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93화 (93/100)

00093  외전2. 케니스와 함께 춤을 (IF외전)  =========================================================================

가면은 쓰고 있었지만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목소리, 키, 체격, 머리색, 눈동자의 색까지 어딜 살펴봐도 죄다 ‘나 케니스요’하며 외치고 있었으니까. 아니 세상에! 얘가 왜 여기에 있어?

“ ……내가 샴페인에 취해서 텔레포트를 썼나? 아닌데.”

올리브 영애의 생일파티였다. 케니스가 여길 참석했다고? 그럴 리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내가 눈을 깜박였다. 직접 마주대하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케니스가? 그 케니스가? 여혐 케에니이스으가아?

“ 싸, 쌍둥이 형제?”

시신경이 받아들이는 상황을 사고가 인정하기 싫어했다. 떠오르는 희박한 가능성 하나를 내뱉었더니 상대방이 황당하다는 듯 웃는다. 비웃음인 듯 비웃음 아닌 비웃음 같은 입매의 각도에 내가 결국 저항을 그만두었다. 표정마저 케니스였다.

“ 괜찮은 것 같군.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 어떻게…….”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줄은 어떻게 알고? 또 파티엔 어쩐 일로 참석을? 머릿속에서 꼬리를 무는 의문의 끝에 문득 한 가지가 추가되었다.

“ ……저 누구게요?”

내가 나인걸 아나?

나는 손을 들어 머리를 매만졌다. 가지런하다. 가면도 만져본다. 이상 없다. 여전히 나는 클론 8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드레스도 유행 따라 무난하고 몸매에 특색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으니, 솔직히 몇 년을 본 사이라도 알아보기가 힘들 것 같았다.

“ 뜬금없군. 이름을 대답하면 되는 건가?”

“ 네? 뭐…….”

“ 라테 엑트리.”

망설임도 없이 정체가 흘러나온다. 단박에 정답을 맞히는 것에 놀라 나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어떻게 알았지?

아냐. 이렇게 쉽게 밝혀지면 재미가 없는데. 때 아닌 장난기가 불쑥 솟아서 나는 표정을 가다듬었다. 목소리도 조금 바꾼다. 가면까지 쓴 판국에 이런 걸 안 하면 섭섭하지.

“ 아닌데요.”

“ 아니라고?”

“ 네. 라테 엑트리라뇨? 처음 듣네요.”

“ 그런가? 유감이군.”

“ 아시는 분과 헷갈리셨나 봐요. 라테라는 분은 누구인가요?”

“ 너구리 이름이다.”

“ 사람이거든요!”

헉. 말렸다. 놀려먹으려다 되레 내가 놀림을 당할 줄이야. 패배감에 구두로 땅을 치자 케니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래, 웃어라 웃어. 마음껏 웃으……어라? 패자의 신세를 체감하다 불쑥 어떤 것을 깨닫는다. 쟤 전에도 저렇게 웃은 적이 있었나?

가지런한 이를 다 드러내는 케니스의 웃음이 천진난만했다. 가만 보자,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저 인간의 웃는 모습이라고는 한심해서 못 봐주겠다는 웃음, 기가 차다는 웃음, 어이가 없다는 웃음, 지금 장난하냐는 웃음, 그걸 말이라고 하냐는 웃음……뭐야! 표현만 다르지 다 비웃음이잖아!

저런 식으로 웃는 건 역시 처음이었다. 그래, 그렇다. -_-^ 같은 건 남발해도 ^0^ 이런 건 선보인 적이 없는 냉미남 캐릭터가 케니스 아니던가. 생소한 게 당연했다. 오늘을 기념비적인 날로 지정해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도 오버가 아닐지 모른다. 명명은 케니스 꺄르륵 데이.

조금 지나니 케니스는 다시 멀쩡해져있었다. 치아가 안 보인다. 다 웃은 거니?

“ 꺄르륵은 끝나셨어요?”

“ 무슨 소리지.”

“ 아니에요. 그보다 저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케니스를 알아본 건 그렇다 쳐도-케니스 같은 흑발은 귀했다-, 케니스가 나를 알아본 것은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재차 이야기하지만 내 외양은 현재 클론 8호다. 목소리나 행동으로 도중에 파악한 걸까?

“ 그냥…….”

“ 그냥?”

“ 그냥 알 수 있었다.”

“ 뭐죠.”

궁금증이 요만큼도 해소되지 않는 답변이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냥’의 의미를 파헤치려 애썼다. 보자마자 ‘저 인간은 누구다!’하고 감이 왔다는 소린가?

“ 덕분에 긴장이 풀렸군.”

“ 네?”

“ 실은 확인할 것이 있어서 왔다.”

“ ……?”

“ 라테.”

나는 또 묘한 낯설음에 사로잡혔다. 케니스의 목소리로 호칭하는 내 이름이 익숙하지 않았다. 전에도 부른 적이 있던가? 있었더라도 장담컨대 저런 어조는 아니었을 것이다. 케니스는 오늘 내게 새로운 모습을 연달아 보여주고 있었다.

“ 네가…….”

“ …….”

“ 네가 특별하다.”

어디선가 커다란 종이 생겨났다. 화려한 리본이 달린 금색 종은 금방이라도 아기천사들과 함께 맑은 소리를 울릴 것처럼 흔들리더니, 이내 나에게로 다가와 내 뒤통수를 때렸다.

뎅!

*

지나가는 제국민을 아무나 붙잡고 물어본다고 가정하자. ‘에스반데 공작각하께서 가장 잘 하시는 게 무엇일까요?’ 백이면 백 같은 대답이 나올 것이다. ‘검술이요!’

케니스가 검에 있어 불세출의 천재라는 것은 어쩌면 세 살배기도 알고 있을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가장 못하는 건 뭘까? 케니스가 못하는 것은?

전자처럼 만인이 아는 것은 아니었지만, 여기에도 답이 있었다. 그는 감정에 서툴렀다.

케니스 폰 에스반데. 그는 스스로의 감정을 지각하는 일에 미숙했다. 그것도 동류가 드물 만큼.

“ 그러니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벨린에게 손을 못 대게 됐다. 이거죠?”

그래서일 것이다. 마치 의무처럼 그를 지배했던 이벨린에 대한 감정이 씻은 듯이 사라졌을 때도, 케니스는 그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했다. 라테가 아니었다면 아마 그는 훨씬 더 시간이 지나서야 본인의 내적인 변화를 알아차렸을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그렇지 않음을 곧바로 인지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케니스는 보통보다 배는 느린 편이었다. 타인이 콕 집어서 이건 그거다! 하고 부정할 수 없도록 직구를 꽂아주지 않는 다음에야, 스스로의 힘으로 자각하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런 마당이니 이미 제 속에 똬리를 틀고 앉은 감정을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엄연히 실재하고 있었거늘 존재자체를 몰랐다. ‘어쭈, 이래도 눈치 못 챌래?’하고 묻는 듯한 직접적인 계기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 감사합니다, 각하. 덕분에 살았어요.”

산 속에서 라테를 도운 날이었다. 그는 대상의 팔을 붙잡아 그녀를 위기에서 건져 놓고는, 형언하기 힘든 표정으로 한참이나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케니스는 혈육을 제외한 모든 이성과 닿는 것을 끔찍해했다. 접촉하는 순간 기분 나쁜 소름이 올라왔으니까. 사람을 진저리치게 만드는 혐오스러운 감각이, 케니스에겐 너무도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랬어야하는데, 이상했다. 이상하게도 아무렇지 않았다. 이성을 제 손으로 직접 만졌음에도 일체의 거부감이 없었다.

‘ 왜?’

라테의 팔을 붙잡았다. 맨손이었다. 여름이라 옷이 얇아 여인의 것을 잡는다는 감촉이 손아귀에 선연했다. 그런데도 소름끼치기는커녕 싫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어째서? 케니스는 스스로에게 의문을 던지며 몇 번이고 당시의 감각을 되새겼다. 반복해서 상기해 봐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혹여 증상자체가 사라진 건 아닌가 의심해 다른 이의 손을 잡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케니스는 벌레를 움켜쥔 듯한 감각에 한 시간을 앓아누웠다. 오직 라테만이 예외였다.

‘ 왜!’

사흘쯤 되자 케니스는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 되었다. 본인은 머릿속이 복잡하고 심란해죽겠는데, 속도 모르고 자꾸 평소처럼 깔짝대는 라테가 한때는 공연히 얄밉기까지 했다. 그래서 찾아온 라테를 부러 냉랭하게 돌려보낸 적도 있었다. 그러고는 반나절 후 후회했지만.

‘ 미쳤다.’

스스로에게 맛이 갔다는 자가진단을 내린 후 케니스는 자작저를 방문했다. 라테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마음이 영 답답했다. 당사자에게 상담을 해 답을 들으면 조금 나아질까.

그리고 그는 곧 충격의 도가니탕에 발을 담근다.

“ 이벨린 문제예요?”

“ 뭐?”

첫 번째 충격이었다. 케니스는 라테의 천진한 물음에서 자신이 불과 얼마 전 이벨린의 문제로 상담을 했었다는 걸 기억해냈다. 다시 말해 듣기 전까진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벨린은 그의 뇌리에 남아있지도 않았다. 이름을 들어 떠올리고 나서도 사실 마찬가지였다. 이벨린을 신경 쓰기엔 이미 남아있는 정신머리가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기울이기에도 모자라서.

“ 마음이 가는 여인이 나타났다는 말씀이시잖아요?”

두 번째 충격은 첫 번째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마치 해일처럼 거대하게 케니스를 덮쳤다. 산중턱에서 벼락을 맞고 산채로 용암에 입욕한 것 같았다. 그는 경악했다.

“ 사랑이 찾아온 게 아닐까요?”

사랑. 사랑이란다. 대상을 만지고도 아무렇지 않았던 이유가 사랑 때문이란다. 케니스는 그야말로 뒤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아니다.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된다. 그러나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오히려 시인하는 기분이었다. 아니라고 할수록 맞는 말처럼 느껴졌다. 패닉나라 친구들이 자꾸만 케니스를 찾아와 인사했다.

“ 저……각하.”

“ 얘기해라.”

“ 혹시, 닿았는데 아무렇지 않았다는 여성이……저인가요?”

그리고 익명 뒤에 감춰두었던 사연의 주인공을 들키던 순간, 케니스는 기념비적으로 말까지 더듬은 뒤 도망쳤다. 살면서 그렇게 당황했던 적이 달리 없었다고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결국 진실과 만나고 만 케니스는 그날 잠을 설쳤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었다. 아침이 되어서도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다가 점심이 되었다. 가장 높은 곳에 떠 있던 해가 조금씩 서쪽으로 기울어질 무렵, 케니스가 결심했다.

확인하러가자.

사랑?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믿을 수도 없고 인정할 수도 없고 납득할 수도 없지만 사랑일 가능성도 있지. 그래서 그는 확인을 해보기로 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가서 상대를 다시 만나보면 방법이 떠오를 것이다. 결정하고 케니스는 자작저를 재차 방문했다.

그리고 라테가 부재중이라는 답변을 들었다. 안 돼. 결론이 어떻게 나든 오늘 확정을 내리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대상의 위치를 물었더니 올리브 백작저라는 답이 돌아왔다. 운이 좋게도 가까운 곳이었다. 금일이 올리브 백작영애가 생일을 맞이한 날이란다. 그런 건 알바 아니었다.

소란이 싫었고 여성들이 우글거리는 환경도 싫었지만 라테를 대면하기 위해서라면 어쩔 수 없었다. 케니스는 실로 비장하게 백작저로 향했다. 파티의 컨셉에 맞춰 입구에서 가면을 나눠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얼굴을 가리고도 남다른 비율이나 체격은 자연스레 남들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래도 외모를 전부 드러낸 상태보단 훨씬 나았다. 덕분에 그는 여인들에게 둘러싸이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케니스는 입장하자마자 라테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모조리 가면을 착용한 채라 생김새들이 거기서 거기였지만 살피다보면 구분할 수 있지 않겠나. 웬 영애가 다급하게 케니스에게 도움을 요청해온 것은 그 순간이었다.

“ 도와주세요!”

영애는 라테가 남자로부터 구해주었던 여인이었다. 라테의 덕으로 저는 겨우 빠져나왔지만 대신 그곳에 남은 은인이 신경 쓰였던 것이다. 도움을 청할 상대를 찾던 그녀는 마침 눈에 들어온, 가장 장신인 케니스에게 다짜고짜 달려가 호소했다. 테라스에 변태가 있다고. 다른 영애가 위험하니 부디 도와달라고.

케니스는 기사였다. 레이디가 험한 꼴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당연히 안 됐다. 비록 다른 볼일이 있다지만 일단 구해주고 나서 도로 용건을 보아야한다. 해서 그는 지체 없이 영애가 가리킨 장소로 몸을 움직였다.

문은 닫혀있었으나 커튼이 걷힌 채라 속이 훤히 보였다. 들은 대로 변태의 기운이 느껴지는 남자와, 그런 남자에게 붙들린 영애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케니스는 목격하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라테였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그도 모른다. 다만 당연한 것처럼 지각할 수 있었다. 유리문너머로 비치는 뒷모습만 보고도 그는 한눈에 라테임을 알아보았다.

“ 저 소리 지를 건데요?”

“ 질러봐.”

“ 꽤애애애애액!!!!”

확실했다.

안으로 들어선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얼른 팔을 뻗어 라테를 품에 감싸고, 감히 그녀를 건드린 후안무치한 변태새끼를 왼손으로 후려쳤다. 하마터면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아 상대를 죽일 뻔했으나, 라테의 어깨를 끌어안는 순간 마음이 풀어져 겨우 힘 조절을 할 수 있었다. 라테 덕분에 죽음을 모면했다는 것을 아마 남자는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 싸, 쌍둥이 형제인가.”

라테는 똑같았다. 하는 짓이 여전하다. 물론 사람이 하루 만에 바뀌는 것이 더 이상한 노릇이겠지만 어쨌든 그랬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라는 모습이 귀여웠다. 아, 망했다. 귀엽다니. 이젠 빼도 박도 못한다.

확인은 필요 없었다. 그건 이미 라테를 발견하자마자 철렁 내려앉던 심장으로 검증이 끝났다. 케니스는 비록 느린 인간이었지만 한번 자각을 하면 그때부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인물이었다. 더 이상 피하고 부정할 생각은 없다. 초조하고 긴장되긴 했지만 깨달은 것을 상대에게 감추지 않고 전한다.

씨앗으로 시작했던 감정에 열매가 맺혔다. 라테는 케니스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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