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2 8. 전에 알던 너도 아냐 =========================================================================
“ 왜 멈춰?”
“ !”
그리고 나는 자연히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안 자고 있었어?! 딱히 불순한 의도는 없었지만-아마도-괜히 나쁜 짓을 하려다 걸린 아이의 심정이 되어 난 파드득 뒤로 물러났다. 아니, 물러나려고 했다.
“ 파, 팔!”
“ 팔 뭐?”
“ 내 허리!”
“ 허리 뭐?”
그새 완전히 눈을 뜬 아윈이 날 향해 씨익 웃었다. 나는 오도가도 못 하게 허리를 붙들린 채로 상대의 악동 같은 미소를 응시했다. 개구쟁이마냥 장난기가 가득 서린 미소는 또 가녀린 소시민의 심장을 덜컥거리게 만든다. 아, 안 돼 이놈아! 그러다 네 여친 심정지로 먼저 간다!
“ 눈은 왜 감아?”
“ 그…그런 게 있단다.”
“ 입맞춰달라고?”
“ 아니야! 뭐야! 너 왜 이렇게 능글맞아졌어?!”
아윈이 소리까지 내어 웃었다. 이어 팔을 어떻게 움직인 건지 내 몸 전체가 홀랑 침대 위로 올라간다. 덕분에 아윈을 위에서 덮치는 망측한 자세가 되고 말았으니 그 상황에서 내 정신이 온전할 리 없었다. 혼이 작별인사도 없이 짐을 싸 떠나간다.
“ 고객님.”
“ …왜, 왜?”
“ 조금 전 고객님의 콧김에서 분명히.”
“ ……?”
“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활화산 같은 욕망이 느껴졌었는데.”
“ ?! 아니야! 아냐! 그런 콧김 안 뿜었어!”
“ 태풍인 줄 알았더니 콧김이었을 줄이야.”
“ 아니래도!”
나를 수치사 시키려는 듯 나불댄 아윈이 문득 허리를 감싸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러더니 뺨으로 손길을 옮긴다. 한 손은 뒷목 부근에서 느껴졌다. 나지막한 음성이 귓가로 와 닿았다.
“ 욕망은 마저 실현시켜야지.”
그리고 얼굴이 가까워진다. 난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
민망한 자세에 부끄러운 전개였다. 내가…내가 위에서 덮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요 침대양반! 아직도 장면을 떠올리면 얼굴에 열이 오른다. 나는 손부채질을 하며 애꿎은 자연경관만 눈에 담았다.
아윈을 놀래겠다던 작은 소망은 불씨도 피우지 못하고 그렇게 수포로 돌아갔다. 네, 오늘도 나만 놀랐습니다. 흑흑 억울. 사실 기대를 않았으니 큰 실망도 없긴 했다. 그래도 내 언젠간 그놈의 놀라는 얼굴을 꼭 보고나서야 세상을 뜨겠다. 죽기 전에는 기회가 오겠거니.
결혼반지를 고르러 나가는 길에는 도드보기라는 마탑 식구 한명이 동행했다. 듣기로 보석 보는 안목이 뛰어나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수준이라 했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 가는 보석점마다 그가 아주 큰 역할을 해주었다. 흠이 있거나 가치 이하의 패물들을 보자마자 귀신같이 잡아내 직원이나 사장의 귓가에 경고를 속삭이는 것이다. 두유 노우 마탑주? 두유 노우 마탑주 성질? 뒤지고 가게 접기 싫으면 멀쩡한 것들로 후딱 바꿔오세요. 언더스텐?
덕분에 사고 없는 무난한 쇼핑이 될 수 있었다. 둘만 나왔으면 거리에서 점포 몇 개쯤 사라졌을 뻔했다. 나도 보석 보는 눈은 영 별로였으니까.
최종 간택된 것은 아윈의 눈동자를 닮은 붉은 색 보석이 박힌 장신구였다. 반지까지 고르고 나니 정말로 결혼을 목전에 둔 예비신부가 된 느낌이라, 난 돌아오는 내내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야 했다. 유부녀라니…내가 마탑의 안주인이 된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이상 빠를 수가 없는 진행이었다. 아, 물론 하루아침에 탑으로 납치돼 다짜고짜 안살림부터 시작하는 것보단 느리고 신사적인 수준이겠지만. 아윈 이 무법자가 나름 인내하는 중인 게 맞긴 맞군.
헤어지기 직전 나는 용케도 페리도트를 기억해냈다. 이번에도 까먹고 넘겼으면 나중에 떠올리자마자 어이없어하며 벽에 머리라도 박았을 텐데 참 다행인 일이었다. 질문을 던지기위해 막 떠나려는 상대를 두 팔 벌려 막아서자마자 아윈은 ‘같이 더 있고 싶었으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라는 대사를 던짐으로써 날 그 자리에 굳게 만들었다. 어디서 학원이라도 다니는 건지 아윈의 능글맞음이 부쩍 늘었다. 소, 소름. 근데 잘생겨서 용서.
어쨌든 결론적으로 후작가의 반역죄는 부러 뒤집어씌운 누명이 맞았고, 영애 페리도트는 ‘아직’ 살아있는 상태였다. 아윈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재 페리도트 가넷은 환각마법에 걸려 반복적으로 죽음을 겪으며 ‘빌빌대느라’ 바쁘다고 했다. 내가 쓰러졌던 날부터 숲 한구석에 처박혀 그렇게 물만 마시며 차차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몰골을 보여줄까 하는 것에 난 고개를 붕붕 저었다. 말만 들어도 비참하기가 하늘을 찌르는데 눈으로 직접 봤다간 꿈에라도 나올 것 같았다. 나는 그냥, 페리도트가 지금껏 죽이거나 괴롭혀온 사람들의 수 만큼만 죽음을 겪은 뒤 세상을 떴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궁금하던 것을 듣고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에슐라는 내게 그 사이 도착한 편지들을 한 아름 안겨주었다. 거 많기도 해라. 친분은커녕 일면식도 없는 곳들에서 쏟아진 것들 중 익숙한 문양이 두 개 눈에 띄었다. 하나는 카노네 집-아메리 남작가-에서 온 서신이고, 다른 하나는….
“ 황녀언니?”
나는 황가의 문양이 또렷이 찍혀있는 편지를 뜯어 펼쳤다. 간단한 내용이 정갈한 필체로 군더더기 없이 적혀있었다. 시간이 되는대로 만나러 와줄 수 있겠냐는 전문을 읽고, 난 망설일 것 없이 비숏을 깨우러 움직였다. 안 그래도 조만간 방문하려던 참이었는데 잘됐다.
“ 어버버.”
“ 자, 여기 침 닦고. 무슨 꿈을 꿨길래 홍수가…….”
깜찍한 십대의 나이에 연애방면 눈치바닥이라는 점까지 더해져 갈수록 애처럼 느껴지는 비숏은 내 무자비한 손길 아래 비몽사몽 단잠에서 벗어났다. 머리로 풍차 돌리기를 하며 몸을 일으키는 것을 사용인에게 부탁해 나갈 채비를 시킨다.
“ 황녀전하를 뵈러 갈 거예요.”
“ 네에…….”
“ 그렇게 미인이시라는데.”
“ 지금 출발하면 됩니까?”
다루기가 점점 쉬워지고 있었다.
간만에 노동한 비숏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황녀를 대면하는 장소에는 나 혼자밖에 입장할 수 없었다. 애초에 라테 엑트리가 아닌 ‘로즈’를 부른 자리였으니 당연했다. 나는 울상을 짓는 안쓰러운 비숏을 접객실에 홀로 두고 나오며 지나가는 시종더러 맛있는 거라도 잘 챙겨 달라 부탁을 건넸다. 맛난 거라도 먹으면서 기다리렴…쏴리.
“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전하.”
“ 어머! 로즈, 말투가 딱딱해졌어요.”
“ 황실까지 온 김에 한번 예를 차려보았사옵니다.”
“ 그렇군요. 그럼 이제 버려요.”
“ 넹.”
인사를 올리고 나는 편하게 준비된 맞은편 자리에 가 앉았다.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생글생글 온 낯에 웃음을 띈 황녀언니가 이쪽으로 시선을 준다. 난 그 웃음을 맞받아 느끼한 미소와 윙크를 함께 날렸다.
“ 사실은 로즈, 부탁할 것이 있어서 와달라고 했어요.”
“ 부탁이요?”
“ 로즈 외엔 해줄 수 없는 일이에요.”
꺼내는 목소리가 은근히 낮고, 또 진지했다. 본론이 나오기 무섭게 깔린 분위기가 급변한다.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내가 태평히 늘어져있던 자세를 각지게 고쳐 잡았다. 부탁? 그것도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니? 흐음, 냄새가 난다. 어딘지 보통이 아닌 중대사의 냄새가 나. 장난스러움을 벗고 심각한 표정을 장착하자마자 황녀언니가 기다렸다는 듯 무언가를 탁자 위로 내밀었다.
“ ! 이, 이건…?”
종이 뭉치. 여자의 감인 걸까? 본능적으로 느껴지는 게 있었다. 난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집어 들었다.
“ 맞아요.”
연녹색 눈동자가 깊게 빛난다. 나는 공기 반 소리 반으로 탄식처럼 반응을 뱉었다.
“ 역시…….”
“ 제가 쓴 비모르예요.”
“ 그렇군요.”
여자의 감이 아니라 작가의 감이었다.
“ 결국 이쪽 세계로 들어오시는 건가요?”
“ 미숙하고 부끄러운 결정이죠.”
“ 처음에야 다 그런걸요.”
난 대화를 이어나가며 종이뭉치 위의 활자를 빠르게 훑어 내렸다. 한때 검수한다고 글만 주구장창 읽었더니 속독이 제법 된다. 나는 찰나의 탐색을 통해서도 느껴지는 문장의 내공에 입안에서 탄성을 작게 굴렸다. 잘 썼다.
새삼 비모르에 대한 황녀언니의 덕심…그러니까 애정과 열정이 피부로 와 닿는 순간이었다. 독자의 마지막 단계. 읽을 게 없어서 본인이 직접 쓰는 경지! 심지어 잘 쓰기까지! 하기야 첫 만남 시 소설 문구를 줄줄 외울 때부터 짐작은 했다.
“ 집필하느라 바쁘셨겠어요.”
“ 실은 그에 관련된 부탁이랍니다.”
황녀언니가 수줍게 웃었다. 청초함이 배꽃마냥 피어나는 자태가 아주 몹시 보기 좋았다. 흐뭇한 미소를 띄며 어떤 건가요? 묻자 답이 돌아온다.
“ 초반부는 어찌어찌 잘 넘겼는데, 중반부터 감정선이 자꾸 막히지 뭐예요. 가령 삐-하고 삐-하는 부분에서 삐-하게 된다든가, 혹은 삐삐-도중에 삐-가 삐-를 삐이-한다든가.”
“ 흐음. 그거 고민되시겠네요. 아무래도 삐-할 때 삐삐-를 하게 되는 건…….”
“ 그렇죠? 수정해봤지만 역시 삐삐삐-가 삐삐-를…….”
햇빛 들어오는 분위기 좋은 후원에 때 아닌 비모르의 열풍이 불어쳤다. 손끝의 모션마저 우아한 미인에게서 낯부끄러운 얘기들이 잘도 쏟아져 나온다. 나는 적나라한 묘사들과 상대의 안개꽃 같은 말갛고 정결한 외모를 굳이 매치시키려 노력하지 않으며 열심히 상담에 응했다.
황녀언니는 한참 후에야 개운한 얼굴을 했다.
“ 고마워요!”
“ 허헛, 뭐 이런 걸로.”
“ 로즈가 아니었다면 계속해서 제자리걸음만 했을 거예요. 정말 고마워요. 참, 로즈는 요즘 집필중인 것이 없나요? 전작도 이미 다섯 번은 읽었는데.”
아는 표정이다. 저 눈빛은 열혈 팬의 갈망이었다. 난 이때다 싶어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기실 나도 부탁할 것을 가지고 온 마당이었다.
“ 실은…….”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서브커플의 외전 습작이 지금 내 품속에 있다. 특히 인기가 많았던 커플이었다. 이걸 대가로 내밀고 원하는 것을 청한다.
“ 부탁드릴 내용이 있어요.”
이벨린을 보내고 난 뒤 문득 케니스가 떠올랐었다. 그리고 원래는 한국에서 가능하길 바랐던 것을 어쩌면 이곳에서 실현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마침 내겐 시도해볼 만한 길이 있었다. 그렇다면 그 길을 밟는다.
“ ……할 수 있을까요?”
*
나중의 이야기지만, 제국에는 특별법이 하나 통과되었다. 정식 명칭은 ‘이성 간 거부의사 위반에 따른 처벌법’이었으나 그보다는 ‘로즈법’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남매지간의 돈독한 정을 자랑하는 황녀가 열과 성을 다해 제 오라비인 황태자를 움직였기에 가능했던 결과였다. 사생팬에게 죄를 물을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니 당연히 제정의 결과로 사생들이 속속 줄어들었다. 아무리 그들이라도 본인의 행각이 평생 지울 수 없는 기록으로 남아 시집도 포기하는 신세가 되는 것은 두려울 것이다.
언젠가는 케니스에게서 청첩장을 받아볼 수 있기를 고대할 따름이었다.
*
“ 에슐라는?”
“ 수련을 떠난다던가…. 화장 솜씨를 보다 갈고닦아서 돌아오겠답니다.”
귀택한 자작저에는 공백이 있었다. 뭔가 했더니 에슐라가 자리를 비웠다. 데자뷰를 불러일으키는 그녀의 출장 수행이었다. 그 실력에서 솜씨를 더 갈고닦는다니……. 메이크업의 신이 되어 신전하나 짓고 나타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카노가 보낸 소식-축하한다는 것과 함께 본인도 마음이 맞는 사람과 약혼하게 되었다는 내용이었다-에 답장을 하고 나니 새로운 편지가 도착했다. 발신인 부크를 달고 전해진 서신은 이름아침에 받았던 것에서 애절함만 보다 추가되었을 뿐 똑같은 얘기를 담고 있었다. 아니 바쁘대도 얘가. 그대로 읽씹형에 처하려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어떤 생각에 움직임을 멈춘다.
야수의 꽃.
번쩍하는 깨달음과도 같은 것을 얻었다. 나는 펜을 들었다. 그리고 종이를 펼친다. 비록 이 세계에서는 열람할 수 없다지만, 저쪽 세상에나마 분명히 이야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벨린과 황태자, 케니스, 그리고 아윈의 로맨스가 활자위에서 숨을 쉰다. 그들의 스토리가 남겨져 읽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자리를 매긴다.
「 다음 작품 장르 바꿀 거야.」
답신을 작성해 곧바로 보냈다. 결심이 서니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딱히 주저할 일도 아니다.
난 차기작 구상을 지금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물론, 비모르를 쓰지는 않는다.
‘ 주인공들 이름은 뭘로 할까? 나랑 아윈 이름을 하나씩 조합하면 뭐가 나올 것 같은데. 라윈? 테아? 흠, 어느 쪽을 여자로 하지.’
잉크가 묻은 펜촉이 종이 위를 노니며 흔적을 남겼다. 그래, 흔적. 부러 갖다 파기하지 않고서야 사라지지 않을 자취. 시간이 흘러도 남아있을 수 있는 기록.
“ 배경은 살짝 바꾸는 게 나으려나? 아카데미……그래, 그것도 낭만적이지.”
이야기를 쓴다. 자작가의 영애와 마탑의 젊은 주인이 등장하는 로맨스였다. 영애는……음…머릿결이 살짝 좋아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쯤은 엘라스틴을 해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응. 마탑주는 뭐, 있는 그대로 성격 개판으로 해야지. 개판에 무법자.
등장인물을 정했다. 그 다음은? 평소와 같은 순서는 아니지만 소설을 마무리 짓는 결말 문장부터 우선 완성한다. 나는 또박또박, 한 자 한 자 정성들인 필체로 공들여 글자를 써내렸다. 종이가 잉크를 흡수해 만들어내는 구절을 보며 입가에 웃음을 매단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평생 서로를 사랑하며 그렇게,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절대로 바꾸지 않을 마지막이었다.
소설의 결말부터 먼저 쓴 내가 눈따따를 찾아 손을 쥐었다. 어쩐지 당장 떠오르는 얼굴을 눈에 담아야 나머지를 채워나갈 힘이 솟을 것 같았다. 마주친 눈따따의 눈코입이 오늘따라 웃는 것처럼 보인다. 아, 그냥 내가 기분이 좋은 거구나. 벽지마저 나를 보고 웃네? 저거 설마 파라노말 액티비티는 아니겠지?
“ 우리 집.”
시야가 변한다. 나는 할 수 있는 가장 해사한 미소를 지었다.
完.
============================ 작품 후기 ============================
라테: 인형이 웃넹ㅎㅎ내가 기분이 좋은가부다
눈따따: 두유 노우 애나벨?
라테: 갸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