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25 4. 엮이는 물고기 세 마리 =========================================================================
나는 벙쪄서 쏜살같이 멀어지는 물고기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어찌나 빨리 날아가는지 순식간에 둘의 모습이 점처럼 작아지는 게 보였다. 난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서서 그저 눈만 깜박였다.
…? 이게 뭐지. 내가 지금 뭘 본걸까.
도저히 물음표 외엔 금시의 내 심정을 표현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상황파악이 쉽사리 되지 않는다. 어, 그러니까, 지금 케니스가 튄 거?
이벨린만 데리고? 날 두고? 몬스터 한복판에다 일부러, 나 엿 먹으라고?
“ 아니 이 미친 생선이!”
난 기함했다. 머릿속에서 상황이 정리되자마자 자동으로 욕부터 튀어나왔다. 이건 진짜 상상도 못한 사태였다. 원작대로라면 화려한 검 솜씨를 뽐내며 오크들에게 삼도천 이용권을 끊어주었을 케니스가 돌연 이벨린만 달랑 들고 이곳에서 날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까닭은 하나였다. 못 죽여서 애가 닳던 대상이 지 알아서 사지로 기어들어간 판국에 내가 뭐 하러 거길 끼어듦? 개이득. 걍 도망칠 거임 빠이, 즐천당!…이거잖아!
그야말로 하늘을 찌르는 졸렬함이었다. 진짜 충격적일만큼 치사하고 더럽다. 문득 예전에 즐겨 읽었던 모 만화의 졸렬잎 마을 주민들이 떠올랐다. 이건 걔네보다 더해. 뭔 속이 새우젓보다 좁아!
나는 아연한 얼굴로 고개만 돌려 케니스가 선사해준 상황을 눈에 담았다. 오크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멀뚱멀뚱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뭐야. 쟤넨 또 왜 안 움직여. 생각하는 순간 선두의 한 놈이 말을 뱉었다.
“ 취익, 버렸다. 취익.”
“ 취익, 인간. 취익, 불쌍하다. 취익.”
“ …….”
너네 말 잘하는구나.
오크들의 언어구사가 생각보다 다채로웠다. 난 또 인간, 죽인다, 이 두 단어밖에 못하는 줄 알았지. 참 겉보기와 다르게 지능이 뛰어난 친구들이네…는 무슨. 현실을 도피하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슬픈 눈물을 삼켰다. 몬스터에게 동정을 받다니. 내 인생…. 눈물이 차올라서 고갤 들어.
그러나 오크들의 연민은 잠시였다.
“ 그래도, 취익, 죽인다!”
“ 취익, 인간은 무조건, 취익. 죽인다!”
…. 불쌍히 여기는 거 아니었어? 이건 또 새로운 배신이었다. 나는 어느새 다시 죽인다를 연발하는 오크들을 착잡한 눈길로 쳐다봤다. 그래, 결국 우린 이런 운명인거지. 나는 아련한 표정으로 품에 손을 넣었다. 잡히는 일곱 장의 스크롤을 모조리 꺼내 찢을 준비를 했다. 있는 걸 전부 가져와서 망정이지.
내가 매지컬 캐쉬 파워를 장착할 때까지 오크들은 그대로 꼼짝하지 않았다. 연신 인간 죽인다를 나불대는 입과 달리 미동조차 않는 모습이 의아하긴 했으나, 굳이 이유를 분석하고 싶진 않았다. 어쨌든 움직이기 시작하면 죽이려고 달려들 테니까. 싸움은 선빵이지.
난 손에 든 스크롤을 주저없이 찢었다. 종잇조각에 케니스를 대입하니 손짓이 절로 거칠어진다. 스크롤이 주욱 반으로 갈라짐과 동시에 내 앞으로 폭풍이 일었다.
후우우우웅!
그래, 기왕 이렇게 된 거 다 쓰자, 다 써! 나는 연달아 스크롤을 두 장씩 신명나게 찢어댔다. 폭풍에 더해 이번엔 거센 토네이도가 오크 떼를 삼킨다. 산길이라 덩달아 휩쓸린 나뭇가지나 돌조각 등이 사방에서 날아다녔으나 내게는 일말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 사용한 스크롤 중 실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드 한 장, 바람계열 공격마법 다섯 장, 그리고 텔레포트가 하나. 실로 완벽한 조합이었다. 내가 어떻게 이리 딱 맞게 남겨뒀었는지 모르겠다. 나한테 선견지명이 있나.
몇 분쯤 지나자 마법의 효과가 일체 사라졌다. 회오리가 가라앉고 다시 주인이 된 산들바람이 내 이마를 간질였다. 주변은 완전히 다른 풍경으로 변해있었다. 아주 초토화구만. 오크들은 이미 어디까지 날아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안녕. 잠깐이지만 즐거운 만남이었어. 다음엔 무해한 생물로 태어나렴. 나는 지금쯤 요단강을 건너고 있을 그들에게 속으로 심심한 애도를 표하고 뒤를 돌았다. 텔레포트도 그냥 마저 쓸까, 그런데 이거 좌표가 어디로 잡혀있더라…를 생각하며 정면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
쟤가 왜 저기 있지.
케니스가 형용하기 힘든 낯짝으로 조금 먼 곳에서 내 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못 볼 걸 본 것처럼 와락 인상을 일그러뜨린다. 허허, 내참 기가 막혀서. 야, 그런 표정 지을 사람은 나거든?
대체 여긴 왜 온 걸까. 이게 웬 횡재라 날 버리고 빛의 속도로 튀더니 그새 도로 돌아온 그의 작태는 내게 의문만 안겨주었다. 뭐하는 애야 저거. 설마 걱정돼서 다시 온 건가? 내가 안 죽었을까봐.
거 예상이랑 다르게 말짱해서 유감이시겠수다. 당장 욕이라도 퍼붓고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고개를 디밀었으나, 내 앞날을 시궁창으로 처박을 순 없는 노릇이라 꾹 눌러 참았다. 대신 나는 활짝 웃었다. 아주 화알짝.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방긋방긋. 쟤 내 웃는 얼굴 싫어하잖아.
나는 그렇게 빛나는 미소를 날리며 텔레포트 스크롤을 죽 찍었다.
*
그는 진심으로 라테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
이벨린을 안전한 곳에 내려놓은 케니스는 ‘어차피 몬스터들은 지금 움직이지 못하니 걱정할 것 없다’는 말로 그녀를 안심시켰다. 자칫 헛소리로 치부될 수 있는 발언이었지만, 담긴 내용은 흠 없는 사실이었다. 실제로 오크들은 제 의지완 다르게 손끝하나 까딱할 수 없는 상태였다. 종전의 살기가 그들의 육체를 강제로 묶어놓았기 때문이다. 케니스는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살기에 마나를 담아 오크 몇 마리를 속박하는 일 따윈 번거롭지도 않았다.
케니스는 이벨린을 자리에 두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라테를 남겨둔 방향이었다. 그는 라테에게 진정으로 살의를 품은 적은 없었다. 정녕 죽이고자했다면 애저녁에 사람을 쓰거나 가문을 주저앉혔을 것이다. 이리 번거로운 방법은 처음부터 택하지도 않는다.
그는 다만 대상에게 겁을 줄 심산이었다. 그녀가 눈에 띄게 거슬리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이벨린의 곁에 붙어 너구리같은 낯을 하고 라테는 그의 신경을 쉼 없이 긁었다. 짜증이 절로 치밀어 당장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을 만큼. 그녀는 사람을 열 받게 하는 재주를 타고난 것 같았다.
제 속이 편해지려면 저 건방진 작태를 필히 고쳐야한다. 케니스는 생각했고, 마침 눈앞에 기회가 왔다. 토벌에서 용케 살아남은 오크들은 불쾌한 대상이었으나 이 상황엔 이용가치가 있었다. 그는 라테의 눈앞에서 그들을 친히 도륙할 속셈이었다. 보통은 몬스터무리 앞에 홀로 남겨지는 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기 마련이다. 더욱이 그 몬스터들이 면전에서 썰려나가면 말 할것도 없고.
그래, 보통은.
케니스는 미간에 힘을 주었다. 그가 맞이한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마주한 장소에 겁에 질린 라테 따위는 없었다. 그녀는 익숙한 솜씨로 스크롤을 찢어가며 오크들을 날려 보내고 있었다. 발생하는 마법의 위력이 하나같이 고가의 스크롤임을 증명했다. 실드로 제 몸을 보호하고 거침없이 공격마법을 발현시키는 폼이 능숙하다.
도대체.
이벨린이 친구 운운한 후로 라테에 대한 조사는 이미 끝냈다. 그녀의 부친인 엑트리 자작은 부유한 귀족이 아니었다. 2대 전에 영지를 빼앗겨 나라의 녹을 받고 사는 처지였다. 그 외 다른 돈줄은 없다. 설사 모아둔 재산이 있다 해도 저 정도의 사치는 불가했다. 일 이년내로 모든 가산을 탕진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그는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라테가 하는 꼴을 모조리 지켜보았다. 상황이 정리되고 우연히 마주친 시선에 습관처럼 표정을 찌푸렸다. 하는 행동부터 지금의 이 형국까지, 라테는 무엇 하나 이해할 수 없는 대상이었다. 도무지.
그녀는 잔뜩 일그러진 케니스의 안면에 대고 방긋거리며 웃었다. 작정하고 지은 듯한 밝은 미소를 남기고 라테는 텔레포트 스크롤을 찢어 사라졌다. 케니스는 텅 빈 자리를 응시하며 침음을 삼켰다.
정체가 뭔가. 그는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저런 인간상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정말 단 한번도. 진정.
라테가 사라진 공간에 혼란스러움이 대신 남았다.
============================ 작품 후기 ============================
(케니스가 예상보다 스무배쯤 욕을 먹어 당황스러운 상태)
어...케니스 영생하겠네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한 천 년쯤 살고 우연히 죽었다가 내생에도 영생 할 기세(..
(조금 미안해짐
+루트 짐작하시는 분들이 계신데 추측하기엔 아직 조금 이르셔요☞☜ 흠흠
놀라긴 했지만 케니스를 욕하시는 건 괜찮았습니다. ㅋ섞인 간단한 욕에서부터 진지한 쌍욕까지. 사람마다 개새끼(in 소설)의 기준이 다르니 그러려니 했습니다. 막 장문으로 욕하시고 마지막에 '작가님 놀라셨죠 ㅠㅠ죄송'하시는 귀여우신 분들도 계셨고.
그런데 전개, 글 자체에 대한 비난부터 혐오스러워서 더는 글을 읽지 못하겠다는 이야긴 충격이었네요. 혐오스럽다니. 공들여 혐오스럽고 무리수에 도가 지나치고 이해할 수 없는 글을 쓴 저는 멘탈이 조각났답니다. 바삭바삭. 가방에 넣고 하루종일 돌아다닌 쿠크다스가 됐어요. 전 댓글을 하나하나 읽는 편인데, 영향을 꽤 받는 편입니다. 댓글따라 정해둔 전개나 설정을 바꾸지는 않지만 험한 댓글이 있으면 상처를 쉽게 입어요. 쉽게 입는 만큼 보통은 쉽게 회복하지만, 이번엔 안 그래도 심신이 지쳐있던 터라 크게 충격을 받았나봐요. 멘탈 붙이는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습니다. 짧으면 1주, 길면 2주쯤.
마침 과제도 산더미인데 한동안은 학업과 일에 몰두하다 올게요. 멘탈도 다시 단단히 붙이고. 쿠쿠다스 말고 웨하스 정도는 만들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독자님들 마른하늘에 날벼락 미안해요ㅜㅜ
그럼 다들 그동안 모기 조심하시고(잠 설침ㅜㅜㅜ
다음편에서 다시 만나요! 늘 사랑합니다 씨유레이러☆
+
이번화 댓글은 후기보다 내용에 관한 얘기였으면 좋겠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