씨. 음유시인 드러라 아시죠? 이번에 새로운 노래를 불러서 인기가 엄청 올랐대요.”
“ ……응? 뭔데?”
“ 불러볼게요. 친구로만 생각했던 네가~어느 날 내게 사랑을 말해~친구에서 연인으로~”
“ 와악!”
“ 왜 그러세요?”
“ 아, 아냐.”
갑자기 비명이 나왔다.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반응이었다. 정말 나도 모르게.
“ 노래는 됐어.”
“ 맞다, 릴리가 신간 로맨스소설을 사왔어요. 읽어보실래요?”
“ 어떤 거?”
“ 여기요. ‘친구였던 그놈이 갑자기 고.백.을?!’.”
“ 끄아악!”
“ 책은 왜 던지세요?!”
아, 아니 진짜 나도 모르게. 의도한 게 아니었다. 손과 입이 통제를 벗어나서.
“ 싫으시면 말로 하시지…….”
“ 미,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냐.”
“ 알았어요. 그보다 조금 있다 푹시느 제과점에 다녀올 건데 필요하신 거 있으세요?”
“ 푹시느? 아, 거긴 역시 크림빵이 맛있지.”
“ 맞아요! 신제품 쿠키도 나왔던데요? 이름도 특이해요.”
“ 그래?”
“ 뭐라더라, 그렇지, 사랑과 우정사이.”
“ 끄아!”
“ 과일 잼도 함께 출시됐더라고요. 숨겨왔던 친구의 끈적한 마음.”
“ 끄아아!”
미친 빵집!
나는 얼굴을 감싸고 탁자에 엎드렸다. 발도 동동 굴렀다. 머리로 꽂히는 에슐라의 시선이 싸해지는 느낌이었지만 모른 척했다. 내가 예민한 건지 세상이 나를 괴롭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
“ 다녀오겠습니다.”
공작저에 기별을 보냈다.
방문의사를 전하고 약속을 잡았다. 어서와, 정상적인 방문은 처음이지? 예고 없이 대뜸 찾아가는 게 일상이었으니 정석대로 일시를 정하는 게 외려 낯설었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마차에 올랐다. 무슨 큰일을 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왠지 모르게 각오가 필요했다.
마차에 앉자마자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리 감상할 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다각거리는 말발굽소리가 일정하게 울린다. 그걸 자장가삼아 어느새 잠이 들었던 것 같다. 눈을 잠깐 감았다 떴다고 생각했는데 도착지 부근이었다.
……스읍. 침 안 흘렸겠지. 이동하는 동안 홀로 사색에나 좀 잠겨볼까 했더니 이게 뭔……하기야, 어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새웠으니 어쩔 수 없나. 찌뿌듯한 몸에 막 기지개를 켜는 순간이었다. 마차가 멈췄다. 오, 도착인가?
“ 가진 거 다 내놓으시지! 앙?”
아니었다.
“ 뭐여, 저것들은…….”
“ 소, 손님.”
마부의 목소리가 떨렸다.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파악해본다. 쌍둥이들처럼 검은 천 조각을 얼굴에 두르고 한 손으로 칼을 쥔 것들이 마차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강도잖아? 복장들이 하나같이 ‘진정한 강도라면 이들처럼!’ 같은 느낌이었다. 이야, FM이구만.
“ 케케케! 뒤지기 싫으면 얌전히 토해내라고! 크케케!”
웃음소리도 FM이다. 강도짓을 교과서로 배운 걸까. 한 놈이 대단히 강도스럽게 웃으며 손에 든 칼을 이리저리 휘둘렀다. 칼이 아니라 쌍절곤을 저리 휘두르다 지 급소 지가 때리면 볼만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내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불쌍한 마부아저씨가 울기 전에 어서 쟤네를 처리해야지.
“ 뭐야! 귀족인가?”
마차에서 내려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장식이 크게 없는 옷인데 비싼 걸 알아보다니, 생각보다 눈썰미가 좋은 친구들인 것 같았다. 치맛자락을 탁탁 털고 고개를 든다. 다섯 놈이 죄다 나만 보고 있었다.
“ 그래, 나 귀족이야.”
“ 귀족이래! 어쩌지?”
“ 기다려. 호위는 없는 것 같은데?”
“ 달랑 저거 혼자라고?”
“ 뭐야! 그럼 쫄 필요 없잖아?”
호위의 부재를 확인한 강도들이 언제 흠칫했냐는 듯 도로 기세를 되찾았다. 칼을 휘두르던 놈도 멈췄던 칼질을 다시 시작한다. 하하, 과연 내 만만력. 누구든지 나를 만만하게 보는군!
오히려 한층 신이 난 강도들을 응시하며 내가 품에서 스크롤을 꺼냈다. 울애긔들, 호위보다 내가 더 무섭다는 걸 곧 알게 해줄겡.
“ 귀족아가씨, 다치기 싫으면 순순히 내놓는 게 좋을 걸?”
“ 그래! 크케케케!”
“ 내놓으라니? 뭘?”
“ 당연히 가진 거 전부지!”
“ 맞아! 크케케케!”
“ 옷까지 벗어서 내놔야 할 거야~크큭.”
“ 좋아! 크케케케!”
“ 야 저 새끼 입 막아. 추임새도 적당히 넣어야지 미친.”
“ 그렇지! 크케케……엥?”
뚝심 있게 크케케케만 반복하던 놈이 결국 주변 동료들에게 다굴을 당했다. 그래, 시끄럽긴 진짜 시끄럽더라. 곧 응징을 마친 놈들이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 얼른 있는 거 다 꺼내! 피 보기 싫으면!”
“ 알았어, 금방 줄게.”
“ 큭큭, 말귀가 통하는군.”
“ 줄 수 있는 게~.”
“ 응?”
“ 이 스크롤 밖에 없다~.”
노래를 부르며 스크롤을 한 장씩 찢었다. 강도단이 저마다 하늘을 난다. 부웅!
“ 가진 거라곤~ 캐시파워밖에 없다~.”
“ 으어억!”
“ 끄억!”
쿠당, 쿠당탕. 요란하게도 나뒹군다. 이게 게임이라면 싹쓸이점수를 보너스로 얻었을 것이야.
“ 이게 널~ 웃게 만들 수 있을 진 모르지~만~.”
“ 끄어억…….”
“ 크윽.”
“ 그래도 찢어 본다~ 네가 받아주길 바래~~본다~!”
아, 열창했다.
노래와 함께 강도들도 나란히 끝났다. 사이좋게 바닥에 엎어진 친구들이 저마다 전투불능 상태로 연신 신음만 흘린다. 나는 우선 위협이 될 만한 쇠붙이들을 전부 수거한 뒤, 엎어진 강도들의 근처로 가 쪼그려 앉았다.
“ 얘들아.”
“ 끄으…….”
“ 한 번 더 날까, 아니면 머리 박을까?”
“ 박겠습니다.”
강도들은 대단히 얌전해졌다. 나를 마법사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잔뜩 쫄은 녀석들을 어디서 주워들은 방법으로 여러 차례 굴린 후, 키 순서로 다소곳하게 무릎을 꿇렸다. 자, 이제 어쩐다.
그냥 놔주자니 기력을 회복하는 대로 본업-강도-에 복귀할 것 같고, 그렇다고 멱을 따자니 내가 그만한 강심장은 아니었다. 역시 좀 번거롭더라도 경비대에 넘기는 게 최선이겠지?
결정을 내린 나는 마부에게 부탁해 경비대원을 데려오도록 했다. 난 당연히 감시를 목적으로 이곳에 남았다. 쪼그린 자세를 유지하려니 슬슬 다리가 아파, 평평한 돌을 하나 찾아 엉덩이를 안착한다. 음……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요, 강도는 강도요……할 게 없구나.
“ 있잖아.”
“ …….”
“ 뭐 재밌는 얘기 아는 사람 있니?”
“ …….”
“ 없으면 하늘 날고.”
“ 있습니다! 저, 저 압니다!”
“ 그래? 뭔데?”
“ 그, 제 연애사입니다만……제가 얼마 전에 두 여자를 동시에 사귀었는데.”
“ 머리 박아.”
에라이 개놈시키.
혹시라도 도망칠까 강도들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내가 한숨을 삼켰다. 마부 아저씨는 언제 돌아오는 것인고. 그러고 보니 얼른 가서 케니스도 만나봐야 하는데. 이미 상당히 지체를 한 마당이었다. 이보다 더 늦으면 괜히 걱정을 끼칠……어머! 걱정이래! 나 고to the백 받은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적응이 빠르니? 걱정? 어머! 어머어머!
“ 야, 혼자 실실대는 거 보이냐? 웬 미친년한테 걸려선…….”
“ 너도 박아.”
두 놈에게 징벌의 자세를 지시한 뒤 내가 턱을 괴었다. 강도들과 담화를 나누는 것보단 이쪽이 훨씬 생산적일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케니스에 대한 생각을 시작한다. 케니스. 케니스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흐음……yo! 넌 정말 잘생겼고 그리고 검도 잘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해, 그게 바로 펄펙, 그게 바로 인생의……아니아니, 나 뭐하냐.
대상을 낱낱이 탐구하는 심층적 사고를 할 요량이었는데 갑자기 웬 인생의 진리랩이. 고개를 흔들어 헛생각을 털어낸 내가 다시 분위기를 잡았다. 좋아, 정신 차리고 진지하게.
“ 여깁니다!”
어라, 왔네?
기다리던 마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보다는 일찍 돌아온 것 같았다. 지루함에서 벗어난다는 기쁨에 내가 반갑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여기예요! 경비대원…….
“ 라테! 괜찮나?”
그리고 태초에 빛이 있었다.
“ ……엥? 각하?”
케니스? 케니스가 왜 여기에? 내가 황당한 표정으로 마부와 케니스를 번갈아보았다. 마부가 데리고 나타난 것은 요청했던 경비대원이 아니라 얼굴에서 빛을 생산하는 선샤인 케니스였다. 선샤인이 성큼성큼 내게 걸어온다. 으응?
의아하게 바라보자 마부가 대답했다.
“ 여기선 경비대보다 공작저가 가까워서…….”
“ 아.”
다시 보니 공작저의 사병으로 추정되는 기사 몇몇도 함께였다. 기사들은 도착하자마자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강도단을 포박했다. 나는 그걸 지켜보다 눈을 돌렸다. 언제 지척까지 왔는지 케니스가 코앞에서 나를 샅샅이 살피고 있었다.
“ 각하.”
“ 다친 곳은 없군. 걱정했다.”
“ 헐.”
돌리는 것도 없이 말이 직설적이었다. 내가 충격으로 동공을 비웠다. 뭐, 뭐지. 츤데레 케니스 찾습니다. 실종된 김첨지 찾아요.
“ 그……걱정 안 해주셔도 되는데.”
“ 그래도 걱정이 된다. 어쩔 수 없지 않나.”
“ 굳이 하실 거면 제 손발을 먼저 걱정해주시면 안될까요?”
안 어울리는 말을 연달아 들었더니 손가락 발가락이 하나가 되었다. 내 응수에 케니스의 눈썹이 간만에 꿈틀거린다. 앗 기분 상했나? 나는 그걸 관찰하다 불쑥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 각하, 오늘은 저번보다 더 잘생기셨네요.”
“ 쓸데없는 소리.”
얼핏 냉정한 대꾸였지만 자세히 보면 귀가 빨개져 있었다. 귀가! 빨개! 그 신기하기까지 한 반응에, 케니스가 내게 고백을 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시 떠올랐다. 이거 상당히…….
‘귀, 귀여운데?’
난 또 왜이래. 왠지 덩달아 얼굴이 달아오를 것 같아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나는 지금껏 내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백작저에서의 그 날 이후, 내 사고의 흐름은 온통 케니스를 중심으로만 진행되고 있었다. ‘케니스가 고백을 했다.’ ‘케니스가 왜?’ ‘왜 나를?’ ‘대체 언제부터?’ 그러나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런 문제들이 아니다.
실은 제일 먼저 확인했어야 하는 것.
내 마음은?
숙였던 고개를 도로 든다. 케니스와 눈이 마주쳤다. 짙은 남색 눈동자에 오롯이 내 모습이 담겼다. 순간 심장이 뛰었다. 조금 전에 던진 말은 그저 놀리려고만 한 이야기는 아니다. 케니스는 정말로 전보다 더 잘생겨보였다. 사실 발견하던 순간 머릿속에서 올모스트 패러다이스가 울렸다. 마치 왕자님의 등장처럼.
“ 각하, 있잖아요.”
“ ……?”
난 이제와 스스로의 마음을 따져보기 시작했다. 나는 어떻지? 솔직히 좋아하냐고 묻는다면 아직 모른다. 기다 아니다 확실히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케니스의 특별취급이 사라진다고 한다면, 그러니까 내가 내미는 열매를 의심 없이 먹어주거나 지금처럼 걱정을 해준다거나, 그런 것들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꽤나 쓰렸다. 상대에게 있어 ‘특별하다’는 의미를 잃고 싶지 않았다.
“ 우리 앞으로 자주 만날까요?”
그렇다면 지금부터 알아보자. 우정인지 사랑인지, 변덕인지 진심인지. 답은 사실 이미 반쯤 나와 있는 것 같지만, 그래도 확실해질 때까지.
케니스가 잠시 후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이 수줍어보여서, 나는 집에 돌아가자마자 터닥 의원에게 눈을 진찰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시 나타난 황금종이 이번에는 얌전히 맑은 종소리를 울린다. 나한테만 보이는 천사들이 머리위로 축복의 가루를 뿌려주었다.
케니스의 귀가 조금 전보다 더 빨간색이었다. 나는 눈을 접어 웃었다.
<얼마 후의 이야기>
제국 내에서 전쟁이 터졌다.
군대가 진격하고 병장기가 맞부딪치는 그런 전쟁은 아니었다. 싸움은 물밑에서 조용히 진행되었다.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자들의 숨 막히는 결투.
비모르 애독자 VS 케니스 사생……!
“ 로즈파 승!! 와하하하!”
수면아래에서 벌어진 소리 없는 전쟁은, 한 달여 만에 전자에게 승리의 깃발을 안겨주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호탕하게 웃은 내가 이내 손수건으로 감격의 눈물을 훔쳤다. 고생했어요, 내 팬들!
“ 축하해요, 아가씨!”
“ 정말 축하드려요!”
에슐라와 릴리가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며 폭죽을 터뜨렸다. 나는 둘을 동시에 끌어안고 함께 승리의 희열을 나눴다. 가슴이 뿌듯하게 벅차올랐다.
일의 발단은 한 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로즈의 정체를 공표할거야.”
“ 선생님?!”
케니스와의 백년해로를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처치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사생이었다. 어디에 어떻게 숨어있을지 모르는 사생팬들로부터 나도, 님도 지켜야한다. 며칠간의 고민 끝에 나는 결국 특단의 결정을 내렸다.
“ 로즈의 애독자들로 사생팬을 쓸어버린다!”
물론 넘어야 할 산이 있었다. 내가 비모르 작가-심지어 엄청나게 유명한-라는 비밍아웃을 케니스에게도, 부모님에게도 해야 하는 것이다. 두 눈을 질끈 감고 난 우선 남자친구인 케니스에게 먼저 털어놓았다.
‘ 그렇군.’
‘ 그게 다예요?’
‘ 뭐가 더 필요하지?’
‘ 이해받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 내가 기사단을 이끌었었다는 걸 알고 있나?’
‘ 네.’
‘ 여러 사람이 모이다보면 개중엔 꼭 독특한 취미를 가진 이가 한둘씩은 있기 마련이다. 특히 전장에서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온갖 기상천외한 취향들을 접했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게 아니라면 한 번도 그에 대해 옳다 그르다 논해 본 기억이 없다. 네 경우도 마찬가지야. 사실 그리 놀라울만한 수준도 아니다.’
예상 외로 빠르고 명쾌하게 클리어. 남친이라는 산을 넘은 나는 다음 허들인 부모님-특히 아버지-를 찾아갔다. 사실 이번에는 실패를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내걸 게 있었으니까.
‘ (비밍아웃)’
‘ 뭐, 뭐라고? 제정신인 게냐?! 당장 모든 서적을 불태우고 출판사 사장이라는 놈을 이리로…….’
‘ 마저 들어주세요. 제가 로즈라는 이름을 유지해야 에스반데 공작각하를 완전히 얻을 수 있습니다.’
‘ !’
‘ 전장의 검은 사신 에스반데 공작이 우리 집의 사!위!가 된다구요.’
‘ !!’
두 번째 산도 무사히 넘었다.
그렇게 준비를 마친 나는 부크와 의논해 로즈의 정체를 사방에 알렸다. 에슐라도 한몫 거들었다. 모임을 타고, 파티를 타고, 소문은 영애들 사이에서 일파만파 퍼져나갔다. 베일에 싸여있던 비모르계의 큰손 ‘로즈’가 다름 아닌 엑트리 자작가의 무남독녀 ‘라테 엑트리’라는 정보가, 곳곳의 독자들에게 썰물처럼 전해졌다.
그리고 전쟁이 시작되었다.
나와 케니스의 교제사실은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내용이었다. 그 상황에서 로즈의 신상이 밝혀지자 자연스럽게 로즈파 VS 사생파의 구도가 형성되었다. 사생이 로즈를 핍박하여 그녀가 신간을 쓰지 못하는 최악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애독자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궐기했다. 다행히 사생파보다 로즈파가 수적으로 우세했다. 교집합에 속해있던 영애들도 빠심보다 덕심이 더 컸던지 거의 로즈쪽으로 붙었다. 승기는 시작부터 기울어있었던 셈이다.
“ 각하.”
“ 음?”
“ 산사므 영지에서 무지개 색 식물뿌리가 나왔대요.”
승리를 기념하여 케니스와 만찬을 함께했다. 요리되어 나온 풀뿌리를 보자 문득 최근에 전해들은 소식이 떠오른다. 어찌나 크기가 크고 오색찬란한지 영주가 직접 전시중이라고 하던데.
“ 보러 갈까요?”
“ 좋군.”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나는 내일 뭘 입을까 고민하며 메인요리를 한입 잘라 입에 넣었다. 창밖으로 비치는 노을이 예쁘다. 음식도 맛있었다. 그리고 남자친구도 잘생겼지.
난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여담>
“ 그러고 보니까, 저 이런 꿈을 꾼 적이 있어요.”
“ 어떤?”
“ 각하와 제가 연인이 되었는데, 슬프게도 각하의 여혐이 심해서 저와도 잘 닿을 수 없는 상태인 거예요. 꿈속에서. 그래서 서로 사랑은 하는데 스킨십은 손잡는 것 외에는 못하는…….”
“ …….”
“ 그 탓에 욕구불만에 걸린 저는 각하를 몰래 스토킹하며 매일 각하가 입었던 옷, 각하가 마신 컵, 각하가 덮은 이불 등 온갖 물건들을 수집하는……꺅! 내 목!”
“ 허무맹랑한 꿈이군.”
“ 왜 목을 물고 그래요! 자국 남겠네.”
“ 남으라고 한 거다.”
“ 꿈은 반대라더니……어휴.”
“ 그래서, 불만인가?”
“ 그럴 리가요? 우리 다음 데이트는 어두운 곳으로 갑시다.”
외전2 마침.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일주일 만이군요 'ㅁ' 하하!
잘 지내셨나요?
이렇게 외전2도 끝을 맺었습니다XD
냉미남 캐릭터는 사실 크게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케니스는 안쓰러운 여혐(ㅋㅋㅋ...)과 ㅇ..아닐거야!!!내가 저걸 조하다니?!?!!아닐ㄱ거야!!!!하는 현실부정이 귀여워서 나름 재밌게 집필했습니다. ㅎㅎ케니스 카와이..'-'...눈화랑 밥머글어 갈레?ㅎ넝담~
여기서 잠깐 살펴보는 아윈라테와 케니스라테
라테: 우리 심심한데 뽀뽀나 할까? (늬끠)
케니스: .....! (당황하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다)
라테: 우리 심심한테 뽀뽀나 할까? (늬끠)
아윈: 뽀뽀만?
라테: !
+
다음 외전은 동화패러디로, 신데렐라와 백설공주 이렇게 총 2편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일주일 뒤에 함께 올라올 거예요! 신데렐라는 연재 때 보셨던 것과 동일하니 건너뛰셔도 됩니다 >
그럼 다음주에 만나요. 안녕! >ㅃ
++
어느톡방)
C: 나 너꺼 비숏외전 보다 말았는데 마저 봐야겠다
나: ? 비숏 외전 아직 안 올렸을걸?
C: 왜 그거 외전1
나: 아ㅋㅋㅋㅋㅋ간달프?
C: 아...맞다
C: 비숏이 아니라 간달프였지
C: 둘 다 불쌍해서 헷갈렸어
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공통점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