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4화 (4/100)

00004  1. 야수의 꽃  =========================================================================

첫 출판은 열다섯의 봄. 그러니까 3년 전이었다. 그때까지도 완전히 버리지 못한 행여나 하는 마음이 나를 꾸준히 사교계에 집어넣은 지도 2년이 다 되어가는 무렵이었다. 이 연회, 저 연회를 가리지 않고 누볐지만 남자주인공들의 머리털도 보지 못했음은 물론이요 어찌 그리 짠 것처럼 일률적으로 재미가 없는지 하루하루 생기를 잃어가던 나날이었다. 고작 열다섯에 입시를 족히 세 번은 치룬 꼬락서니를 하고 있던 날 되살린 것은 어느 남작저의 하녀들이었다.

-한슨x로데반일까, 로데반x한슨일까?

-어머? 당연히 한슨x로데반이지.

-얘 좀 봐, 요즘 누가 키로 순서를 정하니?

-그럼?

-성격. 중요한 건 그거지. 몇 번을 관찰해봐도 어울리는 조합은 로데반x한슨이야.

-오호라.

그야말로 시들어있던 날 단박에 깨우는 대화였다. 그들의 속닥임은 마치, 나를 한순간에 야수의 꽃이 아닌 대한민국 어느 한복판으로 옮겨놓은 듯한 감흥을 주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하하호호 떠들며 나누던 담소가 절로 떠오르고 향수가 이는 기분이었다.

라테를 재끼고 김혜정이 튀어나와 외쳤다. bl소설을 쓰자!

그 즉시 자택으로 돌아온 난 책상 앞에 붙어 앉아 글을 써내려갔다. 하릴없이 백년만년 나뒹굴 것만 같았던 펜과 종이가 드디어 제 구실을 찾는 순간이었다. 누런 건 종이요 검은 건 글씨라. 읽히는 게 신기한 꼬불랑거리는 문자는 적어도 한글보다는 빠르게 적혔다. 속독도 못했던 내가 속기를 할 줄이야. 진소위 신들린 듯한 작문을 통해 나 스스로도 놀랄 만큼 그렇게, 첫 작은 순식간에 완성되었다.

「 방랑기사 에드윈은 더 이상 자유롭지 않다. 」

지금에 와 생각해도 썩 마음에 드는 제목을 달고, 단편은 얇은 책자로 출간되어 대형서점 한 켠에 자리할 수 있었다(몹시 수월한 출판과정을 거치며 나는 내가 귀족가 여식인 것에 감사했다). 그리고 그 신들린 노고의 첫 작품이 입소문을 타고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가 종내 비모르(여기에선 bl을 비모르라 일컬었다)장르에서 판매부수 1위를 찍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내 작품을 담당했던 출판사는 쌍수를 들고 좋아했고 나는 갓 열다섯에 돈을 긁어모으는 쾌거를 이루었다. 심지어 저 작품은 아직까지도 프리미엄이 붙어 종종 거래되는 중이다.

“ 아가씨, 뭘 그리 읽으세요?”

“ …어? 으응. 그냥 편지.”

과거의 추억에 잠겨있느라 에슐라가 들어오는 줄도 몰랐다. 나는 숙련된 손길로 종이를 말아 책상 한구석에 갈무리했다. 내 아버지, 그러니까 엑트리 자작은 일반적으로 자애로운 부친이었지만 딸이 bl소설을 출간하는 것까지 그냥 보아 넘길 만큼 개방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남남간의 사랑을 다루는 것만도 기함할 일인데 가뜩이나 내 소설은 그리 플라토닉한 편마저 아니었던 터라. 아니, 그도 그럴게 내 정신연령이 벌써 몇인데….

하여튼 내가 소설출간을 통해 돈을 쓸어 담고 있다는 사실은 양친에게 철저히 비밀이었다. 특히 아버지에게 그러했고 그런 점에서 에슐라는 대단히 주의를 요하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다 좋은 반면 입이 너무나 가벼웠던 것이다. 에슐라는 ‘다물지 못하는 입’으로 자작저에선 이미 유명했다.

“ 오늘 다과회에 참석하실 거죠?”

“ 그랬지 참. 깜박하고 있었네.”

“ 아직 시간이 여유로우니까 천천히 준비하셔도 될 거에요. 머리 만져드릴게요.”

“ 응, 부탁할게.”

늘상 생각하는 거지만 머리를 매만지는 에슐라의 손길은 어느 때든 감탄이 나올 만큼 부드러웠다. 그 마법의 손이 만들어내는 결과물도 마찬가지로 훌륭하기 짝이 없었고. 그녀는 내 머리카락에 한해서만은 수도 내에 다시없을 만큼 뛰어난 인재였다. 다시 생각해도 유일한 단점이 아쉬웠다. 그놈의 입만 아니면.

“ 짠! 다 됐어요. 어떠세요?”

“ 당연한 말이지만…마음에 들어.”

“ 에헤헤.”

에슐라가 한쪽으로 곱게 땋아준 내 금발은 언제 망나니였냐는 듯 가지런하고 예뻤다. 이 세계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매직 펌이 없다는 것이다. 이 거지같은 곱슬머리. 암만 생각해도 에슐라는 내 사교활동의 은인이었다.

“ 원피스는 뭘 입을까?”

“ 아가씨는 예쁘시니까 뭘 입어도 잘 어울릴 거예요.”

“ 정말? 칭찬 고마워.”

에슐라는 습관처럼 잊을만하면 내 외모를 치켜세우곤 했다. 일종의 아부였는데 기실 그녀는 나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저택 내에서 은근히 내 비호를 받고 있으니 당연한 건지도 몰랐다. 난 에슐라가 칭찬해준 얼굴을 거울 앞에서 요모조모 한번 살펴보곤 그녀와 함께 원피스를 골랐다.

원피스, 화장, 장신구까지. 시간을 들여 외출준비를 마친 내 모습은 내가 봐도 그럭저럭 꽤 괜찮았다. 경국지색까지는 아니더라도 지나가다 한번쯤 돌아볼 만했다. 문제는 머리와 화장의 힘이 크다는 거랄까. 물론 과거 김혜정이던 때를 상기해보면, 신부화장수준으로 찍어 발라야 간신히 미녀소릴 들었으니 그때에 비하면 백배는 낫다 하겠다.

“ 다녀오겠습니다.”

“ 조심해서 갔다오렴.”

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저택을 나왔다. 내 목적지인 올리브 백작저는 여기에서 제법 가까웠으므로 나는 수행원이 필요치 않다 주장했지만, 어머니는 한사코 내게 호위를 붙여주었다. 그것도 꽤나 든든한. 난 마차도 필요 없을 만큼 인접한 장소를 찾아가는데 대체 왜 호위가 필요한지 의문이었다. 힐끗 돌아본 옆에는 오늘도 위풍당당한 한스 경이 근육을 뽐내며 걷고 있었다. 그는 엑트리 가문 내에서 알아주는 실력자였는데, 팔이 움직일 때마다 꿈틀거리는 이두박근이 인상적이었다.

‘ 탈모만 아니었다면 인기가 제법 많았을 텐데…….’

나는 그의 이성적 인기를 좀먹는 원형탈모에 심심찮은 애도를 보냈다. 성격도 괜찮은 사람이거늘.

시대를 가리지 않는 탈모의 위용 따위를 생각하고 있으려니 도착은 금세였다. 나는 올리브 백작가의 둘째 영애가 주최한 다과회에 늦지 않게 도착했다. 앞서 당도한 영애들이 수행원들을 제법 대동한 모양인지 한스 경은 자연스레 따로 안내받았다.

“ 오랜만이에요, 엑트리 영애.”

“ 간만에 뵙니다, 올리브 영애. 그간 무고하셨나요?”

“ 저야 별 일 없었답니다. 영애는 어땠나요?”

“ 저도 무난히 보냈지요.”

그냥저냥한, 기실 생략해도 될 법한 인사를 나누며 준비된 자리에 앉았다. 먼저 착석해있던 옆자리의 카노가 내 앞으로 티라미스 한 조각을 밀어주며 먹으라고 손짓했다. 아메리 남작의 장녀인 카노는 이중에서 그나마 나와 가장 허물없는 사이였다. 나는 그녀에게 눈짓으로 고맙다 인사하고 케이크 한 스푼을 입에 떠 넣었다.

“ 오늘 이렇게 모인 이유는, 사실 다들 잘 알고 계실 거라 생각해요.”

저번에도 그랬지만 올리브 백작저에서 제공하는 티라미스는 참 맛이 좋았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달함과 약간의 느끼함을 음미하며 올리브 영애의 말에 집중했다. 오늘은 웬일로 이 차의 이름은 뭐시기고 어디에서 수입해왔으며 향은 어떠하고- 따위의 서론을 건너뛰려는 모양이었다. 나야 지루함이 덜하니 환영이었지만.

“ 물론이죠. 당연히…보름 뒤에 있을 로렐리아 황녀전하의 탄신연회 때문이 아닌가요?”

카놀라 영애가 재빨리 말을 받았다. 그녀는 카놀라 백작가의 독녀로 이 모임에선 올리브 영애 다음으로 권세가 높았다. 올리브, 카놀라. 나는 처음 그녀들의 가문을 들었을 때 야수의 꽃 작가가 조연들의 이름을 짓기 위해 부엌을 뒤진 게 아닌가하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카노 아메리와 라테(나)또한. 그녀와 내가 친한 게 어느 정도 납득이 되는 네이밍이었다.

“ 맞아요. 황실에서 열리는 이번 연회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뒤이어 제 말을 이어주길 바라듯 올리브 영애가 단어 끝을 흐렸다. 놓치지 않고 그녀의 좌측에 앉아있던 비스켓 영애가 문장을 덧붙였다.

“ 론드미오 황태자전하께서 참석하시기 때문이죠.”

론드미오. 오랜만에 듣는 남주인공1의 이름이었다. 헌데 지금 와서 들으니 얘도 이름이 좀 성의가 없다. 얘 이름 그냥 로미오 늘린 거 아니야?

“ 저도 들었어요. 헌데…정말일지는, 잘.”

한 명이 조심스레 의심의 기색을 표했다. 거기에 두어 명 정도 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게 ‘신비주의’ 컨셉을 겁나 잘 지키시는 황태자께선 어디어디에 등장한다는 소문이 무색하게 실제론 두문불출이 쩔어주셨던 것이다. 한때나마 사교파티를 열심히 쫓아다녔던 내가 여태껏 머리털 한 올 본 적이 없으니 말 다했다. 나뿐 아니라 이 자리에 동석한 제법 많은 영애가 비슷한 경험이 있을 터였다. 그녀들의 학습능력이 제로수준이 아니라면 이번 소식의 신빙성에 의문을 품는 것도 당연했다. 나도 사실 좀 회의적인 입장이었고.

그러나 첨가된 영애의 말에 난 하마터면 들고 있던 스푼으로 티라미스를 뭉갤 뻔했다.

“ 이번만큼은 진짜일거에요. 올해는 로렐리아 황녀전하께서 열일곱이 되시는 해니까요. 즉 황녀전하께서 성년을 맞이하는 탄신연회란 거죠.”

세상에. 난 스푼을 내려놓고 입을 가렸다. 내가 어떻게 이걸 까먹고 있었을까? 아무래도 그간 지나치게 소설 집필에만 신경을 쏟은 모양이었다. 이토록 중요한 사실을 잊고 지냈다니.

로렐리아 황녀의 열일곱 번째 생일파티.

그곳은, 여주인공 이벨린이 처음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남주인공1과 극적인 만남을 갖게 되는 장소였다.

============================ 작품 후기 ============================

이 착한 사람들같으니...;ㅅ;

다시 한번 잘 부탁해요*(__)*

+격조-> 무고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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