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3 4. 엮이는 물고기 세 마리 =========================================================================
론드미오를 여기서 마주칠 줄이야. 방향을 보아하니 이미 도서관에서 이벨린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인 것 같았다. 아마 돌아간 뒤엔 사람을 시켜 그녀가 관심있어하는 고대서적에 대해 알아보겠지. 조금만 더 일찍 왔다면 둘이 함께 있는 걸 구경했을 텐데…아유 아까워라.
아쉬워하는 내 위로 황태자의 미성이 떨어졌다.
“ 이곳이 공석인가?”
갑자기 뭔 소리야. 인사를 올린 것에 대한 응답치고는 뜬금없는 문장이다. 나는 머리위로 물음표를 띄우며 몸을 바로 했다.
“ 예?”
“ 고개를 들어도 좋다…아주 바로 올려다보는군.”
“ 제가 좀 빠릅니다. 헌데 공석이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신지?”
“ 사석에선 방금처럼 예의를 차릴 것 같지 않아 한 소리지.”
사석? 예의? 아.
며칠 전 백작가의 정원에서 이벨린과 함께 마주쳤던 때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그걸 까먹으면 금붕어지 사람일까. 나는 당시 황태자가 내게 말을 편히 하라 허락했던 것을 떠올리며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오, 마침 사람도 없는데?
이 부근이 원래 이런 건지 아니면 때맞춰 사용인들이 죄다 바쁜 건지는 모르겠으나, 나와 황태자가 서 있는 복도는 조금의 인적도 없이 황량했다. 한적한 너른 복도를 꼼꼼히 살핀 나는 이것은 깝침의 신이 내게 내린 기회인가하는 생각을 하며 앞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시야에 들어오는 론드미오의 낯짝은 늘 그랬듯 오늘도 어김없이 반질반질 빛나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한번 크게 끄덕였다.
“ 이제 보니 사석이네요!”
그것은 즉 내가 지금부터 나댈 거라는 이야기지!
나는 여차하면 방패1 이벨린과 더불어 방패2 황녀의 손수건까지 꺼낼 생각을 하며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황태자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 직후였다.
“ 앗, 빛을 너무 오래 쳐다봤어! 크윽…앞이, 앞이 보이지 않아…장님이 돼버려!”
“ …….”
“ 아아, 눈앞이 온통 암흑이에요. 흑흑흑. 전하, 저는 이제 어쩌면 좋,”
“ 어의를 불러주지.”
어머. 못 먹을 걸 씹은 표정으로 떨떠름해하다 도망쳤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적응이라도 한 건지 황태자가 태연한 낯으로 내 장난에 응수한다. 나는 더 이상 이 정도 깝침으로는 론드미오를 퇴장시킬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입맛을 다셨다. 어울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 이 몸 탓에 맹인이 된 이를 그냥 보낼 수야 있나. 어의가 탐탁지 않다면 대신관도 있으니 원하는 쪽으로 골라보도록.”
“ 어머나! 굉장히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면 되니까요.”
“ 호오. 그런 것도 할 줄 아나?”
“ 얼마 전 수양을 통해 개안을 마쳤답니다.”
“ 그거 축하할 일이군.”
잘되었다며 박수까지 쳐준 황태자가 문득 내가 들고 있는 종이봉투로 시선을 옮겼다.
“ 그건 뭔가?”
“ 아, 이건…음, 별 건 아닌데요.”
갓 튀긴 따끈따끈한 팝콘이지 뭐. 팝콘이라고 말해봤자 모르겠지만. 난 기왕 황태자가 관심을 보인 김에 맛이라도 알려줄까 싶어 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치즈냄새가 훅 끼친다. 비숏처럼 한주먹 쥐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혹시나 싶어 챙겨왔던 여분의 봉투도 품에서 꺼냈다. 이 정도쯤 덜어줄까.
“ 먹을거리인가? 처음 보는 외양이야.”
“ 맛 좋아요. 과자종류인데, 아마 입에 맞으실 거예요.”
난 덜어낸 팝콘봉지를 황태자에게 내밀려다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곧 장사를 시작할 품목인데 그냥 줄게 아니라 값이라도 받아볼까 싶었다. 나는 봉투를 도로 품에 안고 빈손을 내밀었다.
“ 선불입니다.”
“ 판매라….”
내 손을 앞에 두고 황태자가 픽 옅게 웃었다. 상황이 우스운 것 같았다. 어허, 돈도 많으신 분이.
“ 얼만가?”
“ 1골드예요.”
“ 터무니없는 값이군.”
가격을 들은 황태자가 미간을 좁혔다. 그야 그렇지. 내가 부른 금액은 보통 시중가보다 족히 백배는 높았으니까. 그러나 이건 다 나의 세심한 배려가 들어간 책정이었다. 난 빙그레 웃음을 띄며 말했다.
“ 전하께서 은화나 동화를 가지고계시진 않을 듯하여 특별히 인상된 맞춤가격으로 모셨답니다.”
이것이 바로 신개념 바가지 배려!
황태자는 내 뻔뻔한 설명에 어처구니가 사라진 듯 잠시 대답이 없더니, 이내 짐짓 눈썹을 추켜올렸다.
“ 내게 바가지를 씌운 건 영애가 처음이야.”
“ 영광이네요.”
“ 본래라면 경을 칠 일이나 이벨린을 보아 그냥 넘기도록 하지.”
여주인공 친구라서 봐준다는 말이었다. 허허, 그거 참 고마운 걸? 나는 과거 숱하게 보았던 사극을 떠올리며 상체를 숙였다.
“ 즈언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잘 따라했나 모르겠네. 배에 힘을 주고 최대한 걸걸하게 외치긴 했는데. 원래 사극대사는 걸걸한 맛이지!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드는데, 마주친 황태자의 상태가 어딘지 이상했다. 왜 입가를 부들부들 떨고 그러…응?
“ 하하하하!”
지 혼자서 갑자기 빵 터지고 난리다. 황태자는 사람을 앞에 두고 한참을 신나게 웃더니 품에서 금화를 꺼내 내게 주었다. 뭔진 모르겠지만 돈을 받았으니 상품을 팔아야지. 팝콘봉투를 받아든 황태자가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 영애도 참 특이해.”
특이하다니! 큰 웃음 더하기 저 대사는 보통 로맨스소설에서 사랑의 서막을 뜻하는 알림이었다. 나는 황태자와 눈을 마주한 채 입을 열었다.
“ 혹시 사랑이 싹틀 것 같나요?”
와, 바로 정색하네.
내 같잖은 질문에 웃음을 잃은 론드미오는 이만 충분히 시간을 지체했다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나는 예의상 작별인사는 격식을 갖추어 날려주었다. 뚜벅뚜벅, 황태자가 단정한 걸음걸이로 멀어진다.
나는 그 뒷모습을 응시하다 어깨를 으쓱하고 몸을 돌렸다. 특이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기실 의미가 없는 대사라는 걸 충분히 알고 있었다. 굳이 비유하자면 길가의 돌멩이가 남다른 모양인 것에 ‘특이하네’하고 한 마디 중얼거리는 정도일까. 같은 단어를 들어도 여주인공과 조연은 그 무게가 퍽 달랐다. 증거로 황태자는 아직 내 이름도 모른다.
뭐, 굳이 알아줄 필요는 없지만. 조연이란 다 그런 거지! 난 눈 호강을 한 것에 의의를 두며 모퉁이를 돌아 도서관으로 향했다.
도서관의 바로 지척에서 나는 발을 멈췄다. 굳이 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마침 만나길 원했던 사람이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낯익은 청흑발을 보며 난 먼저 입을 열었다.
“ 여기서 다 만나네요!”
“ 어머나, 라테.”
내 가증스러운 인사에 이벨린이 또 순수하게 반가워해주었다. 앞으로도 이벨린은 나와 ‘뭐야 이거 스토커아닌가’싶을만한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겠지만 그녀는 그때마다 의심 없이 ‘정말 우연이네요‘라며 날 반겨줄 것이다. 어차피 물고기 세 마리와 하루가 멀다 하고 가는 곳마다 만나는 마당에 나 하나쯤 추가하는 것 정도야!
“ 꼭 보고 싶었어요. 할 말이 있었거든요.”
나는 견우를 만난 직녀마냥 격한 반가움을 표현하며 이벨린의 곁에 찰싹 붙었다. 이벨린과 나란히 걸어가며 난 목적이었던 케니스 뒷담 철회를 시작했다. 그녀는 내가 갑작스레 케니스를 변호-그것도 열성적으로-하는 것에 조금 의아해하는 기색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 가만 생각해보니 각하께서도, 뭐래야 되지, 은근히 좋은 분인 것 같더라구요.”
난 내친김에 케니스를 칭찬까지 했다. 평화를 위한 발버둥이었다. 이벨린은 내 말에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 맞아요.”
맞긴 무슨…. 내가 먼저 뱉어놓고도 동의할 수 없는 맞장구였다. 하기야 이벨린의 입장에선 케니스는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나 저를 구해주는 무뚝뚝한 기사님쯤 될 것이다. 실제로도 그렇고. 그러고 보면 내가 목격한 것만 케니스가 벌써 이벨린을 세 번은 도와줬다. 생각난 김에 누가누가 많이 구해주나 랭킹이라도 매겨볼까!
그런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이벨린이 곤란한 듯 중얼거렸다.
“ 길을 잃은 것 같아요.”
나는 우뚝 자리에 멈췄다. 엥?
“ 여기가 어딜까요?”
“ …….”
난 이벨린의 순진무구한 눈망울을 보며 침묵을 지켰다. 당연히 나도 모르지.
길을 잃었다~ 딴딴따단 따단딴. 어딜 가야 할까~ 열두 개로 갈린 조각난 황궁 길~.
여주인공과 함께 황성 안을 걷다가 뜬금없이 길을 잃었다. 나는 잠시 생각하다 조용히 품에 안은 팝콘 봉투의 입구를 열었다.
“ …이벨린?”
“ 전하?”
아, 팝콘냄새. 마음에 들어.
“ 여기서 뭘 하고 있었나.”
“ 길을 잃어서 그만….”
팝콘 맛있다. 냠냠.
“ 하하하. 정말,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군.”
“ …송구합니다.”
“ 탓하려는 게 아니야.”
식감이 살아있네. 이 정도 시간은 봉투에 담아놔도 괜찮은가보다.
“ 이벨린. 그대는 항상 나를 신경 쓰이게 해.”
“ 왜, 저를….”
“ 글쎄, 왜일까?”
치즈 양념이 생각보다 많이 먹으니 질린다. 음, 짭짤한 맛이 약간 부족한가?
“ 어쨌든 길은 내가 안내해주도록 하지. 빚이야. 빚을 갚을 방법은,”
아예 매운 맛을 추가해서 스파이시 치즈를 만드는 것도 괜찮겠는데.
“ 천천히 생각해보는 걸로.”
그나저나 지금으로선 물고기들 중에 황태자가 가장 적극적이네.
나는 거의 다 먹은 봉투를 돌돌 말며 론드미오의 느끼한…음, 아니지. 별로 느끼하지도 않네. 잘생겨서 커버된다. 그의 녹아내릴 것 같은 눈웃음을 응시했다. 이렇게 생긴 얼굴로 저렇게까지 들이대는데 이벨린은 그 하얀 피부에 홍조하나 없었다. 단아한 미모위에 그녀가 띄우고 있는 것은 오로지 당황이었다. 그래그래, 아직 초반인데 흔들리기엔 멀었지, 암.
“ 저기, 전하? 저도 있어요?”
걷기 시작한 둘을 뒤따르며 공기화를 벗어나고자 말을 걸어봤다. 황태자가 흠칫한다.
“ ……알고 있었다.”
뻥치고 있네.
*
길을 안내해준 것에 대한 대가로 황태자는 이벨린에게 함께 식사할 것을 제안했다. 오올, 이렇게 식사도 같이하고 나중에는 고서를 빌미로 데이트도 하고 그러겠지. 얘 잘 들이대는데? 케니스랑 아윈도 분발 좀 해야겠다. 어련히 알아서 엮이겠지만은.
나는 둘의 오찬에까지 끼어들 마음은 없었던 터라-어차피 끼어들 수 도 없지만-, 비숏을 데리고 황성에서 벗어났다. 비숏은 볕 잘 드는 정원에서 웬 토끼를 쓰다듬고 있는 걸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황성에서 신분이 증명된 자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곳은 정원과 도서관뿐이다. 그나저나 토끼가 아직도 있네.
비숏을 달고 성문을 나오는데 그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 저기, 라테님. 아까 들어올 때 제게 주셨던 과자 말입니다….”
“ 그거 집에 많아요. 다른 맛도 있고.”
“ 그, 그렇습니까?”
“ 네. 마차 부를까요?”
“ 아뇨! 텔레포트 쓰겠습니다.”
자진하길래 완전히 회복한줄 알았더니, 비숏은 두 사람 몫의 텔레포트를 쓰고 난 뒤 도로 창백한 안색으로 회귀했다. 나는 파리한 비숏에게 돌아온 저택에서 팝콘을 종류별로 잔뜩 안겨주었다.
============================ 작품 후기 ============================
'ㅁ'뜬금없지만 남주 댓글투표 한번 해볼까요?
(굳이 골라야 한다면) 1.황태자 2.케니스 3.아윈
댓글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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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부터는 쳅터가 바뀝니다 > < ! 예쁜 악녀언니의 등장 빠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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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들 남주는 첫화부터 정해놓고 시작했습니다. 음...역하렘은 아니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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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딸의 남친이 마음에 들지않는 아빠 2~
아빠: 남친 전화번호 줘봐라
막내: 왜?;;;
아빠: 불러내서 술 한번 마셔봐야지. 마셔보고 잘 마시면...탈락
아빠: 못 마시면....탈락
아빠: 적당히 마시면....탈락
나: 두 발로 걸으면....탈락
나: 숨 쉬면....탈락
막내: 아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친구와 통화중인 막내)
막내: 어딘데 운동장? 뭐?? 남자애랑 같이 있다고??
아빠: (옆에서 듣고있다가 갑자기) 그 남자애 니 남친이다. 헤어져
나: ㅋㅋㅋㅋㅋㅋㅋㅋ급 잘못된 만남ㅋㅋㅋㅋㅋㅋㅋ
막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난 너를 믿었던 만큼 난 내 친구도 믿었기엨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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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lover님, 구월의사과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XD ! 우걱우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