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9 5. 에이레네의 밤: 무도회 =========================================================================
어? 어어? 생소한 부유감이 몸을 감쌌다. 난 플라이 스크롤은 써본 적이 없었다. 난데없이 중력이 사라진 몸뚱아리가 둥실 떠오르더니 그대로 허공을 이동하기 시작한다. 뭐…뭐야 이거. 당황해서 수족을 휘저어 봐도 둥실둥실 공중을 가르는 것은 그대로였다. 아, 설마.
“ 라테!”
혹시나 싶었던 곳에 가까워지자 익숙한 목소리가 나를 반겼다. 으응, 이벨린 하이. 그 옆에는 아니나 다를까 아윈이 예의 천사 같은 미소를 띄우고 서있었다.
“ 왕따처럼 혼자 있길래 불쌍해서.”
어, 그래…그것 참 고맙구나….
날 부유마법으로 보쌈 해 여기로 데려온 이유가 어찌나 감격적인지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둘만의 오붓한 시간에 왜 나 같은 불청객을 굳이. 몸 둘 바를 모르고 그대로 허공에 둥둥 떠 있자니 문득 발밑의 허전함이 한층 생생하게 느껴졌다. 음, 나 슬슬 내려갔으면 하는데.
“ 저기, 나 지상이 그리워서…이제 좀 내려주지 않을래?”
“ …….”
“ 이보세요? 나 발에 뭐가 좀 닿았으면 좋겠거든요?”
대답 좀 해라 개놈아.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가싶던 아윈이 살짝 턱짓을 했다. 그러자 내 몸이 더욱 높게 솟구친다. 아니 뭐야! 또라이가 내려달랬더니! 한결 작아진 아윈이 저 밑에서 내게 말했다.
“ 놀아줄게.”
“ 뭐? 저기…마음은 고마운데 대단히 필요없,”
“ 고객님한테 선택권 없는데?”
미친 강제 플레이…!
제발 그 놀이라는 게 고객님 조각조각 땃따따 만은 아니길 바랄 뿐이었다. 아윈아, 알고 있겠지만 죽으면 놀이를 할 수가 없어요, 응. 네가 좋아하는 그 광대짓(?)도 내가 살아있어야 볼 수 있단다?
순간 내 몸이 공중에서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아니 잠깐 세상에 오 갓 나 설마 이대로 추락사 엔딩…은 지면에 가까워지자 추락하던 것이 우뚝 멈췄다. 응? 그러더니 다시 위로 붕 상승한다. 그리고 재차 떨어지고, 도로 붕, 떨어지고 붕…….
‘ …비행기?’
떴따 떴다 비행기?
기억도 안나는 까마득한 어릴 적, 비행기를 태워준다며 삼촌이 아장거리던 나를 허공에 던졌다 받았다 했던 것이 떠오른다. 스케일은 비교가 안 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이건 그때 그 놀이의 연장선이나 다름없었다. 와, 나 당시 그거 진짜 좋아했었는데. 까르륵 까르륵하며 즐기다 마침 멀리 있던 어머니께서 그걸 발견하시고 한달음에 달려와 삼촌의 등짝에 필살 108나찰후리기를 자비 없이 퍽퍽….
코가 시큰해지는 몇 안 되는 좋은 기억이었다. 너무 옛날 추억이 떠올랐어. 아 눈물 난다. 근데 아윈은 설마 이걸 나더러 무서워하라고 해주는 건가. 난 속으로 피식 웃었다. 저 상공까지 올리면 모를까 공포에 떨기엔 왕복 높이가 너무 얕았다. 내가 번지점프도 곧잘 즐기던 인간이라 그렇기도 하지만.
나는 괜히 솔직하게 ‘이거 재밌기만 하구먼 껄껄껄!’하고 반응했다가 한층 가혹한 놀이형(?)에 처해지는 걸 방지하고자 거짓으로 무서움을 연기했다. 꺄악, 무서워! 살려줘! 꺄아악! 너무 무서워!
“ 고객님.”
“ 꺄아…응?”
“ 무섭다면서 입은 웃고 있네?”
이, 이런.
내가 그런 초보적인 실수를. 낭패라는 얼굴로 내려다보자 아윈은 의외로 나를 횡황훙황 시키던 걸 멈추고 순순히 바닥으로 내려주었다. 왠지 오랜만인 것 같은 단단한 지면이 발바닥에 닿는다. 나는 땅에 발을 디디고도 혹시나 ‘이제 조각조각 땃따따 타임’이라고 하는 건 아닐까 싶어 긴장한 채로 아윈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아윈은 그럴 생각까진 없는지 조용했다. 휴, 살았네. 하긴 안 죽인댔지. 그러고 보면 참, 이벨린도 함께 있었다.
나는 재빨리 믿음직한 프렌드실드에게 다가가 찰싹 붙었다.
“ 이벨린!”
“ 라테, 괜찮아요?”
“ 네, 뭐….”
마치 괴롭힘 당하고 엄마한테 쪼르르 가 이르는 어린애가 된 기분이다. 물론 괴롭기는커녕 다시 하고 싶을 만큼 재밌었지만. 오히려 혹시 몰라 치맛자락을 붙잡고 있는 게 힘이 더 들었다-누운 자세로 떨어지느라 크게 펄럭이진 않았지만-. 이벨린은 나를 토닥이더니 과거 케니스에게 그랬던 것처럼 아윈을 나무랐다.
“ 아윈, 그러지 좀 말고 소중히 대해줘. ‘내’ 친구잖아.”
어째 조금 묘한 느낌이 드는 대사였다. 내가 예민한가. 아윈은 나를 흘긋 보더니 도로 이벨린과 눈을 마주쳤다.
“ 네가 마음에 드는 건 사실이지만, 이벨린.”
내숭에 의한 것일 미소가 지금 따라 어딘가 미묘했다. 아윈이 말을 잇는다.
“ 나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지는 마.”
아니, 야. 뭘 그렇게 많이 바랐다고. 그냥 조연 좀 괴롭히지 말라는 것 가지고 쩨쩨하기는. 아윈의 말은 어딘지 모르게 경고성을 띄고 있었다. 이벨린이 대꾸 없이 입을 다무는 게 보인다.
나는 애매한 분위기 속에서 미간을 약간 좁혔다. 생각해보니 얘가 원작에서도 이벨린한테 이렇게 나왔던가? 그랬을 리가. 황태자와 케니스가 쓸개라도 빼줄 것처럼 어화둥둥 하는 판국에 저 혼자 이리 굴었다간 경쟁력이 엉망이 될 게 뻔하다. 근데 얘 지금 왜이래.
“ 아무튼, 회장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랬지? 가자.”
위화감이 감도는 불편한 침묵을 깬 아윈이 나와 이벨린을 텔레포트로 이동시켰다. 뒤이어 본인도 회장에 나타난다. 난 고개를 돌려 아윈이 등장한 자리를 확인하고 눈을 껌벅거렸다. 공교롭게도 페리도트의 바로 정면이었다. 심지어 거리도 가깝다. 어쩜 이런 타이밍이?
“ …!”
페리도트의 동공이 흔들리는 게 여기서도 보인다. 호박색 눈동자가 아윈에게 꽂힌 채 움직일 줄 몰랐다. 하긴 저런 얼굴을 보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려면 장님이거나 여주인공이거나 뭐…. 나만해도 여기가 소설 속인 걸 몰랐더라면 지금쯤 ‘마탑주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임’따위에 가입해 있었을지 모른다. 플랜카드를 흔들며 ‘탑주오빠 사랑해요’를 외치고 다녔을지 누가 알까. 아무렴, 남자 코피도 터뜨리는 위인인데.
은근 동네북인 악녀언니가 아윈에게도 연타로 공기취급 당하는 걸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이벨린이 내게 말을 걸었다.
“ 라테. 미안해요, 괜히 저 때문에….”
“ 네?”
뜬금없는 사과다. 고개를 갸웃하자 이벨린이 이어 말했다.
“ 조금 전에요. 제가 아윈에게 부탁하지만 않았어도….”
“ 테라스에서 저 꺼낸 거요?”
“ 네. 제가 청했었거든요. 라테가 보여서 그냥 반가운 마음에.”
“ 그래요?”
그랬구나. 어쩐지 아윈이 뭣하러 이벨린과의 둘만의 시간에 조연을 데려다 끼얹었나했다. 자식 여주인공 말 잘 듣네? 아깐 왜 그랬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 이벨린 눈 좋네요.”
“ ……네, 뭐. 눈에 띄어서.”
생각 없이 던진 말인데 대답까지의 텀이 묘하게 길었다. 널린 금발에 유행하는 몰개성 드레스 차림이었는데도 눈에 띄었다고 말해주는 립서비스야 고맙지만. 나는 그 간극에 대해 굳이 생각하지 않기로 하고 손을 내저었다.
“ 사과할 필요 없어요. 팔 하나 잘린 것도 아니고 뭐 어때요. 그리고 아윈이 저한테 막 구는 것도 일부러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솔직히 이벨린 탓도 아니잖아요?”
“ 하지만….”
이벨린은 뭔가를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이내 주저하던 것을 삼키고 알겠다며 긍정의 답을 내놓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이벨린은 물고기의 행동에 과한 책임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스스로가 어장의 주인임을 깨닫고 주인 된 바로서 물고기들의 행실을 단속하고자 하는 걸까? 허헛, 뭐 설마. 이벨린의 설정은 ‘천사표 여주인공’이었다. 그래서 그런가보지.
회장 안에 흐르던 선율이 변했다. 바뀐 악단의 연주가 청춘 남녀들에게 춤 한곡씩을 권하듯 리드미컬하게 흘렀다. 마침 황태자가 만인의 주목을 받으며 뚜벅뚜벅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제비꼬리처럼 뒤가 갈라진 푸른색 연미복이 근사하게 그를 감싸 빛낸다. 이벨린을 발견한 황태자의 표정이 전보다 한층 밝게 펴졌다. 나는 그가 가식이 아닌 진짜 미소로 이벨린을 향해 손을 내미는 것을 보다 페리도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충격을 거나하게 먹은 그녀가 돌처럼 굳어 둘에게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철옹성처럼 제 작업을 튕겨내던 남자가 웬 듣도 보도 못한 영애에게 먼저 춤추자며 들이대고 있으니 머리가 띵할 수밖에. 올해의 에이레네는 아마 페리도트에게 최악의 축제로 기억될 것이다. 얘한테도 까이고, 쟤한테도 까이고. 아주 동네북 쿵퍽 쿵퍽.
나는 페리도트를 담았던 시야를 이번엔 아윈에게로 옮겼다. 언제 의자에 앉았는지 상체를 느긋하게 뒤로 젖혀 벽에 기댄 자세로 아윈이 홀 중앙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침 황태자와 이벨린이 음악에 맞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소란스럽던 연회장이 어느 순간 둘만의 무대로 변했다.
============================ 작품 후기 ============================
훙황훙황!
라테: 까르륵
1인칭이라 아윈의 심리변화를 보여드리기가 어렵네요. 쟤는 1단계 2단계 3단계로 마음상태가 변하는 인물이라...'ㅁ'a 후반부에 외전으로 다뤄볼까 해요! 인기많아서 좋네여 저도 아윈 좋아함(?)
+
길고도 달콤했던 나흘간의 휴일이 끝났네요 8ㅁ8 갑자기 일이 없어서 행복해하며 괴로워하며(텅장: 밥내놔!!!엘리아냥녀나 밥내놓으라고!!!!!)보낸 시간이 이렇게..."ㅁ"
다음편은 또 휴일이 생기면 올라옵니다! @[email protected] 크윽 텅장의 굴레
++
~요일제로 설거지 당번을 정하기로 한 엄마와 자식들~
월화: 첫째
수목: 둘째
금토: 막내
일: 아빠
(대망의 일요일)
아빠: 오늘 설거지 당번 누구냐?
나: 아빠! ^^
아빠: 뻥치지마라
나: 진짠뎅! 엄마한테 물어바
아빠: 참나 어이없네ㅡㅡ 영희(가명)씨~! (안방으로 들어가심)
(잠시 후 다시 나오심)
아빠: 어쩐지 오늘따라 설거지가 하고 싶더라 ^^
(달그락 달그락)
나, 동생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soulover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XD 사랑의 총알 빵야뺭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