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5 6. 에이레네의 밤: 저잣거리 =========================================================================
무서운 놈들…. 한 놈만 있어도 파괴력이 엄청날 텐데, 셋이 함께 모여 있다니 잔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걷는 속도를 높여 그들을 어서 따라잡고자 노력했다. 다행히 오래 걷지 않아 익숙한 면면들을 시야에 잡아낼 수 있었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청흑발의 여인. 그리고 그 곁을 나란히 차지한 세 마리의 물고기.
“ …….”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저 셋을 한자리에서 목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인데, 생각보다 그 조합에서 나오는 위력이 어마어마했다. 오면서 마주한 광경들로 대충 짐작은 했지만, 물고기들은 붙여놓으니 지닌 찬란함이 배로 증가해 이미 하나의 전구가 되어있었다. 혹시 여기 낮이에요? 만약 이 순간을 글로 남긴다면 다음처럼 써야 할 것 같았다.
크와아앙 대왕전구가 울부짖었따. 대왕전구는 짱 쎄고 잘생겨서 전구 중에 최강이어따. 대왕전구가 쳐다보자 사람들이 마구 쓰러졌따. 으악 앞이 안보여! 모든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뒹굴어따.
그렇게 거리는 순식간에 눈 먼 자들의 도시로 변했다.
내, 내 눈.
“ 고객님이네?”
조금 떨어진 곳에 오도카니 서서 괴로워하는 나를 처음 발견한 건 아윈이었다. 아니지, 나머지 둘도 빨리 발견했는데 일부러 아는 척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겠구나. 어쨌든 불린 김에 자박자박 가까이 다가가자 아윈이 내게 말을 던진다.
“ 왜 눈을 감고 있어?”
반만 뜬 거거든….
완전히 다 뜨기엔 아직 적응의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여주인공처럼 강철안구가 아니라 이렇게라도 눈 건강에 힘써야 한다. 소중한 마이 아이! 내 눈은 내가 지킨다! 그렇게 가면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를 게슴츠레 뜨고 있으려니 마침 나를 쳐다본 이벨린이 아는 체를 했다.
“ 혹시 라테?”
“ 네. 맞아요.”
“ 어머, 여긴 어쩐 일이에요? 우연이네요!”
우연을 입에 담는 이벨린은 그 맑은 목소리에 한 점 의심의 기색도 없었다. 하긴 황태자도 우연히 만나고 케니스도 우연히 만나고 아윈도 우연히 만났을 테니 뭐. 나는 그 네 번째 우연이 되어 뻔뻔스레 웃었다.
“ 그러게요!”
“ 참, 저 이벨린이에요. 가면 썼는데도 알아보겠어요?”
허헛. 못 알아보는 게 등신이다. 흔치않은 청흑발을 그대로 드러낸 데다 옷차림도 평소와 비슷하고, 가면은 얼굴의 반 정도만을 가리는 디자인이었다. 그 조건에서 이벨린인 걸 몰라본다면 그건 내 안구가 한시바삐 병원으로 이송해야하는 위급한 상태일 때나 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러한 내심을 입 밖에 내는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개소리나 날렸다.
“ 저의 마음에 자리한 제3의 눈은 모든 걸 꿰뚫어보거든요. 후우……저도 이런 제 힘이 무섭네요.”
케니스의 얼굴이 간만에 구겨지는 것도 같았다.
물고기 셋은 서로서로 본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황당하고 우스운 듯한 표정들이었다. 나는 그 애매한 표정의 남정네들을 보며 건네줄 수 없는 예언적 조언을 속으로 삼켰다. 너네 앞으론 심심하면 이 조합으로 뭉칠 테니, 내외하지 말고 어서 빨리 친해지는 게 좋을 거란다! 실제로 이들은 원작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어 룰을 만드는 둥 의외로 제법 사이좋게 지낸다. 적어도 사자대면 전까진. 그 이후는 어떻게 되는 거니, 너희? 아 또 생각하니까 궁금하네.
이벨린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축제를 구경하자며 내게 제안해왔다. 어멋, 언니! 그렇게 말해주면…정말 좋아용! 기다렸다는 듯 냉큼 긍정하며 곁에 찰싹 붙자 등 뒤로 따가운 시선이 날아들어 꽂힌다. 뭐여. 케니스인가. 어차피 내가 사라져도 이 자리는 당장 네 자리가 되지 않아요, 님아. 님 옆의 물고기 둘이나 먼저 처리하라능? 알겠냐능?
나는 구태여 고개를 돌려 뻔한 시선의 범인을 확인하는 대신 그저 마음의 소리로 대상을 놀렸다. 째려보든가 말든가. 푸딩이나 된 주제에 꺄르륵.
근데, 분명 다 좋은데, 아무런 문제없이 만족스러운 상황인데 조금 전부터 느껴지는 이 묘한 기분은 뭘까. 이상하게 뭔가가 살짝 빠진듯한 느낌이 언젠가를 기점으로 내 신경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빠져? 아닌데. 구성원도 완벽하고 챙길 것도 다 챙겼는데 대체 뭐가….
상념을 깨운 것은 지척에서 울린 말간 목소리였다.
“ 라테, 연극 좋아해요?”
“ …연극이요?”
“ 네. 연극을 보러 가려던 중이었거든요.”
보폭을 맞춰 걸으며 이벨린이 말을 꺼냈다. 내 생각도 덩달아 그녀가 꺼낸 주제로 휙 넘어갔다. 연극이라! 장르에 따라 취향을 많이 타긴 하지만 대체로 좋아하는 편…잠깐. 나는 눈알을 한 바퀴 데구룩 굴렸다. 머릿속에서 특정 내용이나 장면이 떠오를 듯 말 듯 한다.
에이레네의 밤, 저잣거리의 축제, 연극. 뭔가 이에 관련된 내용을 원작에서 읽었던 것 같았다. 아니지, 분명 읽었는데? 뭔가를 읽었다는 사실만이 뚜렷하게 수면위로 떠오른다. 정작 내용은 빼고. 아니 이 쓸모없는 기억력이?
“ 무슨 연극인데요?”
“ 음, 제목이…‘장미보다 붉게 피로 물들다’? 아마 이걸 거예요.”
헉. 기억났다!
이름을 듣자마자 묻혀있던 기억이 불쑥 고개를 내밀어 내 머리를 퍽 때렸다. 그리고 나는 동시에 비명을 삼켰다. 맙소사!
“ 어…음…지금 그걸 보러가는 길이라구요?”
“ 네, 재미있겠죠? 라익보링 백작님께서 후원하셨다고….”
네에? 천만의 말씀, 재미는 개뿔 라익보링이라는 후원자의 이름부터가 신뢰도가 바닥인데 무슨 소리실까. 라익 보링? 좋아하다 지루한? 이름 진짜 구리네! 노답!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내가 이미 저 연극을 본적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몇 년 전이었지만 두 시간 반을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그래, 고통. 저 연극은 고문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끔찍하게 재미가 없었다.
이름하야 핵노잼…!
“ 잘못 들어왔네요. 저 여기서 나갈게요.”
“ 네?”
“ 아, 아뇨. 이벨린, 제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각나서요.”
도망쳐야 한다. 나 여기 완전 잘못 끼었다. 나는 홍콩행 게이바에 실수로 입장한 일반인 같은 심정이 되어 있지도 않은 급한 일 핑계를 꺼냈다. 단언컨대 저 연극을 관람하는 것보다 재미없는 일은 세상에 없다. 저 그냥 혼자 축제 구경하겠습니다.
“ 급한 일이라뇨?”
“ 아, 그게….”
집에 두고 온 팝콘이 아파서요.
아니 이 와중에도 헛소리가 생각이 나네.
“ 누굴 만나기로 했는데 그만 깜박하고 있었어요. 아쉽지만 저 먼저 가볼게요! 연극 재미있게 봐요!”
난 막 지어낸 핑계와 인사를 남기고 잰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마음 같아선 뛰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도망치는 게 너무 티가 나니까. 누가 잡는 것도 아닌데 괜히 마음이 바쁘다. 나는 부지런히 이동해 물고기의 영향권을 벗어났을 때쯤 해서야 걸음의 속도를 늦췄다. 후아…. 하마터면 지옥으로 향하는 급행열차에 다시 엉덩이를 안착할 뻔했네. 오버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게 다 저 연극이 그만큼 심각한 노잼이기 때문이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한다.
장붉피의 마수에서 벗어나 마음에 평화를 되찾자 절로 발이 느릿해진다. 나는 내키는 방향으로 아무렇게나 천천히 발을 놀리며 방금 막 또렷이 떠오른 원작의 내용을 상기했다.
장미보다 붉게 피로 물들다. 제목하나는 그럴듯한 이 연극은, 이벨린이 현재 머물고 있는 백작가 식솔의 추천을 받아 축제날 저잣거리에서 물고기들과 함께 관람하게 되는 작품이었다. 상연시간 두 시간 삼십분. 특징, 현대였으면 고소당해도 할 말 없는 제목과 내용 사이의 크나큰 괴리. 만약 내가 황족의 신분이었다면 연극 관람이 끝나자마자 감독과 투자자를 찾아내 분노의 죽빵펀치를 갈겼을 것이다. 이름이라도 정직하게 짓던가!
장붉피는 다름 아닌 추리물의 탈을 쓸 고대문자 학습 연극이었다. 극은 억울하게 살인누명을 쓴 주인공이 진범을 잡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줄거리로 진행되는데, 무려 그 고군분투의 90%를 고대문자 공부와 해석으로 채우는 파격적인 구성을 자랑했다. 왜냐? 피해자가 남긴 단서가 고대문자였기 때문에. 솔직히 이 연극 돌았다고 생각한다. 장미보다 붉게 물드는 건 아마 혈압 올라 새빨개진 관람객들의 얼굴이겠지!
그리고 이 정신 나간 연극을 이벨린은 저 혼자 몹시 재미나게 관람한다. 그도 그럴게 고대문자는 그녀의 주특기이자 전문분야였다. 종종 깜빡 잊곤 하지만 이벨린이 제국에 온 이유부터가 고대문자를 심도 깊게 배우기 위해서였으니 말 다했다. 그녀는 상연 내내 눈을 반짝이며 극에 푹 집중하는데, 끝나고 나서는 활짝 웃는 얼굴로 고대문자에 대해 열띠게 사견을 늘어놓다 마침 관리 차 극장을 방문한 라익보링 백작에게 좋은 인상까지 남긴다. 그리고 이는 나중에 백작이 페리도트가 날뛸 때 이벨린의 편을 들어 도와주게 되는 방향으로 이어졌다.
그밖에도 이를 계기로 황태자가 고대문자를 배우기 시작한다든가, 사랑연극에나 열광하는 여타 귀족영애들과는 다른 차별화된 매력에 물고기 셋이 전보다 훨씬 여주인공에게 퐁당퐁당 빠져든다든가 하는 결과들이 이번 연극 에피소드의 예정된 성과였다. 기승전물고기들 퐁당퐁당.
뭐 다른 건 차치하고라도, 아윈이 관람 중에 짜증나서 전용좌석에 앉아있는 감독을 잡아 죽이려다 이벨린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그만두는 장면은 생각난 김에 구경하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다. 걔가 이벨린 모르게 감독의 숨통을 10초 정도는 막았지 아마. 아휴 역시 막나가는 싸이코패스. 감독이 아주 죄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죽이는 건 너무하자나? 나 같으면 죽빵 정도로 참겠다. 물론 죽빵도 아윈이 때리면 ‘죽음으로 가는 안면빵’이겠지만.
아무튼 연극관람은 이미 텄다. 아무리 구경거리가 아쉬워도 앉은 자리에서 두 시간 반 동안 괴로움에 몸을 꼬고 싶진 않았다. 그냥 연극이 끝날 때쯤 시간 맞춰 극장부근에서 서성이다 또 우연히 만난 척 하지 뭐.
“ 그럼 이제 어딜 간담…….”
상연시간동안 뭘 해야 할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일단 인파를 찾아 무작정 움직였다. 작년에도 이 축제를 구경나왔었는데, 그때의 기억이 다소 흐릿한 걸 보니 딱히 재미있진 않았던 모양이다. 내가 축복받은 체질이기만 했다면 음식부터 보이는 대로 입에 밀어 넣었을 텐데. 흑흑, 살 빼주는 마법은 어디 없나.
“ 대회 구경하시고 가세요!”
“ 대회 참여해보세요! 상품 있습니다!”
대회? 나는 귓가를 간질이는 흥미로운 단어에 발을 멈췄다. 고개를 슥 빼서 살펴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웅성웅성 원을 그리며 모여 있는 게 시야에 잡혔다. 그 가운데 남자 두엇이 글자가 새겨진 나무판자를 위로 높게 치켜든 채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뭔 진 모르겠지만 잠깐 구경이나 해볼까. 호기심에 가까이 다가가자 판자에 쓰인 글자가 눈에 확 들어왔다.
‘ 천하제일 막장대회.’
?! 뭐지 저건. 정체는 모르겠지만 엄청나게 끌리는 타이틀이다.
============================ 작품 후기 ============================
라테: 저 여기서 나갈게요
이벨린: 들어올 땐 마음대로였겠지만 나갈 땐 아니란다
러테: ?!
+
~과거의 카톡방~
나: 한글2010 짱나
A: ??
나: 난 ~했길래 라고 쓰고 그때서야 그제서야 다 쓰고싶단마랴
A: 근디
나: ㅠㅠㅠㅠ빨간 줄 쳐진다구ㅜㅜㅜ고치라고 강요한다거ㅜㅜ
A: 고쳐 그럼 ㅄ아
나: 싯타구싯타구!! ㅅ바 난 그제서야가 좋다구!!! 했길래가 좋다구!! 8ㅁ8 니들이 몬데 ㅅ바!! 시적허용처럼 소설적허용도 해줘!쿵쾅쿵쾅
나: (한글파괴의 주범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나: 세종대왕: 저 개ㅅ끼를 끌어내라
나: 엘리아냥: 즈어어어어언하아아
A: 지혼자 잘도 노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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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편은 내일 자정에! (찡긋
무료로 풀리는 날짜는 화목토입니당. 자세한 건(별 거 없지만) 작품 공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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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선작 3만 이벤트 안 하시나여?
A. "-" 3만이요..? 무서운 숫자네여...될 것 같진 않지만 되면 먼가 해볼게여 (뭘?)(모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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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화 댓글을 보다보니 제가 미녀라는 잘못된 이미지가 퍼지고 있네여. 근데 마음에 드니까 그거 사실인 걸로 할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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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 is 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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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over님, 매화와벚꽃님, 설이수님, 섀늘님, 엘티냥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 아리가또리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