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50 5. 에이레네의 밤: 무도회 =========================================================================
원스텝, 투스텝. 두 사람의 동작이 마치 사전에 맞춘 것처럼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빠르진 않지만 우아한 몸짓이 물 흐르듯 회장의 선율에 따라 움직였다. 황태자야 말할 것도 없고 이벨린도 지금 보니 춤 실력이 꽤나 수준급이었다. 원래 허둥대다 발도 살짜쿵 밟아주고 그 모습에 남주인공이 빵 터지며 귀엽다 생각하고 뭐 그래야하는 거 아닌감? 기억을 더듬어보니 이벨린이 춤추다 상대의 발을 밟는 장면이 원작에서 한번은 나왔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닌 듯 그녀는 제법 능숙한 춤 솜씨를 보여주고 있었다.
아윈은 그 광경을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여전히 응시하느라 바빴다. 빡친걸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지금 아윈의 얼굴에선 질투나 라이벌을 향한 경계, 적의 이런 것들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표정 하나로 내가 아윈의 내면까지 읽을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일단 겉보기엔 그랬다.
궁금하네. 찔러서 물어볼까. 소설의 전개를 따른다면 이번 에이레네의 밤은 아윈이 이벨린에게 보다 집착하는 계기가 되어야 했다. 그건 비단 아윈뿐만 아니라 다른 물고기들도 마찬가지였다. 셋은 오늘의 연회와 이어질 저잣거리의 축제를 통해 서로가 여주인공을 사이에 둔 연적임을 깨닫게 된다. 모름지기 나만 탐내는 상품보다 남도 원하는 상품이 한층 매력적이기 마련, 물고기 셋의 이벨린을 향한 마음은 더욱 깊어지고 만다.
‘ 그래야 하는데.’
알쏭달쏭하다. 아윈이 원래 원작에서도 제 마음을 가장 늦게 자각하는 편이긴 했지만, 좀 전 정원에서 보여준 모습은 역시 좀 의아했다. 라이벌들은 간 쓸개를 다 빼다주는 판에 저 혼자 뭔 경고를 하고 앉았대. 라이벌이 있는 걸 그땐 몰라서 그랬나? 그래도 뭔가…흐으으음.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마침 아윈과 정통으로 눈이 마주쳤다.
노, 놀래라. 안 그래도 딱 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놀람과 찔림에 그대로 굳자 아윈이 말을 걸었다.
“ 고객님, 뭐 해?”
“ …뭐가?”
“ 목이 꺾였네. 천장에서 뭐 맞았어?”
뭐? 쟤가 갑자기 뭐래는 거야. 멀쩡한 사람 목이 왜 꺾……아. 무슨 얘긴가 했더니 내가 고개를 기울이다말고 멈췄다는 게 문득 생각이 났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멀쩡히 되돌린 뒤 그 상태에서 자연스럽게 반대편으로 젖혔다.
“ 목 운동 중이야, 목 운동. 목 건강을 위해선 주기적인 운동이 필수라고 할까.”
나도 내가 뭔 소리를 지껄이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오는 대로 뱉고 있는데, 잠시 잊고 있었던 페리도트 생각이 불쑥 머리를 때렸다. 황태자만 피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아윈이랑도 친한 척 하면 안 되잖아! 실제로 별로 친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그렇게 보이는 건 조심해야했다. 적어도 페리도트의 앞에서는 무조건.
“ 갑자기 쫄았네.”
생각보다 아윈은 관찰력이 좋은 것 같았다. 나는 페리도트가 황태자와 이벨린에게 정신이 팔려 이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걸 확인한 후 조금씩 아윈과 거리를 벌렸다.
“ 알면 말 걸지 마.”
“ 고객님 춤 잘 춰?”
“ 개 뜬금없네…. 나 댄스 대륙서열 0위야. 그리고 말 걸지 마.”
“ 뭔진 모르겠지만 잘 춘단 소리지?”
“ 어어. 나 귀족 지위도 댄스 배틀로 땄어. 그러니까 말 걸지 마.”
아윈이 거는 말을 무시할 담력은 없었다. 대충대충 입이 나불대는 대로 대답하며 나는 인파가 가장 밀집된 공간으로 재빠르게 발을 놀렸다. 황태자와 이벨린을 넋 놓은 듯 쳐다보는 구경꾼들 사이로 몸을 우겨넣고 나자 비로소 마음의 평화가 찾아오는 느낌이 들었다. 아윈은 꾸물꾸물 도망친 내게서 관심을 거두고 다시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도 관람객들 사이에 낀 마당에 주인공들이나 마저 구경할까싶어 홀 중앙으로 눈을 돌렸다. 황태자의 손을 잡고 이벨린이 한 바퀴 선 자리에서 몸을 회전한다. 그녀의 눈동자와 어울리는 녹색 드레스가 동그란 원을 그리며 예쁘게 팔락였다. 아유 고와라.
“ 아아, 너무 아름다워. 잘 어울린…아, 아냐! 전하께선 그 누구의 것도 될 수 없어! 감히! 하지만 보기 좋……그렇지 않아!”
예쁘다고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옆에서 웬 영애가 자아분열을 겪고 있는 게 보였다. 론드미오 추종자인가본데…. 거 애잔한 친구일세.
이벨린은 평소보다 유독 반짝거리며 빛나고 있었다. 여주인공 버프라고 할까. 예쁘긴 하지만 미인이 별처럼 많은 이곳에서 이벨린은 외모 하나로 주목받을 정도는 아니었는데, 지금처럼 중요한 순간이 되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 반짝반짝 특별한 매력을 뽐냈다. 그 때문에 그린 듯한 환상적인 미녀 페리도트보다도 이벨린이 황태자와 더욱 잘 어울린다는 평가를 극 중반쯤이 되어 받기도 한다.
그런 사실을 떠올렸을 무렵 춤이 끝났다. 수많은 이들의 주목 속에서 춤을 마친 둘이 서로의 눈을 말없이 마주하고 있었다. 위치상 이벨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황태자의 표정만큼은 똑똑히 시야에 들어왔다. 사랑스러운 연인을 바라보듯 따스한 눈빛과 미소.
누가 봐도 이벨린은 황태자의 ‘특별한 사람’이었다.
“ 아아!”
“ 바수니야 영애!”
왠지 이름부터가 황태자의 극성팬일 것만 같은 영애가 이마를 짚으며 뒤로 넘어갔다. 맥없이 쓰러지는 그녀를 근처의 일행인 듯한 이들이 받쳐주는 게 보인다. 곧이어 회장 바깥으로 실려 나가는 소녀의 자태를 눈에 담으며 나는 새삼 황태자의 영향력을 실감했다. 장난 아니네. 잘 보니 저기서도 쓰러지고, 저어기서도 쓰러지고…. 허어. 살상무기야?
페리도트 또한 분을 참지 못하겠는 듯 부들거리더니 이내 몸을 돌려 회장을 빠져나간다. 퇴장하면서 순간이지만 아윈에게 눈길을 주는 것이 아까 잠깐 새 관심이 확실히 생긴 모양이었다. 조만간 어떻게든 접근해보려 하겠구먼.
죄 많은 남자 론드미오는 주변이 요렇게 돌아가든지 저렇게 돌아가든지 신경 쓰지 않고 이벨린만 뚫어져라 쳐다보다, 이내 몰려든 고위귀족 자제들에게 둘러싸여 그들의 인사를 받아주는 처지가 되었다. 의도치 않게 사람의 벽이 생기자 이벨린이 황태자와 떨어져 잠시 혼자 남겨진다. 아윈은 이벨린을 지켜보고는 있었지만, 사이의 거리가 좀 되었던 터라 얼핏 보면 그녀는 완전히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누군가 슬금슬금 이벨린에게로 접근하는 폼이 시야에 걸렸다. 오른손에 곱게 샴페인 잔을 들고 어쩐지 수상한 발걸음으로 이동하는 인영은, 유감스럽게도 내가 몹시 잘 아는 인물이었다. 붉은빛을 약하게 띄는 갈색머리, 콧잔등의 주근깨를 화장으로 가렸을 동글한 얼굴. …카노? 내-거의 없는-친구 카노잖아?
아깐 찾아도 안보이더니 이렇게 발견하는구나. 근데…. 난 미간을 좁혔다. 평소와 어울리지 않는 카노의 낯설은 표정에 순간 불안감이 확 엄습한다. 표정이 왜 저렇게……구려? 침잠된 카노의 낯빛에선 흡사 증오마저 비치는 것 같았다.
부정적인 기운이 넘실거리는 어두운 얼굴로 점차 이벨린에게 가까워진다. 설마 저거-. 머릿속에 떠오르는 최악의 가정에 내가 반사적으로 소리쳤다.
“ 카노!”
안 들리나? 미동도 없다. 나는 초조한 얼굴로 카노를 응시하며 그녀를 향해 발을 놀렸다. 카노의 손에 들린 샴페인은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나의 이 샴페인을 봐줘! 어떻게 생각해?’ 하는 품평이 목적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같이 한잔하며 친해지기 위한 용도는 더더욱 아닐 것이다. 그건 이벨린을 노려보는 카노의 악의적인 눈빛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지금 그거 끼얹으려는 거니? 미친!
남주인공이 여주인공을 얼마나 아끼는지, 애지중지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로 뇌 텅텅 조연들이 쓰이는 건 따분할 정도로 흔한 일이었다. 그네들은 정신이 나간 듯 남주인공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상황에서도 기어코 여주인공에게 다가가 일을 저지르곤 한다. 폭언을 내뱉으며 손찌검을 한다든지, 멀쩡한 음료수를 갑자기 상대에게 끼얹는다든지 하는 게 대표정인 행동이었다. 그리곤 당사자보다 열 배는 분노한 남주인공에 의해 이미 끝난 인생으로 질질질 끌려 퇴장. 그게 일반적인 그들의 말로였다.
그 1회용 단발성 악역을 지금 다른 사람도 아닌 카노가 맡으려고 하고 있다니! 환장하겠네 진짜. 내가 기억하는 카노는 분명 순하고 내성적인 성정이었다. 저럴 애가 아닌데 왜 저래! 사랑의 힘이야? 그래?
나는 걸음에 박차를 가하며 아윈을 힐끗거렸다. 눈길이 여전히 이벨린을 향해있었다. 안 돼. 진짜 안 된다. 백번 양보해 황태자라면 몰라도 아윈 눈앞에서 일이 벌어지는 것 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했다. 쟤가 개입하면 정말 죽는다. 샴페인 좀 뿌렸다고 죽어!
내 발걸음은 초조한 마음만큼 빠르지 못했다. 그 사이 카노가 이벨린의 바로 앞까지 도착한 게 보인다. 오 갓! 할 수 없지. 나는 있는 힘껏 몸을 날렸다.
“ 가, 감히 당신이 황태자 전하를…컥!”
“ 꺄악!”
퍽! 우당탕.
============================ 작품 후기 ============================
퍽 우당탕 쿵!
카노: (뇌진탕으로 사망)
라테: (살인죄로 체포)
~무기징역 엔딩~
+
(2차)IF 라테가 묻지마 살인을 당한다면?
황태자: 헐 재밌는 친구였는데 불쌍..ㅉㅉ(범인 수배령을 내려준다)
케니스: 개이득인지 아닌지 고민한다. 조금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아윈: 그렇게 웃긴 걸 또 어디서 찾아 ㅆ발 ㅈ같네(범인을 잡아다 오체분시를 한다)
많이 발전했네요 (왈칵
역시 달달한 로맨스 판타지 (?
++
나: 아빠 막내 남친 막내가 만들어준 도시락 먹고 배탈났대
아빠: 뭐? 크하하핫(진짜 이렇게 웃으심) 그거 쌤통이다 크하하핫
막내: (부들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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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롱님, soulover님, 채꼬지님, 초보마녀님, 구월의사과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쿵더덕 쿵덕 덩기덕 쿵덕 얼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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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공지를 통해 예쁜 팬아트들을 만나볼 수 있답니다! 슈엘리안님, 온기님, 행복한벼룩님 감사합니다 (__)♡
*현재 작품표지는 온기님께서 주신 팬아트입니다. 아윈한테서 냄새나네요 내남자냄새 ^-^하악ㅇ하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