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56화 (56/100)

00056  6. 에이레네의 밤: 저잣거리  =========================================================================

글귀가…나를 끌어당기고 있어!

“ 자자, 참가하실 분들은 여기여기로 오셔서 번호표 하나씩 받아가세요!”

앗, 나도 모르게 중앙으로…. 아앗! 내가 언제 번호표를 받았담!

무의식중에 나의 잠재능력인 사물 텔레포트를 시전하고 만 건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종이로 만들어진 조잡한 번호표 한 장이 내 손바닥위에서 바스락 존재감을 내뿜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결국……너무나 위험한 나머지 봉인하고자 했던 금기된 대마법이 이렇게,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나고야 말았구나! 크윽, 과인의 실수로다!

혼잣말 개소리는 이쯤하고. 번호표는 5번이었다.

참가인원이 열 명쯤 채워지자 판자를 들고 있던 남자가 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말이 대회지 그냥 개인이 주최하는 소소한 놀이라고 봐야했다. 참 센스 있는 분이시네, 어쩜 이런 대회를! 주최자는 거리에서 제법 잘 나가는 상인인 듯 반질반질한 비단옷을 입고 등장해 개최소감과 상품에 대해 이야기했다.

“ 험험. 그럼 이번에도, 모여주신 김에 화끈한 막장 이야기들 많이 부탁드리겠습니다. 우승자 상품은 바로 요, 외알 안경입니다.”

상인의 손에 들린 외알 안경은 꽤나 상등품인 듯 달려있는 금줄이 반지르르 고운 태를 자랑하고 있었다. 오, 상품 좋은데? 그런데 왜 하필 외알 안경일까.

생각하자마자 구경꾼 한명이 질문을 던졌다.

“ 왜 하필 상품이 외알 안경인가요?”

“ 아, 그건 말이죠.”

상인이 허허 웃는다. 눈가의 주름이 어딘지 인자해보였다.

“ 어젯밤 창고 뒤지다가 나와서요.”

정말 성의 있는 상품선정이었다.

“ 자, 지금부터! 천하제일막장대회를 시작하겠습니다! 1번부터 차례대로 앞으로 나와 막장 이야기들을 들려주시면, 관객 분들의 호응에 따라 주최자님께서 우승자를 뽑아주시겠습니다. 그럼 1번 참가자! 나와 주세요!”

응응, 역시 이야기 경연대회로구먼. 판자를 들었던 남자가 우렁찬 목소리로 외친다. 그러자 고불고불한 갈색머리를 높이 올려묶은 중년의 여인이 힘찬 발걸음으로 무대-돗자리 같은 게 깔려있었다-중앙에 등장했다. 눈빛이 비장하다. 관객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찬 얼굴로 그녀의 얘기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시작된 첫 번째 스토리!

“ 이 이야기는…방앗간 집 아들래미가 한 여자를 우연히 만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핫, 설마 챔시?!

“ 그의 이름은 곡시그.”

아니네.

곡시그라는 방앗간 집 아들이 주인공인 이야기는 이러했다. 곡시그는 길을 걷다 한 여인을 만난다. 그녀의 이름은 트윈. 트윈의 예쁜 얼굴과 큰 가슴-이야기가 노골적이었다-에 사랑에 빠져버린 곡시그는 매일같이 그녀의 집 앞에 꽃을 갖다 놓는다. 그러기를 며칠, 결국 곡시그의 정성에 마음의 문을 연 트윈은 그와 데이트 약속을 잡는다.

그리고 약속한 날, 한창 데이트 도중 두 사람은 트윈의 주도하에 으슥한 장소로 이동한다. 기대에 들떠 트윈을 따라 인적이 없는 곳으로 향한 곡시그. 그러나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인가! 사람이 없는 골목에 도착한 트윈이 돌연 곡시그를 칼로 찔러버린 것!-이 대목에서 관객들은 엄청나게 환호했다.-영문도 모른 채 칼빵을 맞은 곡시그가 쓰러지자, 트윈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진실을 이야기한다. 사실 그녀는 트윈이 아니었다. 트윈은 쌍둥이였고, 데이트에 나온 사람은 트윈의 쌍둥이 언니 윈스였던 것이다.

알고 보니 쌍둥이 동생 트윈은 이미 죽은 뒤였다. 곡시그가 매일같이 갖다 놓던 꽃 중에는 그도 미처 몰랐던 독화가 있었고, 그 꽃잎을 말려 차를 우려마신 트윈이 그만 시름시름 앓다 죽어버린 것. 동생의 죽음이 곡시그가 보낸 꽃 때문이라는 걸 알아낸 윈스는 복수를 위해 트윈인척 곡시그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충격적인 전말이 숨어있었다.

사실 곡시그가 갖다 준 꽃 중에는 독초가 없었다. 트윈이 일부러 독초를 구해다 먹고 곡시그가 원인인 것처럼 꾸몄던 것이다. 그 이유는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몇 년 전 곡시그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시비가 붙은 행인을 실수로 넘어뜨려 사고로 죽인 일이 있었는데, 그 행인이 바로 당시 트윈의 연인이었던 것! 자신이 죽는다면 쌍둥이 언니 윈스가 기꺼이 곡시그를 죽여줄 것이라 예상한 트윈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더욱 비극적인 사실이 있었다.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만, 윈스는 쌍둥이 동생 트윈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랑하는 사람의 복수를 마친 윈스는 트윈을 따라 본인도 목숨을 끊는다.

이야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다.

“ …여기까집니다.”

“ ―우와아!”

“ 슬프다!!”

“ 근데 막장이야!”

“ 막장인데 슬프다!”

구경꾼들에게서 박수와 함께 함성이 마구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나도 껴 있었다. 크흡…트윈…윈스……크흐읍. 곡시그 넌 그냥 병신…!

막장인데 너무 슬프잖아! 시작부터 이야기가 이렇게 강렬하다니. 나는 코를 훌쩍이며 열과 성을 다해 박수를 쳤다. 관객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1번 참가자가 당당히 퇴장한다. 크헝, 가면 때문에 눈물을 닦을 수가 없어.

흑흑 완전 재밌다.

그렇게 강한 인상을 남긴 1번의 뒤를 이어 2번 참가자, 3번 참가자, 4번 참가자가 차례로 각자 준비해온 이야기보따리를 꺼내 풀었다. 나름 흥미진진한 내용들이 오갔지만 아쉽게도 첫 번째 참가자의 아성에는 번번이 미치지 못한 채 무대를 내려가야 했다. 핫, 눈물이 그새 말랐군.

그리고 마침내 내 번호가 호명되었다.

“ 다음은 5번 참가자! 나와 주세요!”

뭘까, 이 떨림은?

나는 긴장되어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무대 위로-그래봤자 돗자리지만-발을 올렸다. 으아 떨려! 앞선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들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심장이 쿵쿵 요란스레 난리였다. 딱히 외알 안경이나 우승자의 자리가 탐나는 건 아니었지만, 그냥 왠지 모르게 기분이 쫄깃하다.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중간 중간 무슨 얘기를 할까 제법 고민했지만 역시 내가 아는 막장은 과거 숱하게 시청했었던 드라마가 전부였다. 좋아, 간다! 드라마 약간 바꾸기!

“ 어느 마을에, 가난하지만 기죽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여자와 엄청난 부잣집 외아들 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름은 어떻게 하지? 흠, 모르겠다 대충.

“ 여자의 이름은 주여, 남자의 이름은 주남이었습니다.”

여주, 남주를 뒤집은 건데 해놓고 나니 이름이 무슨 돌림자 쓰는 집안의 남매 같았다.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알고 보니 남매’ 설정도 넣는다.

“ 둘은 사귀는 사이였습니다. 데이트를 할 때면 주남은 주여에게 늘 이런 말을 던지곤 했습니다.”

관객들은 의외로 내 이야기에 열심히 집중해주고 있었다. 오오, 떨림이 가라앉는군.

“ ‘나 너 좋아하냐?’ 그럼 그 말을 들은 주여는 이렇게 대답하곤 했습니다. ‘몰라 이 새끼야. 그걸 니가 알지 내가 아냐? 별 걸 다 물어 이상한 놈이.’ 주여는 입이 다소 거친 여성이었습니다.”

“ 오, 거친 여자!”

“ 마음에 드는데!”

호응이 뿌듯했다. 나는 입가를 끌어올리며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감사합니다. 그렇게 둘이 사귀던 어느 날, 주남의 어머니가 주여를 불러냈습니다. 주남의 어머니는 장차 집안의 모든 재산을 물려받게 될 외동아들 주남이가 가난한 집의 여자를 만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찻집으로 주여를 불러낸 주남의 어머니는 주여의 앞에 돈 봉투…아니 주머니를 던지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 …….”

“ 이걸 받고 내 아들과 헤어져주게.”

“ 이야, 어머니 화끈한데?”

“ 그러자 주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대답했습니다.”

“ …….”

“ 이날만을 기다렸다!!”

“ 이쪽은 더 화끈한데?!”

한쪽에서 박수소리도 들려온다. 이거 재미나는군.

“ ‘주남이랑은 바로 헤어지겠습니다. 돈주머니 감사. 그럼 이만!’이렇게 말한 주여가 주머니를 챙겨 가게를 나가려던 순간이었습니다. 갑자기 주남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잡았습니다.”

“ ?!”

“ 주남의 어머니가 외쳤습니다. ‘이년이! 우리 아들을 정말로 사랑한다면 못 헤어지겠다고 버텨야지! 감히 우리 아들의 마음을 농락해?!’ 그러면서 그녀가 휘어잡은 주여의 머리채를 마구 흔들기 시작했습니다.”

“ 오오!”

“ 그 순간, 갑자기 주여의 머리카락이 훌러덩 벗겨졌습니다. 그녀의 머리는 사실 가발이었던 것입니다! 가발이 벗겨지고 드러난 주여의 머리는 마치 남자처럼 몹시 짧았습니다.”

“ 뭐지!”

“ 주여가 말했습니다. ‘아오 들켰네.’ 그렇습니다, 사실 그녀의 정체는 여자가 아니라 여장한 남자였습니다!”

“ 뭐지?!”

관객들이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동공들을 보니 이 맛에 막장스토리를 쓰는구나 싶었다. 짜릿한데? 하지만 한편으론 나도 점점 혼란스러워지고 있었다.

“ 아들의 연인이 여장남자였다는 사실에 충격 받은 주남의 어머니는, 부들부들 떨다가 컵에 있던 물을 주여에게 확 뿌렸습니다. 그 물을 고스란히 맞은 주여는 머리와 얼굴이 홀딱 젖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물에 젖은 주여의 모습은 놀랍게도 너무나 섹시했습니다. 주여가 젖은 머리를 유혹적으로 쓸어올리자 그걸 본 주남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 …….”

“ 나와 결혼해줘.”

“ 뭐라고!”

“ 그러자 주여가 말했습니다. ‘웃기는 군. 당신 남편은?’”

“ 그, 그러게.”

“ 주남의 어머니가 그에 대답했습니다. ‘괜찮아, 내 남편은 이미 예전에 죽었어. 지금 있는 건 흑마법으로 살아있는 것처럼 조종중인 꼭두각시일 뿐이야.’”

“ 갑자기 무서워졌어?!”

“ 그렇게 주남의 어머니와 주여는 결혼했습니다.”

“ 바로?!”

이젠 나도 내가 뭐라고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드라마가 드라마가 아니게 돼 버려…!

“ 그러나 결혼생활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신혼 도중, 주여가 주남의 어머니에게 몰래 독약을 먹였기 때문입니다.”

“ 너무해!”

“ 사실 주남의 어머니는 주여의 부모님을 죽인 원수였습니다.”

“ 잘했다!”

슬슬 마무리를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난 아무 말이나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 주여는 죽은 주남 아버지의 혼외자식이었습니다. 주남의 어머니는 과거 남편의 정부를 몰래 독살한 적이 있었는데, 그 정부가 바로 주여의 어머니였던 것입니다.”

“ 와우….”

“ 복수를 마친 주여는 재산을 챙겨 집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주남이가 나타나 주여를 붙잡았습니다.”

“ 쟤 아직 있었어?”

“ 주남이가 외쳤습니다. ‘형, 떠나지마! 난 형이 남자라도 사랑해! 우리 함께 살자!’”

“ 뭐야?!”

“ 그러자 주여가 말했습니다. ‘너랑 난 배다른 형제야. 아빠가 똑같다고 이 병신아. 형제끼리 뭘 사랑해.’”

“ 남자인건 상관없나?!”

“ 주남이가 다시 소리쳤습니다. ‘아니! 우리 배다른 형제 아니야. 난 엄마의 혼외자식이야!! 우린 완전 남남이라고! 그러니까 나랑 살자!!’”

“ ?!”

“ 결국 주여는 그렇게 집에 남아 주남이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 해피엔딩?!”

“ 끝.”

“ …….”

“ …….”

“ …….”

침묵이 내려앉았다. 진행되는 내내 격한 반응을 보여줬던 그들은 막상 이야기가 끝나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저 하나같이 동공만 격하게 떨고 있을 뿐이었다.

그 조용함 사이로 누군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 개막장인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과연 라테는 1등을 거머쥘 것인가...! (두둥

+

다음편도 내일 자정에 올라옵니다☆ (찡긋

그리고 기다리시는 걔 곧 나와요 소곤소곤

안 따라왔다고 넘 실망마셔요 속닥속닥

++

저번편 후기에서 한글2010 빨간 줄이 싫다고 찡찡댄 엘리아냥

친절한 독자님: 한글사전에 등록하시면 빨간 줄 안 쳐져요!

엘리아냥: 오 대박

엘리아냥: (한글사전에 '외않되?'를 등록한다)

한글사전: 미친놈아!

+++

아빠: 곧 추석이네

막내: ㅇ

아빠: 추석 기념으로 남친이랑 헤어져라. 남자의 눈물에 속고 그러지 마. 대학 가면 그런 남자들 널렸어.

막내: 지금도 널림ㅋ

아빠: !

나: ㅋㅋㅋㅋ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라프니아님, 붐붐치키붐님, pingno님,YouURin님, smile2님, mytaya20님, 0네레시스0님, afrance님, 산기슭님, 바람실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여러분들 어서 저희 집 오셔서 날개 찾아가세요...흘리고 다니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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