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뒤.
‘STN’ 연기대상 시상식 무대.
축하공연과 함께 연말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현장이었다.
방청객 자리 아래 배우들, 관계자들, 스태프들, 등등 시상식과 관련된 사람들이 앉았다. 그리고 그 한쪽에 가을과 태준이 자리했다.
흰 셔츠에 깔끔한 베이지색 재킷과 슬랙스를 입은 가을이 아이돌 무대의 공연을 보며 열렬한 환호를 보냈다.
‘거기에 네가’ 시즌 2를 성공적으로 끝냈던 가을은 그 뒤 연출가로 다시 한번 사람들에게 이름을 알리며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기회가 된다면 일일극을 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방송국 사정상 기회가 없었던 가을은 오랜 시간 쉬었다가 복귀하는 작가의 16부작 작품을 맡게 되었다.
밝고 가벼운 근래 트렌드와 달리 정통 멜로에 가까운 작품이라 많은 우려가 있었지만 유행이 돌고 돌듯 묵직한 작품에 목말라하던 시청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평균 25%의 시청률을 유지하다 마지막 회엔 시청률 30%라는 기염을 토하며 최고의 인기를 이끌어 냈다.
특히 연출에 대한 칭찬이 많았다. 감각적이면서도 인물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나게 했다는 평이었다.
각종 화제를 낳으며 드라마가 끝난 후 ‘STN’ 연기대상 시상식 무대의 주요 상들은 가을이 맡았던 작품이 차지했다.
남녀, 최우수상은 물론이고, 대상까지 유력했다.
그리고 가을 역시 ‘연출상’ 후보에 올라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다.
쟁쟁한 여섯 작품의 연출상 후보를 공개하던 시상자가 이내 결과를 발표했다.
“수상자는, 정가을 감독님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시상자의 발표에 가을의 얼굴에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벅찬 미소가 걸렸다.
가을만큼이나 기쁜 마음을 감추지 못한 태준이 큰 박수를 보냈다.
“축하해요.”
“고마워요.”
태준의 축하 인사에 환한 미소로 답한 가을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단상에 오르자 도식을 비롯해 혁진, 지영, 함께한 스태프들이 꽃다발을 건네주었다.
넘치는 꽃다발에 현장 진행 스태프들에게 꽃다발을 넘긴 가을이 마이크 앞에 섰다.
긴장감에 잠시 숨을 고른 가을이 힘을 얻으려는 듯 자리에 앉아 있는 태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이 자리에 있기까지 많은 도움을 주신 정찬 CP님, 솔 엔터 박수진 대표님, 멋진 연기를 선보이신 배우분들, 애써 주신 도식 감독님, 혁진이, 지영이를 비롯한 스태프분들 모두 감사합니다.”
벅찬 마음을 누르며 하늘에서 보고 있을 선호 오빠, 의찬과 가영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던 가을이 마무리 인사를 했다.
“마지막으로 어떤 일이든 곁에서 손을 잡고 힘을 준 그분께 사랑한다는 얘길 전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렁찬 박수 소리와 함께 가을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가을이 상을 받는 모습을 벅찬 마음으로 지켜보던 태준은 예상하지 못한 말에 눈이 커다래졌다.
연출상 후보에 올랐다는 연락을 받았던 가을은 혹시 몰라 수상소감을 미리 준비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태준이었지만 가을이 이 자리에서 자신의 얘기를 할 줄은 몰랐었다.
곁으로 다가오는 가을을 향해 태준이 감격 어린 표정을 지었다.
“예상도 못 했는데.”
“그러라고 한 일이니까요.”
그 말에 태준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가을 역시 밝게 웃어 보였다.
인생의 영광스러운 순간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만큼이나 행복한 일은 없었다.
태준의 따듯한 눈빛을 받으며 가을이 자리에 앉자 축하 메시지가 쏟아졌다.
지잉-
[정가을이~~~ 축하한다. 역시 내 친구야. 멋지다! 장하다!]
[언니~ 진짜 축하해. 화면발 장난 아니던데, 언니가 배우 해야 하는 거 아냐? 명석 오빠도 동의한대!]
정식 승무원이 된 가영은 근래 부쩍 명석의 집을 드나드는 중이었다.
오늘도 송년회를 해야 한다며 명석과 함께하고 있는 가영이었다.
지잉-
[선배, 축하해요. 다음엔 나 캐스팅하는 거 알죠?]
드라마 촬영차 해외에 나가 있는 서준의 메시지였다.
서로가 정신없이 바빠 가끔 메시지로 안부를 묻는 것 외에 얼굴을 보기 힘든 두 사람이었다.
이어, 문규와 정열에게도 잊지 않고 축하 메시지가 왔다.
그 외에도 단체 메시지 창이나, 개인적으로 오는 메시지들에 답변을 보내 준 가을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가을이 답변을 보내는 모습을 진득하게 지켜보던 태준이 그제야 조용히 속삭였다.
“기분이 어때요?”
태준의 질문에 가을이 숨을 한번 골랐다.
“꿈 같아요.”
그 말에 태준이 가을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도 많을 거예요. 꿈 같은 일.”
손을 마주 잡은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며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뒤.
드라마를 찍었던 스태프들과 배우들이 가볍게 회포를 푸는 자리가 이어졌다.
상을 받고 모인 자리라 어느 때보다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했다.
“우리 정 감독이 이렇게 잘될 줄 진작 알았다니까. 내가 사람을 기가 막히게 보잖아.”
도식이 연신 술잔을 부딪치며 기쁜 목소리를 냈다.
“상은 가을 누나가 받았는데 술은 왜 감독님이 다 드세요.”
혁진의 핀잔에 눈을 흘긴 도식이 다시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마시냐 인마.”
“어제도 드셔 놓고.”
“내일도 드신다에 내 손목을 걸겠어.”
지영의 자신 있다는 듯 가느다란 손목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네 손목 가져가서 뭐 하냐. 쓸 데도 없는 거.”
“쓸 데가 왜 없어요? 감독님한테 오징어 구워 드린 게 몇 마린데?”
“아아, 그건 인정. 네 손목 지키려면 내일은 금주해야겠네.”
아웅다웅하면서도 언제나 사이가 좋은 세 사람을 보던 가을이 미소 지었다.
이번 드라마의 연출을 맡게 된 가을이 스태프를 선정하면서 같이 일하자는 말을 하자마자 군말 없이 함께해 준 고마운 세 사람이었다.
“다들 고마워요.”
가을의 목소리에 세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제가 정말…….”
부끄러운 듯 잠시 말이 없던 가을이 진심을 담아 말을 이었다.
“좋아하는 거 아시죠?”
“아이고, 당연하지. 그걸 모르면 이 시간에 축하한다고 여기 앉아서 술을 마시고 있을까.”
“저도 압니다.”
“저도 알아요!”
그 모습을 보던 가을이 술잔을 들자 세 사람이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 밖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는 태준도 가을의 옆에 앉아 술잔을 들었다.
‘짠-’
잔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가 울려 퍼지며 모두가 말끔히 술을 비우고 내려놓았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좋은 사람들, 인생의 화려한 순간들을 함께하며 가을의 한 해가 저물어 갔다.
* * *
제주도 ‘세양 호텔’.
얼마 전 연말 시상식이 끝나고 다음 날, 태준과 함께 선호의 납골당을 찾은 가을이 ‘연출상’ 트로피를 선호의 용감한 시민 감사패 옆에 올려놓았다.
자랑스러운 동생이 된 모습을 선호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선호에게 그간의 일을 전한 후, 태준과 함께 제주도로 떠났다.
새해를 맞아 1박 2일 일정으로 제주도 ‘세양 호텔’에 도착한 두 사람은 짐을 정리한 후에 앞에 보이는 바닷가로 향했다.
거센 파도와 함께 매서운 겨울바람이 두 사람을 감쌌다.
“으, 춥다.”
“거봐요. 춥다니까.”
태준이 춥다고 룸 안에서 바다를 보자고 하는 걸 가을이 나가서 보자고 해 나온 참이었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도리까지 칭칭 감았는데도 겨울 바다의 위용을 이겨 내지 못했다.
“그래도 이렇게 같이 해변을 걷고 싶어서요.”
“따듯한 봄에 오면 되지.”
“봄에도 오고. 지금도 걷고.”
가을이 코가 빨개진 채로 배시시 웃자 태준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겨울에 보는 바다는 또 다른 것 같아요.”
단숨에 모든 걸 삼킬 듯 크게 너울대는 파도를 가을이 빤히 바라보았다.
“보고 있으면 뭔가 강해지는 느낌이 든달까. 저렇게 맹렬한 파도에 맞설 힘을 기르고 싶어져요.”
태준이 코트 주머니에 맞잡은 가을의 손을 조금 더 꽉 쥐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까, 무리해서 맞설 필요 없어요.”
그 말에 가을이 태준의 어깨에 슬며시 얼굴을 기댔다.
태준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영원하지 않을까 봐, 그래서 태준이 자신의 곁을 떠날까 봐 두려웠던 마음은 그와 사귄 이후 단 한 순간도 느껴 본 적이 없었다.
변하지 않는 사랑도 있다는 걸 보여 주겠다던 말을 지키듯 태준은 늘 한결같이 사랑을 해 주고, 그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그 마음이 영원할 거라는 걸 가을은 잘 알고 있었다.
“오빠.”
“응.”
“알죠?”
“응.”
태준의 대답에 가을이 슬쩍 고개를 들어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뭔데요?”
바다를 보던 태준이 고개를 돌려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나랑 같은 생각한 거 아닌가?”
“배고프다는 생각~?”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 가을의 빨간 코를 태준이 콕 눌렀다.
가볍게 웃어 보인 가을이 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태준을 바라보았다.
“사랑해요.”
“나도. 사랑해요.”
청아하게 웃어 보인 태준이 그대로 가을을 품에 안았다.
“꽁꽁 얼었네. 감기 걸릴라.”
“안에 든든히 입어서 괜찮아요.”
“난 얇게 입었어요.”
“어? 진짜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서,”
태준이 가을을 더 꼬옥 끌어안으며 말을 이었다.
“같이, 몸 좀 녹여요.”
“그, 그럴까요?”
수줍은 말에 만족스럽게 웃은 태준이 다시 가을의 손을 잡고 ‘세양 호텔’로 몸을 돌렸다.
얼마 뒤.
호텔 레스토랑에서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후, 가볍게 술을 하기 위해 가을과 태준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일반 칵테일바와 다른 최상층에 있는 VIP 전용 칵테일바였다.
“아, 잠깐 룸에 들러야 할 것 같은데. 가을 씨 먼저 올라가 있을래요?”
“같이 가요.”
“아뇨. 명석이랑 통화도 해야 하고. 먼저 가 있어요.”
“네.”
평소라면 뭐든 같이하려고 하는 태준이 먼저 올라가라고 하자 어딘가 이상했지만, 가을은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VIP 칵테일바에 들어섰다.
일반 칵테일바가 아니라서 그런지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노을이 진 바닷가 풍경이 전면에 가득 들어오는 그림 같은 전망이 압권이었다.
한눈에 바다가 보이는 멋진 전망은 룸에서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은은한 재즈와 함께 멋들어진 조명, 칵테일바 안을 가득히 메운 꽃 등 전반적인 분위기가 방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무슨 꽃이 이렇게 많아.”
곳곳에 놓인 꽃이 과하다 싶을 정도 많았지만 VIP 칵테일바라 다른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꽃밭에 온 듯 칵테일바 안을 가득 메운 꽃향기를 맡던 가을이 태준이 오길 기다리며 노을이 진 겨울 바다를 감상했다.
잔잔히 흐르던 재즈 연주가 갑자기 끊기자 가을이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렸다.
언제 왔는지 태준이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오지 않고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자 가을은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목을 가다듬듯 ‘큼’ 기침 소리를 낸 태준이 옆에 놓은 기타를 들었다.
언젠가 가을은 어릴 적에 봤던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이 통기타를 치며 프러포즈를 하는 장면이 너무 멋있었다는 얘길 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크면 꼭 그런 프러포즈를 받고 싶다고 생각했다며 영화 속 연출도 압권이었다는 말을 했었다.
그 말을 기억해 둔 태준이 시간을 내 연습을 한 것이었다.
가을이 연출가로 자리매김하는 순간을 진득이 기다리던 태준은 얼마 전 그녀에게 연출상 후보에 올랐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상을 받든, 받지 못하든, 후보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가을이 연출자로서 인정을 받은 것임엔 확실했다.
그 후 제주도 여행을 계획하면서 태준은 그동안 기다려 온 프러포즈를 빠르게 준비해 놓았다.
태준이 연습한 곡은 잔잔하면서도 진심이 담긴 팝송으로 인기를 누린 ‘더 웨딩’이라는 곡이었다.
감미로운 기타 연주에 맞춰 태준의 목소리로 노래가 시작되자 가을의 눈가가 그렁하게 차올랐다.
잠잘 시간도 부족할 만큼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태준이 기타를 배우고, 노래를 연습했을 걸 생각하자 울컥해진 마음을 참아 내기 힘들었다.
긴장한 듯 기타를 치는 태준의 손이 떨리는 게 보여 가을의 심장이 덩달아 더 일렁였다.
노래가 끝나자 기타를 내려놓은 태준이 가을의 앞으로 다가왔다.
박수를 치는 것도 잊을 만큼 마음이 벅차올라 가을은 다가오는 태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프러포즈를 하기 위해 가을의 앞으로 다가온 태준이 무릎을 꿇고 작은 상자를 건넸다.
“앞으로 평생,”
“…….”
“내 옆에 있어 줄래요?”
눈앞에 있는 반지를 보던 가을이 태준의 눈을 바라보았다.
“……네.”
가을의 대답에 미소 지은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일으켜 세웠다.
가을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자 그녀도 태준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서로의 마음이 하나가 됐음을 증명하는 반지가 두 사람의 손가락에서 반짝거렸다.
오른손에는 가을을 지켜 주기 위한 경찰 반지를, 왼손에는 가을과 사랑을 약속한 반지를 낀 태준이 그녀의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평생, 사랑할게요.”
“저도요.”
태준이 그대로 가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앞으로 어떤 일이 닥쳐도 서로 사랑할 것을 맹세하며 두 사람은 깊은 키스를 나눴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