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3화 (3/100)

00003  1. 야수의 꽃  =========================================================================

처음 깨달은 것이 그것이었고, 다음으로 알아챈 것은 내가 내 몸뚱아리 그대로 이동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드라마세트장 같은 방 안에서 찾아낸 전신거울이 비춘 것은 만년 달고 사는 다크서클이 안쓰러운 스물아홉의 한국인이 아니라, 웬 일곱 내지 여덟 살 정도로 보이는 금발의 서양인 여자아이였다.

위 아래, 위위 아래.

시험 삼아 팔을 흔들자 거울 속 여자아이가 충실히 내 동작을 따라했다. 아직 어려서 짧은 팔이 열심히 파닥거렸다. 허허허, 이런 미친. 아무래도 이 쪼그만 여자아이가 다름 아닌 ‘나’인 모양이었다. 다른 세계로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인종도 바뀌고, 나이도 바뀌고. 원치 않은 지나친 회춘에 내가 할 수 있는 반응이라고는 허망한 웃음을 내뱉는 것뿐이었다.

그 뒤로 내가 무얼 했느냐면, 일단 울었다. 몸이 어려지니 덩달아 정신도 어려진 건지 그냥 울컥울컥 눈물이 나서 빼액 떼를 쓰며 울었다. 당장 달려온 하녀복을 입은 서양인 언니가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무시하고 계속 울었다. 울다 울다 지쳐 잠들고, 깨어나면 다시 울었다. 종내에는 목이 쉬어 울음소리도 내기 힘들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나이에 비해 조숙하던 아이가 갑자기 며칠을 목 놓아 우니 부모님은 물론이거니와 온 저택의 사용인들까지 당황해서 안절부절 못했었다고 한다.

어쨌든 울만큼 울고 나자 문득 떠오르는 격언이 있었다. 아는 것이 힘이다. 만에 하나 이게 꿈도 아니고 헛것도 아닐 상황을 대비해, 까먹기 전에 내가 아는 모든 것을 적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학습용인지 장식인지 모르겠지만 책상 한 켠에 놓여있던 종이와 펜을 이용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을 하나씩, 꾹꾹 눌러가며 쓰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이 세계의 글을 읽고 쓴 줄 안다는 점이었다.

그때 정리한 내용이 다음과 같았다.

나: 라테 엑트리(울 때 이렇게 불렸음. 아마 맞을듯).

특징: 모르겠음. 일단 귀족인 듯.

여주인공: 이벨린 도트.

특징: 예쁘다. 밝고 순수. 천사표. 늘 위험에 처한다. 유학생임.

능력: 어장술10

남주인공1: 론드미오 드 헤일론.

특징: 잘생겼다. 황태자다. 신비주의. 늘 여주인공을 위험에서 구한다.

능력: 검술8 마법7 (확실하지 않음)

남주인공2: 케니스 폰 에스반데.

특징: 잘생겼다. 최연소 공작이다. 여성혐오증. 얘도 여주인공을 위험에서 구한다.

능력: 검술10

남주인공3: 아윈 헤브림.

특징: 잘생겼다. 마탑의 주인이다. 여자보기를 돌 보듯. 얘도 함께 여주인공을 위험에서 구한다.

능력: 마법10

배경: 헤일론 제국.

특징: 강대국이다.

“ …….”

작성을 끝내고 나는 기함했다.

아는 것이 이게 다였던 것이다.

세 번, 아니 네 번이나 소설을 반복해서 읽어놓고도 배경지식이 고작 이따위라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이건 뭐, 학원 강사 주제에 기억력이 빠가사리 수준이 아닌가. 한심함을 넘어 신기함이 몰려오는 기분이었다. 내가 원래 이렇게 머리가 나빴나?

다행히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기억력 장애였던 건지, 시간이 좀 흐르자 다른 것들이 추가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가령 라테(나)의 가문이 자작가라는 것과 미래에 끝판 악녀의 곁에 붙어 알랑거리면서 여주인공을 소소하게 괴롭히다 털릴 운명의 조연이라는 것(슬픈 기억이었다), 여주인공 이벨린이 제국에 유학을 오는 나이가 열여덟이라는 것 등이었다. 그리고 추가로,

남주인공2가 여주인공에게 반했을 때 한 대사:

그대는 내가 아는 ‘여자’라는 생물과는 참 다르군.

“ …….”

음. 만고 쓸모없었다. 내가 저걸 왜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리하야 대충이나마 현재 처한 상황과 지닌 지식수준을 파악하게 된 나는, 일단 일상생활을 했다. 씻고 밥먹고 숨을 쉬면서 내가 살고 있는 집과 주변사람들을 조금씩 눈에 익혀나갔다. 내 방. 욕실. 저택 구조. 그리고 엄마 아빠와 유모, 시녀 및 다른 고용인들까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에 흠칫 놀라지 않기까지는 한 달 정도 걸렸고, 어색함을 느끼지 않기까지는 반년이 걸렸다. 또한 내가 가진 인적, 물적 재화를 온전히 내 것이라 받아들이는 데에는 약 일 년 정도가 소요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나는 온전히 ‘라테 엑트리’가 되었다.

물론 과거를 홀라당 까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생각나지 않는다는 뜻도 아니고. 다만, 더 이상 현실도피를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맞았다. 나는 이 곳을 내가 숨 쉬며 살아가는 하나의 세계로 인정했다. 비록, 소설 속이긴 했지만.

그렇게 자작영애 라테로 다시 태어난 나는 한때 원대한 야망을 품기도 했다. 말하자면 내 비중을 대폭 늘려 보이겠다는 포부였다. 원작 속 라테는 여주인공에게 주스를 끼얹는 치졸한 짓이나 하다가 남주인공에게 영혼을 탈곡당하고 사라지지만, 나는 그렇게 놔두지 않겠노라 다짐한 것이다. 마침 나이도 어릴 때 들어왔겠다 나와 비슷하게 어린 세 남주인공들을 찾아 인연을 만들어나가면 딱 알맞지 않겠는가. 그러다 잘되어 여주인공대신 셋의 사랑을 받기라도 하면 예! 그야말로 금상첨화!

그리고 그러한 나의 야망이 실현되려는 듯, 나는 호기심에 들어갔던 황실의 정원에서 길을 잃어 마침 그곳에서 낮잠을 자던 황태자를 만났다. 그리고 재미삼아 구경하던 연무장에서 아직 어려 여성혐오증이 나타나기 전의 공작(미래)을 만나 그의 유일한 여성인 친구가 되었고, 또 놀러나간 저잣거리에서는 우연히 휘말린 사건을 통해 마탑의 주인(미래)의 도움을 받았다. 여주인공이 등장하기도 전에 나는 보란듯이 세 명의 남주인공과 모두 인연을 만들어낸 것이다.

…같은 일은 꿈에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린나이에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내가 얻은 것이라곤 셋과의 인연은커녕 한번 조연은 영원한 조연이라는 쓰디쓴 인생의 교훈이 전부였다. 악녀 역으로 배정된 조연 라테와 남주인공들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현실의 벽이 존재했다. 그것도 아주, 굳건한 벽.

우선 황실의 정원. 그래, 여기서 뭘 만나긴 만났다. 다만 황태자가 아니었을 뿐. 처음 뒤편에서 들려온 부스럭 소리에 ‘황태자?!’하며 설렜던 나를 쥐어박고 싶었다. 부스럭거림의 주인공은 황태자는커녕 사람도 아닌, 바로 토끼였다. 나는 이날 하루 종일 정원을 누비며 토끼들과의 극적인 만남만 잔뜩 하고 돌아와야 했다.

그리고 연무장. 여기도 마찬가지로 답이 없었다. 후끈한 열기와 훅 끼쳐오는 땀 냄새, 쇠붙이들끼리 맞부딪히는 챙챙 소리들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응. 그게 다였다. 아저씨들(당시 라테의 나이 기준)의 화끈한 근육이나 온종일 구경하다 나는 왠지 심적으로 지쳐서 집에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저잣거리…아…내가 왜 여길 나갔는지 모르겠다. 그냥 소설 속에서 흔히 여주인공 놀러나감-> 시비 털림-> 위험-> 남주인공이 구해줌의 코스를 밟는 곳이라 생각 없이 무턱대고 뛰어들었던 게 아닐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살짝 돌았던 모양이다.

저잣거리는 의외로 진짜 사건사고의 메카였고 나 또한 사건에 휘말려들었다. 그리고 운이 나빴던 건지 원래 치안이 구린 건지 위험에 처했다. 그리고 그제야 덜컥 겁에 질린 날 구해준 것은 남주인공이 아니라 아버지가 몰래 붙여놓은 비밀 호위였다. 근래 들어 외출이 잦아진 날 걱정한 아버지의 안배가 아니었다면, 난 지금처럼 태평하게 회상 따윌 하고 있진 못했을 것이다. 여주인공에게 찻물을 끼얹긴 커녕 찻물처럼 사라질 뻔했다. 난 그날 이후 아버지에게 삼일을 내리 혼나고 한 달간 외출금지와 혼자서는 절대 저택 바깥으로 나가지 않겠다는 약조를 해야했다.

이쯤 일을 겪고 나면 싫어도 깨달을 수밖에 없다. 조연 자작영애와 제국 최고 능력남 남주인공을 이어주는 플래그 따위는 0.1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참으로 원작에 충실한 세상이었다. 기실 따지고 보면 신비주의 황태자, 여성혐오증 검술천재 최연소 공작, 자타공인 마법천재 마탑의 주인과 길에 널린 조연이 엮이는 게 더 신기한 일이리라. 나는 미처 현실을 직시하지 못했던 허황된 야망을 고이 접어 저 멀리 날려 보냈다.

그리고 지금, 방년 열여덟.

소설 속에 들어와 라테가 된 지도 어언 십년 째.

나는 여즉 남주인공 셋을 코빼기도 보지 못했다. 슬슬 어떻게 생겼었는지 묘사를 까먹을 지경이었다.

ㅡ물론, 그렇다고 내 지난 시간들이 의미가 없었던 건 아니다. 나는 그 긴 시간을 그저 숨만 쉬면서 보내진 않았다.

푸드덕!

익숙해진 날갯짓 소리가 때마침 기다리던 것의 도착을 알렸다. 안 그래도 올 때가됐다 싶어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있던 터라 더욱 반가운 알림이었다. 자연스레 손 안에 내려앉은 전서를 돌돌 펼치자, 너른 종이에는 유려한 필체로 기대하던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번 작품도 대단히 반응이 좋습니다, 선생님. 장르 1위는 물론이고 종합순위에서도 잘만하면 1위를 노려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혹시 다음 작품은 구상하셨는지요? 관련해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고 싶습니다만…언제쯤 시간이 되시는지 궁금합니다. 답신 기다리겠습니다.

전문을 훑어 내린 나는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는 걸 느꼈다. 일편 당연한 결과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비실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래, 이번 신작 ‘황실 기사단의 여러 가지 사정’도 순풍에 돛단 듯 잘나가고 있다는 말이렷다. 뿌듯하게도.

ㅡ그렇다. ‘야수의 꽃’ 속 생활도 어언지간 십년.

나는 그간 BL소설을 써내어 그야말로 대박을 치는 거보를 이루었다. 어찌보면 본래의 야망보다도 더 큰 일을 달성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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