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경하는 들러리양-2화 (2/100)

00002  1. 야수의 꽃  =========================================================================

별 거 없는 날이었다. 아이들 시험도 끝났겠다, 곧 방학도 다가오겠다 수업을 일찍 마치고 나도 일찍 퇴근한 금요일 오후였다. 간만에 맥주한잔 하며 즐겨 찾는 사이트에 들어가 몇 개월 전부터 작가가 잠수 탄 소설을 1편부터 정주행했다. 제목은 ‘야수의 꽃’. 음…제목만 보면 야수처럼 거친 폭군 황제의 격정집착로맨스 같지만, 실제는 그냥 유학생 여주인공이 제국에서 가장 잘난 남자 셋을 동시에 어장치는 가벼운 소설이었다.

무슨 일을 겪어도 늘 잃지 않는 밝은 웃음과 순수함을 지닌 천사표 여주인공이 황태자, 최연소 공작, 마탑의 후계자를 차례로 퐁당퐁당 어장에 넣는 내용은 보기보다 재미있었다. 클리셰 범벅에 뻔한 플래그가 주를 이뤘지만 작가의 필력이 좋은지 매끄러운 문장이 읽기 편했고, 무엇보다 남자주인공들이 워낙 멋진 놈들이라 보는 맛이 났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초반에는 밥 먹고 글만 쓰나 싶을 정도로 성실연재를 하던 작가가 어느 순간 생업전선에라도 뛰어든 건지 두문분출 중이라는 정도랄까. 덕분에 최신 회차의 댓글란에는 작가의 귀환을 간절히 염원하는 절규들로 가득했다. 물론 나도 그 중 한 명이었고.

-이벨린.

-전하….

-그놈의 전하라는 호칭 좀 집어치워. 이름으로 불러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않나?

-하지만…….

이벨린의 긴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붙잡힌 손목에서 전해져오는 따뜻한 체온이 유달리 신경 쓰였다. 달빛 때문일까? 늘 보던 얼굴이었지만, 어쩐지 유독 수려하게 느껴지는 론드미오의 얼굴에 이벨린이 얼굴을 붉혔다. 얽히는 시선에 그녀의 가슴 고동이 점차 빨라질 때였다.

-그 손 놓아주시죠, 전하.

-…케니스.

가감 없이 질투를 드러내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둘 사이를 갈랐다. 케니스 폰 에스반데. 에스반데가家의 주인이 황태자를 향해 비뚜름한 웃음을 흘렸다. 달빛만이 가득한 어두운 정원에서, 그는 연적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이거, 명백히 룰 위반 아닙니까?

-룰이라…난 내 행동을 제약하는 룰 따위에 동의를 한 기억은 없다만.

-하…. 전하, 정녕 이리 나오시겠ㅡ.

-어라? 룰 파기야? 그럼 나도 내 맘대로 해야겠네.

-…! 아윈!

언제 나타난 것일까? 소년 같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아윈 헤브림이 불쑥 사이에 끼어들었다. 빙글빙글 웃음 짓는 아윈은 마치 개구쟁이 소년처럼 보였지만, 그런 그가 자신을 마주할 때면 완연한 남자의 얼굴을 한다는 것을 이벨린은 알고 있었다. 」

다시 읽어도 흥미진진한 삼자대면도 아닌 사자대면에 침을 꼴깍 삼켰다. 이후내용이 궁금했지만 다음 편으로 넘어가지 않는 회차에 분노하며 세 번째 독촉댓글을 막 입력하려면 참이었다. 어, 뭐지? 갑자기 머리가 핑 도는 느낌이 들었다.

난 편두통 따위를 달고 사는 가녀린 체질이 아니었다. 여인네들 만고의 질병이라는 빈혈도 생리 중이 아니라면 겪는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멀미도 안 하는 체질이라 이런 식의 현기증은 내게 대단히 생소한 일이었다. 설마 한 시간 모니터 좀 쳐다봤다고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요즘 내가 일을 너무 열심히 했나…하는 생각이 든 직후였다.

“ 어?”

눈앞의 풍경이 갑자기 확 바뀌는 경험을 한 적이 있는가? 롤러코스터를 탔을 때 말고, 마치 영화 속에서 장면이 바뀌듯 내 시야 전부가 한 순간에 뒤집어졌다. 난데없이, 한 톨의 예고도 없이 뒤바뀐 세상이 나를 그대로 집어삼켰다. 덩그러니 놓인 새로운 세계는 무엇 하나 할 것 없이 모든 게 낯설었다.

“ …어어?”

성대를 타고 나오는 목소리가 낯설다는 것을 인지할 정신도 없었다. 나는 내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헛것을 보는 것인지 아니면 꿈을 꾸는 것인지를 먼저 판단할 필요가 있었다. 꿈인가? 아니 꿈이라면 대체 어디서부터?

기능을 잃은 듯 제대로 사고하지 못하는 뇌를 애써 열심히 돌려보았으나 내 상황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어지러운 기분으로 전면을 응시하자 아무것도 없던 허공에 하나씩 글자가 새겨지는 게 눈에 들어왔다. 아니, 시발, 이젠 폴터가이스트냐? 절로 치미는 욕을 한마디 뱉고 나자 문장이 완성되어 있었다.

소설 ‘야수의 꽃’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어어…뭐?

뭐라고?

야수의 꽃?

그 거지같이 친절한 안내문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도저히 말도 안 되고 믿을 수도 없지만, 내 집구석에서 한순간에 소설 속 세계로 들어온 것이다. 그것도 인터넷에 연재중인 로맨스판타지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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