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5 외전1. 라테와 간달프 원정대 =========================================================================
나와 메모리아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의 마법진을 재현할 방법이라도 찾은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위치를 발견했다니, 그렇다면 노인탈출을 위해선 해당 장소까지 이동해야 할 일이었다. 안 그래도 기쁨의 세리머니-괴성을 지르며 뒷마당으로 달려 나온-를 마치고 나면 여비를 챙길 생각이었다고 아로브럭이 덧붙였다. 먼 곳인가?
“ 근데 어떻게 알아낸 거예요?”
“ 그건 말이죠, 지난 몇 년간의 지대한 노고가…….”
“ 중요하지 않은 건 생략합시다. 아로브럭 씨, 지금 바로 출발할 건가요?”
“ 아, 네. 그래야죠.”
“ 얼마나 걸립니까?”
“ 제국 북단이니 텔레포트를 나눠서 쓴다면 이틀쯤……그런데 왜요?”
아로브럭이 찜찜한 얼굴을 했다. 메모리아의 어조에서 묘한 뉘앙스를 받은 것 같았다. 사실 그거 나도 느꼈어. 저기, 님 혹시…? 아니나 다를까, 폭탄선언이 터졌다.
“ 기다려요.”
“ 예?”
“ 나도 갑니다.”
“ 예?!”
눈을 휘둥그레 뜨며 아로브럭이 기겁했다. 그의 입장에선 일말도 달갑지 않은 선언일 게 뻔했다. 그 사이 언제 일어났는지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낸 넘나레드마저 상황에 가세했다.
“ 영감의 마지막 순간에 이 몸이 어찌 빠지겠소이까.”
“ 왜, 왜 이러세요?”
“ 다들 가는 거야? 그럼 나도.”
“ !!”
카르댄밸까지 끼자 안 가는 게 이상한 분위기가 되고 말았다. 나는 요상하게 흘러가는 여론을 지켜보다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여기 원정대원 하나 추가요. 흐름을 떠나 전부터 마물이라는 친구들의 생김새가 궁금하긴 했다. 아로브럭만 따라가면 볼 수 있단 소리잖아?
“ …….”
아로브럭의 낯빛에 슬슬 체념이 어릴 때였다.
“ 고객님.”
“ 어? 다녀왔어?”
귀에 익은 목소리가 익숙한 호칭으로 나를 불렀다.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서 불쑥 나타난 모양새였으나 나는 놀라지 않고 침착하게 상대를 맞이했다. 아윈의 갑툭튀는 이젠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인간은 적응하고 단련되는 동물! 내 심장은 많이 튼튼해졌지!
“ 히익.”
“ 타, 탑주님.”
그러나 등장방법이 아닌 존재 자체에서 오는 충격은 무뎌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를 제외한 네 명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눈을 큼지막하게 뜬 채로 동상처럼 굳었다. 아윈은 늘 그랬듯 나머지를 무시하고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난 먼저 입을 열었다.
“ 나 구경 갈 거야.”
“ 뭘?”
“ 마물.”
“ 그게 어디 있는데.”
“ 제국 북단?”
아로브럭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대답을 뱉었다. 아윈은 정확한 위치에 대한 되물음이나 왜 가냐는 이유를 묻는 대신 짤막한 두 마디를 던졌다.
“ 그래, 가.”
그리고 저 말은 함께 간다는 뜻이다.
나, 아로브럭, 넘나레드와 친구들, 거기에 아윈까지. 마법진 원정대는 결국 이렇게 여섯 명으로 완성되었다. 즉흥적인 결사였다.
*
내가 부탁한 덕분에 인원은 다 같이 한꺼번에 이동할 수 있었다. 이틀을 예상했던 여정은 아윈의 먼치킨적인 능력이 더해지면서 3초로 줄어들었다.
아로브럭은 기왕 이리 된 것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눈치였는데, 사실 나도 아윈이 원정대에 껴서 잘됐다고 보는 입장이었다. 그건 비단 잘생긴 남편과 붙어 다니고 싶은 아내 된 이의 사심 때문만이 아니라, 보다 모두의, 원정대 전체의 안전을 기리는 의미에서였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마법진에서 소환 된 마물이 지난 십년간 엄청난 파워업을 이룬 상태라면? 사이어인이 초사이어인이 되듯 판타지인데 마물이 수련을 통해 초마물이 되어있지 말라는 법은 없다. 나는 그러한 위험에서 원정대를 구하고 싶은 것이다! 누가 내 이 깊은 뜻 좀 알아줬으면.
“ 여기야?”
“ 예, 맞습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어느 동굴 입구였다. 바깥에는 눈이 소복하고 안은 꽤 어두워 느껴지는 분위기가 제법 스산하다. 북단이라더니 털옷을 껴입었음에도 추위가 느껴져 난 본능처럼 아윈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이러고 있으면 아윈이 알아서 마법으로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올바른 남편사용법(?)을 실천하는 사이 아로브럭이 먼저 동굴 안으로 발을 디뎠다. 발걸음에서 어째 설렘이 묻어나는 게 보인다. 그를 따라 줄줄이 이동해 원정대는 금방 동굴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 걸음 걷지 않아 한쪽 벽면을 커다랗게 메운 마법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법으로 띄운 불빛 아래 적나라하게 드러난 문양에 내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편견 하나가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나 당연히 바닥에 있을 줄 알았어!
벽에 그려진 마법진을 눈에 담으며 나는 자연히 마물이 소환되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럼 뭐냐, 어떻게 튀어나오는 거야? 벽걸이 티비에서 기어 나오는 사다코처럼 그렇게 등장하나?
소환되자마자 바닥으로 떨어지는 마물의 깨는 모습 따위를 그려보고 있으려니 카르댄밸이 말을 꺼냈다.
“ 어떻게 불러내? 요?”
“ 잠시만요, 제가 하겠습니다. 이게 피를 묻혀야 돼서…….”
“ 그나저나 저주가 풀리면 이 모자라 보이는 반존댓말은 안 쓰게 될 테니 그건 좋다.”
“ 어, 나도.”
카르댄밸과 넘나레드의 공감대형성을 뒤로하고 아로브럭이 마법진으로 다가갔다. 벽의 문양을 좀 더듬는가 싶더니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낸다. 끄아! 나는 지켜보다말고 식겁해서 눈을 감았다. 내 비위는 요상해서 칼로 베는 것보다 저런 것을 더 못견뎌한다. 예전에 스릴러영화 볼 때도 그랬어.
잠시 후 필요한 의식이 끝났는지 번쩍하고 시야로 빛이 비쳤다. 난 감았던 눈을 슬그머니 떴다.
“ 아, 시발 똥 싸던 중이었는데.”
그리고 마물은 나타나자마자 굉장히 저렴한 발언을 했다.
“ …….”
“ …….”
내려앉은 정적이 싸했다. 나만 들었으면 아 뭐임 환청이네 하겠는데 표정들을 보아하니 그것도 아니었다. 뭐, 뭐야.
“ 방금 미친, 뭐냐?”
넘나레드가 모두의 심경을 대변했다.
아니, ‘이 몸을 소환한 게 너희들인가? 큭큭큭.’ 같은 정석적인 대사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저건 너무 심한데. 그냥 심한 게 아니라 너무 심하잖아? 아니 인간적으로 어?
“ 이 똥쟁이 새끼야 내 환상 돌려내!”
카르댄밸은 나름 기대하던 것이 있었는지 괴로운 표정으로 침묵 후 울분을 토했다. 넘나레드도 함께 심각한 얼굴이었다.
“ 저거 돌려보내자. 보내버리고 새로 소환하면 안 돼? 이건 시작부터 글러먹었어.”
굳은 어투가 진심인 것 같았다. 비난과 회의가 쏟아지는 반응에 마물은 되레 자기 쪽이 어이없다는 듯 허, 숨을 뱉었다.
“ 이것들이 쾌변 중이던 마물 불러내놓고 왜 지들이 적반하장이야?”
어깨도 으쓱한다. 덕분에 이쪽의 반응은 한층 격렬해졌다. 메모리아도 드물게 열이 받았는지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나는 사자성어를 쓰는 유식한 마물을 황당하게 응시하다 아로브럭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문제를 하나 발견했다.
“ 눈이 두갠데요?”
“ 예?”
“ 왜 아까, 손가락은 못 세 봤는데 눈은 하나였다고 했잖아요? 출발하기 전에.”
아로브럭은 내 말에 어리둥절해하다 곧 깨달은 낯빛을 했다. 아!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다. 얼른 고개를 돌려 마물을 재차 뜯어본 아로브럭이 이내 당황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맞아요. 다른 마물입니다……. 저 마물이 아니에요.”
“ 마법진은요? 마법진은 똑같고요?”
“ 네, 그건 확실합니다. 동일해요.”
“ 이런.”
이걸 어쩐담. 기껏 소환한 마물이 찾던 것과 생판 다른 놈이라니 허탈함이 하늘을 찌를 노릇이었다. 나는 비 오기 전 하늘처럼 어두워지는 아로브럭의 얼굴빛에 어서 떠오르는 방편을 뱉었다.
“ 넘나레드가 얘기한 것처럼 돌려보내고 다시 소환하면 되지 않을까요?”
“ 잘 모르겠습니다. 강제로 보내는 방법이 있는 줄도 모르겠고……된다 해도 만약 저 마법진이 임의로 아무 마물이나 소환하는 거라면, 다시 시도한다 해도 마찬가지이지 않을지.”
그건 그렇지. 회의적인 얘기였지만 아로브럭의 말이 맞았다. 상황을 보아하니 마법진당 특정마물이 연동되는 게 아니라 단순 랜덤인 모양인데, 마물이 한둘도 아니고 개중 원하는 대상을 콕 집어낼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확률로 대강 따져도 소수점 밑으로 0이 주르륵 이어지지 않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맞아염 망했네염 포기하세염 아님 한 십년쯤 소환하든가’라고 냉정히 말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침울한 할아버지의 얼굴은 왠지 보는 것만으로도 타자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힘이 있었다. 윽…! 뭔가 생각해내야 할 것만 같아! 뭔가 좋은 방법!
“ 그래도 일단 해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잘하면 얻어걸릴 수도 있을……아!”
생각났다. 난 주먹으로 손바닥을 탁 때렸다. 그거야!
“ 협박합시다.”
“ 네?”
“ 저 마물 털자구요.”
“ ……네?”
마물 사회에도 다 자기들만의 정보망이 있지 않을까? 지금 나타난 마물을 조지다보면 아로브럭에게 저주를 건 마물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지 몰랐다. 더 나아가면 여기로 불러내는 게 가능할 지도. 지도 목숨이 소중하면 죽기 전엔 다 불겠지?
폭력적이고 효율적인 해결책을 제시한 뒤 나는 기대감을 담아 아윈을 올려다보았다. 여태껏 내 하는 양을 가만히 주시하고만 있던 아윈이 나와 눈을 마주쳤다. 좋아, 청탁의 눈빛을 발사!
효과는 빨랐다. 아윈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손부터 뻗었다.
“ 그러다 얼마 전 최고의 비법을 발견한 거지. 너네 힘줄 때 자세를 이렇게 하면……켁!”
그새 대화주제가 어떻게 바뀐 건지 무언가 알고 싶지 않은 것에 대해 열변을 토하던 마물이 이쪽으로 휙 날아와 목을 붙잡혔다. 성인 여자의 키만 한 마물이 허공에 대롱대롱 뜬다. 대상의 목을 쥔 채로 아윈이 무심하게 말했다.
“ 뭐할까.”
“ 뭐야? 뭐하는 거……업니까?”
갑작스레 마물이 허공을 날아 이동하자 카르댄밸이 이편으로 관심을 보였다. 함께 대화 중이었는지 넘나레드도 뒤이어 이목을 집중했다. 아윈에게 목이 붙들린 마물의 뒤태를 힐끗 보더니 ‘탑주마마, 무슨 일이옵나이까’하고 어디서 주워들었나 궁금한 말투로 묻는다. 대답은 내가 해주었다.
“ 지금부터 이 마물을 조질 거예요.”
“ 네? 그 불쌍하고 가엽고 유용한 마물친구를 왜?”
“ 언젠 똥쟁이 새끼라더니.”
뭘 했기에 이미지가 바뀐 거야? 그새 마물을 친구로 맞아들인 그들에겐 유감이었지만, 그래도 이건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아로브럭의 성공적인 노인탈출을 위해선 어쩔 수 없다.
“ 아로브럭에게 저주를 걸었던 마물과 이 마물이 달라요. 그래서 이 마물을 족쳐서 해당 마물에 대해 알아내려 해요.”
“ 아아.”
“ 근데 저 마물이 아는 게 있을까요?”
‘내가 볼 땐 쾌변 팁 외엔 뇌에 든 게 없을 것 같은데’ 중얼거리며 넘나레드가 걸음을 옮겼다. 그럴듯한 가정이라 나는 순간 흠칫했다.
“ 어쨌든 결과야 털어보면 알겠지. 그럼 이제 어떡하죠? 여기에 구멍 좀 내면 되나?”
친구라고 할 땐 언제고 그들은 또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발목이나 손목 같은 곳을 가리키며 카르댄밸이 진지하게 이야기한다. 순식간에 버림받은 마물은 떨리는 동공을 막 이리저리 굴렸다.
“ 저, 저기, 저기요.”
반항하거나 공격할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마물은 몹시 저자세로 나왔다. 아마 아윈이 비인간적인 먼치킨이란 것을 본능적으로 감지한 것 같았다. 굉장히 작아진 목소리로 마물이 우물쭈물 말했다. 가까이서 관찰하니 속눈썹이 기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어, 아는 건 다 불겠습니다.”
“ 쉬운 마물이네.”
“ 저기요, 님이 이렇게 잡혀보시던가요.”
메모리아의 폄하에 마물이 발끈해서 항변했다. 하기야 현명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국가 기밀을 캐물으며 애국심을 시험할 것도 아닌데 뭐. 나는 빠른 진행을 위해 핵심부터 물었다.
============================ 작품 후기 ============================
마물: ㄸ을 쌀 때도 힘조절이 중요해. 강약 중간약....
넘나레드: 이새끼 야매아냐?
카르댄밸: 닥치고 일단 더 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