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57화 (57/100)

00057  6. 에이레네의 밤: 저잣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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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부터 말하자면 대회는 무사히 마무리되지 못했다. 8번 참가자가 우승에 대한 욕심이 지나쳤던지 그만 실화를 풀고 말았는데-과연 현실만한 막장이 없다더니 수위가 엄청 셌다-하필이면 그 이야기의 실제 등장인물이 관객들 사이에 껴 있었던 것이다. 본인의 낯 뜨거운 불륜스토리가 까발려지는 것에 눈이 뒤집힌 당사자가 무대로 난입을 했고, 8번 참가자와 머리채를 잡고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이해관계에 얽힌 다른 사람들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판이 커지고 돗자리는 어딘가로 사라지고……뭐 그렇게 난장판 개판이 되어 대회는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어떻게 보면 이름에 충실한 멋진 마무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막을 내린 대회의 우승상품은 지금 내 손에 있다.

“ 이걸 팔아야 하나.”

혼돈의 도가니탕이 된 대회장을 보며 ‘아, 어서 꺼져야겠다’는 생각에 슬금슬금 몸을 이동시켰을 때였다. 누가 톡톡 두드리는 것에 뒤돌아봤더니 상인이 내게 안경을 내밀며 가져가라고 눈짓하고 있었다. 대회의 취지에 진정 부합하는 이야기라 몹시 감동적이었다나 뭐라나. 그런 연유로 상인이 창고에서 주운 외알 안경은 내 차지가 되었다.

딱히 탐나던 건 아니었지만 막상 손에 넣으니 뿌듯하긴 하다. 내 이야기가 최고의 막장스토리로 인정받다니……이 영광을 주여와 주남이에게 돌립니다. 너네 잘 살고 있는 거지?

안경을 품에 갈무리하고 나는 다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연극이 끝나기까진 한참 남았을 것이다. 볼만한 거 또 어디 없나. 막장대회는 참 재밌었어. 새로운 흥밋거리를 찾아 사방으로 고개를 휘저으며 걷는데, 채 몇 걸음 걷기도 전 무언가가 재차 내 시야를 확 사로잡았다.

‘ 천하제일 연기대회.’

“ !”

얘는 또 뭐지!

오늘 무슨 날인가. 왜 다들 여기저기서 천하제일을 찾고 난릴까. 얘는 심지어 굉장히 나를 위한 대회인 것 같은데. 나는 종전과 비슷한 정도의 강렬한 이끌림을 느끼며 그쪽으로 쪼르르 발을 놀렸다. 뭐야뭐야 벌써 설레어!

그리고 정신을 차리니 내 번호는 7번이었다.

“ 흑흑…. 널 사랑했는데…정말 날 떠나는 거니? 돌아와 줘…흑흑흑.”

1번 참가자언니의 명연기가 펼쳐졌다. 웨이브 진 갈색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언니는,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 안약도 없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뜨리고 있었다. 호오, 제법인데! 인정하지! 하지만 얼핏 완벽하게만 보이는 그녀의 연기에는 사실 치명적인 오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리얼리티가 부족하다는 것!

남친에게 차인 여자는 저렇게 가녀리게 슬퍼만 하지 않는다. 이별을 겪은 여자는 대체로 분노와 슬픔을 함께 겪기 마련이었다. ‘이 개새끼가 감히 나를 차? 죽여버리겠어!’ ‘아, 아냐…돌아와 줘…다시 돌아와 준다면 뭐든 할게…. 흑흑’ ‘아 근데 주제에 날 차?! 죽어버려!’ ‘핫, 아니야, 난 아직 널 사랑해…흑흑’ ‘생각할수록 빡치네 죽여버린다!’ ‘아냐 돌아와 줘 사랑해’ ‘죽어라 개새끼’ ‘흑흑 사랑해’ ‘뒤져라 개새끼’ ‘흑흑 사랑해’……뭐 이정도의 지킬 앤 하이드 같은 모습은 보여줘야 하는 거 아닐까? 물론 절대로 내가 그랬다는 말은 아니다.

죽어라 구남친…!

“ 안타까운 슬픔을 표현한 연기, 잘 봤습니다. 제 점수는 8점입니다.”

“ 저는 9점.”

“ 7점 드리죠.”

1번 참가자의 연기가 끝났다. 이 대회는 앞전 것과는 다르게 점수제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심사위원들이 앉아있는 게 보인다. 10점 만점인 듯 그들이 저마다의 점수를 언급하자, 한 남자가 곁에서 세 점수를 합하여 기록했다. 어멋, 이 대회 뭔가 본격적이야.

“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살인마가 쫓아와요, 제발!”

두 번째 참가자는 골목길에서 웬 괴한에게 쫓기는 피해자를 연기했다. 소리는 열심히 지르는데…절레절레. 완전 발연기.

“ 살인마가 꽃을 들고 공격하나 보군요. 다급함, 절박함이 전혀 없어요. 3점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2점.”

“ 꼭 점수 줘야 해요?”

2번 참가자가 쓸쓸히 퇴장했다. 뒤를 이은 3번 참가자는 반대로 살인마 연기를 선보였다. 좋아하던 여자를 스토킹해서 칼로 찌르는 내용의 연기였다. 오오, 이 사람은 잘하네.

“ 인상 깊은 연기였습니다. 9점 드립니다.”

“ 8점 드리죠.”

“ 제 옆구리가 다 아픈 느낌! 10점 드릴게요!”

이야 이 대회도 재밌구만. 작년에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올해는 어째 볼거리가 많았다. 속으로 나도 나름 점수를 매기며 연기들을 구경하고 있자니 어느덧 순번이 찾아왔다.

“ 이번 참가자 분께선 특이하게 가면을 쓰고 계시네요! 7번이시군요. 자아, 시작해주세요!”

고민하다 나는 과거 공갈단 멤버 넷을 퇴치했던 명연기를 다시 선보이기로 했다. 그래, 역시 그만한 인생연기가 없지. 가면 때문에 내 표정을 전부 보여주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이다. 자, 보여줄게 완전히 다 죽은 나! 잇새로 억누른 신음을 내뱉으며 막 가슴께를 움켜쥐고 한쪽 무릎을 꿇고 있는데, 갑자기 관객들이 모인 쪽에서 누군가 비명을 빽 질렀다.

“ 찾았다!!”

엉? 뭘, 혹시 꿈에 그리던 너의 이상형?

“ 저년 저거! 그때 그년!”

아니었다. 삿대질을 하며 얼굴을 내민 인영은 유감스럽게도 대단히 낯익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어, 많이 안 좋은 쪽으로.

“ 저년 잡아라!”

나는 즉시 무대에서 내려와 잽싸게 달음박질쳤다. 쟨 대사가 또 왜 저래. 나 무슨 범죄자라도 된 기분이다. 씩씩대며 제 일행에게 날 생포할 것을 알리는 인간은 다름 아닌 연애에 서툰 공갈단 멤버였다. 어우야, 오랜만이다. 하필 이런데서 다 만났어.

“ 산채로 잡아라!”

버럭버럭 외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이거 참 예상치 못한 술래잡기가 아닐 수 없었다. 와 세상 엄청나게 좁네. 쟤네를 어떻게 또 우연히 만나냐. 나는 뜀박질 중인 다리에 힘을 주었다.

중간 중간 진로를 방해하는 인파 때문에 공갈단은 나를 쉽사리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난 달리면서 품에 있는 스크롤을 확인했다. 텔레포트 스크롤을 쓰기엔, 지금 이 자리를 피해봤자 나중에 다시 마주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역시 공격마법으로 퇴치하고 싶은데, 여긴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나는 무작정 뛰다가 급 진로를 결정했다. 이 쪽으로 가다보면 아마 인적이 드문 골목길이…어, 그래, 저기!

심지어 골목길은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자 바로 막다른 벽이 나왔다. 이렇게 완벽할 데가. 나는 벽을 앞에 두고 멈춰 서서 숨을 골랐다. 아우 힘 들어라. 아 숨차.

“ 헥헥…잡았다…! 넌 이제 독 안에 든 쥐다!”

공갈단은 멍청해 보이는 얼굴과는 다르게 관용 어구를 쓰며 날 쫓아 들어왔다. 헉헉거리는 폼이 쟤네도 어지간히 체력이 심각한 모양이었다.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평소에 운동 좀 하지, 쯧쯧.

난 가까워지는 공갈단을 보며 그들의 수를 셌다. 어디보자, 하나 둘 셋 넷…다 있네. 쟤네는 저게 무슨 영혼의 멤버인가 숫자가 바뀌질 않는다. 나는 넷을 날려버릴 만한 적당한 마법을 품 안에서 골랐다. 역시 바람계열이 제일 무난하겠지? 내 너희들에게 폭풍의 스톰을 맛보여 주마!

“ 병신들, 독 안에 든 것은 너희들이다!”

“ 뭐야?”

“ 감히 잠자는 대마법사의 코털을 건드리다니! 내 지금껏 숨겨왔지만, 이번만큼은 세상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은둔마법을 선보여주도록 하겠다!”

“ 저게 미쳤나.”

코웃음을 친 공갈단 넷이 한꺼번에 이쪽으로 덤벼들었다. 그래, 바로 지금-.

미끄덩, 철퍽! 쿵! 쿠당! 퍽!

“ 끄악!”

“ 컥!”

“ …어라?”

뭐지. 나 아직 스크롤 안 찢었는데. 장렬하게 나를 향해 달려들려던 넷은, 갑자기 몇 미터쯤 남기고 확 미끄러지더니 한명씩 같은 지점으로 엎어졌다. 그 결과 차곡차곡 쌓여 하나의 샌드위치 같은 꼴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갑자기 코끝이 찡해지며 향수가 밀려왔다. 저거 그거잖아. 학교 다닐 때 교실에서 자주했던 햄버거 놀이잖아!

맨 처음타자로 걸리면 갈비뼈가 위험해지는 바로 그 놀이!

뭣도 모르고 친구들을 우르르 불러 했다가 잘못 걸리는 바람에 그 날 인터넷 창에 대고 ‘학교에서 햄버거놀이를 했는데 갈비뼈가 아파요….’하고 질문 글을 올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래, 그랬었지. 그땐 그랬지. 불현듯 떠오른 추억에 나도 모르게 이 상황에서 눈시울을 붉히고 있을 때였다. 허공에서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 만나기로 했다는 게 쟤네야?”

어어? 이거 익숙한 목소린데. 난 고개를 위로 확 제쳤다. 어떻게 한 건지 허공에 걸터앉은-마법이겠지만-아윈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어두운 환경에서도 색채 짙은 붉은 눈동자와 결 좋은 은발이 또렷이 시야에 들어온다. 아니, 쟤 저기서 뭐해? 그보다 왜 여기 있어?

나와 눈이 마주친 아윈이 눈을 반달로 접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이 각도에서도 심하게 잘생겼네.

“ 고객님.”

“ 아니…엥? 응?”

“ 멀쩡하네. 어디서 모자라게 길이나 잃고 구석에 주저앉아 병신처럼 눈물콧물 다 짜면서 추하게 울고 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더니.”

뭐? 왜 저렇게 구체적이야. 게다가 애초에 걱정이라는 단어가 자기 캐릭터랑 어마어마하게 어울리지 않는 건 둘째 치고, 어째 나불대는 목소리에는 실망의 기운이 가득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걱정이 아니라 기대잖니, 그거.

“ …그러고 있었으면 뭐 어쩌게?”

“ 영상구로 찍어서 고객님 만날 때마다 보여줄까 했는데.”

이 미친놈이 이젠 수치플레이까지?

============================ 작품 후기 ============================

밤이 되었습니다.

아윈파는 고개를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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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주시는 분들 늘 감사합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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