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양 그룹’ 회장실.
한쪽 벽면이 통창으로 된 넓은 회장실 안. 한쪽 책장엔 책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고요한 회장실 안에 태준이 서류를 넘기는 소리만 들려왔다.
책상 위에 가득 올려진 서류를 하나씩 검토하며 태준은 한창 업무에 열중하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 태준을 도와 업무를 보던 정열이 제주도로 내려가면서 태준이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
회장이라는 직책을 맡기에는 태준의 나이가 어려 주주들과 고위 경영진들의 우려가 컸지만, 태준은 뛰어난 통솔력과 냉철한 판단력, 우수한 머리로 보란 듯이 회사를 이끌어 갔다.
‘삐-’
-정가을 씨 오셨습니다.
명석의 목소리에 태준이 보고 있던 서류를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장실 문을 열었다.
가을이 비서실 앞에 서 있는 걸 발견한 태준이 반갑게 웃으며 나왔다.
12월 31일, 올해의 마지막을 맞아 함께 가을이 좋아하는 레스토랑에 가기로 예약을 해 둔 상태였다.
예약해 둔 시간보다 가을의 촬영이 빨리 끝나자 태준은 회사에 와서 기다렸다가 함께 가자는 연락을 한 상태였다.
“밖에 춥죠?”
“조금요.”
“임 비서, 차 한 잔만 부탁해.”
명석에게 차를 내어 오라는 지시를 한 태준이 가을을 에스코트하듯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자 명석이 탕비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보던 여자 비서들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진짜 스윗하시다.”
“문 열고 나올 때 눈빛 봤어?”
“봤지. 내가 심쿵했잖아. 애인이 올 때마다 문 열고 나와서 데리고 들어가는 남자라니. 전생에 무슨 복을 쌓아야 저런 남자를 만나는 거야?”
“그러니까. 평소엔 찬바람 장난 아니잖아.”
“내 말이. 애인이 오면 다른 사람 된다니까. 아아, 진짜 부럽다.”
한참이나 부럽다는 말을 주고받던 여자 비서들이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회장실 안으로 들어온 가을은 언제 봐도 멋있는 통창 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가장 예쁜 저녁. 노을이 지는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이런 데서 일하면 무슨 생각 들어요?”
뻥 뚫린 전망을 좋아하는 가을이 부럽다는 듯 태준을 바라보았다.
“글쎄.”
태준이 소파에 앉으며 말을 이었다.
“얼른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
“와아, 진짜 직장인이 다 됐어.”
가을의 말에 소리 내 웃던 태준이 옆에 와서 앉으라는 듯 소파를 두드리자 가을이 그 곁에 다가와 앉았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온 명석이 찻잔을 가을의 앞에 내려놓았다.
“처제도 이쪽으로 오는 건가?”
오늘 저녁 일정은 명석과 가영도 함께하기로 했다.
“예. 회사 앞에서 보기로 했습니다.”
가영이 일 때문에 조금 늦을 것 같다고 연락해 명석은 회사에서 업무를 보다가 가영을 만날 생각이었다.
“두 분이 먼저 가 계세요. 전 가영 씨 기다렸다가 함께 갈게요.”
“그래.”
명석이 가볍게 인사를 하고 회장실을 나갔다.
“임 비서님 무슨 일 있으세요??”
“음?”
“평소보다 기운이 좀 없어 보이는데.”
“가을 씨 눈에도 그래 보여요?”
“네. 원래 말이 없는 분이긴 한데 뭐랄까, 평소보다 좀 가라앉은 느낌이랄까?”
태준이 동의한다는 듯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물어보니까 가치관에 혼란이 와서 그렇다던데.”
“가치관이요?”
가을이 무슨 말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자 태준이 자신도 무슨 소린지 모른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가영의 문제일 거란 짐작만 할 뿐 정확히 어떤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물어본다고 바로 대답해 줄 명석이 아니라 조만간 술을 한잔하며 슬쩍 떠볼 생각이었다.
태준이 뜨거운 차를 후후 불고 있는 가을을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 촬영은 어땠어요?”
“좋았어요.”
“다행이네.”
“서준이 연기가 더 늘어서 찍을 때마다 보람이 있어요. 특히 감정연기가 좋아서 애절한 느낌을 정말 잘 살리거든요.”
“애절한 느낌?”
고개를 끄덕인 가을이 다시 서준의 칭찬을 이었다.
“눈빛이 좋은 배우들이 있는데, 서준이가 딱 그래요. 아마 이번에 방송 나가면 서준이 인기가 더 많아질 거예요.”
가을의 얘기를 듣던 태준이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혹시 은서준이 아직도,”
“아니에요.”
가을이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서준은 현재 가을에게 사적인 관심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때문에 가을은 그가 아직까지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걸 모르고 있었다.
그에 반해 남자의 감이 발동한 태준은 서준이 아직 마음을 정리하지 못한 걸 느꼈다.
“왜 이렇게 예뻐서.”
태준이 가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넘겼다.
“사람을 불안하게 하지.”
“그런 걸로 치면 제가 더하죠.”
회사 안으로 들어와 회장실로 오는 동안에 엘리베이터 안에 있던 여직원들이 태준에 관한 얘기를 하는 걸 들었던 가을이었다.
잘생겼다느니, 애인이 있어도 유혹하고 싶다느니, 그런 남자면 영혼을 바치겠다느니, 온갖 말을 하는 걸 묵묵히 들어야 했다.
“이 큰 회사에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데, 제가 훨~씬 불리하죠.”
태준이 일부러 불퉁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가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난 걱정할 거 없다니까.”
“어째서요?”
“말했는데. 가을 씨밖에 모른다고.”
태준이 가까이 다가오자 가을이 좋으면서도 슬쩍 태준의 가슴을 밀어냈다.
“얼른 업무 보세요.”
“싫어요.”
“아이참. 그래야 퇴근을 하죠.”
가을의 만류에도 기꺼이 다가가 키스를 퍼부은 후에야 태준은 업무를 마무리했다.
몇 시간 뒤.
예약해 둔 창가 좌석에 가을과 태준이 나란히 자리했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의 모습이 연말임을 실감케 했다.
레스토랑 안에도 연말을 맞아 함께 식사를 하는 연인들과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시간이 왜 이렇게 빠른지 모르겠어요. 한 달이 하루 같달까.”
가을의 말에 태준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바쁘게 살아서 그래요.”
“그렇게 치면 오빠는 1년이 하루 같겠어요.”
“그러게. 특히 이렇게 같이 있으면 하루가 너무 짧아요.”
“저도 그래요.”
웃어 보인 가을이 투명한 잔에 담겨 있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내일은 할아버님 찾아뵈러 가요.”
“할아버지요?”
“새해 인사도 드릴 겸, 혼자 적적하실 테니까 가서 말벗도 해 드리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일선에서 물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문규는 정열이 제주도로 내려가자 유독 더 가을에게 연락을 해 왔다.
그때마다 결혼은 언제 할 거냐며 아이는 자신이 봐주겠다고 낳기만 하라고 성화를 부렸다.
가을은 그럴 때마다 연출가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하고 나서 결혼하고 싶다는 뜻을 확실하게 밝혔다.
적적하면 취미 생활을 가져 보라고 가을이 권유하자 요즘 기원에 나가 바둑을 두며 시간을 보내고 있는 문규였다.
“피곤하지 않겠어요?”
“괜찮아요.”
가을이 웃어 보일 때 가영과 명석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언니~~~. 형부~~.”
비행 스케줄 때문에 한 달에 몇 번 얼굴을 보기가 힘들어진 가영이 반가운 표정을 하며 빠르게 테이블로 다가와 앉았다.
“처제는 갈수록 예뻐지네.”
태준의 칭찬에 가영이 한껏 미소 지었다.
“그죠? 우리 명석 오빠 긴장 좀 해야겠죠?”
“그러게.”
“아하하하.”
환하게 웃는 가영에 비해 명석은 가벼운 입 미소만 지어 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문한 음식이 차려지자 가영은 쉬지 않고 비행 중에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며 분위기를 돋우었다.
“일하는 데 어려움은 없나?”
배가 고팠는지 스테이크 두 조각을 한꺼번에 입에 넣던 가영이 태준의 질문에 우물거리며 대답했다.
“다들 잘해 줘서 크게 어려운 건 없어요. 저 진짜 열심히 일해서 3년 안에 돈 많이 모아야 하거든요.”
가영의 접시에 스테이크를 덜어 놓아 주던 명석이 처음 듣는 말에 고개를 들었다.
가을과 태준 역시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가영을 바라보았다.
“왜 3년 안이야??”
가을의 질문에 가영이 입에 있던 스테이크를 꿀꺽 넘기고 대답했다.
“명석 오빠랑 결혼하려고.”
그 말에 명석이 ‘컥.’ 하는 소리를 내자 가영이 왜 놀라냐는 표정으로 명석을 바라보았다.
“오빠 35살에 결혼한다고 했잖아요.”
“…….”
“설마, 나 말고 다른 여자랑 결혼할 거예요?”
“그게 아니라,”
“연애랑 결혼이랑 따로 생각 안 한다면서요.”
“…….”
“연애는 나랑 하고 결혼은 다른 여자랑 하려고 했어요?”
매사 진중하고 감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 명석이 가영의 말에 쩔쩔매는 모습을 보이자 태준과 가을이 관망하듯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나 가지고 논 거예요?”
“누가 가지고 놀았다고,”
“그럼 나랑 결혼해요.”
“아직 그런 얘기를 하긴 이르니까 일단,”
“나 밥 안 먹을 거야.”
가영이 투정 부리듯 들고 있던 포크를 접시에 내려놓았다.
“배고프다면서요.”
명석과 만나자마자 배가 고파서 혼났다며 연신 배를 움켜잡았던 가영이었다.
“그래도 안 먹을래요.”
가영이 입술을 한껏 내밀고 귀여운 투정을 부리자 명석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으니까, 얼른 먹어요.”
“진짜죠?? 진짜 진짜죠?”
“진짜니까 얼른,”
“들었죠, 두 분?”
가영이 냉큼 태준과 가을을 돌아보았다.
“두 분이 증인이에요. 나중에 명석 오빠가 다른 소리 하면 피의 응징을 해 주셔야 해요!”
“그런 건 내가 잘하지.”
태준의 말에 가을이 말을 보탰다.
“나도.”
가영이 명석을 돌아보며 해맑게 웃어 보였다.
“들었죠? 오빠 이제 3년 뒤에 나랑 결혼해야 해요.”
가영을 넘보는 남자들에 대한 질투심에 한 번씩 속을 끓였던 명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영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직진 중이었다.
“오빠랑 나랑 이제, 결혼할 사이가 된 거예요.”
가영이 한껏 들떠 한 손으로 명석의 팔을 ‘콩콩’ 치자 그 말에 명석의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결혼할 사이.
한 번 정한 일은 반드시 지켜내는 명석은, 자신이 정한 가치관을 유지해야 한다는 마음과 후회하는 마음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지난번 가영과 첫 키스를 하고 이성이 끊어졌던 날, 혼전순결을 지켜준다는 가영의 말에 한 번 더 마음을 다잡았다.
그러다가도 가영을 볼 때면 왜 굳이 마음을 다잡아야 하는지 스스로 혼란스러웠다.
“오빠~ 우리 약혼부터 할까요?”
“약혼……?”
약혼이라는 건, 언젠가 반드시 결혼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영과 잠자리를 가진다고 해도, 혼전순결을 저버리는 것이 아니라 첫날밤 시기를 조금 앞당기게 되는 것뿐 아닐까.
행복한 얼굴로 눈을 반짝이고 있는 가영을 명석이 뜨거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가치관을 지켜주고 있는 가영과 조만간 이 부분에 대해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눠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거 진짜 맛있다. 좀 드셔보세요.”
“난 괜찮으니까, 가을 씨 많이 먹어요.”
서로를 챙기며 행복해하는 가을과 태준.
“오빠아~ 반지부터 하러 갈까요?”
명석에게 결혼 약속을 받아 한껏 기분이 들떠 있는 가영.
그 속에서 명석은, 혼전순결의 기준을 합리화하며 두근거리는 눈빛으로 가영을 바라보았다.
식사에 이어 카페에서 시간을 보낸 후 가을과 태준은 한남동으로 왔다.
‘쏴아아.’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던 태준이 뭔가 떠올리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가영에게 조련을 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명석이 말이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명석이 어딘가 얼이 나가 있어 보여 걱정을 했었지만 그 이유가 가영에게 있는 것 같아 태준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제대로 임자를 만난 것 같단 생각에 태준은 내내 흐뭇하게 두 사람을 바라보았었다.
매사 이성적인 명석과, 감정에 충실한 가영. 명석이 안고 있는 문제가 뭔지 대충 짐작을 한 태준이었다.
샤워를 끝낸 태준이 소파에 앉아 있는 가을에게 향했다.
한남동에 도착해 먼저 샤워를 마친 후 가을은 보신각 종소리를 듣고 잔다며 TV를 켜 놓고 있었다.
TV 화면엔 ‘STN’ 방송국에서 하는 연기대상이 한창 방송 중이었다.
가을은 TV는 보지 않은 채 시선을 내려 뭔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무슨 생각 해요?”
태준이 물기에 젖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털며 가을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그냥, 다행이라는 생각이요.”
“어떤 부분이?”
“그게, 가영이만 너무 임 비서님을 좋아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었거든요, 그런데 오늘 보니까 임 비서님도 가영이 많이 좋아하는 게 눈에 보여서요.”
그 말에 태준이 연하게 웃어 보였다.
“명석이가 표현을 잘 안 해서 그렇지, 처제 엄청 좋아해요.”
“그죠? 그런 거 맞죠?”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이었다.
“좋아하지 않으면, 애초에 사귀지도 않을 녀석이고. 나와 관련된 게 최우선인 녀석인데, 언젠가부터 처제 일을 먼저 챙기니까.”
“다행이다.”
혹시라도 가영만 명석을 좋아해 상처받을까 봐 걱정하고 있던 가을이 그제야 마음이 놓이는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올 한 해 최고의 인기를 누린 올해의 스타상, 온라인으로 진행된 투표에서 총 10분이 영예의 상을 수상하셨습니다!]
MC의 목소리와 함께 선정된 배우 10명의 모습이 보였다.
그중 한 명은 서준이었다.
화면에 서준이 잡히자 방청객들의 함성이 거세졌다. 말하지 않아도 대세 배우임을 알 수 있는 환호성이었다.
“잘되는 거 보니까 좋네.”
드라마 반응은 가을의 작품이 가장 좋았지만 미니시리즈 위주로 상이 돌아가 ’거기에 네가‘ 관련된 상은 아쉽게도 후보에 오르지 못했다.
“아쉬워요?”
“아뇨. 상을 받으려고 연출자가 된 게 아니니까. 누가 봐도 부끄럽지 않은 작품을 찍은 걸로 만족해요, 전.”
그 말에 태준이 연하게 웃어 보였다.
“하여간, 멋있다니까.”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태준이 가을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함께 TV를 보는 사이 어느새 시간은 11시 59분이 되었다.
[10, 9, 8, 7…….]
카운트 소리와 함께 12시가 되자 보신각 종이 울렸다.
‘댕-’
종소리와 함께 태준을 향해 고개를 돌린 가을이 가장 먼저 새해 인사를 건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가을의 말에 태준이 지그시 가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올해는 더 사랑할게요.”
“……저도요.”
가을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보인 태준이 천천히 입을 맞췄다.
‘댕-’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보신각 종소리와 함께 두 사람의 키스는 한껏 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