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5화 (5/100)

00005  1. 야수의 꽃  =========================================================================

“ 어머, 그 말은….”

“ 정말 가능성이 있겠군요.”

굳이 나처럼 여주인공의 등장 따위를 모르더라도, 황녀의 성년회 겸 탄신회는 황태자의 출현을 예견하기에 마땅한 배경이었던지라 한순간에 술렁임이 일었다. 하긴 상식적으로 일 년도 아니고 평생에 한 번 있는 여동생의 기념일에 참석을 아니하는 못된 오라비는 없을 것이다. 더군다나 론드미오 황태자와 그의 여동생 황녀는 사이도 제법 돈독한 편이었다. 그놈의 신비주의 컨셉만 아니었다면 매년 생일연회마다 뻔질나게 얼굴을 들이밀지 않았을까 싶을 만큼.

“ 드디어 론드미오 전하를 뵙겠네요.”

“ 기대가 됩니다. 풍문에 따르면 인세에 다시없을 미남이시라지요.”

“ 전하의 용안을 눈에 담은 후엔 한동안 다른 사내들을 보아선 안 된다는 농도 돌더군요. 그들이 갑자기 사람이 아닌 사물로 보인다며.”

“ 올리브 영애께선 뵌 적이 있지 않습니까? 어떠셨나요?”

모임의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영애들은 하나같이 상기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기대에 찬 사견을 늘어놓기 바빴다. 이 집단에서 가장 얌전한 편인 카노 또한 눈망울에 설렘을 가득 담고 그네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인 마당이었다. 올리브 영애는 한 이의 질문으로 인해 온 시선이 제게 쏟아진 것이 나쁘지 않은 듯 우쭐한 기색으로 제 경험을 열심히 늘어놓기 시작했다.

“ 그분의 용모는 정말이지 직접 보지 않고서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블라….”

미주알고주알 쏟아지는 찬사를 듣고 있자니 책(인터넷 연재분)으로 읽었던 황태자에 대한 묘사가 떠올랐다. 뭐였더라, 햇빛이 부서지듯 찬란한 백금발에 바다처럼 깊은 푸른 눈동자였나? 간단히 말해 론드미오는 금발벽안의 소유자였다. 덤으로 굉장히 잘생긴. 소설에서 서술한 남주인공 1은 그야말로 동화 속 왕자님의 표본 같은 생김새였던 걸로 기억한다.

‘야수의 꽃’에서 남주인공 1,2,3의 외모는 잊을 만하면 잘생겼다고 하고 가물 할 법하면 환상적이라고 꾸준히 언급되었었기에 나도 실상 열 띈 대화를 나누는 영애들 만큼이나 기대가 일긴 했다. 과연 어떻게 생겨먹었을까? 모니터를 통해 작가가 그리 잘생겼다 강조했던 그들의 비현실적인 외양을 이 세계가 어찌 구현해놓았을지 호기심과 여망이 동시에 떠올랐다.

“ 참, 저는 이번에 에뛰르 살롱에서 드레스를 맞추기로 했답니다.”

“ 어머, 안 그래도 아리따르 살롱에 예약을 잡아놓았었는데요.”

“ 전 개인적으로 미르 살롱에 마음에 들더군요.”

황태자에 외모를 주제로 타올랐던 대화는 이내 다른 것으로 넘어갔다.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를 어디서 맞추느냐하는 문제였다. 그것은 단순히 제 단골매장 기호를 뽐내고자하는 목적보다는 기왕이면 비슷한 차림새는 피하자는 일종의 사전합의에 더 가까웠다. 눈에 띄겠다는 포부로 고르고 고른 드레스가 하필 옆 사람과 겹치기라도 한다면 서로에게 하등 좋을 것이 없었으니까. 점찍어둔 살롱이 겹칠 경우 발생하는 은근한 신경전은 보는 맛이 있었다.

나야 뭐, 어차피 제국제일 살롱의 드레스를 입든 누더기를 뒤집어쓰든 황태자의 시선을 받을 이는 오로지 여주인공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네들의 담합에 끼고자하는 의사는 단 한 톨도 없었다. 나는 대충 호응이 필요한 상황마다 그럭저럭 영혼 없는 리액션을 선보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 오늘 즐거웠어요, 올리브 영애.”

“ 저도요. 영애 덕분에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 다음에 또 티타임을 열거든 꼭 불러주세요.”

어느덧 파장의 때를 맞이한 모임은 주최인인 올리브 영애를 향한 참석인들의 알랑거림을 다소 첨부한 인사말들로 마무리를 치렀다. 올리브 영애는 유난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오만이 있는 성정이었고 무엇보다 뒤끝이 제법 긴 편이었다. 나는 공짜 다과에 유용한 정보를 얻어놓고는 그 베풂을 행한 이에게 인사 한마디 없이 사라지는 후안무치한 사람이 되어 그녀의 빈축을 사고 싶지는 않았기에, 이처럼 복된 티타임에 초대되어 영광이었다는 적당한 아부를 남겼다.

나는 백작저를 나와 다시금 대단히 가까운 거리를 한스 경과 동행했다. 티타임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혹 그가 동떨어진 곳에서 몹시 무료한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을까 걱정했으나, 다행이도 한스 경은 나름대로 즐거운 한때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는 밝은 기색으로 “역시 잘 맞는 사람끼리 나누는 대화가 재밌는 법입니다. 아가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라며 떠들었다. 수행원들 중에 죽이 척척 맞는 이가 있었나보다. 잘 된 일이다.

저택으로 돌아온 나는 무관심한 것보다는 낫지만 그래도 약간의 피곤함을 안겨주는 걱정 많으신 어머니께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다녀왔음을 어필하고 곧장 내 방으로 향했다. 식사나 목욕을 준비할까 묻는 시녀를 고갯짓과 함께 물린 뒤 난 책상 앞에 털썩 걸어앉았다. 일단은 생각을 좀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난 습관처럼 손에 쥔 펜 끝으로 종이를 톡톡 치며 야수의 꽃 전개를 떠올렸다.

상념 속에서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종전 티타임에서 기억해냈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로렐리아 황녀의 성년회 겸 탄신연회. 유학생 여주인공 이벨린의 첫 등장. 그리고 남주인공 1 황태자와의 첫 만남.

흐으음-. 나는 뜻 모를 신음을 내뱉으며 보다 자세한 것을 상기하려 애썼으나 추가로 달리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다만 원래부터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여주인공이 연회장에서 뭔가 남들과 다른 특이한 행동을 한다는 사실만 약간 더 또렷해졌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황태자가 여주인공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한 일말의 당위적 장치인 모양인데 대체 그게 뭐였는지…. 아 뭐더라. 나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는 소설 첫 화의 내용에 과거 독자이던 시절의 나를 질책했다. 이 등신. 이럴 줄 알았으면 정주행할 때 초반부도 빠짐없이 눈여겨 읽는 건데. 그놈의 사자대면만 죽어라 반복해서 정독한 덕에 10년이 지난 지금도 최신 회차의 장면만은 여전히 뇌리에 선명했다.

“ …뭐, 어쨌든.”

난 펜을 놓고 책상을 떠나 침대로 몸을 옮겼다. 푹신한 침대에 퍼질러 자리 잡은 나는 익숙하다 못해 지겨운 천장 무늬를 보며 새삼 내가 이 세계로 들어온 지 꽤나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상기했다. 간혹 과거의 꿈을 꾸는 날에는 잠자리를 설치고 볼썽사나운 몰골이 되곤 했지만, 그뿐이었다. 딱히 울거나 우울에 빠지지도 않고 난 놀랄 만큼 잘 먹고 잘 지냈다. 돈도 잘 벌었고 말이다.

온갖 컨텐츠가 범람하던 대한민국보단 다소 할 게 없고 심심하다는 것만 빼면, 기실 여긴 썩 괜찮은 곳이었다. 인자한 양친에 늘 배부르고 등 따시며 적당한 사치를 매일같이 즐길 수 있는 여건에서, 원생들에게 시달리고 원장과 학부모에게 시달리는데다 이혼한 부모님에게마저 쥐어 짜이던 스물아홉 솔로의 삶을 굳이 추억할 이유는 없었다. 과거는 미화되기는커녕 갈수록 힘들었던 기억들로만 채워져서 어쩔 때는 내가 이 곳으로 온 것이 선물이 아닐까 하는 우스운 생각도 들었다.

조연만 아니라면 더 좋았을 텐데.

배부르고 등 따시지만 멋진 남자와의 연애는 꿈꿀 수 없다는 사실이 울적했다. 나는 새삼 이 곳 남자들의 외모를 원기옥 모으듯 긁어모아 남자주인공 세 놈에게 몰빵해준 야수의 꽃 작가가 원망스러웠다. 아니 조금쯤은 남겨줘도 됐잖아요? 지금껏 지내며 목격해온, 남주인공들을 빛내주느라 흐릿한 이목구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남자들이 떠올라 나는 괜스레 더 슬퍼졌다.

하여튼 간, 고대하던 이벤트가 코앞으로 다가왔음에 가슴이 좀 두근대는 것은 사실이었다. 나는 이제부터 여주인공이 세 남주인공을 차례로 어장에 집어넣는 과정도, 솜털하나 볼 수 없었던 잘난 남자들의 눈부시게 미려한(소설에 따르면)용모도, 그리고 뒷내용이 궁금해 잠을 이루지 못했던 사자대면의 결과도 직접 눈으로 확인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심장이 떨려왔다.

‘ 설렌다.’

앞으로 열흘 후라. 나는 차기작 구상을 좀 뒤로 미뤄야겠다 마음먹었다. 출판사의 부크가 아주 죽는소릴 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주인공 어장질을 쫓아다니며 구경하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모자랄 테니까.

나는 앞으로의 열흘이 제법 느리게 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팝콘이나 만들어 볼까?

============================ 작품 후기 ============================

할 일이 많을수록 조아라에 자주 오게 되지 않나여ㅇㅅㅇ?

주륵.....................

+오타, 잘못쓰인 단어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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