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86화 (86/100)

00086  외전1. 라테와 간달프 원정대  =========================================================================

“ 여기 이 사람이 십년 전 저주에 걸렸거든요. 강제로 노화를 불러오는 저주인데, 혹시 풀 수 있나요?”

“ 어?”

별 기대는 하지 않고 던진 질문이었는데, 마물은 의외로 뭔가를 아는 것 같은 반응을 보였다. 눈을 껌벅이더니 빠르게 말한다.

“ 알아요! 저 그거 알아요!”

“ 안다구요?”

“ 그러니까 푸는 방법을 아는 건 아닌데, 누가 걸었는지는 알아요!”

“ 오 대박.”

카르댄밸이 추임새를 넣었다. 이거 뜻하지 않게 시작부터 원하던 걸 얻었다. 난 마물을 찰싹찰싹 때리며 재촉했다.

“ 누군데요? 누구?”

“ 저랑 같은 동기구요, 이름은 기므마물이구요, 친한 친구는 이이마물, 바그마물이 있고, 키는 백칠십에 몸무게가…….”

“ 잠깐만요. 뜬금없는 질문이긴 한데 본인은 이름이 뭐예요?”

“ 저, 저는 초애마물이요.”

……김이박최?

작명의 성의리스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 누가 지었는지 모르겠지만 심하네. 아무튼 그래서 그 기므마물, 여기로 불러낼 수 있어요?”

“ 제가, 그, 걔 전용 소환진을 그릴 줄 알아요.”

“ 술술 풀리는데? 근데 둘이 친구사이 아니야?”

“ 우와, 지금 친구를 판 거야?”

“ 친구 아니에요!”

넘나레드와 카르댄밸의 숙덕거림에 마물이 빽 외쳤다. 격하게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넘나레드가 심드렁하게 그 외침을 받아쳤다.

“ 개인정보를 그렇게 상세하게 알고 있으면서 친구가 아니야? 그럼 애인이냐?”

“ 씨이, 절교했단 말이야! 요!”

“ 절교?”

“ 그 새끼가……내 애인을 뺏었다고! 요!”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전에 찾아왔던 정적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표현하기 어려운 분위기 가운데, 머리 위에서 아윈의 상쾌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 가지가지 하네.”

너무했지만 사실 나도 좀 비슷하게 생각했다.

“ 불러내, 당장 불러내!”

“ 우리가 네 복수를 해줄게!”

“ 그래!”

아픈 과거라도 있는 건지 넘나레드를 비롯한 세 명이 한마음 한뜻으로 분개하기 시작했다. 특히 카르댄밸의 분노가 가장 커 보였다. 저주고 나발이고 등장하자마자 토막 썰기 당하는 거 아냐? 죽일 땐 죽이더라도 저주는 풀게 하고 응징하라고 해야겠다.

아윈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마물이 언급했던 소환진을 바닥에 대고 슥슥 그려나갔다. 성인 남자 셋의 성원 속에 커다란 원을 이루는 문양이 점차 완성되어간다. 돌로 그어 만들어낸 소환진 위로 피를 떨어뜨리자-나는 이번에도 도중에 눈을 감았다-, 문양 위로 아까와 같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번쩍!

“ 크크큭……나를 소환한 애송이가 누구…….”

“ 야, 패.”

“ 잠깐, 어억! 크억! 억!”

누구 때완 다르게 무게감 있고 정석적인 첫 대사였지만, 분노한 남자들은 그것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다. 등장인사도 마무리하지 못한 채 기므마물이 열심히 두들겨 맞기 시작했다. 소환되자마자 행해진 다굴엔 자비가 없었다.

“ 뭐, 뭐야! 왜이래!”

“ 니가 얘 애인 뺏었다며?”

“ 심지어 친구사이에 시발, 그게 할 짓이냐?”

“ ……애, 애인?”

마물끼리의 눈이 마주쳤다. 곧이어 기므마물이 바락 악을 쓴다.

“ 쌍! 뭔가 했네! 그거 삼십년이나 지난 얘기잖아!”

“ 삼십년? 너 몇 살인데.”

“ 칠백 두 살.”

“ 그럼 얼마 안 된 거네! 야, 더 밟아!”

징계의 발길질은 한참이나 더 이어졌다. 단체 밟기가 끝난 것은 기므마물이 반쯤 짜부가 된 이후였다.

“ 사, 살려…….”

너덜너덜한 꼴에 연민이 느껴질 법도 했으나 해놓은 짓이 있어서인지 다들 시원해하는 분위기였다. 나도 손을 들자면 통쾌한 쪽이었다. 아윈은 별 감흥 없어보였지만.

기므마물은 흠씬 얻어맞은 뒤 우리가 시킨 대로 고분고분 아로브럭의 저주를 풀었다. 뭐라고 혼자 막 중얼거리더니 제 머리를 한 움큼 뽑아 불에 태웠는데, 직후 그 자리에서 아로브럭의 외양이 서서히 달라졌다. 백발이 빨간색으로-아로브럭은 어두운 적발이었다-, 주름진 피부가 탱탱하게, 그리고 키도 반 뼘 커졌다. 신기한 변화였다. 나도 모르게 박수를 쳤을 만큼.

그 후 기므마물은 맞은 것에 대한 복수심이 들었던지 기회를 살피다 갑자기 공격을 해왔는데, 어리석게도 하필 나를 목표로 삼았다. 혼자 여성인데다 지닌 마나가 가장 적었으니 딴에는 합리적인 판단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과, 기므마물은 세상에서 사라졌다.

허무한 듯 자업자득인 마지막이었다. 초애마물은 소멸하는 동기의 모습을 목격하곤 뻣뻣이 굳어 딸꾹질을 해대다가, 곧 소환시간이 다되어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일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소기의 목적은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나는 젊어진 아로브럭을 포함한 원정대와 함께 동굴을 벗어나다, 문득 잊고 있던 것을 하나 떠올렸다.

“ 손가락 안 셌다!”

마물이 나타나면 손가락이 몇 갠지 세어보려 했는데. 아차.

“ 손가락?”

“ 마물 손가락은 몇 개일까 해서……. 너 봤어? 다섯 개 맞아?”

아윈은 대답대신 뒤에서 내 어깨를 감아왔다. 꼼짝없이 팔에 갇힌 행색이 된 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고 없는 스킨십에 둘부처가 되어있으니 귓가로 소곤소곤 목소리가 들렸다.

“ 대륙 돌까?”

“ 응?”

“ 대륙을 뒤져보면 마법진이 꽤 나올 거거든. 아까 보니 마법진에 담긴 마나량에 따라 소환물의 수준이 달라지는 것 같던데.”

“ 음……즉, 다양하게 구경시켜준다는 얘기?”

“ 그래. 어때?”

좋다고 응답하면 당장이라도 출발 할 기세였다. 난 잠깐 생각한 뒤 파하하 웃으며 아윈의 손등을 퍽퍽 때렸다. 얘는 농담도 참. 마물 하나 보겠다고 제국도 아니고 무슨 대륙을 돌아!

그리고 나는 시간이 꽤 지나서야 깨닫게 된다.

아윈의 사전에는 농담이 없다는 것을.

*후일담.

“ 야, 아로브럭.”

“ 예?”

“ 너 전에 우리랑 같이 술 먹을 때, 그런 얘기 한 적 있지 않아? 어릴 때 종종 여장했었다고.”

“ 맞다! 칠공주였다며?”

“ 아……예, 그랬었죠.”

“ 저도 기억납니다. 열 살이 넘어서도 강제로 드레스를 입곤 했었다죠? 그것도 분홍색 프릴에 빨간 리본으로. 구두는 노란색.”

“ 자세히 기억하시네요.”

“ 난 솔직히 그래서, 아로브럭의 생김새가 미형일 줄 알았어.”

“ 어! 사실 나도!”

“ 원래 아들이 좀 예쁘면 여장도 시키고 하잖아.”

“ 맞아. 특히 어릴 때는 더.”

“ 근데 아로브럭은…….”

“ …….”

“ 어머님 취향이 많이 독특하신가봐?”

“ …….”

“ 비위도 굉장히 좋으신 듯.”

“ 다들 너무해요!”

*후일담2.

“ 고서에 따르면, 대체로 마물은 인간을 벌레처럼 취급한다고 합니다.”

“ 정말요? 근데 그때 소환했던 마물들은 딱히 그런 낌새는 아니었는데.”

“ 자기보다 센 인간은 예외라네요.”

“ 아하.”

외전1 마침.

외전1.5 <라테의 일기>

a월 a일

집에서부터 편지가 왔다. 릴리가 사귀던 남자친구의 양다리를 알게 되어, 그를 굴다리 밑으로 불러내 흠씬 두들겼다는 내용이었다. 결과는 전치 4주라고.

……! 릴리 강하다!

그리고 그 밑에는 팝콘 사업의 추이가 더불어 적혀있었다. 광장 근처에 커다란 가게를 하나 개업했다고 한다. 오오, 거기 땅값 비싸기로 유명한 곳인데?

얼른 방문해봐야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짐을 챙겨 몰래 탑을 빠져나가다 아윈에게 딱 걸렸다. 크윽, 얘는 왜 이렇게 귀신같을까. 혼자 조용히 다녀오고 싶어 필사의 애교도 부려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나는 결국 체념하고 아윈과 동행했다.

덕분에 방문이 아닌 행차가 되었지만, 결과적으론 나간 김에 데이트도 했으니 나쁘지 않았다. 아, 그리고 팝콘 가게는 예뻤다! 외관도 훌륭하고 인테리어도 깔끔했다. 연인들끼리 지나가다 한 번씩 들러봄직한 분위기였다.

잘됐으면 좋겠다, 후후.

a월 aa일

아윈이랑 곳곳을 돌아다니며 느낀 건데, 만약 내가 절세가인이었으면 이미 나라 한두 개 정도는 멸망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나라 왕족이나 귀족 같은 양반들이 내게 집적대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나 세계평화훈장 이런 거 받아야 하지 않을까? 근데 내 눈에서 흐르는 이 따뜻한 물줄기는 뭐지?

c월 c일

청첩장이 도착했다. 늦봄의 신부가 될 주인공은 다름 아닌 카노였다! 약혼한다는 이야길 작년에 들었었는데 어느새 식을 올릴 때가 된 모양이었다.

주목을 피하기 위해 아윈과 나란히 가면을 쓴 채 참석할까 고민하다가, 이내 그냥 맨얼굴로 입장하기로 했다. ‘하객 중에 마탑주가 있더라’는 유명세가 아마 카노와 신랑에겐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귀족사회에서 인맥이 지니는 중요성은 두 말하면 입 아프니까.

신랑은 평민출신의 기사로, 전장에서 공을 세워 작위를 수여받은 케이스였다. 분명 처음 보는 인물이거늘 이상하게 어디서 만난 것처럼 낯이 익어 식 내내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알고 보니 생김새가 넘나레드를 쏙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둘은 실제로 형제였다.

……카노……. 괜찮은 걸까?

e월 e일

비모르를 접고 쓰기 시작했던 로맨스 소설을 엊그제 출간했다. 마탑주는 못 말려!를 제목으로 하려다 부크가 뜯어말려서 참았다. 결국 선택된 서명은 ‘무법자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잘 팔리든 안 팔리든 상관없다. 그냥 뿌듯했다. 아로브럭의 옛 모습을 추억하여 간달프도 까메오로 등장시켜주었다. 웃음소리는 ‘홀홀홀.’

f월 f일

부크가 신이 나서 소식을 왕창 보내왔다. 생각보다 무법자(생략)의 반응이 굉장히 좋았던 것이다. 필명도 숨기고 신인인양 시장에 내보냈는데 의외의 성과였다. 이거 인세가 또 쌓이겠구먼.

한편, 소설이 대박을 치면서 아윈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는 얘기도 들었다.

……음?

특히 남팬이 그렇게 많이 늘었다고.

……으음?

f월 g일

참! 그러고 보니 황녀언니도 책을 냈다. 애절하고 격정적인 분위기의 장편 비모르였다.

‘로즈의 뒤를 이을 최강 신인의 등장!’이 세간의 평가라고 한다.

잘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부크가 징징거림이 잔뜩 담긴 편지를 보내왔다. 알고 보니 출간한 곳이 라이벌 출판사란다. 아이쿠 저런. 뭐 어쩔 수 있나, 황녀언니 흥하세요!

k월 k일

카르댄밸이 갑자기 폭탄발언을 했다. 오늘부터 조신해질 거라고 사방에 막 호언을 하고 다닌다.

조신?

대뜸 본인의 한계를 넘는 결심을 한 이유가 궁금해서 붙잡고 물어봤더니, 아래와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 첫눈에 반한 그녀의 이상형이 어리고 잘생기고 조신한 남자라서요!’

아하.

그런데 조신함보단 잘생김을 먼저 해결해야 되는 거 아닐까?

상처받을 것 같아서 굳이 이야기하진 않았다.

k월 x일

카르댄밸이 결국 차였다.

넘나레드가 어디서 구해왔는지 축하의 폭죽을 터뜨리는 바람에 그 자리에서 피의 혈전이 벌어졌다. 나는 둘의 혈전을 아로브럭과 함께 멀찍이서 구경했는데, 실력이 엇비슷해 사흘밤낮을 싸우고도 결착이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둘 다 죽을 것 같으면 아윈에게 말려달라고 해야겠다. 그리고 이번에는 솔직히 넘나레드가 조금 너무했다고 생각한다.

n월 n일

넘나레드가 실연의 아픔을 겪었다. 카르댄밸이 똑같이 폭죽을 터뜨렸다. 둘이 똑같이 또 싸웠다.

둘이 그냥 결혼해라.

m월 n일

케니스가 웬 여성과 데이트를 했다는 소문을 들었다!

헐!

여혐러 케니스에게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진상을 파악하기위해 빠르게 나갈 채비를 하다가 아윈에게 붙들렸다. 같이 나가자고 했는데 싫단다. 엥? 왜? 설마 케니스를 보러가는 거라서? 울애긔는 질투하는 모습도 귀엽군아~넝담~ㅎ 하고 장난쳤다가 질투 맞다는 답이 돌아와서 엄청 깜짝 놀랐다.

질투한다고 시인하는 아윈이라니. 카, 카와이.

케니스와의 만남은 그냥 포기했다. 그리고 훗날 편지를 통해 진위여부를 물었는데, 헛소문이라는 답장을 받았다. 에이.

m월 m일

나는 질투한 적이 있었나 한번 생각을 해봤다.

예쁜 여자가 아윈에게 관심을 보이며 막 들이댄다면?

음…….

난 시뮬레이션을 하다말고 식은땀을 훔쳤다. 질투고 나발이고 그전에 아윈이 먼저 그 여자를 죽여 버릴까봐 무서웠다. 연적이 생기면 내가 지켜줘야 할 판이다.

x월 x일

마탑 식구들과 대화를 나누다 아이 얘기가 나왔다. 나는 원체 아이에게 관심이 없는 편이라-남의 아기가 눈에 보이면 귀여워는 한다만-세워둔 자녀계획이 딱히 없었지만, 아윈은 또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같이 밥 먹으면서 물어봤다.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너.’

‘?!’

아직은 둘이서만 오순도순 살자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z월 z일

아윈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윈은 먼치킨이니까, 아마 나보다 훨씬 오래 살겠지?

내가 호호할머니가 되어 세상을 뜨고 아윈이 이곳에 혼자 남겨지는 상상을 해봤다. 어쩐지 마음이 많이 아팠다. 나 없이 영감홀로 어찌 이 세상을 산담. 잠깐, 그러고 보니 옛날이야기들 중엔 가끔 연인을 잃은 최강자가 슬픔에 미쳐 세계를 위험으로 몰아넣곤 하는 스토리가…….

……내일부턴 불로초를 찾아봐야겠다.

<일기 마침.>

============================ 작품 후기 ============================

외전 1이 끝났습니다! > <

다음 외전은 "케니스 IF외전" 이며, 라테와 케니스가 이어지는 페러렐 월드의 이야기입니다. 8회 짜리예요!

케니스가 귀여우니까 많이 봐주세요 (당당

외전2는 일주일 뒤부터 화목토일 이렇게 주4회로 올라옵니다! 왜 띄엄띄엄이냐? 그거슨...외전이 선공개 되었던 K사와 주기를 맞춰야 해서 그렇답니다 8ㅁ8 쿠헝헝...여러분 띄엄띄엄이라도 절 버리지 마라주세여...88ㅁ88

그럼 오랜만의 가족이야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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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상의 탈의)

나: 아빠 배나온거봨ㅋㅋㅋㅋ개울가에~올챙이 한마리~꼬물꼬물 헤엄치다~

아빠: 가시나야, 이 나이에 이정도 배 안나오면 멋 없어!

막내: ㅎ? 아빠 배 옛날부터 그랬자나

아빠: 아니거든????

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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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만나요!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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