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15화 (15/100)

00015  2. 두근두근 와작와작 팝콘 팔아요  =========================================================================

나오다 말았지만 어떤 단어인지 어련히 알 것 같았다. 그래, 이해한다. 날보고 떠오르는 게 그것밖에 없겠지. 얜 팝콘 이름도 모르니까. 그나저나 보는 즉시 자동으로 말이 튀어나온 걸 보면 어지간히 인상이 강했던 모양이다. 물끄러미 응시하자 그녀는 잔뜩 당황한 기색을 했다.

“ 아, 아니, 저기….”

“ 우리 어제 정원에서 만났었죠?”

선수를 쳤다. 내 아는체에 이벨린이 반색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어쩜 이런 우연이 다 있냐는 듯 가증스레 손뼉을 치며 함박 웃었다. 그러자 이벨린이 얼결에 날 따라 웃는 게 보였다. 이거 시작이 순조롭군.

“ 그땐 도망치느라 바빠서 감사인사도 못했네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제 은인이에요.”

“ 아, 아뇨. 은인은 무슨.”

“ 진심이에요. 영애께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전 어제 죽었을지도 몰라요.”

“ …….”

은인이라는 말에 손사래를 치던 이벨린이 뒤이어진 문장엔 부정하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이 은근 긍정의 낌새를 담은터라 난 새삼스레 정신적 타격을 입었다. 나 진짜 죽을 뻔했던 거 맞잖아? 아니 케니스 이 미친놈이. 정말로 날 썰려고 했어?

반쯤은 장난으로 했던 가정이 진짜였다는 사실에 등 뒤로 식은땀이 살 흘렀다. 어쩐지 이벨린이 몸을 던져서까지 막아주더라니. 무사히 붙어있는 목이 오늘따라 다행스럽다. 난 그녀에게 빌붙어야겠다는 결심을 한층 두텁게 다졌다.

고개를 흔들어 충격을 털어내고 나는 통성명을 시도했다.

“ …그러고 보니 구해주셨는데 이름도 모르네요. 물어봐도 될까요?”

“ 아, 전 이벨린 도트에요. 이벨린이라고 불러줘요.”

“ 그렇군요. 이벨린, 전 라테 엑트리에요. 편하게 라테라고 불러요.”

“ 그래요, 라테.”

좋아. 일단 이름은 텄다. 나는 그녀가 내게 경계를 없애고 호의를 가질만한 주제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며 머리를 굴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고대어를 좀 공부해 두는 건데. 이벨린은 고대문자 학습을 위해 저 먼 나라에서부터 여기까지 건너온 학구열 넘치는 유학생이었다-막상 공부는 얼마하지 않지만-. 이 때문에 원작에선 남주인공1이 오로지 그녀와 가까워지기 위해 고대어를 배우는 부분도 있었다. 끙끙거리며 상형문자를 밤낮 외우는 그 열성에 독자들의 지지기반이 좀 높아졌었지. 근데 후반부에 황태자가 그걸로 고백을 했던가, 안했던가?

아무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아. 좀처럼 마땅한 얘깃거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자고로 사람은 대화를 많이 할수록 친해지는 법이거늘. 끙끙거리며 골머리를 앓고 있자니 때마침 이벨린의 뒤편에서 껄렁한 음성이 날아들었다.

“ 야, 거기 후드! 네가 이 꼬맹이한테 금화를 준 놈이냐?”

어맛, 이 불량한 대사는 설마. 난 이벨린과 동시에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시선을 준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한눈에 몰염치한 건달 한 무리가 이쪽을 쳐다보며 형형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아니 너희들은? 여주인공을 위기에 몰아넣을-그러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하고 털릴-패거리가 아니더냐!

난 그들의 전형적인 등장에 감탄하며 방금 말을 던진 대상을 살폈다. 우락부락한 덩치에 험상궂은 얼굴 하니 제 친구들과 함께 뒷골목에서 한 칼빵 했을 생김새였다. 앗, 갑자기 내 내장이 아파오는 기분. 그러나 그 위협적인 겉모습에도 이벨린은 눈 하나 깜짝 않고 외려 분노한 기색을 했다.

“ 지금 설마…아이에게서 돈을 갈취한 건가요?”

“ 응? 그랬다면 어쩔 건데?”

선두의 건달이 낄낄거리며 손안의 금화를 던졌다 잡았다 반복한다. 아니 저놈이, 귀중한 10골드님께 무슨 짓이야. 저러다 떨어뜨리면 어쩌려고. 금화를 귀이 여기지 않는 건방진 작태에 분노하는데 이벨린이 옆에서 더 화가 난-물론 전혀 다른 이유로-빛으로 건달에게 언성을 높였다.

“ 당장 다시 돌려주세요!”

“ 어엉? 푸핫, 이년이 어디서 명령 질이야? 지금 상황파악이 안되나?”

건달은 목소리로 이벨린의 성별을 파악한 듯 호칭을 놈에서 년으로 바꿨다. 왠지 놈보다 년이 더 심한 욕 같아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비록 남자지만 건달에게도 년을 붙여서 욕해주고픈 충동이 일었다. 야이 우락부락한 년아. 당장 집에 가서 수염이나 깎아. 수염에서 냄새나게 생긴 년이 어디서.

물론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그랬다간 아윈이 채 등장하기도 전에 먼저 처 맞을 확률이 높을 테니까. 객체가 나일 땐 무조건 폭력반대요.

“ 네년 목숨은 지금 우리한테 달린 거야, 알아? 좋게 말할 때 가진 돈 다 대놓고 꺼져라. 앙?”

언뜻 보이는 건달의 누런 이와 함께 틀에 박힌 대사가 귀에 전달된다. 근데 왜 쟤네는 맨 날 돈 내놓으라 하면서 좋게 말한다 하지. 돈 내놔가 좋은 말인가. 돈 내놓으면 살아서 꺼질 수 있으니 좋은 건가? 그럼 나쁜 말은 한 ‘씨X 당장 가진 돈 다 내놔 씨X 근데 돈 내놔도 죽고 씨X 안 내놔도 죽는다 씨X 넌 뭘 해도 뒈져 씨X 그래도 내놔 씨X!!' 이 정도쯤 되나.

이런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건달들이 눈에 확 띄게 우리에게 가까워진 게 보였다. 어, 어머. 쟤네 언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니. 난 그들의 소리 없는 접근에 깜짝 놀랐다. 거리가 좁혀진 덕에 한층 구체적으로 시야에 들어오는 그네들의 흉악한 면상은 사람을 겁주기에 차고 넘쳤다. 으으, 진짜 이유 없이 칼빵 놓을 것처럼 생겼잖아. 소름.

그러나 이벨린은 내 공포를 조금도 공유하지 않는 듯 흔들림이 없었다. 숭악한 장정들을 눈앞에 두고도 그녀는 여주인공다운 배짱으로 당차게 외쳤다.

“ 지금 뭐하는 짓이죠? 어린아이에게서 금화를 뺏는 것도 모자라 이젠 죄 없는 사람까지 겁박하다니, 정말 수준이하군요! 다 큰 어른이 부끄러움도 모르나요?”

후훗. 역시 이벨린다운 멋진 대사야. 난 건달무리를 향한 그녀의 비난을 들으며 아윈의 등장이 코앞에 다가왔음을 실감했다. 기실 저건 건달에게 쏘아붙이는 힐난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아윈을 소환하는 주문이기도 했다. 먼발치서 구경이나 하던 아윈이 방금의 당돌한 대사에 이벨에게 관심을 가지고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난 본능처럼 팝콘을 갈구하는 속을 진정시켰다. 참아, 여기 팝콘 없어.

건달은 이벨린의 생각지 못한-그들의 입장에선-꼿꼿한 태도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이내 표정을 구기며 분노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게 아주 위협적이다. 콧김을 뿜을 기세로 격하게 걸어온 건달이 이벨린의 바로 지척에 서서 더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곁눈질한 내가 다 흠칫했을 정도로 숭악한 얼굴이었다.

“ 이 미친년이. 너 방금 뭐라 그랬냐?”

나였다면 쫄아도 세 번은 쫄았을 텐데 이벨린은 여전히 의연했다. 저 사람이길 포기한 것 같은 얼굴에도 겁먹지 않다니 굉장하다.

ㅡ근데 잠깐만.

“ 나이를 헛먹어 상식이하의 행동을 하는 것이 몰염치하다고 했습니다. 왜요, 다시 말해드려요?”

“ 이 년이 진짜 미쳤나!”

아윈의 등장이 원래 이렇게 늦던가?

난 당장이라도 덩치의 거친 주먹이 이벨린의 가녀린 몸을 갈길 것 같은 상황에 눈살을 찌푸렸다. 좀 이상한데. 기억이 옳다면 아윈은 건달이 채 이벨린의 지척에 닿기도 전에 나타나야했다. 이렇게까지 사태가 진행되어 자칫 이벨린이 뺨이라도 맞게 되면 너무 늦는다. 애초에 원작에선 건달들이 살아서 도망치는데 지금 여주인공을 때리고도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것 같진 않았다. 뭐지, 아윈 얘 왜 안 나와?

“ 몇 대 맞아야 분위기파악이 되지-.”

마침 건달이 허공으로 손을 올렸다. 이벨린의 얼굴을 내리치기 딱인 각도였다. 아, 아니 잠깐만. 난 엉겁결에 측면에서 건달의 옷자락을 확 잡아당겼다.

============================ 작품 후기 ============================

+여러분들의 댓글을 읽고 스트레스가 눈녹듯 사라져서 징징거림은 삭제할게요. 흑흑 이 술마신 다음날 콩나물국 같은 사람들...☆ 내겐 없어선 안될 선샤인이에요 (왈칵

++수정 전 징징요약: 댓글을 달땐 그걸 읽을 작가를 배려해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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