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1 6. 에이레네의 밤: 저잣거리 =========================================================================
나는 인형들을 훑으며 혹시 은발에 붉은 눈과 비슷한 외양은 없나 찾아 헤맸다. 당사자한테 빡칠 때마다 집구석에서 인형에게 못을 박으면 그 재미가 나름 쏠쏠할 것 같은데. 으음……에이, 없네. 생각난 김에 주문제작할까.
꽤 잘 만든 장미인형을 골라 황녀언니에게 선물하고, 돌아다니다 발견한 장신구 노점에서 장미인형의 이파리에는 어떤 반지가 어울릴지 토론하던 와중이었다. 상품들을 구경하다말고 황녀언니가 다른 곳에 반짝 시선을 주었다. 그러더니 그대로 눈을 고정하는 모습에, 나도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
“ 오라버니?”
놀람을 숨기지 못한 부름이 황녀의 입을 타고 흘러나왔다. 시선의 끝에는 이벨린과 물고기 두 마리가 여전한 찬란함으로 사방의 이목을 주워삼키고 있었다. 와, 시간이 언제 이렇게 지났담. 그들은 연극관람을 마치고 근처 거리를 구경나온 것 같았다.
“ 로젤리아.”
황태자가 용케 이쪽을 발견하고 표정을 바꿨다. 성큼성큼 긴 다리로 가까워지는 것이 순식간이다. 참, 이 둘이 사이 돈독하지.
“ 여긴 어떻게…나올 거라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 오라버니야말로, 여기서 만나 뵙게 될 줄은 몰랐어요.”
“ 거리는 위험하다, 로젤리아. 호위가 붙어있긴 하지만……다섯 가지고는 부족해.”
론드미오가 미간을 좁혔다. 그 불편한 심기에서 여동생을 향한 걱정이 그대로 느껴졌다. 뭐시야, 이 양반 팔불출인가! 호위 다섯이 적다고 툴툴거린 황태자는 이내 나와 아윈을 번갈아 응시하고 눈에 이채를 띄었다. 조합이 굉장히 의외라는 기색이었다.
“ 어떻게 같이 있지?”
“ 우연히 만났어요.”
황녀가 해사하게 웃으며 말을 받았다. 내가 아윈을 달고 다니게 된 건 딱히 우연은 아니었지만 나는 일단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이벨린과 케니스가 이 편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 오랜만이에요, 공.”
난 케니스와 인사를 나누는 황녀언니를 열심히 관찰했다. 나름 매의 눈으로 살폈으나 지금은 별다른 동요가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다행이군. 이벨린은 호칭이 생략되니 상대가 누구인지 모르겠는 듯 선 자리에서 눈만 멀뚱거리고 있었다. 황녀가 오라버니 운운한 건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론드미오가 그에 웃으며 서로 소개시켜준 뒤에야 이벨린은 황녀에게 인사를 올렸다.
“ 아, 이 분이.”
황녀언니의 혼잣말은 가장 가까이 붙어있던 내게만 들릴 정도로 작았다. 이 분이? 벌써 소문이라도 도나? 의아함을 품는 순간 이벨린이 다른 주제를 꺼냈다.
“ 갑자기 사라져서 걱정했어.”
그녀는 아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고만 있던 아윈이 그제야 이벨린에게로 눈을 돌린다. 정말로 걱정했던 건지 인사치렌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부드럽고 상냥한 어조였다. 곧장 대답이 없자 그녀가 말을 추가했다.
“ 왜 먼저 가버린 거야?”
어머 얘!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거닛?! 는 몰라서 묻는 게 맞을 것이다. 여주인공 이벨린은 내가 재밌으면 당연히 남들도 재밌을 거라는 다소 뇌맑은 인식이 없잖아 있는 캐릭터였다. 아윈이 그 물음에 대고 짧게 응수했다.
“ 재미없어서. 연극이.”
오호라. 이 자식 언어순화 좀 보시게. 그냥 재미없는 수준이었니? 언제는 좆같다더니? 엉? 지읒을 막 남발하더니? 이벨린은 그 간단한 이유에 조금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 아, 미안, 나는 그럴 줄은 모르고….”
난감해하는 얼굴을 보니 연극이 관람도중 탈주하고 싶을 만큼 노잼이라는 가정은 아예 하고 있지 못했던 게 뻔했다. 황태자랑 케니스가 고생 좀 했겠구만. 연극 꿀잼인 척 하느라. 이벨린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고르자 곁의 케니스가 표정을 굳혔다.
“ 굳이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나.”
엉? 얜 왜 지가 난리래.
“ 요구한적 없는데?”
어어? 여긴 또 이렇게 받네.
“ 상대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군.”
“ 재미없는 걸 재미없다고 벙어리처럼 말도 못하는 게 배련가?”
헐!
이거 뭐지. 이 분위기 뭐지! 갑자기 심상치 않은 기류가 케니스와 아윈의 사이에서 흐르기 시작한다. 나는 둘을 감싼 싸늘한 기운에 눈을 깜박이다 헙 하고 입을 막았다. 이…이건! 남자주인공들 끼리의 신경전, 대립! 로맨스소설에서 여주인공을 가운데 두고 꼭 한 번씩은 나온다는 그거? 와 대박 와작와작.
근데, 지금 이건 좀 상황이 애매하다. 나는 팝콘을 갈구하던 것을 멈추고 좋지 못한 시선을 교환중인 둘을 번갈아 살폈다. 이벨린이 원인이 된 건 맞는데, 여느 논점처럼 ‘내가 그녀를 더 사랑해’ ‘아니 나다’ ‘나야’ 이런 식의 갈등이 아니었다. 외려 ‘여주인공 핍박하지 마’ ‘니가 뭔 상관’ ‘이 새끼가’ ‘뭐’ 여기에 부합하는 느낌이었다. 으응? 왜 물고기들끼리 이런 걸로 싸우고 난리야, 이것들이? 지분다툼을 해도 모자랄 판에 얘네 뭐시당가.
가만 보면 그래, 문제는 아윈에게 있었다. 원작이었다면 연극 도중 밖으로 도망치는 행동을 선택했더라도 이유를 묻는 것에 ‘급한 일이 있었다’는 식으로 둘러댔을 것이다. 앞장서서 연극을 보러가자 이끈 이가 이벨린인데, 그 앞에 대고 ‘연극이 노잼이라 튄 건데’하고 곧이곧대로 말해버리면 당사자는 면목이 없어지는 게 당연했으니까. 아윈이 본래 남의 입장 따위 개의치 않아하는 성격은 맞지만, 그게 이벨린에게도 적용되는 건 확실히 원작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었다. 정말 뭘까. 물고기3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아윈의 뻔뻔스런 얼굴에 케니스가 눈썹을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앗 나 저 표정 전에 자주 봤는데. 냉미남 전용 한쪽눈썹 씰룩이잖아. -_-^ 이거. 아무튼 저건 케니스의 기분이 상당히 구리다는 증표였다. 마찬가지로 아윈도 웃고 있는 반면 눈빛이 싸늘했다.
어……설마 이대로 싸우나?
자, 잠깐만.
세계멸망의 위협을 느낀 내가 황태자를 급히 찔렀다.
“ 전하.”
“ 음?”
“ 좀 말려 봐요, 저기 둘.”
“ 내가 왜?”
잘 보니 이 자식은 팔짱까지 끼고 있었다. 아니 이놈이? 자기 일 아니라고 태평함이 굉장하신데?
“ 싸움나면 어떡해요.”
“ 싸우면 되지?”
“ 뭘 돼요 옆에 있다가 죽게 생겼는데. 휘말리면 전하가 저 건져줄 거예요?”
황태자는 내 말에 황녀와 이벨린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그러더니 심각하게 대꾸한다.
“ 손이 모자라.”
야이…….
“ 발로 건지는 것도 괜찮다면 고려해 보겠다.”
이게 아윈 같은 대답을 하고 앉았다. 나는 가면도 썼겠다 관리하지 않은 표정을 원하는 대로 구기며 말을 받았다.
“ 그러다 실수해서 상반신만 건지면요?”
“ 그건…안타까운 일이지만 명복을,”
“ 치워요. 흑흑 이벨린!”
나는 불경하게 황태자의 말을 자르고 이벨린에게로 들러붙었다. 멀거니 서있던 그녀가 나를 돌아본다. 점점 흉흉해지는 아윈과 케니스의 분위기에 내가 막 저 둘 좀 말려달라며 부탁하려던 참이었다.
때마침 아윈의 품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갑작스레 알람처럼 울려대는 소리에 멀뚱히 굳어있자니, 아윈이 제 상의에서 조그만 구슬 같은 걸 꺼냈다. 구슬은 아윈의 손에 닿는 즉시 뚝 소리를 멈추더니 이내 제 위로 화면을 크게 띄웠다.
저건…통신구?
[ 탑주님! 탑주님 저 보이십니까? 큰일 났습니다! 도와주세요 탑주님!]
간달프! 나는 간만에 보는 아는 얼굴에 자칫 손을 흔들 뻔했다. 고작 한번 만난-그것도 공적인 일로-사이였지만 외양이 간달프라 그런지 느껴지는 친밀감이 남달랐다. 속으로 반가워하고 있으려니 아윈이 귀찮다는 듯 대꾸한다.
“ 뭔데.”
[ 지난달에 의뢰 넣었던 끼다로와 왕국의 애래서기어 왕자 있잖습니까, 그 양반이 지금…어이쿠! 부수지 마세요! 어이쿠!!]
난리였다. 상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쪽 상황이 매우 급박하다는 것 하나는 생생히 전해져 오고 있었다. 가, 간달프……. 타이밍은 고마운데 거기 괜찮은 거니? 애래서기어 왕자는 대체 누구길래 이름이 그렇게 재수 없는 거니? 다급함이 넘치는 화면 너머의 판국을 지켜보던 아윈은 이내 짜증이 묻은 손길로 머리를 한번 쓸어넘기곤 통신을 끊었다. 아, 가는가보다.
통신구를 도로 품에 넣은 아윈이 찰나 내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응? 나 왜? 생각이 들기 무섭게 뭔가가 날아든다. 뭐, 뭐야! 엉겁결에 받아들자 인형이었다. 인형?……어…나 이 성의 없는 눈코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야 잠깐만.
“ 고객님 분신. 소중히 모셔.”
호칭이 다시 고객님으로 돌아왔구나, 다행…이 아니라 뭐?
“ 이게 왜 내 분신,”
슉. 미처 따지기도 전에 아윈은 그대로 사라졌다.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자리와 양손으로 잡은 인형을 번갈아보다 난 마음속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미친, 이건 대체 언제 산거야?
“ 분신?”
아윈이 던지고 간 단어에 황태자가 관심을 보였다. 위치가 제멋대로인 눈코입에 노란 실타래가 머리카락이랍시고 붙어있는 인형을 발견한 론드미오가 순간 멈칫한다. 야, 너 표정이…?
“ 다, 닮았군.”
너 지금 웃음 참니?
케니스도 막 내 손에 들린 인형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 말은 없었지만 대신 느낌이 알려주고 있었다. 저건 필시 닮았다고 생각하는 안색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분명 내 얼굴과 인형을 번갈아 쳐다보는 거 내가 방금 봤거든, 얘? 아오 이 망할 것들이!
+덤. (연기대회를 무사히 마쳤다면)
죽는 연기를 훌륭히 선보인 라테.
“ …후회 없는……삶…이었다…….”
털썩.
“ 10.”
“ 10.”
“ 10.”
“ 크크킄 이것이 너희와 나의 눈높이다.”
흑막 같은 웃음소리와 대사를 읊어준 뒤 당당히 1등 상품을 챙겼다고 한다.
+덤덤. (장붉피를 보러 간 케니스)
보러가자 이끌기에 보러왔다. 어차피 연극이란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별 생각 없이 케니스는 자리에 착석한다. 오는 길에 스친 웬 행인이 ‘감독새끼 죽여버리겠어’라고 중얼거렸던 것도 같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 기억을 넘겼다. 이내 연극의 막이 오른다. 30분 뒤.
“ …….”
심연처럼 깊은 남색 눈동자가 남들은 눈치 채지 못할 미세한 지진을 일으켰다.
재미없다.
심각하게 재미없다.
당황스러울 만큼 재미없다.
이걸 기획한 놈을 잡아다 중무장상태로 연무장을 백 바퀴는 돌게 하고 싶을 정도로 재미가 없었다.
힐끗 돌아본 옆은 이벨린이 아이처럼 눈을 빛내며 연극에 몰입하고 있었다. 순간 갈등의 순간을 겪은 케니스가 다문 입가에 힘을 준다. 참는다. 참자. 관람할 수 있다.
그렇게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감추지도 않고 ‘와 이 연극 정신 나갔네’하는 표정을 짓고 있던 아윈이 돌연 자리에서 혼자 사라진다. 그걸 목격한 케니스의 동공이 한차례 크게 떨렸다. 저런 배신자새끼…!
다시 연극이 상연중인 무대로 눈길을 돌린 케니스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대체 무얼 하며 남은 시간을 보내야 한단 말인가. 그때 마침, 열연중인 극 위의 남자배우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 근소하지만 왼팔에 더 힘이 들어가는군. 만약 검을 배운다면 왼손잡이로….’
그렇게 시작된 케니스의 상상은 점점 더 구체적이고 길어지기 시작했다.
‘ 내가 가르친다면 이 정도 수준까지 몇 년이 걸리겠고…블라블라.’
상상 속에서 남자배우는 512년이 걸려 결국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
‘ 좋아. 다음.’
남자주인공, 여자주인공, 조연 및 기타 엑스트라, 감독, 그리고 시야에 들어오는 근처의 관객까지.
그들은 모두 케니스의 머릿속에서 한 번씩은 소드마스터를 달성했다. 상연시간이 끝나 연극의 막이 내릴 때까지. 케니스는 그렇게 장붉피를 이겨냈다.
============================ 작품 후기 ============================
기껏 등장한 케니스가 욕먹을 짓만 하는 것 같아서..'ㅁ'
귀여워하시라고 덤 좀 넣어봤습니다 (?)
어때여 귀여우신가여? > <
+
나: 아빠 나 팩스로 통장사본이랑 신분증사본 보내야대 돈 받을 게 있어서
아빠: 아빠통장 보내도 괜찮다 ^^
나: ?! 멀 선심쓰는 것처럼 말하고 있어
막내: 인터셉트!
엄마: (빵터짐)
++
남주는 지금 혼자 티 팍팍내는 그 친구가 맞습니다 (찡긋
+++
돼버렷 드립은 앞으로 빼도록 하겠습니다:D 없으면 안 되는 핵심드립도 아니니 불편해하시는 분들이 몇 분이라도 계시다면 이러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돼버려 말고도 다른 구수한(?) 드립들이 많으니 함께하시죠! 예를 들어 찰싹 찰지구나! (더 심각해졌다) 넝담~ㅎ
*
작가의 몸상태가 엉망 of 엉망입니다. 갸아아악 ;ㅁ; 일단 손가락은 잘 움직이니 (!) 영혼을 갈아 다음편이 완성되는 대로 해당 날짜 자정에 업뎃을...할 터인데...목표는 우선 내일이지만 확답을 못드리겠서여 8ㅁ8 뿌에ㅔ에ㅔ엥 엉엉 뎨동 부디 빠른 쾌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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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티냥님, 버들양님, llyyrr님, OliveDrab님, 라프니아님, miroit님, 김앵무님, 은만두야님, soulover님, 부산사람님, 아르나쇼님, 이려니리님, sfsczg58856님, 슈거김님, sapirin님, runien님, ekdnf7232님, 슈렌러브러브님, 바다랑님, 하치앙님, Sa렌님, 샤이넨님, 트누님, 카베비님, 珠님, 노랑카프줄무늬님, 대왕수박님, 월요일따우님, hjjjjj93님, 슷삐님, 마법사J님, Yuiera님, 루아다님, 순백의현자(어둠의군주)님, 열혈라스님, 크크크z님, Matina님, eyore님, 다래Blume님, 봉봉님이시다님, fhdkl님, 나혼자두지마님, 緋雪님, 리엔J님, 김블리님, 유클라님, hatrea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61화를 올리던 엘리아냥이 갑자기....돌연사! 그 이유는 지나친 감사함에 말문이 막히다못해 숨까지 막혔기 때문이라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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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작 3만 이벤트는..'ㅁ'..어..66회 쯤에 댓글을 달아주신 분들 중 무작위로 6분을 선정해서 팝콘 기프티콘을...드리는 건 어떨까 고민중인데 괜찮으신가요? 하게 되면 무료로 보시는 분들도 포함이니 이벤트 기간은 길게 잡을 듯 해요! 연참은..머랄까 해봐야 미리보기라서 선물이 아닌거 같다는.."-" 그렇다는 (못해서 그런 거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