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2 2. 두근두근 와작와작 팝콘 팔아요 =========================================================================
사생? 사생이라니! 시선의 의미를 파악하고 난 아찔해졌다. 과거 사회문제수준이었던 연예인 사생팬에 대해 친구와 열띤 담화를 나누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마침 어느 인기연예인이 사생팬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속보가 들리던 때라 그들에 대한 나와 친구의 반감정은 극에 달해있었다. 난 그때 극성 사생팬을 바퀴벌레 수준으로 싫어했다. 사생이 주제로 떠오를 때면 온갖 부정적인 감정을 담고 일그러지던 내 친구, 나, 내(구)남친 들의 표정과 눈빛을 또렷이 기억한다.
그래. 그랬는데.
쟤가 지금 날 사생팬처럼 보고 있네?
어이가 너무 없어서 할 말이 송두리째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케니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수려한 얼굴에 그늘이 지는 모습은 객관적으로 몹시 쌔끈한 광경이었으나 난 지금 그런 걸 감상할 정신이 아니었다.
초면에 사생취급을 받은 충격으로 넋이 나간 내게 공작이 입술을 비틀었다.
“ 일부러 회장엔 얼씬도 하지 않았는데…지긋지긋하군. 어떻게 알고 따라온 거지?”
차가운 목소리였다. 그 독설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 방금 뭐랬냐? 이게 어디서 신박한 개소리야. 똑같이 반말로 받아치고 싶었지만 쟤는 공작이었고, 난 아무런 지위도 없는 그냥 자작가 여식이었다. 무시할 수 없는 신분 차에 애써 짜증을 억누르고 최대한 단어와 문장을 골라 꺼냈다.
“ 죄송하지만 무슨 말씀이신지? 큰 오해를 하신듯한데 전 각하보다 제 팝콘에 더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나는 신뢰감을 주기위해 품안의 팝콘봉지까지 내밀었다. 그러나 케니스의 눈이 팝콘에 머무른 건 1초도 채 되지 않았다. 그는 그야말로 흘낏, 팝콘을 쳐다보곤 다시 내게 재수 없는 눈길을 보냈다.
“ 그럼 왜 그런 곳에 숨어있었나.”
“ 팝콘이 냄새가 강한 편이라 회장 안에서 먹긴 좀 그래서, 편하게 먹을 만한 장소를 찾던 중이었습니다.”
“ 지금 그걸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 진짠데요?”
어처구니가 없어 다듬지도 못하고 말이 튀어나갔다. 난 케니스의 정도를 넘는 자의식과잉과 인간불신에 얼떨떨할 지경이었다.
“ 저 정말 각하 스토킹 한 거 아니라니까요?”
“ 다들 말은 그렇게 하지.”
얘 진짜 뭐냐? 난 제어되지 않는 표정을 괴상하게 일그러뜨렸다. 집안에 갑자기 출현한 돈벌레를 쳐다보는 것과 비슷할 내 얼굴에도 케니스는 아랑곳 않았다. 아니 물론, 기실 그가 전혀 0.1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소설에 따르면 그는 어릴 적부터 주변 여성들의 도가 지나친 질긴 스토킹…즉 사생짓에 노출된 삶을 살아왔고 그로인해 여성혐오증까지 걸린(물론 그 여성혐오증은 여주인공 앞에선 씻은 듯 사라진다)사람이었다. 그런 설정이니 지금과 같은 태도를 쌀알 한 톨 만큼은 이해해 줄 수 있었지만, 그건 그거고 아무튼 야 난 아니라고.
“ 제가 지금 가진 게 팝콘뿐이라 팝콘을 걸고 말씀드리는데, 맹세코 저 각하 따라온 거 아니에요.”
마음을 다한 내 항변에도 케니스의 싸한 시선은 바뀔 줄 몰랐다. 아오 저게. 다른 것도 아니고 팝콘까지 걸었는데. 슬슬 열이 뻗친 내가 저 매끈한 콧구멍에 팝콘을 꽂아 넣고 싶단 충동을 느낄 때였다.
“ 그만하세요.”
이벨린이 나섰다.
그녀는 예쁘장한 녹색 눈을 깜박이며 나와 공작 사이에 끼어들었다. 케니스의 눈길이 곧바로 내게서 그녀로 옮겨가는 게 느껴진다. 난 시야에 들어오는 이벨린의 뒤태를 멀거니 쳐다보며 그 와중에 허리께에서 찰랑이는 머릿결이 참 좋다는 생각을 했다. 이 언니 설정 상 별다른 관리도 안하지 않나…. 부럽다.
“ 심하시네요. 이 분께서 아니라고 하잖아요.”
이벨린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케니스를 질책했다. 어머, 이게 웬 개이득. 난 뜻밖의 아군이 된 믿음직한 뒤통수에 눈을 둔 채 그녀를 열심히 응원하기 시작했다. 언니, 파이팅! 그놈한테 욕 한 사발만 해줘요! 내가 하면 사망플래그지만 언니가 하면 사랑플래그니까!
“ 설령 그쪽 말처럼 이분이 그쪽을 따라온 게 맞다 해도, 그게 그렇게까지 피해가 되나요?”
언니 잘 한…응? 방금 뭐요?
난 응원을 멈췄다. 이벨린은 전혀 달갑지 않은 방향으로 나를 변론하고 있었다. 잠깐만요, 저기 언니, 그거 아닌데.
“ 그쪽에게 해코지라도 하려고 미행하는 게 아니잖아요. 순수하게 좋아하는 마음으로 따라다니는 걸 텐데….”
아니라니까.
“ 이 분이 안쓰럽지도 않으세요?”
미친. 난 깨달았다. 그녀는 내 아군이 아니었다. 본인 딴에는 천사같은 마음씨로 날 변호해주고 있는지 몰라도, 내 입장에서 이벨린은 마치 시어머니의 오해에 쐐기를 박는 눈치 없는 남편과도 같았다. 내가 진짜 아까부터 사랑에 빠진 스토커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내 속을 터뜨리기로 작정한 듯 나불대는 이벨린의 말에, 케니스는 그녀를 빤히 응시하다 입을 열었다.
“ 본인 일도 아닌데 참견이 지나치군.”
“ 흥, 그럴 만 하니까 그렇죠.”
“ 왜 자기와 상관없는 사람을 나서서 변호하지? 딱히 이득이 되는 것도 없지 않나?”
“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요. 그쪽은 꼭 뭔가 얻는 게 있어야만 사람을 돕나요?”
난 그 대화에 딴지를 걸고 싶었다. 이벨린의 말엔 큰 어폐가 있었다. 너 나 도운 적 없거든?
그러나 당사자의 억울함만을 가중시키는 문장이 케니스에겐 새로운 감흥을 불러일으킨 모양이었다. 이벨린를 응시하는 케니스의 표정이 변했다. 그리고 난 느껴지는 묘한 기류에 깜짝 놀라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아니 뭐야. 이 분위기는? 설마?
“ …….”
“ …….”
난 자리를 옮겨 둘을 번갈아 쳐다봤다. 서로에게 얽히는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이 상황은…. 어쩐지 팝콘을 부르는 분위기속에서 케니스가 나지막이 내뱉었다.
“ 특이하군. ㅡ재밌어.”
난 저절로 그려지는 설명 창에 눈을 부릅떴다. 아니? 이럴 수가? 소설의 전개를 따르면 케니스는 두 번째 만남에서 이벨린의 어장에 안착해야했다. 그런데 지금 이건…. 특이하다, 재밌다 따위의 남주인공 전용 대사를 입에 담는 케니스는 첫 만남에 벌써 어장으로 이주한 눈치였다. 원래 로맨스소설에서 등장하는 대사 중 ‘특이하군’ 은 ‘난 이제 널 겁나 지켜볼거야’이고, ‘재밌다’는 ‘나 곧 너 좋아할 듯?’으로 해석되지 않던가. 둘을 동시에 꺼낸 케니스는 아무리 봐도 이미 훌륭한 한 마리의 물고기였다.
어라. 왜 전개가 빠르지? 설마 나 때문?
난 그럴듯한 추측에 한쪽 눈을 찡그렸다. 아무래도 내가 이벨린의 특별함을 가중시키는 대조군으로 사용된 듯했다. 미행하다 걸려놓고 팝콘 핑계를 대는 사생팬과, 조건 없이 남을 돕는 이타심 넘치는 여주인공을 한자리에 두고 보니 후자에 빠질 수밖에 없더라…이런 느낌?
사생도 모자라 사랑의 양분까지 된 신세에 나는 탄식을 금할 수 없었다. 조연의 삶이란 결국 이런 걸까? 밀려오는 허탈함에 난 힘 빠진 손으로 팝콘을 한줌 집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래, 너네끼리 다 해먹어라. 난 팝콘이나 삼킬 테니까. 어째 허무주의가 이해되는 기분으로 입 안의 팝콘을 씹는데 열중했다. 이 와중에 맛있네.
와작와작, 와작와작.
요란스런 소리에 좀 전부터 날 병풍마냥 취급하던 케니스가 이쪽으로 시선을 주는 게 보였다. 눈빛에 담긴 짙은 혐오감은 여전했지만 이젠 딱히 열이 뻗치지도 않는다. 그렇게 보든가말든가. 뭐 어쩌라고. 최대한 건방져보이게 눈썹을 치켜 올리자 짜증 섞인 목소리가 날아든다.
“ 안 꺼지나?”
참 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으로 읽을 땐 ‘오~싸가지 결핍~그래 그런 게 매력이지’이러면서 좋아했었는데 실제로 겪으니 이거 뭔 저혈압치료제가 따로 없네. 나는 사생이 가란다고 가는 거 봤냐, 하는 심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우두커니 선 내 작태가 제법 심경을 건드린 모양인지 미간의 주름이 짙어진다. 곧이어 꺼내는 말들은 역시나.
“ 구질구질하군. 도저히 너 같은 족속은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여자는 네가 안타깝지 않느냐고 했지만, 글쎄. 존재자체가 혐오를 부르는 대상에게 안타까움 따위를 느끼는 것이 가능한가?”
쏟아지는 독설에 나는 종전의 생각을 수정했다. 열 안 뻗친다는 거 취소요. 혈압 올라서 돌아가시겠다.
난 결심했다. 이대로 얌전히 집에 돌아가 발 씻고 잘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분명 근시일내에 화병으로 세상을 뜨고 말 것이다. 난 맹렬한 기세로 이벨린을 돌아보았다. 형형할 게 분명한 내 눈빛에 그녀가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 언니, 언니도 들었죠.”
“ 네?”
“ 솔직히 이건 내가 얌전히 있는 게 이상한 거잖아요. 그죠? 언니도 이해하죠? 저 언니만 믿을게요. 언닌 착하니까 내 편 들어줄 거죠?”
쉼 없이 뱉어내는 말에 이벨린이 얼떨에 고개를 끄덕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난 긍정의 싸인을 받자마자 함박웃음을 짓고 케니스에게 바짝 다가갔다. 케니스는 난데없는 내 돌진에 당황하는 듯했으나 ‘네 까짓 게 뭘 하겠나’하는 심경 탓에 방심한 기색이었다.
그래, 계속 그렇게 방심해라.
지척에 도달한 난 잽싸게 녀석의 잘생긴 콧구멍에 팝콘을 쑤셔 넣었다.
============================ 작품 후기 ============================
ㅇㅅaㅇ
여러분 저 사실 설레는 연애이야기 쓰려고 구들 팠어요.
근데 언제 쓸 수 있을진 사실 저도 잘 모르겠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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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hddl0610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ㄷㄷㄷ저 이렇게 놀람..딱 이렇게
0.o ????!! <-이러고 모니터 한참 응시
이번에도 드릴 거라곤 어...제 사랑밖에...아이시떼루♥ (배은망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