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1 8. 전에 알던 너도 아냐 =========================================================================
“ 싫어요.”
그리고 나는 잠깐 현실도피를 했다.
“ 아, 차 종류 중에 라테차라는 게 있나보네요? 라테차 싫어해요? 그럼 그건 빼라고 할게요. 명칭이 마테차랑 비슷하네요. 사실 저도 마테차는 별로 안 좋아하는데, 우리 은근히 차 취향이 비슷…….”
“ 아뇨!”
물론 현실도피는 통하지 않았다.
“ 당신이 싫다구요. 라테 엑트리, 그 쪽이 싫어요. 정말 싫어.”
아니 뭘 세 번씩이나.
난 상대방의 친절한 강조에 일순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할 말이 없을 수밖에 없었다. 오랜만이에요. 그러게요! 무슨 고민 있어요? 난 네가 싫어. ……? 대화 흐름의 상태가?
뜬금없음이 아윈급이었다. 누구도 따라갈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성에 다른 사람도 아닌 이벨린이 도전할 줄이야. 나는 간만에 얼굴을 마주한 친구로부터 다짜고짜 네가 싫다는 말을 네 번 연속으로 들은 입장이 되어 혼란의 도가니탕에 입욕신청을 했다. 대체 이런 상황에선 무슨 대답을 꺼내야 알맞은 응수인 걸까.
이벨린은 내게 번민의 시간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 저는, 저는 원래 그런 걸 몰라요. 알아서도 안돼요. 남을 싫어하는 것 따위, 해선 안돼요.”
“ …….”
“ 하지만 라테가 싫어요. 싫어하면 안 되는데, 그런데 싫어요. 전부 라테 때문이에요.”
에엥……?
덧붙여진 대사는 내게 더 큰 혼돈만을 안겨주었다. 그게 뭐지. 사고내면 안돼요, 차사고 같은 건 나쁜 거예요. 그런데 당신이 내 차에 치였어요. 전부 당신 때문이에요.
“ ?”
“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내 것도 마음대로 빼앗아가고, 나쁜 마음을 가르쳐서 날 망가뜨리고…….”
“ 잠깐, 잠깐만요. 아윈으로 단련된 줄 알았더니 이건 또 색다른 소통의 어려움이네. 그러니까, 이벨린?”
나는 손까지 들어 타임을 요청했다. 정리가 필요하다. 해석도 더해져야하고. 대체 이게 무슨 혼세마왕이 거대해 질것만 같은 혼란의 소통장애란 말이냐. 쉼 없이 흘러나오는 상대의 이야길 잠시 끊고 난 처음부터 도로 짚었다.
“ 일단 이벨린은 내가 싫은 상태예요. 그렇죠?”
고개를 끄덕인다.
“ 좋아요. 그럼, 언제부터 내가 싫었나요? 만나자마자는 아니었겠죠. 그랬으면 은인이니 친구니 거릴 때 그냥 꺼지라고 했을 테니까.”
“ 라테가……내걸 뺏어가기 시작했을 때부터요.”
“ 아, 그랬군요. 근데 제가 이벨린의 뭘 뺏었나요?”
“ 사랑.”
“ 네?”
“ 내가 받아야 할 남들의 사랑.”
“ ……?”
순간 머릿속으로 특정한 이미지가 빠르게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슈가 슈X룬, 쇼코룬~ 당신의 하트를 픽!업!
나는 망상을 지우고 재차 입을 열었다.
“ 제가 어떻게 남들의 하트를…아니, 사랑을 뺏었다는 얘기예요?”
“ 돌려주세요.”
“ 뭘요?”
“ 전부 다.”
으으으음. 난 잠시 동안 말을 아꼈다. 못 본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벨린은 얘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답답한 담화스킬을 구사하고 있었다. 전부 다. 그래, 전부 다 뭐?
문득 뇌리에 간밤의 꿈이 스쳐지나갔다.
‘ 어장관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짜릿해! 늘 새로워! 어장관리가 최고야!’
꿈 속 인터뷰 상대의 얼굴은 이벨린이었다.
허, 나는 터져 나오는 헛숨을 지체 않고 뱉었다. 그게 그냥 개꿈이 아니었어? 이벨린은 지금 날더러 자기가 받아야 할 사랑을 뺏어갔다고 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네가 싫다고, 뺏어간 것을 돌려놓으라며 아이도 안 할 투정을 부려대고 있다.
난 지금껏 가지고 있었던 대상에 대한 평가를 전면 수정해야 할 당위성을 느꼈다. 그 어떤 천사도 본인의 어장이 깨졌다며 징징거리지 않는다. 나는 이벨린이 단순히 마음이 여려 상대의 애정공세를 거절하지 못하는, 더해 결정장애가 조금 있는 그런 캐릭터인줄로만 알았다. 어장도 우스갯소리로 한 소리지, 정말로 그녀가 동시다발적인 여럿의 애정을 즐거워하고 그것을 계속 끌어가고 싶어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다.
아이고 두야. 난 머리를 짚었다.
‘ 장난, 몰래카메라. 둘 다 아니고.’
어설픈 관심법으로도 이벨린의 진심 여부를 판가름할 수 있었다. 뒤통수가 당황스러울 만큼 얼얼하다.
“ 그러니까…아윈이나, 뭐 그런 걸 돌려달라는 거예요?”
“ …….”
“ 허어.”
긍정의 대꾸는 없었지만 표정을 보니까 맞았다. 진짜야. 진짜구나. 얘 정말 나한테 아윈이나 케니스 그런 애들의 애정을 도로 내놓으라고 요구중인 거구나. 케니스야 나한테 있지도 않았지만 아윈이라고 해서 돌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아니 애초에,
“ 저기 이벨린. 아윈은 산책 도중 잃어버린 뽀삐나 이사 할 때 잘못 흘리고 간 미미인형 같은 게 아니에요. 자아가 짱짱한 사람인데 제가 무슨 수로 돌려주고 말고 해요.”
아윈이 이벨린한테 돌아가라 한다고 돌아갈 놈인가? 가서 목 따고 부메랑마냥 귀환하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물론 보낼 마음도 전혀 없지만.
나는 말을 던지며 이벨린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판단의 원인을 되짚었다. 난 왜 그녀를 천사표라고 여겨왔을까. 늘 상냥한 미소로 주위를 대해서? 다가오는 사람들을 의심하지 않아서? 그러고 보니 단발성 악역들에게도 악의를 내비친 적이 없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럭저럭 천사 근처가 아닌가 싶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니 커다란 함정이 있었다.
이벨린은 여주인공이었다. 적어도 현실이 소설의 전개를 따라가는 동안은 그랬다. 그 어떤 무모한 짓을 일삼아도 털끝하나 다치지 않고, 사람들은 만나자마자 그녀를 좋아한다. 그녀에게 해를 입히려 한 악역들은 항상 실패와 더불어 시도한 악행의 몇 배나 되는 죗값을 받고 퇴장 당했다. 만약 위 같은 판국이 유학이후로 한정된 것이 아니라 더 이전부터, 아주 어린 시절부터 꾸준히 그래왔다면, 이벨린은 높은 확률로 천사가 아니라…….
‘ 덜 배운 아이.’
학습이 부족한 상태에 가까울 것이다. 착한다기보다 나쁜 감정을 배워본 적이 없는 아이. 남들이 나서서 다 해주고, 사랑만 주었기 때문에 상냥하게 웃는 것 외엔 할 줄 모르는 공백 투성이인 껍데기만 어른.
난 미간을 좁혔다. 예전에 알던 사람들 중에 다소 비슷한 케이스가 있었다. 지나친 애정 탓에 미숙하게 자란 아이는 여전한 애정 속에서는 지닌 흠이 티가 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시기는 아이에게서 사랑이 거둬지고 난 이후였다. 치마폭에서만 성장한 아이는 그곳을 나오면 결국 백치가 되고 만다.
“ 아녜요, 돌려줘요. 라테가 뺏어갔잖아요. 모두 라테 때문이잖아요? 원래 제 거예요. 제 거인 게 맞아요.”
“ 왜 이벨린 거예요? 혼자 다 가지기엔 너무 많을 텐데?”
“ 항상 그랬어요. 당연히, 다 제거였어요.”
결론을 내렸다. 이벨린은 잘못 자랐다. 배워야 할 것을 가르쳐주지 않는 환경에 너무 오래 있었고, 애정이 조금이라도 거두어지면 불안하고 초조해 할 정도로 해당 환경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 주인공병?’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아무튼, 그래, 이제 어쩌면 좋을까. 짐작이지만 얼추 상대를 판단하고 난 기분은 제법 씁쓸했다. 케니스의 태도를 보건데 이벨린의 주인공버프는 사라졌거나 최소한 약해졌다. 그런 마당에 당사자는 과거의 영광을 바라며 변환 환경을 모조리 내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상냥하고 차분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던 내 친구-앞으로는 아닌 것 같지만-가 알고 보니 덜 배운 아이였다니.
나는 날숨을 크게 한번 뱉었다. 관자놀이를 누르던 손을 떼 눈따따의 머리통 위로 얹는다. 좋아, 눈따따 조수파워 충전. 이제부턴 단호하게 갑니다.
“ 아니에요, 이벨린. 틀렸어요.”
“ 뭐가…….”
“ 솔직히 이벨린, 지금 혼란스럽죠?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고 뭘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르겠고, 근데 나는 밉고 그러니까 무작정 여기까지 찾아온 거죠? 지금 머리가 많이 복잡하고 이것저것 다 이상하다고 느껴질 거예요. 안 그래요?”
“ …….”
“ 이유를 알려줄게요. 이벨린이 틀렸어요. 이벨린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모조리, 전부, 틀렸어요. 그래서 그래요. 이벨린이 틀려서.”
난 몇 번이고 강조했다. 아마 여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일 것이다. 솔직히 이벨린에게 필요한건 지금 같은 단편적인 말 몇 마디가 아니라 장기간의 보살핌이었다. 훈육과 가르침이 섞인, 잘못된 것을 꺼내 부수고 올바른 것을 도로 심는 작업. 다년간의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다만 버려야 하는 믿음을 부수는 과정에 말 몇 마디가 도움이 되어준다면 좋겠지만.
“ 잘 들어요. 내가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죽어도 아윈과 공작 각하의 애정은 이벨린에게로 되돌아가지 않아요. 왜? 이벨린 게 아니니까. 옆 나라 왕이 갑자기 서거한다고 그 나라가 이벨린의 영토가 되지는 않는 것처럼.”
“ …….”
“ 이벨린은 나 때문에 당연하던 것들이 비틀렸다고 생각하겠죠. 그렇지 않아요. 이벨린은 지금까지 가짜 세상에 살았고, 이제야 진짜 세상으로 나온 거예요. 이벨린이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은 나를 원망하는 게 아니라 가짜 세상을 하루빨리 잊어버리는 거고.”
이야기 도중 저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대꾸 없이 입을 앙다문 이벨린의 표정이…….
“ 받아들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요.”
이전까지 품어왔던 이미지와는 정말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 이벨린은 더 이상 타인의 인생에서까지 주인공은 아니에요. 이벨린의 삶에서만 주인공이죠. 남들이, 각자 다 그런 것처럼.”
한때마나 천사라고 생각했던 상대가 악의에 가득 찬 얼굴을 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정이 가지 않았던 친구와의 인연에 결국 작별을 고했다.
여주인공은 사라졌다.
*
기껏 도움이 될까 단호박으로 던졌던 말은 날 향한 이벨린의 원망에 불씨만 더 키운 것 같았다. 상대방 입장에선 듣기 싫은 설교만 늘어놓은 셈이니 어쩔 수 없나. 난 이벨린이 떠나간 뒤 머잖아 그녀에게 대한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젠 만날 일도 없는 생판 남이 됐으니 그저 알아서 잘 살길 바랄 수밖에.
“ 친구가 하나 줄었어, 눈따따야.”
좋아하지 않았으니 상관은 없지만. 왜 정이 안 갔을까 했는데 상대가 먼저 내게 정을 주지 않아서 그랬나보다. 나는 눈따따의 양손을 꽉 붙들었다.
“ 기분이 애매한데 남자친구나 보러 갈까?”
난 눈따따에게 말을 거는 형식을 취하며 할 행동을 정했다. 마탑으로 가자. 어차피 오늘 결혼반지를 보러 나가기로 한 마당이니 만나기는 만나야했다. 허구한 날 아윈이 먼저 찾아와 놀라기만 했으니 이번엔 내가 먼저 급습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아윈을 놀라게 해줘볼까!
‘ 깜짝 놀라는 아윈……?’
왜 상상이 안 되지. 영 그려지지 않는 아윈의 놀란 모습을 짐작해보려 애쓰다 나는 포기하고 시동어를 입에 올렸다. 대경실색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어쨌든 놀랐으면 좋겠다.
마탑 최상층으로 이동한 나는 이곳저곳을 살핀 뒤 반 바퀴를 돌고 나서야 방의 주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 자….”
난 헙 입을 막았다.
‘ 자고 있잖아?’
예상외의 광경이 시야를 메운다. 나는 눈을 감은 모습이 꼭 인형 같은 얼굴을 묘한 기분으로 쳐다보았다. 아윈은 제 침상 위에 곤히 잠들어있었다.
‘ 자세 바르네.’
안 그럴 것 같아선 표본마냥 반듯하게 누워있다. 난 행여 대상이 깨기라도 할까 조심조심 발꿈치를 들고 걸음을 옮겼다. 누운 상대와 점차 가까워지는데, 으음……. 갑자기 침이 넘어가는 이유 좀.
‘ 자는데도 빛이!’
머리맡에 도착한 나는 탄성을 삼켰다. 얘는 뭔 발광인간인가. 엘프 드래곤 이런 것처럼 전설 속 발광족의 숨겨진 후예, 뭐 그런 거 아냐? 난 불신의 눈길로 미동조차 않는 아윈을 내려 응시했다. 거 속눈썹도 엄청 기네.
‘ 조, 좀 더 가까이서 관찰해볼까.’
이건 종족이 불분명한 상대의 생김새를 보다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스스로에게 내걸 사유를 만들며 슬금슬금 아윈과의 간격을 좁혔다. 아윈의 낯 위로 그늘이 진다. 후…. 누구 남친인지 그늘마저 잘생겼다.
난 숙이던 고개를 대상과 두 뼘 정도의 간극을 남긴 채로 멈췄다. 하나로 땋아 뒤로 넘긴 머리카락은 흘러내려 방해되지는 않았다.
그래그래. 얘가 바로 내 남친이에요. 어째 뿌듯한 감흥으로 눈에 가득 들어오는 아윈의 이목구비를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을 때였다. 굳게 닫혀있던 입술이 예고도 없이 달싹였다.
“ 왜 멈춰?”
============================ 작품 후기 ============================
안 멈추면 뭐?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