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5 8. 전에 알던 너도 아냐 =========================================================================
고백인 듯 고백 아닌 고백 같은 말을 들었다. 황야를 넘어 대륙의 무법자인 아윈이 나는 솜털하나 다치게 못 하겠다고 한다. 다른 놈이 건드리는 꼴도 두고 볼 수 없단다. 나, 나는 그럼, 무법자의 여인?
“ 꺄아아아.”
어울리지 않는 새된 비명을 지르며 난 침대를 뒹굴었다. 뒹굴어도 될 만큼 침대가 넓다니, 역시 귀족 팔자가 좋긴 좋네. 아니 이게 아니라, 아무튼.
“ 눈따따야…난 이제 어쩌면 좋으니.”
품에 안고 있던 눈따따를 꺼내 괜히 말을 걸었다. 눈따따는 더 이상 평범한 인형도, 보통의 GPS도 아니었다.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새로운 기능이 생겼다. 아윈이 방에서 사라지기 전 붙들고 제법 공들여 마법을 새겨 넣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와중에도 번쩍번쩍 빛나던 아윈의 얼굴을 감상하느라 미처 뭔 마법이냐고 물어보지도 못했다. 마음을 자각했어도 상대의 생김새가 치명적인 건 역시 똑같다.
“ 어서 심장과 눈을 단련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하지?”
눈따따는 답을 주지 않았지만 본디 침묵은 긍정이라고 했다-눈따따는 긍정밖에 못하는 좋은 상담원이었다-. 확실히 내 안구와 심장은 보다 튼튼해질 필요가 있었다. 자칫하다간 남자친구 때문에 실명한 최초의 여자가 될지도 모르는 판이다. 하여간 남친이 너무 해악해도 문제…는 어머어머! 나 방금 뭐랜 거니? 남친이라니 어머어머! 주책이야 어머어멋!
나는 아침부터 생난리를 떨다가 기력을 반쯤 소진하고서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야단이 지나친가. 생각이나 감정이 영 주체가 되질 않았다. 마치 첫사랑의 열병을 앓는 어린 소녀 같다.
‘ 영 틀린 표현은 못되지, 응.’
김혜정으로 스물다섯 해를 살면서 연애를 해보지 않았던 건 아니다. 횟수로만 따지면 오히려 경험이 많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로 설렘이나 열정이 빠진 어딘가 빈껍데기 같은 관계들이었으니 지금 같은 감정은 기실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난 머릿속으로 두둥실 아윈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슴이 세차게 두근거린다. 낯설지만 기분 좋은 감각이었다.
“ 흐흐…흠흐흐.”
“ 아가씨!”
“ 어헉 깜짝이야.”
나는 바람직하지 못한 상상을 하다 걸린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문을 돌아봤다. 아니 딱히 그런 상상은 전혀 없었지만, 아무튼 괜히 놀랐네. 난 표정을 정리하며 다른 저택에서 했으면 해고당할만한 실례를 저지른 에슐라에게 눈길을 주었다. 얜 왜 또.
“ 에슐라, 노크를 하면서 동시에 문을 열면 노크의 의미가 사라지지 않니.”
“ 아가씨, 아가씨! 그거 들으셨어요?”
“ 뭘….”
“ 여기 보셔요.”
에슐라는 허둥지둥 내 눈앞에 대고 지도를 펼치지 시작했다. 가만 보니 조그마한 흑연도 하나 챙겨왔다. 응? 뭘 하려고?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자니 그새 제국지도를 완전히 핀 에슐라가 특정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듯 짚었다. 음, 나는 지리에 매우 약한 사람인데.
“ 거기가 어디야?”
“ 가넷 후작가요. 그리고…….”
지도를 붙잡은 에슐라가 흑연을 쥔 다른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후작가라며 알려준 곳에 대고 연달아 엑스 표를 치기 시작한다. …엉? 어엉?
“ 이거 설마.”
“ 멸문했대요!”
“ 헐.”
실감나는 전달이었다. 에슐라 너…언제 이런 스킬을……? 아니 그보다, 뭐시여? 멸문?
“ 가문 망했대? 왜?”
“ 반역이래요.”
“ 풉, 뭐!”
너무 놀라 공기를 다 뿜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반역이 설마 내가 아는 그 반역? 나는 역할을 다한 지도를 차곡차곡 갈무리하는 에슐라를 붙잡고 황당한 낯으로 물었다.
“ 반역? 무슨 반역? 후작이 황성으로 군사라도 진격시켰대?”
“ 그건 아니고, 예전에 소탕한 반역집단에 몰래 한발 걸쳤던 증거가 나왔다나? 그랬어요.”
“ 증거?”
“ 네. 뭐 빼도 박도 못하는 물증이라던데…아! 그리고, 전부 마탑이 밝혀냈대요.”
“ 아하……뭐!”
그런!
눈이 번쩍 뜨인다. 마탑이란 말을 듣자마자 어떻게 된 건지 사정이 얼추 그려졌다. 가넷 후작이 상병신도 아니고 가만히 있던 마탑에게 시비를 걸어 화를 자초했을 리 만무하다. 아윈이 나섰을 게 뻔하고, 나를 죽이려했던 페리도트를 향해 내려진 형벌일 것이다.
‘ 형장의 이슬 최후인가.’
얼굴은 예쁘지만 심각한 인격적 결함을 타고 태어나 악녀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페리도트 가넷. 그 어딘지 허망한 듯 시원한 듯 묘한 그녀의 결말이었다. 지금껏 벌인 악행들을 감안하면 단두대에서 목이 떨어지는 건 지은 죄에 비해 편안한 죽음이 아닌가싶지만, 반역죄라는 오명 아래 가문전체가 박살났으니 또 적절한 죗값을 치룬 건가 생각되기도 했다. 반역이라니, 정말 대단히 알찬 풍비박산이다.
‘ 누명일까?’
진짜로 행한 일을 이제와 공교롭게 덜미가 잡힌 건지, 아니면 조작으로 시작해 조작으로 끝나는 마른하늘의 날벼락인지 궁금해졌다. 나는 어느 쪽일까 판가름해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나중에 아윈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에슐라는 후작가의 몰락에 대한 주위의 반응들까지 내게 조잘조잘 전달해주었다.
“ 아무튼 소문이 파다한데, 솔직히 안타까워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얘기를 듣자니 가넷 후작가의 멸문은 지금 제국 내 최고의 화젯거리이자, 동시에 대다수에게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게 하는 희소식인 모양이었다. 어, 어머나. 딸만 막장으로 살아온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었네. 부전여전에 모전여전이었구먼?
친구 누구네는 남몰래 축하파티까지 벌였다는 말을 들으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하기야 나라도 페리도트 가는 길 스프라이트를 뿌려주고 싶긴 하겠다. 가시는 걸음 사이다 병뚜껑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 그리고 자기보다 다섯 살 어린 남자친구랑 몰래 만나던 풋찌언니는요, 결국 남자친구네 누나한테 걸리는 바람에 둘이 머리채를 붙잡고 싸웠대요.”
에슐라의 이야기는 어느새 후작가의 처참한 최후에서 연하남 남친을 사귀던 풋찌가 피의 혈전을 벌였다는 내용으로 자연스레 넘어갔다. 오랜 사투 끝에 머리카락과 남자친구를 모두 잃고 말았다는 풋찌의 상처뿐인 스토리를 전해 듣다 나는 퍼뜩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여기서도 남녀가 서로 ‘사귀자’고 하면 그때부터 연인인가?
…그런가?
“ 에슐라.”
“ 그래서 그 언니가 눈 밑에 점을……네?”
“ 있잖아, 너흰 남자친구 사귈 때 어떻게 말해?”
“ 어떻게 말하냐뇨?”
“ 한쪽이 사귀자고 하면 그때부터 연인이야?”
“ 아하. 그야 보통 그렇죠!”
긍정한 에슐라는 이어 묻지도 않은 주변인들의 고백성사기를 줄줄이 늘어놓기 시작했다. 난 영혼 없는 고갯짓으로 그에 호응하며 다른 생각으로 머리를 채웠다. 사귀자고, 혹은 연애하자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건 이 사회도 마찬가지인가보네. 어, 그럼 아윈은 아직 내 남…크흠, 친이 아니라 썸남인가? 나 걔랑 썸타는 사인가? 음?
“ 에슐라, 혹시 귀족들도 그런 식으로 사귀자고 하고 서로 연애할까?”
“ 네?”
생각도중 저절로 튀어나간 물음에 에슐라가 조잘거림을 멈추고 나를 쳐다봤다. 물끄러미 시선이 닿는다. 그걸 왜 자기한테 묻느냐는 의문이 표정 위로 고스란히 읽혀 나는 조금 민망해졌다. 그, 그러게.
그 사이였다.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아가씨, 저 릴리예요. 아래층에 손님이 오셔서요.”
“ 들어와. 내 손님?”
“ 네. 응접실로 모셨어요.”
아침식사를 끝내고 방에서 쉰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었다. 방문객이 있기엔 이른 시간이라 난 의아함을 느끼며 앉아있던 몸을 일으켰다. 부지런한 건지 성미가 급한 건지, 얼굴모를 상대의 성정을 짐작해보며 내려갈 채비를 하는데 문득 릴리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응? 왜 그렇게 빨개?
무언가 낌새를 읽었는지 에슐라가 릴리의 곁으로 쪼르르 발을 놀렸다.
“ 뭔데? 손님이 어떻길래?”
“ 그게, 모자를 쓰고 있어서 생김새는 잘 안보였는데…일단 키가 크고.”
성별은 언급하지 않았지만 눈치로 보아 남자일게 훤했다. 아니나 다를까, 붉게 물들인 낯으로 릴리가 말을 이었다.
“ 분위기에서….”
“ 응응.”
“ 멋짐이 느껴졌어.”
“ 어머.”
그리고 나는 분위기만으로도 멋짐을 풍겨내는 용자가 이 시각부터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에 한층 의아해졌다. 누구여 대체.
“ 또 내가, 누구라고 전해드릴까요 하고 물었거든?”
“ 응응. 근데?”
“ 그랬더니 일단 아가씨를 불러달라고 하는데, 목소리에서도…멋짐이 느껴지더라.”
“ 대박.”
멋진 분위기를 두른 용자는 성대마저도 멋진 모양이었다. 난 호들갑을 떨기 시작하는 에슐라를 뒤로하고 방을 나왔다. 허어, 내 협소한 인맥 중에 저렇게 굉장한 사람이 있었단 말이야? 말만 들으면 멋짐영지에서 태어나 멋짐수로 목욕을 하고 멋짐요람에서 자라 삼시세끼 멋짐만점 멋유식을……. 실없는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발은 금세 응접실에 도착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서 손님의 용모를 직접 확인했고,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 어!”
“ 바로 알아보는군.”
손님은 각 잡힌 우아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있었다. 내가 무려 삿대질로 아는 체를 하자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자를 천천히 벗는다. 나는 대단한 결례를 저지르고 있는 스스로의 손가락을 냉큼 내리고 상대의 맞은편으로 가 착석했다. 아니 이 양반이 여길 방문할 줄이야.
“ 각하.”
밤하늘 같은 머리카락과 남색 홍채가 눈에 익다. 이 세계에 세 명뿐인 조각미남 중 한명인 케니스였다. 남주인공2이기도 하고, 내 친구이기도 하지. 난 앉은 채로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찾아올만한 마땅한 이유가 짐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병문안? 아니지, 기절했었다는 거 모를 텐데. 님 왜옴?
“ 어쩐 일로 여기까지 오셨어요? 모자는 또 왜 쓰고 오셨대.”
“ 성가신 게 싫었을 뿐이다.”
릴리의 말을 들은 탓인지 목소리에서 어째 멋짐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의식하고 나니 귀에 들어오는 케니스의 음색은 낮은 울림이 꽤나 감미로운 편이었다. 오, 듣기 좋다. 이런 걸 뭐라더라? 음색깡패? 더 나아가 고막남친?
그래도 물론 심장의 경보기를 울릴 정도는 아니었다. 나는 내심 아윈을 떠올렸다.
‘ 역시 내 썸남 목소리가 더…….’
콩깍지가 낙낙한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케니스가 다시 입을 뗐다.
“ 상담할 게 있다.”
“ 아아, 네……네?”
눈이 절로 휘둥그레진다. 난 확인 차 도로 물었다.
“ 상담이요?”
“ 그래.”
“ 저한테?”
“ …그래.”
“ 각하께서?”
“ ……그래.”
얼핏 표정에 후회의 기색이 스쳐간 느낌도 든다. 난 헛기침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건 올바른 친구의 자세가 아니지. 차분하고 진지하게 상대의 고민을 들어주어야해. 나는 놀람을 없애고 진중한 얼굴과 눈빛을 장착했다. 무게 있고 신뢰감이 넘치는 눈길로 상대를 응시한다.
“ 뭐든 말씀해보세요.”
“ 눈빛이 부담스럽군.”
“ …믿음직한 상담사의 안광이려니 생각해주시죠.”
이어 케니스는 잠깐 갈등하는가싶더니 차츰 얘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화두는 이벨린이었다. 이런 주제까지 상담하는 걸 보니 케니스의 몇 없는 친구자리에 내가 확실히 들어가긴 한 모양이군. 왠지 뿌듯하네. 난 상대의 말에 집중하며 양손을 깍지 껴 턱에 갖다 댔다.
“ 그러니까, 어느 날부터 갑자기 이벨린에게 손을 못 대게 됐다. 이거죠?”
내 정리에 케니스가 매끈한 턱을 끄덕거렸다. 부서지거나 다칠까봐 차마 손댈 수 없다, 뭐 이런 로맨틱한 표현은 유감이지만 전혀 아니었다. 케니스에게 있어 손을 못 댄단 의미는 즉….
“ 대충 언제부터 그러셨는데요?”
여성혐오증상이 이벨린한테도 영향을 끼친단 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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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언니의 화장전후를 내가 표현해볼게
나: ?
막내: 화장 전- "히이이잌" 화장 후- "히익"
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