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8 4. 엮이는 물고기 세 마리 =========================================================================
“ 어떻게…분명 에스반데 공작은 북쪽 토벌대에 합류한다고….”
“ 이쪽에서 흘린 거짓정보예요.”
“ 말도 안 돼!”
복면대장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하긴 나라도…. 지금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1. 죽는다 2. 사망한다 3. 뒤진다 4. 숨을 그만쉰다 뭐 이런 것들만 즐비할 터였다. 더 슬픈 것도 있었다. 5. 고문당하다 삶을 마감한다.
어쨌든 살긴 그른 복면대장은 급하게 눈알을 굴렸다. 어딘가로 열심히 눈짓하는 걸 보니 어째 뻔한 전개가 이어질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게…그래, 이 느낌은 인질극이다! 과거 수많은 로맨스판타지를 섭렵한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추측이었다. 대다수가 실패하고 조짐을 당하지만 그래도 한 번씩은 시도해본다는 그 인질극!
아니나 다를까 케니스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있던 놈이 돌연 몸을 날린다. 이봐, 난 자네가 향할 곳을 알고 있지. 자네는 다름 아닌 황녀를 목표로 삼을….
“ 거, 검 버려. 아니면 이 여자의 목숨은 없다.”
…줄 알았는데 저요?
목에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닿는다. 난 뜬금없는 상황전개에 얼이 빠져 망부석처럼 굳었다. 왜 나를? 인질로서 가치가 있는 건 원작에 몇 페이지 나오지도 않는 나보다 당연히 이 소동의 본 목적인 황녀 쪽이었다. 나는 내 목덜미에 칼을 들이댄 복면이 황녀를 인질로 잡는 건 그 시작부터 실패확률이 높을 거라는 나름의 판단에 따라 움직인 건지 아니면 단순한 병신인건지 판명이 되질 않아 당황스러웠다.
내가 인질이라니!
난 공포에 질렸다.
케니스가 상대인데 내가 인질이라니!
이 미친놈이 여기서 가장 쓸모없는 인질을 골랐어?! 난 케니스가 실수인척 나와 복면을 동시에 찌르는 상상을 하다 그 현실가능성에 사색이 됐다. 내 인생이…결국 이렇게…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설계하며 유언을 고르고 있자니 눈물이 앞을 가렸다. 복면 이 거지같은 놈이 죽으려면 지 혼자죽던가ㅡ가만.
난 문득 정신을 차렸다. 케니스의 낯에 갈등-찌를까 말까-의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나 가발에다 가면 쓰고 있네. 잊고 있던 걸 깨달았다. 거기다 케니스는 전보다 내게 몇 배는 너그러운 상태였다-아마도-. 애써 구해주지는 않더라도 일부러 죽이지도 않을 거란 소리다.
그리고 그는 이 정도 인질극에 딱히 ‘애쓸’ 필요가 없었다.
뚜둑!
“ 크악!”
케니스가 선 자리에서 슬쩍 움직이니 지척에서 비명이 터졌다. 빨라서 눈에 보이지는 않았지만, 칼 손잡이로 복면의 손목을 쳐 뼈를 부러뜨린 것 같았다. 목에 닿아있던 단도가 바닥으로 떨어진다. 예! 나는 복면의 자세가 무너진 틈을 타 몸을 비틀어 속박에서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괜한 복수심으로 바닥의 단도를 발로 차 멀리 보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치한 발길질이지만 그래도 속이 좀 풀린다. 감히 날 죽음의 공포-케니스 때문이지만-에 떨게 해!
정해진 결과였지만 인질극은 실패했다. 복면대장은 작살나는 제 부하의 꼴에 동공지진을 일으키더니 품에서 주먹만 한 구슬을 꺼냈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폼이다. 나 혼돈의 카오스에서 혼자 도망칠 때 저러는데.
구슬을 생명줄 마냥 꽉 쥔 복면대장이 뭔가 대사를 꺼내려는 듯 입을 열었다. 앗, 아저씨! 그래선 안 돼!
“ 내 오늘은 비록 이렇게 물러나지만, 다음번엔 반드…컥!”
털썩.
안 기다려 주거든….
야수의 꽃에도 기다림의 미학이 있긴 있었다. 물론 여주인공 한정. 찰나가 급한 적진의 한복판에서도 주절주절 기승전결이 들어간 장문을 늘어놓을 수 있는 건 이벨린뿐이었다. 너넨 아니야. 물론 나도 아니고. 문장은커녕 한마디도 안 기다려준다. 칼 든 사람 앞에서 ‘두고 보자’따위를 말하려했다간 반쯤 내뱉고 푹찍이었다. 날숨 뱉을 시간에 도망가는 게 낫다.
대장이 쓰러지자 뭔가 있어보이던 복면들은 대번에 오합지졸이 되었다. 손짓, 칼짓 한 번에 죄다 픽픽 고꾸라진다. 두 번 치는 법이 없었다. 툭, 남들이 보기엔 가볍게 건드릴 뿐인데 실이 끊어진 인형마냥 이리저리 널브러진다. 싸움이아니라 마치 장난하는 것 같았다.
소강은 그야말로 금세였다. 삽시간에 정리된 주변이 언제 소란스러웠냐는 듯 고요하다. 그 평온한 침묵 가운데 케니스가 처음과 변함없는 안색으로 곧이 서있었다. 어디선가 연풍이 불어와 결 좋은 머리카락을 살랑인다. 쟤 어디서 산들바람 아티펙트라도 산 거 아니야?
바람의 인공지능에 대해 고민하는데 갑자기 풍속이 강해졌다. 산들거리던 미풍이 난데없이 강풍마냥 세차게 불어온다. 세기가 변했다. 마치 폭풍처럼! 그리고 난 본능적으로 이 엄청난 돌풍의 정체를 알 것 같았다. 이, 이건 바로.
간! 지! 폭! 풍!
케니스한테서 간지폭풍이 분다!
미친! 난 육성으로 욕이 나오려는 것을 참으며 세찬 강풍을 정면에서 맞이했다. 휘몰아치는 바람에서는 여러 간지가 느껴졌다. 카리스마! 멋짐! 잘생김! 강함! 잘났음! 천재!…등등 많기도 하네!
몰아친 폭풍은 실내를 한바탕 휩쓸고 나서야 잠잠해졌다. 바람이 멎고 주위가 다시 고요해지자 난 손을 뻗어 가발부터 더듬었다. 확인 결과 멀쩡한 걸 보니 실재하는 바람이 아니라 정신적 돌풍이었던 모양이다. 허헛, 야수의 꽃…가지가지 하는데?
뭐 기실 간지폭풍이 분 걸 이해는 한다. 압도적인 무력차를 보여주며 찰나에 침입자들을 소탕한 케니스는 그만큼 멋이 넘쳤다. 게다가 별 것 아니라는 듯 의연한 저 자세까지. 재수 없지만 크으…인정한다! 난 힐끗 눈을 돌려 기사 둘을 쳐다보았다. 응, 사랑에 빠졌구먼. 럽~럽~럽. 당연하지만 여타 여인네들도 상황는 비슷했다.
선뜻 깨지지 않는 침묵을 처음 무너뜨린 이는 황녀였다.
“ 고마워요, 에스반데 공. 제 부탁을 들어주셔서.”
“ 아닙니다.”
케니스가 고개를 젓는다. 난 그녀가 말한 ‘부탁’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지척에서 혈향이 전혀 나지 않는다. 사방이 널브러진 복면 투성이었지만 핏자국이 일체 눈에 띄지 않았다. 죽이지 않고 전부 기절시켰단 얘기였다. 허어, 날이 아니라 옆면으로 치기라도 한 건가.
“ 꽤 오래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케니스는 덤덤히 말했다. 황녀의 눈매가 고마움을 담아 호선으로 휘었다. 그녀는 그렇게 화답처럼 미소한 후 가면에 손을 가져갔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벗겨낸다. 연회장에서 꽃처럼 아름답다 감탄했던 그녀의 미모가 조명아래 다시금 드러났다.
아앗, 만약 가발도 쓰고 있었더라면 소설 속의 찰랑…! 하는 엘라스틴 장면을 실사로 볼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이상한 것에 아쉬워하며 가까워지는 황녀를 응시했다.
“ 괜찮은가요? 많이 놀랐을 텐데…미안해요, 이런 일에 휘말리게 해서.”
황녀언니는 먼저보다 배는 미안스러운 기색이었다. 그야 인질극 때문이겠지. 난 몹시 괜찮다는 뜻으로 도리질을 하고 어깨를 으쓱했다. 어쨌든 멀쩡하니까. 나는 결과론자 기질이 있었다.
그녀는 조금 안도한 낯으로 내게 사후설명을 들려주었다. 복면 무리는 황족의 존재자체에 반발하는 이들의 모임으로, 지금처럼 떼로 습격하거나 암살을 시도하는 일이 잦은 단체라고 했다. 밀정을 통해 저를 노리고 있단 정보를 입수한 황녀는 그들을 변방으로 유인하여 소탕하겠다는 핑계-이 쪽이 핑계였다니!-를 대고 모임회를 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반동종자를 잡는 겸 팬미팅을 연 것이 아니라 팬미팅을 여는 김에 겸사겸사 반동종자를 때려잡았다는 얘기였다.
황녀는 수줍은 듯 입을 가렸다.
“ 이렇게라도 만나고 싶었어요.”
“ …….”
이거 그린라이트인가요?
나를 향한 황녀언니의 깊은 애정에 네모박스의 초록불이 켜지는 환시마저 일었다. 나는 불 켜진 박스를 응시하다 한 가지 사실을 직감했다. 안 그래도 제일 만만한 황태자가 한층 더 만만해 지겠구나!
나는 모 아이돌 그룹의 ‘내가 그렇게렇게 만만하니, 헤이!’를 황태자가 부르는 상상을 하며 황녀의 말에 답했다.
“ 가문의 영광입니다.”
황녀언니가 예쁘게 웃으며 손사래를 친다. 그 면을 보고 있자니 상대가 맨얼굴을 드러냈는데 나도 그에 호응해야하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면을 만지작거리다 케니스를 곁눈질했다. 쟤 아직 안 갔네. 그냥 쓰고 있어야겠다.
그리고 힐끔거리면서 깨달은 게 있었다. 나 아직 감사인사 안했구나! 나는 굳이 이 자리에서 몰염치할 마음은 없었다. 해야 하는 걸 상기하자마자 난 좌측 방향으로 고개를 숙였다.
“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설마 이 문장을 얘한테 뱉는 날이 올 줄이야.
“ 별 것 아니다.”
케니스는 여상한 어조로 무감하게 응했다. 그래, 정말 별 거 아니게 보이긴 하더라. 과연 위상 드높은 전장의 검은 사신! 만약 이 놈이 황태자만큼만 만만했더라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앞으로는 저를 비모르의 노란 사신이라고 불러주세요!’하고 깐죽거렸을 텐데. 기껏 지운 데드플래그를 새 걸로 돌려받고 싶지 않아 참았다.
============================ 작품 후기 ============================
내가 그렇게렇게 만만하니~헤이!
Q. 라테는 왜이러케 태평한가여?'ㅇ'
A. 위기감이 음슴...8ㅁ8 현실감도 사실 좀 음슴
케니스 등장 이후부터는 야수의꽃 남주의 먼치킨스러움을 믿음 8ㅁ8!
+
다음화에 마법사나와여 (예고
라테의 짝은..뭐시냐...다음 챕터쯤 되면 입질이 오실 것이야요"ㅁ"!
개인지 수요조사는 남주에게서 남주스멜이 나기 시작하면ㅋㅋㅋㅋ그때 해볼게요!
(그렇게 완결이 났다)
++
동생: (거울을 보며)엄마 나 살찐거같아ㅠㅠ뱃살이 완전..
엄마: 호호^^니가 쪄봤자지~엄마 딸인데 모~
동생: 진짜? 이거바바 ㅜㅜ(엄마에게 배를 보여줌)
엄마: (정색)너 왜그래?
동생: ....
엄마: (심각)너 왜 그렇게 됐어?
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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