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2 외전2. 케니스와 함께 춤을 (IF외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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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으로 돌아온 나는 애꿎은 베개를 스무 방쯤 갈겼다. 만약 내가 타임리프를 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때리고 있는 건 베개가 아니라 응접실에 앉아있던 나 자신이었겠지.
‘ 썸녀 생겼다고 고백하신 거 아니에요?’
‘ 마음이 가는 여인이 나타났다는 말씀이시잖아요.’
‘ 사랑은 아름다운 거예요!’
“ 죽어라! 죽어! 내 입 죽어!”
오랜 시간 잠자리를 함께해온 동반자 친구가 거센 폭력에 짜부라졌다. 여러 번의 진심펀치로 체력을 소진한 나는 이내 침대로 털썩 널브러졌다. 으아아아. 생각하기 싫다. 아무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 케니스 살인충동 들었겠는데.”
천장을 눈에 담으며 내가 중얼거렸다. 응접실에서 케니스는 내 물음에 대해 ‘아, 아니다.’라는 긍정보다 더 긍정 같은 부정의 대답을 남겼다. 그리고는 바람처럼 빠르게 응접실을 벗어나 사라졌다. 아니라면서 왜 도망가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닿았는데도 아무렇지 않아 케니스에게 고뇌를 안겨준 대상이 다름 아닌 나였다니. 난 그것도 모르고 새로운 사랑이니 어쩌니 하며 연애감정타령만 주구장창 늘어놨다. 내가 케니스였다면 쌍욕을 하고 싶었을 거다. ‘닥쳐! 아니라고! 저년을 데려가 매우 쳐라!’
“ 암 쏘리. 사랑운운 취소. 완전 취소.”
짜부라진 베개에게 대신 사과와 정정을 해본다. 나중에 만나면 직접 전해줘야겠다. 나는 손을 뻗어 잡히는 베개를 품에 안은 뒤 침대를 한 바퀴 굴렀다. 360도에 반을 더 구르고 나니 천장 말고 벽이 보인다. 그나저나 진짜 이상하네?
케니스의 여혐증상이 나를 피해갔다. 이유가 뭘까? 나는 침대와 하나가 되어있는 내 왼팔을 내려다봤다. 허마그 산맥에서 구해줄 때 여길 잡아줬었지. 잠깐 스친 것도 아니고 생각해보면 꽤 오래 붙들고 있었다. 그 정도로 접촉했음에도 혐오증세가 전혀 없었다는 건 확실히 신기한 일이었다. 이벨린 외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을 텐데.
‘ 나한테 여주인공 버프가 생겼나?’
원인은 모르겠지만 계승받은 걸까? 알고 보니 내가 전승자? 확인하는 방법은 사실 간단하다. 지금 당장 길거리에 나가 아무 건달이나 붙잡고 시비를 털어보면 된다. 분노한 건달의 주먹이 내 안면에 적중하면 버프가 없는 거고, 그전에 혜성처럼 (잘생긴)누군가가 나타나 날 구해주면 버프가 전승된…….
허황한 상상을 하다 내가 고개를 저었다. 쓸데없는 실험하다 성형하게 생겼네.
-똑똑.
“ 아가씨, 저 에슐라예요. 들어갈게요.”
상념이 깨졌다. 나는 몸을 뒤집어 문을 응시했다. 에슐라가 무슨 일로? 청소할 게 남았나?
“ 드루와, 드루와.”
바깥에서 보일 리가 없는데도 난 손짓을 하며 승인했다. 곧 문이 열리고 에슐라가 총총 안으로 걸어 들어온다. 발걸음에서 묘하게 신이 난 기색이 묻어나와 내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좋은 일이라도 있는감?
“ 즐거워 보이네?”
“ 최근에 새로운 화장법을 배웠거든요! 이제 청초한 느낌을 한층 살려드릴 수 있어요.”
상기된 얼굴로 에슐라가 재잘거렸다. 화장으로 청초함을? 그거 뭔가 굉장한데? 내가 누운 채로 손을 들어 축하의 박수를 쳤다. 에슐라의 실력은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하고 있었다. 타고난 재능에 본인의 욕심이 더해진 결과인 것 같았다.
이러다 나중엔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거 아냐? 제국제일의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되어 수도의 노른자 땅에 샵을 개업한다든가? 그리고 여자 친구 및 부인의 쌩얼을 본 남자들이 에슐라에게 수많은 협박편지를…….
“ 파티장 제일의 여신으로 만들어드릴 거예요!”
“ 편지 안의 칼날을 조심해.”
“ 네?”
“ 아냐. 그보다 포부가 좋은데? 열심히 해, 파이팅!”
“ 무얼 남 일처럼 말씀하세요?”
“ 엥?”
내가 눈을 껌벅거렸다. 남 일이 아니면? 그런 날 향해 에슐라가 ‘어서 일어나셔서 장미수로 목욕부터 하셔요’라며 재촉한다. 뭐? 나? 날 꾸며준다고?
“ 왜?”
“ 잊으신 거예요? 올리브 백작저에서 열리는 파티가 벌써 내일 인걸요!”
“ 아.”
생각났다. 잠자고 있던 기억이 에슐라 덕분에 벌떡 기상해서 뛰쳐나왔다. 올리브 백작가의 차녀 프라이페느 올리브. 그러고 보니 그녀의 생일이 어느새 내일이었다. 엄마야, 언제 날짜가 그렇게 됐어?
올리브 영애는 종종 다과회 등의 모임을 열어 나와 카노를 비롯해 여러 영애들을 초대하곤 했던 인물로, 특이사항을 읊자면 꽤나 긴 뒤끝의 소유자였다. 주목받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성미에, 한번 눈 밖에 난 이는 끝까지 괴롭히는데다, 든든한 방패막이인 빵빵한 집안까지 갖추었으니 그야말로 요주의 대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나도 괜히 밉보이지 않으려 미리 선물을 준비해놓은 차였다.
“ 얼른요! 지금 목욕을 해두어야 내일 피부가 매끈해진단 말이에요.”
“ 으응. 알았어.”
“ 후후, 파티장 최고의 여신~룰루!”
“ 최고는 말고 중간정도의 여신으로 만들어줄래?”
올리브 영애가 주인공일 땐 여러모로 눈에 띄지 않는 편이 좋다. 나는 에슐라에게 솜씨를 좀 조절해줄 것을 부탁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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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페느 올리브는 독특한 걸 좋아한다. 그건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기 생일날에 가면무도회를 열거라고는 솔직히 생각도 못했다.
“ 노란색 가면이라.”
입구에서부터 건네받아 얼굴에 쓴 것을 매만지며 내가 중얼거렸다. 동그란 모양의 가면사이로 드러나는 이목구비라고는 눈과 입뿐이었다. 아, 귀도 있네. 아무튼 그 외에는 얼굴형마저 빈틈없이 가리는 디자인이었으니, 착용하는 순간 쌍둥이로 변해버리는 것을 누구도 피할 수 없었다. 이미 파티장 안에는 색깔만 다른 클론들이 우글거리는 중이었다.
‘ 나도 그렇고.’
에슐라가 회심의 매직핸드로 다듬어준 내 머리는 평소의 망나니스러움을 숨기고 차분함을 가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평범하여 남들과 딱히 구분되지 않는다. 나와 비슷한 금발을 7명쯤 발견한 내가 스스로에게 ‘클론 8호’라는 별명을 붙여주곤 홀 안을 거닐었다. 목마른데 마실 건 어디쯤 있으려나?
‘ 헉!’
음료를 찾아 시야를 옮기다 내가 화들짝 놀랐다. 풍성하고 화려한 붉은 드레스, 금색문양이 그려진 새하얀 가면. 그리고…….
‘ 수, 수박!’
사람의 신체에 과일이 있었다.
가면을 착용한 채로 영애가 깔깔거리며 웃었다. 회색이 약간 섞인 탁한 연녹색 머리카락이 찰랑거린다. 난 그걸 보며 올리브 영애의 머리색이 뭐였던가를 떠올렸다. 아, 과연.
‘ 굳이 가면무도회를 연 이유가 있었군!’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을 가리니 다른 때보다 한층 몸매에 시선이 갔다. 평소엔 주의 깊게 살피지 않아서 몰랐는데 올리브 영애는 남다른 승리자였다. 난 그녀의 소유물 목록에 뒤끝 외에 한 가지를 더 추가시기로 했다.
“ 생일 축하드려요, 올리브 영애.”
“ 어머! 어떻게 알아보셨나요? 호호호!”
발견한 김에 가서 인사를 건넸다. 영애는 매우 기뻐보였다.
축하인사를 전하고 나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선물은 진작 백작저로 따로 배달시켰다. 방명록에 이름을 적고 이만 돌아간대도 큰 무례가 되는 건 아니었지만, 기왕 여기까지 온 것 한두 시간 정도는 머물렀다 가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그 편이 보다 예의에 걸맞았으니까. 시간을 죽이기로 마음먹고 나는 재차 마실 걸 찾아 주변을 누볐다.
“ 소식 들으셨나요? 피쉬헌터 영애가 글쎄…….”
“ 공개적으로 여럿이 결투를…….”
회장은 소란스러웠다. 단순히 사람이 많아서이기도 했지만, 오고가는 가십들의 수위가 평소보다 한층 높은 걸로 보아 익명성의 힘이 작용중인 모양이었다. 더러는 이참에 가면 뒤에 숨어 본인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고 있었다.
들려오는 이야기들은 팔 할이 치정문제였다. 후, 사랑이란……노바카사 넌 임마 누군진 모르겠지만 바람 좀 그만 펴라.
“ 그랬더니 그이가 갑자기 절 벽으로 밀치며…….”
“ 저는 절벽으로 밀쳤어요.”
여러모로 과격한 수위의 대화들을 뒤로한 채 내가 샴페인을 집어 들었다. 아는 사람을 만나면 안부나 물을까했더니, 그 아는 사람 찾기가 월리를 찾아라보다 어려워 보였다. 나는 과자박스에 그려진 숨은그림찾기도 실패하는 사람이다. 쌍둥이들 사이에서 지인 찾기? 절레절레. 나라는 닝겐의 능력으론 무리데스요.
고독을 씹는 쪽으로 결정내린 내가 손에 든 것을 한 모금 비웠다. 사람 수가 많아 공기가 무거운가, 오래있지도 않았는데 회장이 조금 답답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럴 땐 테라스에서 바람이나 잠깐 쐬면 딱인데.
운이 좋다면 아직 선점되지 않은 테라스가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시선을 이리저리 옮겼다. 커튼이 쳐져있지 않은 곳이 즉 비어있는…….
‘ 응?’
이동시키던 눈길을 멈췄다. 방금 뭘 본 것 같은데. 그러니까……누군가가 테라스 안으로 막 끌려들어가지 않았나?
‘ 성범죄!?’
들고 있던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잘못 본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찰나였지만 분명 웬 영애가 남자에게 붙잡혀 억지로 테라스의 유리문 너머로 사라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무래도 착각인 것 같진 않았다. 해당 장면이 범죄의 순간이었다는 것에 무게를 실은 내가 눈을 부릅떴다. 맙소사, 이런데서 성폭력을?
경악을 뒤로하고 얼른 드레스자락부터 그러모아 쥔다. 일단 가보자. 오해인지 아닌지는 여기가 아니라 현장에 가서 판단해도 될 문제였다. 만약 연인사이의 다소 거친 플레이를 오해한 거라면, 그땐 미안하다 사과하고 도로 나오면 될 일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면? ……레이디, 조금만 기다려요!
“ …싫……누가 좀 도와…….”
문틈으로 미약하게 흘러나오는 소리에 눈보다 귀가 먼저 사실을 확인했다. 역할놀이에 심취중인 것이 아니라면 저건 분명 거부의사 낙낙한 저항이렷다. 망설임 없이 문을 밀고 들어가면서 내가 시야를 가리는 커튼도 확 옆으로 제쳤다. 예상한 광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범죄 맞네!
“ 안녕하세요!”
“ 흐흐, 반항하는 것도 귀엽……뭐, 뭐야?”
“ 지나가던 테라스성애자인데요, 제가 눈에 보이는 테라스마다 족족 들어가서 살펴보지 않으면 죽는 병에 걸려서요. 구경 좀 하러 왔답니다!”
“ 무슨…….”
“ 그럴 리 없겠지만 혹시 방해한 거라면 말씀해 주시겠어요?”
남자의 품에 갇혀있던 여자가 이쪽을 응시한다. 가면 탓에 표정은 볼 수 없었지만, 남자가 당황한 사이 후다닥 대상을 밀치고 빠져나오는 것에서 어련히 피해자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서 도망가라며 그녀를 홀 안으로 내보냈다. 하려던 짓을 방해받은 것이 황당한지 남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 허!”
“ 다시 보니 딱히 구경할 만한 게 없네요. 그럼 이만!”
“ 어딜 가?”
성큼성큼 다가온 남자가 잽싸게 내 손목을 잡아챘다. 꺅! 성범죄자가 내게 접촉을! 당장 날카로운 니킥으로 대상의 가랑이 사이를 가격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일단 참았다. 모든 일에는 순서라는 게 있는 법. 난 우선 침착히 교과서적으로 대응했다.
“ 안 돼요! 싫어요!”
“ 뭐라는 거야?”
효과는 없었다. 그야 그렇겠지만.
손목을 붙든 채로 남자가 나를 질질 구석으로 이끌었다. 남자치곤 체구가 왜소한 편이었는데도 내 몸을 어렵지 않게 끌고 가는 것에서 여실한 힘의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오 시밤, 이거 기분 더러운데? 걍 스크롤을 찢어서 날려버리고 튈까?
“ 저기요.”
“ 왜?”
“ 뭐하시려고요?”
“ 뭘 하긴, 네가 방해한 일을 널 데리고 다시 시작해야지.”
“ 성범죄를요?”
“ 표현이 별로네. 사랑을 나누는 행위겠지.”
뻔뻔한 대답에 내가 쯧쯧, 혀를 찼다. 사랑 좋아하시네. 혼자만의 사랑은 니 오른손하고나 나누세요 이 변태새끼야. 말이 통하지 않는 이 븅신은 암만 봐도 고자킥 또는 스크롤 응징이 딱인 것 같았지만, 관대한-동시에 남의 생일파티에 손님으로 와있는 처지인-나는 마지막 기회를 주기로 했다. 네가 생각이 있다면 여기서 얌전히 그만 두는 게 좋을 거란다.
“ 저 소리 지를 건데요?”
“ 질러봐.”
“ 꽤애애애애액!!!!”
“ 미친!”
태연하던 남자의 태도가 급변했다. 기껏해야 ‘꺄악’정도를 예상했겠지만, 틀렸다 이놈아! 뱃심 가득한 우렁찬 비명에 남자가 식겁하더니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는다. 이놈 보게?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틀렸다싶어서 포기하고 도망가면 놔주려했더니 자기무덤을 자기가 판다. 이럼 어쩔 수 없지. 나는 상큼하게 낭심포기킥부터 날려주기로 했다.
준비하시고, 쏘세요!
훽!
“ 어라?”
내 다리가 애꿎은 허공을 갈랐다. 명중은커녕 스치지도 못한 헛발질이었다. 조준을 잘못해서? 아니다. 누군가가 갑자기 내 어깨를 감싸고 뒤로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섬세하면서도 주저 없는 단호한 손길로 그렇게 나를 남자로부터 떼어놓은 누군가는, 직후 상대를 무자비하게 후려쳤다.
퍽!
“ 쿠억!”
우당탕!
옆으로 굴러 반대편 난간까지 가 처박히는 소리가 요란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 눈을 깜박였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사태파악에 시간이 걸렸다. 이게, 그러니까…….
‘ 웬 모르는 사람이 나타나 변태를 한방에 퇴치했어?’
헐?
에엥? 아니 잠깐, 그럼 내 킥은? 회심의 성별전환 발차기는?
“ ……괜찮나?”
요상한 상실감으로 혼을 빼놓고 있으려니 머리위에서 안위를 묻는 목소리가 들렸다. 익숙한 음색이라는 감상을 받는 순간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변태에게 필살 킥을 성공시키지 못한 아쉬움을 고이 털어 날려버리고,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상대의 팔을 치웠다. 순순히 밀려나는 것과 동시에 상대가 내게서 한 발짝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난 묘한 기분으로 뒤를 돌았다. 아는 목소리였다.
“ 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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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자 올리브영애...ㅇㅅ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