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1 외전2. 케니스와 함께 춤을 (IF외전) =========================================================================
케니스가 이상하다.
“ 애가 까칠해졌어.”
나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현상을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 생각이 말로 나올 만큼 케니스의 상태는 정말로 요상했다.
케니스는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나를 피해 다니고 있었다. 전처럼 내게 살기를 뿜는다거나 꺼지라는 눈빛을 발사한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지만, 확실히 티가 날 만큼 나와 마주치길 꺼려했다. 우연하게라도 얼굴을 볼라치면 화들짝 놀라 도망가는 것이 순간 쫓아가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런다고 잡을 수야 없겠지만.
“ 왜 갑자기 내외야?”
볼에 절로 바람이 들어간다. 나는 투덜거렸다. 케니스는 기껏 공작저까지 찾아간 나를 들여보내주지도 않았다. 연유도 알려주지 않고 시종을 시켜 돌아가라고만 통보하니 허탈하고 황당한 노릇이었다. 아니 왜? 이렇게 되면 꽤나 가까운 친구사이가 되었다고 생각한 나만 무안해진다. 열매도 따다주고, 같이 웃고 떠들고……그건 아닌가? 나만 웃었나? 아무튼 위험에서 구해주기까지 했으면서.
“ 왕으앙! 사춘기 아들도 아니고! 뭐여!”
“ 무슨 일이라도 있으세요?”
침구를 정리하던 에슐라가 내 발작에 반응을 보였다. 난 의자에 앉은 채로 발을 파닥거리다 말고 그녀를 응시했다. 들고 있던 베개를 마저 턴 에슐라가 이쪽으로 가까워진다.
“ 저도 말씀해주세요.”
호기심 많은 에슐라의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그래, 청자도 생긴 김에 썰을 풀고 의견을 좀 들어볼까. 나는 익명을 사용해 돌아가는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길지 않은 이야기를 다 들은 에슐라가 잠시 고민하듯 턱을 매만졌다.
“ 음…….”
“ 이유를 알 것 같아?”
“ 아가씨를 도와준 뒤부터 그런다고 하셨죠?”
“ 응. 참고로 내가 인사를 안 하고 튄 것도 아니야.”
“ 아이 참, 전혀 모르겠는데요? 사람의 심리란 역시 어렵네요.”
수확은 없었다. 나는 시무룩해졌다. 초록색 검색창이 다시금 그리워진다. ‘친구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절 피해요. 내공100 겁니다.’
“ 원인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행동하는 의미는…….”
“ 의미는?”
“ 역시 절교하자는 뜻이겠죠?”
“ 끄앙! 아냐! 그럴 리 없어! 너 내공냠냠으로 신고!”
“ 무슨 소리세요.”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괜히 애꿎은 에슐라에게 징징거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똑똑 문을 두드렸다. 노크소리에 이어 용건이 전해진다.
“ 아가씨, 손님이 오셨습니다.”
“ 어라? 릴리가 아니네?”
내게 방문객을 알려주는 일은 대체로 릴리의 몫이었다. 평소와는 다른 굵은 목소리에 의아해하며 에슐라가 문을 열자, 바깥에는 그녀대신 하인인 이란다가 서있었다. 그러게, 오늘은 웬일로?
“ 릴리는 바쁜가봐?”
“ 아, 릴리는…….”
응접실로 내려갈 준비를 하며 내가 던지듯 물었다.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 지나가는 말로 꺼낸 질문이었는데 진지하게 돌아온 답변이 충격적이다.
“ 손님의 얼굴을 보곤 쓰러지는 바람에.”
“ 엥?”
뭐라?
“ 쓰러져?”
“ 조심하셔야합니다.”
“ ?!”
얼굴에서 뭘 뿜고 다니는 거야?
그리고 나는 곧 릴리를 쓰러뜨렸다는 방문객의 정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응접실 한가운데에 빛이 있었다.
“ 억! 샤이닝!”
“ ……왔으면 앉도록.”
생김새로 소녀를 쓰러뜨린다는 건 참 허무맹랑한 이야기처럼 들린다. 하지만 케니스가 출동한다면 어떨까? 케! 니! 스!
“ 어쩐 일이세요? 각하.”
나는 맞은편 자리에 착석하며 상대를 눈에 담았다. 나를 찾아왔다는 손님의 정체는 다름 아닌 케니스였다. 언제는 집중해서 피해 다녀놓고는 꽤나 뜬금없는 방문이라, 난 다소 의아한 기분으로 대상을 살폈다. 왜 온 거니? 그리고 기분 탓인가? 살짝 수척해진 것도 같은데.
“ 아니, 근데 이럴 거면 제가 방문했을 땐 왜 꺼지라고 한 거죠!”
“ 꺼지라는 말까진 하지 않았다.”
“ 받은 느낌은 비슷했어요. 아무튼 진짜 웬일이세요?”
케니스의 용건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찾아온 연유를 꺼내는 대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나는 굳이 그 정적을 깨지 않으며 계속해서 관찰하기를 이어나갔다. 자세히 보니 턱선이 약간 더 날카로워 진 것도 같고……. 어라, 정말 수척해졌어?
“ ……상담할 게 있다.”
한참 만에 다시 열린 케니스의 입에서는 몹시 익숙한 용무가 흘러나왔다. 저거 들어봤는데? 그러고 보니 전에 지금과 아주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던 적이 있었다. 난 기억을 더듬어 응수했다.
“ 이벨린 문제예요?”
“ 뭐?”
케니스의 반문은 빨랐다. 그는 대체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들어 올리더니 이내 돌연 충격에 빠진 얼굴을 했다. 갑자기 혼자 충격? 또 뭐에 저러는 거야? 케니스의 사고흐름이 어떤 상태인 건지 도통 추측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모로 기울인 뒤 다시 입을 열었다.
“ 먼젓번에 그 주제로 상담하셨잖아요. 저는 또 그때의 연장선인가해서.”
“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전혀 달라.’ 덧붙이며 케니스는 두 번이나 부정했다. 그래? 이벨린이 아니면 뭘까. 내외 중이던 나를 찾아올 정도면 어지간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무슨 주제이길래 굳이 나한테……잠깐. 설마 절교하자고? 친구로 좀 지내고보니 느껴지는 이점이 마이너스 무한대 수준이라 없던 관계로 무르려고? ‘너랑 친구인 거 짱시룸’ 선언하려고? 헉! 잠시만, 안 돼! 내 권력자 친구!
……아니지. 생각해보니 그럴 리 없었다. 정말 그런 볼일이라면 일부러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영영 하던 대로 날 무시하거나 통보를 주더라도 편지를 이용했겠지. 나는 머릿속의 혼란을 정리하고 눈을 들었다. 괜히 망상 폭주시키지 말고 그냥 물어보자.
“ 상담하실 내용이 뭔데요?”
“ ……내가, 이성에게 거부증세를 보인다는 걸 기억하나?”
여혐 케니스가 당연한 이야길 했다. 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물론이죠! 제가 그걸로 산에서 각하를 협박하기도 했었잖아요.”
앗, 쓸데없는 말을 꺼냈나. 케니스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내 입 반성해…….
“ 죄송. 계속 말씀해주세요.”
“ 그 증세가 이상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 네?”
“ 특정한 이성과 접촉했는데, 아무렇지 않았었단 얘기다.”
“ 네에?”
뭐라구요! 내가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하마터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설 뻔했다. 제어가 되지 않는 표정을 겨우 수습한 내가 속사포처럼 질문을 쏟아냈다.
“ 언제? 어디서요? 누구한테요? 누구? 누군데요?”
“ 호들갑떨지 마라.”
“ 설마 어머니는 아니시죠?”
“ 나를 멍청이로 생각하는 건가?”
“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 근데 정말 세상에!”
나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두 손을 교차해 입을 가렸다. 이럴 수가, 여혐 케니스에게 광명이!
“ 축하드립니다.”
“ 무슨 말이지?”
“ 방금 썸녀 생겼다고 고백하신 거 아니에요?”
“ 알아듣게 얘기해라.”
“ 앗, 놀라서 단어 여과를 깜박했네. 그러니까, 마음이 가는 여인이 나타났다는 말씀이시잖아요?”
그리고 나는 직후 내 발언에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심각하게 되짚어봐야 했다. 케니스가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충격 받은 표정을 했기 때문이다. 마치 거대한 충격의 쓰나미가 그를 덮친 것 같았다. 눈도 깜박이지 않고 굳어있던 케니스가 쥐어짜듯 말을 꺼냈다.
“ ……마음이 가는……여인?”
“ 닿았는데 아무렇지 않으셨다면서요. 이벨린 때도 그랬으니까……새로운 사랑이 찾아온 게 아닐까요?”
“ 사랑?”
케니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당장 사생팬 부대가 쫓아온대도 저렇게까지 낯이 변할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한순간에 핏기가 사라진 케니스의 얼굴을 보며 덩달아 당황했다. 왜, 왜 저래? 그렇게나 충격적인가? 아니 왜?
말하는 걸로 봐서 케니스는 최근에 우연이든 어떻게든 누군가를 만졌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여성이며, 접촉하던 순간 있었어야 할 거부반응-소름이 끼친다든지 혐오감이 든다든지-이 나타나지 않았다. 여혐증상이 그녀를 피해갔다는 소리. 그 여자가 이벨린으로부터 여주인공 버프를 계승받은 게 아니고서야 케니스에게 봄날이 찾아왔다는 가정이 가장 그럴듯했다. 보통 왜, 여타 만화나 소설에서도 이성혐오는 사랑으로 극복하던데?
“ 저기……각하, 혹시 그 여성분이 유부년가요?”
고개를 젓는다.
“ 아니면 너무할 정도로 어리다든가?”
또 고개를 젓는다.
“ 죽고 못 사는 연인이 있다든가? 아니면 그냥 남자친구라도?”
잠깐 멈칫하는가싶더니 마찬가지로 고개를 젓는다.
뭐야! 그럼 뭐! 뭐가 문제야?
“ 눈이 세 개예요?”
“ 장난하나?”
“ 근데 왜 그렇게 질색하세요.”
아무리 봐도 케니스는 지금 온몸으로 상황을 거부하는 중이었다. 인정하기 싫어서 막무가내로 도리도리만 반복하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제가 털어놓은 사정이 정말로 연애감정과 한 톨의 관련도 없다면 내 말에 그렇게 벼락 맞은 표정을 짓지도 않았을 것이다. 지도 마음 한 구석에선 짚이는 게 있으니까 그런 거 아녀?
“ 현실도피는 좋은 게 아닙니다. 직시하세요!”
“ 믿을 수 없다.”
“ 믿을만한 일만 일어났다면 세상 살기 참 편했겠죠.”
“ 그럴 리 없다. 말도 안 돼.”
“ 사랑은 아름다운 거예요. 각하의 여혐치료에도 도움이 될거라구요.”
케니스의 표정이 괴상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이쯤에서 ‘사랑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당신이 불쌍해요!’하는 웨딩X치의 표절대사를 날려 줘야하나 고민했다. 고심하는 사이 케니스가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한숨을 내쉰다. 가려진 얼굴의 면적이나 손목의 각도 같은 것이 완벽해서 난 순간이나마 할 말을 잃었다. 쟤는 저런 게 참 잘 어울려.
“ 각하, 사족이지만 오늘따라 더 잘생기셨네요.”
감상하다가 떠오르는 것을 바로 뱉었다. 수척해졌다고 느꼈는데 그 탓에 퇴폐미가 더해진 건가? 어쩐지 평소보다 외모가 한층 치명적이다. 저러니 릴리가 쓰러지지. 나도 면역이 없었더라면 호흡곤란정도는 왔겠는데.
“ ……헛소리.”
“ 하긴, 지겨우시죠? 원래도 잘생겼다고는 늘 생각했는데 오늘따라 유독 빛이 나서…….”
“ 그만해라.”
어라? 찰나 잘못 봤나싶어 내가 눈을 깜박거렸다. 깔끔하게 무시당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케니스는 동요하고 있었다. 방금 동공 흔들렸지? 표정도 잠깐 변했던 거 같은데? 어머 웬일이래.
“ 설마 쑥스러우세요?”
“ 죽고 싶나?”
“ 이젠 그렇게 말씀하셔도 안 쫄거든요.”
실컷 구해줘 놓고 이제 와서 그래봐야. 나는 케니스가 눈 깜짝할 새 날아와 날 붙잡아줬던 순간을 상기하며 샐쭉 웃었다. 그래, 며칠 피하긴 했지만 이렇게 찾아와 고민상담까지 하고, 역시 나와 케니스간의 우정은 참으로 돈독…….
“ …….”
갑자기 머릿속에서 파도가 쳤다. 해일이었다. 무시무시한 높이로 몰려와서는 철썩! 큰소리로 뇌 언저리를 강타한다. 나는 순간 숨 쉬는 건 물론이고 눈을 깜박이는 것도 잊었다. 혜성처럼 떠오른 깨달음 하나가 나를 돌로 만들었다.
케니스는 나를 구해줬다. 구해줄 때 팔을 잡았다. 그 후로 부자연스럽게 날 피해 다니더니, 며칠이 지나 찾아와 상담을 했다. 누구랑 접촉했는데 아무렇지 않아서 당황스럽다고. 사랑인 것 같다고 해주니 인정하기 싫어서 몸부림을 쳤다.
그러더니 외모칭찬에 답지 않게 동요를.
“ ……!”
설마! 아니겠지! 표정이 관리되지 않는다. 눈동자가 갈 곳을 잃었다. 차마 보던 전방을 응시하지 못하고 시선이 요란하게도 이동했다. 한 바퀴를 돌고 정착한 곳은 결국 다시 케니스였다. 잠자코 이쪽을 바라보고만 있는 상대에게 난 겨우겨우 입을 열었다.
“ 저……각하.”
“ 뭐지?”
“ 기분나빠하지 마시고 들어주세요. 그냥 추측인데요, 그러니까.”
“ 얘기해라.”
“ 혹시, 닿았는데 아무렇지 않았다는 여성이……저인가요……?”
쨍. 효과음이 들린 것 같았다. 케니스가 얼음이 되었다. 냉미남 포커페이스 남주인공이라는 설정이 무색할 만큼 적나라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나는 입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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