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외전2. 케니스와 함께 춤을 (IF외전) =========================================================================
“ 그리고 만약 범인이 귀족이면, 치안대에서 정말로 잡아들여주겠어요?”
나는 날 같잖게 바라보는 케니스의 시선을 바꾸기 위해 조금 더 현실적인 이야길 꺼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가해자가 귀족이고 피해자가 평민일 때, 귀족에게 처벌이 내려질 거란 생각은 이상주의자도 하지 않는다. 그건 그냥 꿈이었다.
이번 사태에서 겉으로 드러난 피해자는 부크였다. 신분을 숨겨야 하는 ‘로즈’는 나설 수 없었다. 그건 동시에 내가 지나치게 활동적으로 범인을 잡겠다 들쑤실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 협조 좀 해주세요. 친구잖아요! 멋진 의리, 눈부신 우정!”
혈서를 통해 로즈에게 전해진 요구를 들었을 때, 난 자연스럽게 케니스를 먼저 떠올렸다. 빼어난 실력의 기사. 몬스터 토벌. 외모에 대한 언급은 없었지만 어차피 주인공들의 휘황한 미모는 비모르 소설의 기본 패시브였으니 굳이 쓰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물론 잘생기고 실력이 빼어난데다 몬스터토벌에서도 활약한 적이 있는 기사는 케니스 외에도 많을……아닌가? 잘생김에서 탈락인가? 아무튼 완전히 다른 인물이거나 가상의 캐릭터일 수도 있었지만, 그래도 해당 조건에 케니스가 전부 부합한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비모르의 독자라면 높은 확률로 여성일 것이며, 너구리를 독으로 중독 시켜 약품처리까지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재력이나 인맥을 소유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해 시체와 혈서를 상대에게 배달시키는 광적인 정신머리까지 갖추었으니, 이거 나열하면 나열할수록 케니스의 사생팬과 교집합이 보이는 것이다.
나는 케니스에게 비모르라는 주제만 쏙 빼고 나머지를 이야기했다. 대략 상대가 이런 짓을 했고, 나도 죽인다는 협박을 받았지만 사정이 있어 피해자로 나설 수 없고, 아무래도 범인 하는 짓이 님 사생이랑 비슷하고, 그러니까 도와주셈.
“ 후, 알겠다.”
남주인공처럼 한숨을 쉰 케니스가 마침내 고대하던 대답을 뱉었다. 끄아! 야호! 정석적인 한숨소리마저 멋있어 보여!
“ 그럼 알려주시는 거죠?”
“ 한 가지 묻지. 내가 짚이는 후보를 이야기해주면 어떻게 할 셈인가?”
“ 가서 만나볼 거예요.”
“ 그리고?”
“ 범인이 맞는지 떠봐야죠. 저 사람 살살 긁는 거 잘해요.”
“ 알만하군.”
케니스의 입가가 살짝 비틀렸다. 띠꺼움이 드러나는 낯을 보아하니 과거의 추억 따위를 상기 중인 모양이었다. 어머, 얘! 그런 거 떠올리지 마, 지지!
“ 내일 토벌 일정이 있다. 알고 있나?”
“ 아뇨?”
뜬금없이 케니스는 본인의 스케쥴을 꺼냈다. 말이 이어진다.
“ 나를 포함해 몇 명만이 움직이는 소규모 토벌이다. 위치는 허마그 산맥, 대상은 몬스터지.”
“ 고생하시겠네요.”
“ 따라오도록.”
“ 네?”
잘 못들었습니다? 멀뚱히 쳐다보다 귀를 후비려고 손을 드는 순간, 설명이 뒤따랐다.
“ 허마그 산맥과 붙어있는 안트기 영지에 네가 찾는 가장 유력한 후보가 있다. 토벌을 진행하며 이틀정도 머무를 테니 네겐 최적의 기회이지 않나?”
“ 각하.”
“ 말해라.”
“ 칭찬의 박수를! 짝짝짝! 사랑의 박수를! 짝짝짝!”
“ 이만 꺼지도록.”
*
안트기 영지는 이름처럼 특이할 것 없는 무난한 도시였다. 굳이 꼽자면 험악하기로 유명한 허마그 산맥과 인접해 있다는 정도가 특색일 것이다. 영주성도, 영주성에서 헐레벌떡 뛰어나온 영주도 표본처럼 평범했다.
영주인 피엉버므 자작은 토벌대의 행차를 온몸으로 기뻐하며 우릴 머무를 곳으로 안내해주었다. 케니스가 이야기했던 ‘유력한 후보’는 영주의 첫째 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외출중이라 바로 만나볼 순 없었다.
토벌은 시간을 지체할 것 없이 곧바로 시작되었다. 짐을 풀자마자 출발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잠깐 고민을 했다. 따라가서 구경할까? 아니면 여기 남아서 피엉버므 영애가 돌아오기를 기다릴까? 사실 답은 정해져있었다. 몬스터 토벌 과정이라니, 난 솔직히 그런 걸 관람하는 건 별로…….
“ 가로로 썰 거예요, 세로로 썰 거예요?”
내 마음의 별로.
“ 질문이 괴악하군.”
나는 출정에 냉큼 따라붙었다. 케니스는 조금 못마땅한 기색이었지만 제지하진 않았다. 산세가 험한 허마그 산맥은 어느 지점부터는 말을 몰기가 어려워, 난 토벌대와 함께 나란히 걷는 중이었다.
가까이서 몬스터의 죽음을 관찰할 자신은 없지만, 멀리서 본다면 괜찮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곳에선 몬스터의 피가 초록색이라는 게 한몫했다. 빨간색은 힘들지만 초록색이라면 오케이!
“ 참, 그리고 저 여차하면 도망칠 수단도 있거든요.”
“ 그래서.”
“ 위기에 처했을 때 달려오지 않아도 괜찮단 말씀!”
“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 그래도 유언은 집에 전해주세요.”
“ 도망칠 수단이 있다더니?”
실없는 대화를 나누며 산길을 꾸준히 걸었다. 질답으로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허마그 산맥에 주로 등장하는 몬스터는 트롤이라고 한다. 오호, 트롤! 왠지 오크보다 세 보이는 이름인데? 실제로 그럴까?
상상 속의 링 위에서 오크와 트롤에게 서든 매치를 지켜볼 즈음이었다. 갑자기 발을 멈춘 케니스가 말했다.
“ 그만. 다들 여기서 조를 나눈다.”
“ …….”
“ 두 명씩 짝을 짓지. 각자 옆 사람과 조를 이루도록.”
토벌에 동원된 기사들은 총 일곱이었다. 나를 포함해야 짝수가 된다. 우렁차게 대답한 기사들이 일사분란하게 둘씩 나뉘는 것을 보며 내가 입을 열었다.
“ 각하 옆 사람은 저네요?”
“ 난 예외다.”
대꾸는 그렇게 했지만 나는 무사히 케니스와 한 조가 되었다. 허헛, 이 흥헤롱 자식.
“ 각 조마다 스무 마리씩을 베고 다시 이곳으로 모인다. 시간은 해가 지기 전까지. 가능한가?”
“ 맡겨주십시오!”
명령을 받은 세 조가 저마다 총알 같이 자리를 떠났다. 있던 장소에 덩그러니 남은 것은 나와 케니스 뿐이었다. 난 순식간에 인적이 사라진 주변을 둘러보다 내 짝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짝지야.”
“ 죽고 싶나?”
회심의 호칭은 빠르게 기각 당했다.
“ 각하, 어서 몬스터 잡으러 가시죠.”
“ 급할 것 없다.”
“ 내 호기심은 급한데. 우리 기심이 쨔응도 챙겨주세요!”
“ 시끄럽군.”
“ 맞다, 제가 몇 마리를 이쪽으로 유인해올까요?”
케니스가 내 말에 눈썹을 쓱 들어올렸다. ‘무슨 수로?’ 표정위로 드러난 물음이 읽힌다. 나는 당당히 응수했다.
“ 몬스터들도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열한 습성이 있을 것이라 사료되옵니다. 눈앞에서 알짱거리다보면 알아서 절 쫓아오지 않을까요?”
자랑은 아니지만 나의 만만력-남에게 만만히 보이는 능력-은 누구한테도 지지 않는다. 약해보이는 외양으로 대상의 어그로를 끌겠다 주장하는 내게 케니스가 짧은 웃음을 던졌다. 비웃음으로 추정된다.
“ 애 쓰는군.”
“ 알면 좀 함께해주시죠.”
어딘지 귀찮음마저 엿보이는 케니스를 적극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이 양반이 답지 않게 왜 이리 빼고 그래! 전장의 검은 사신이란 명성이 울겠다! 난 소극적인 사신을 뒤에 두고 혼자 척척 앞으로 나아갔다. 에라, 네가 안 간다면 나 혼자 가겠다.
“ 어딜 가지?”
“ 몬스터 어그로 끌러요.”
“ 그냥 하는 말이 아니었나.”
“ 궁금하단 말이에요. 애초에 구경할 목적으로 따라온 거고.”
“ ……산세가 험하다.”
“ 어머.”
그거 설마 걱정? 웬일인가 싶어 걷다 말고 돌아봤더니 눈에 들어오는 케니스의 표정이 가관이었다. 본인의 발언에 본인이 충격 받은 모양새다. 감히 나라는 인간에게 걱정의 말을 던진 스스로의 입을 벌하고 싶어 하는듯한 기색이라, 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거 친구사이에 상대의 안위가 염려될 수도 있지, 유난은.
헛기침을 한 케니스가 말을 바꿨다.
“ 유언은 원하는 대로 전달해주겠다.”
“ 상냥하시네요.”
그새 거리가 꽤 벌어져 이젠 대꾸하려면 목청을 높여야했다. 대답을 던져주고 난 도로 시선을 회수했다. 전방에 비치는 길이 구불구불하다.
잠깐, 이거 막 가다간 길 잃는 거 아냐? 빵조각이라도 떨어뜨려야 하나?
“ 각하, 혹시 빵 있어요?”
“ 배가 고픈가?”
난 화들짝 놀랐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대꾸가 바로 지척에서 들렸기 때문이었다. 목소리를 따라 나는 시야를 옮겼다. 저만치 있던 놈이 어느새 내 옆에.
“ 언제 오셨어요.”
“ …….”
“ 아무튼 배가 고픈 건 아니고, 다만 명작동화의 지혜를 차용해볼까 해서…….”
“ 저쪽에 식용이 가능한 열매가 있군.”
“ 배고픈 거 아니래도?”
요? 뒤에 소심한 존댓말 어미를 붙여 항변하면서도 나는 케니스가 가리키는 곳을 따라 충실히 고개를 돌렸다. 눈길을 주니 웬 나무가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 열린 빨간색 열매. 범인의 것인 내 시력으로도 열매의 탐스러운 모양이 또렷이 보이는 걸 보아 거리는 딱히 멀지 않았다. 그러나,
“ 높잖아요.”
높았다.
나무는 둘레가 넓고 길이가 긴 거목이었다. 아주 불쑥 솟아서 가지가 있는 부분은 가까이서 쳐다보려면 고개를 한참 들어야 할 정도였다. 아니 야, 저 위에 있는 게 식용이면 뭐 어쩌라고.
“ 설마 제가 저걸 따다 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하시는 건 아니죠?”
“ 못하나?”
“ 저 순혈 사람이에요. 원숭이 피 안 섞였습니다.”
“ 인간은 때로 허기를 면하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해내곤 하지.”
“ 그건 사흘쯤 굶었을 때 얘기 아닐까요?”
삼일을 내리 물만 마신 상태라면 나무타기를 시도해봤을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은 아니었다. 애초에 배도 안 고파!
“ 나무를 타는 묘기를 보고 싶으신 거라면 저보단 다람쥐를 추천 드릴게요. 그리고 누차 말씀드리지만 저 하나도 배 안 고프…….”
꼬르륵.
“ ……!”
난 그대로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진부한 타이밍에 믿을 수 없는 소리가 울렸다. 아, 아냐. 그럴 리가. 분명 아닌데? 뭐야 내 배!
“ 흐음. 그럼 방금 들린 건 뭐지?”
“ 이, 입으로 낸 소리요.”
“ 위장이 성대에 달렸나?”
젠장. 내 구차한 변명은 역시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몬스터고 나발이고 당장 쥐구멍을 찾아 도망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왜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는지 당최 이해할 수가 없다. 나 정말로 허기 못 느꼈단 말이야. 위장 너 뭐니? 혹시 최근에 성경이라도 읽은 거니? 위장이 하는 일을 뇌가 모르게 하라, 그런 거니?
“ 인체의 장기도, 뭐랄까, 가끔 실수를 하는 기관인가 보죠.”
“ 큭.”
“ 비웃지 마세요.”
“ …….”
“ 비웃지 말라니까 표정으로 비웃네?! 그래요, 어디 한번 계속 비웃어 보시죠. 이 손으로 각하를 만져버릴 테니까!”
수치심으로 이성을 잃은 내가 위협적으로 손바닥을 펼쳐 상대에게 들이댔다. 잽싸게 피한 케니스가 표정을 확 구긴다. 간만에 보는 오만상이었다.
“ 협박을 하다니.”
“ 여자인 게 무기가 될 줄은 몰랐네요. 보통은 다른 의미로 쓰이는 말인 것 같지만.”
뻔뻔한 내 행각에 케니스가 기가 차다는 눈길을 보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긴 다리를 움직여 어딘가로 멀어진다. 괘씸죄를 적용해 나를 버리고 가는가 싶었는데, 의외로 케니스가 이동한 곳은 나무 앞이었다.
“ 뭐 하시게요?”
물음에 대한 대답대신 케니스는 근처에 있던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가볍게 위로 던졌다. 직후 우둑!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손 위로 뭔가가 떨어진다. 나는 눈을 큼지막하게 떴다. 열매였다!
다시 돌아온 케니스는 내게 획득한 열매를 던졌다. 얼떨결에 받고나서 난 어벙한 낯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이게 무엇이냐. 솔직히 딸 때까지만 해도 날 약 올리려는 목적인 줄로만 알았지, 이런 전개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양손으로 받아든 열매와 그것을 선사해준 대상의 얼굴을 번갈아 응시하다 신기한 기분으로 말했다.
“ 혹시, 독 열매?”
“ 기껏 신경써주었더니.”
“ 농담입니다.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난 인사를 하고 열매를 한입 베어 물었다. 받았으니 눈앞에서 먹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예의일 것 같았다. 그래, 이것은 우정의 열매인 것이다!
아삭한 식감과 함께 입 안으로 넘어오는 과즙이 신선하다. 썩 달콤한 건 아니었지만 청량감이 있었다. 시중에서 판매하는 과일보다야 아무래도 맛이 조금 떨어졌지만, 숲 한가운데서 날것으로 따 먹는다는 상황적 요인이 열매의 부족한 당도를 보완해주었다. 씹을수록 단맛이 살아나는 것 같기도 하…….
“ 크억!”
“ 왜 그러지?”
“ 이, 이 열매.”
“ 말해라.”
“ 떫어요…….”
시간차 어택이었다. 시바! 내가 열매에게 공격을 당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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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소리 안들려요?
여혐러와 너구리가 꽁냥대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