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7화 (87/90)

도진이 문을 열고 들어오자 안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87cm가 넘는 태준과 도진이 서 있자 룸 안이 꽉 찬 느낌이었다.

“안녕하세요.”

도진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태준이 먼저 인사하라는 눈짓을 하자 가을이 자기소개를 했다.

“안녕하세요, 연출을 맡은 정가을입니다.”

“드라마 재밌게 잘 봤습니다.”

“저도 출연하신 영화들 잘 봤습니다.”

이어 작가와 인사를 나눈 도진이 태준과 인사를 나눴다.

“강태준입니다.”

넘볼 수 없는 비주얼의 두 남자가 악수를 하는 모습을 가을과 작가가 감탄하며 바라보았다.

“차도진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미 매니저에게 투자자인 태준에 대한 사항을 듣고 온 도진이었다.

“자자, 다들 앉아, 앉자고.”

정찬 CP가 앉으라는 손짓을 하자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이어 음식들이 나오며 대화가 이어졌다.

“여기 정 감독이 예전부터 도진이 네 팬이었다고 내가 얘기했지?”

“예.”

도진이 가을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자 가을이 얼굴을 붉혔다.

태준이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을이 도진의 팬이라는 걸 알고 난 후 태준은 그의 자료를 찾아보았었다.

영화에서부터 드라마까지 그의 출연작을 살펴보면서 왜 인기가 있는지 실감했다.

캐릭터에 녹아든 연기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거기다 가을이 얘기한 것처럼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더 잘생긴 얼굴이었다.

‘STN’에서 일하면서 많은 연예인을 봤지만 왜 가을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빤히 보고 있다는 걸 느낀 도진이 태준을 쳐다보자, 태준이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내 태준의 시선이 도진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있는 가을에게 향했다.

그 모습에 또다시 질투심이 타오른 태준이 마음을 다스리며 앞에 놓인 물을 단숨에 마시고 내려놓았다.

굳이 이 자리에 나온 이유가 질투 때문이 아니라, 톱스타인 도진의 실물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라는 자기합리화를 하던 태준이었다.

천천히 식사를 하며 가벼운 주변 얘기를 하다 특별 출연에 관한 얘기로 이어졌다.

도진이 맡은 역은 특수 임무를 맡은 서준의 선배 역이었다.

“극의 흐름을 볼 때 3부 45신에 들어가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감독님과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어? 저도 오늘 작가님이랑 그 얘기 했어요. 아무래도 45신에서 등장하는 게 좀 더 자연스러울 것 같다고요.”

“역시 같은 생각을 하셨네요.”

도진이 부드럽게 웃어 보이자 작가는 아예 입을 벌린 채 멍하니 쳐다보고 가을은 칭찬받은 아이처럼 쑥스러워했다.

흡사 수줍은 소녀 팬 두 명이 좋아하는 배우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었다.

“바쁘신데 괜히 시간 내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태준의 목소리에 도진의 시선이 태준에게 향했다.

“아닙니다. 좋은 기회 주셔서 영광이죠.”

“불편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마주 보며 영업용 미소를 짓는 두 남자의 눈부신 외모에 방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후 촬영에 대한 얘기가 이어지다 식사가 끝이 났다.

“도진이랑 난 커피 한잔하러 갈 건데, 다들 시간 어때?”

정찬 CP의 말에 가을이 빠르게 대답했다.

“전 좋습니다!”

가을과 달리 작가는 약속이 있는지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전 국장님을 만나러 가야 해서……….”

“그래 그래, 어쩔 수 없지 뭐.”

태준이 뭐라고 얘기하려 할 때 가을이 태준을 돌아보았다.

“대표님은 바쁘시죠?”

가을은 그저 태준의 시간을 걱정한 것뿐인데 태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뇨. 무척, 한가합니다.”

내내 태준이 의식하고 있던 걸 알고 있던 도진과 정찬 CP가 슬쩍 입술을 올렸다.

도진은 ‘세양 그룹’ 회장인 태준이 가을과 사귀고 있다는 얘기를 정찬 CP에게 전해 들은 상태였다.

아마도 이 자리에 나오는 이유가 도진의 팬인 가을 때문일 것이라는 얘기도 잊지 않고 전해 주었다.

한가하다는 태준의 말에 가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안 바쁘세요??”

“예.”

“어? 어제도 야근하셔 놓고 진짜 안 바쁘,”

“진짜. 괜찮아요.”

가을을 향해 웃어 준 태준이 정찬 CP를 돌아보았다.

“어디로 가실 거죠?”

얼마 뒤.

도진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열심히 사인을 하고 사진을 찍어 주는 중이었다.

“저도 사인해 주세요!”

“사진 한 장만 찍어 주세요~!.”

한식당을 나오다 도진을 알아보고 몰려든 사람들이 연신 그의 외모에 감탄하며 사인과 사진을 요청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가을이 한 명 한 명 눈을 맞추며 사인을 해 주는 도진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진짜 다정하다.”

그 모습을 태준이 가늘게 바라보았다.

“나는?”

“네?”

“나는 안 다정하고?”

태준이 내내 질투를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가을이 웃음이 나려는 걸 숨기고 괜히 도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우리 차 배우님이 더 다정한 거 같은데.”

“우리, 차 배우님?”

도진에게 시선을 거둔 가을이 빤히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지금,”

“…….”

“질투하세요?”

“응.”

태준이 1초 만에 대답했다.

“질투를 왜 하지?”

“…….”

“강태준밖에 모르는 사람한테.”

가을이 얼마 전 태준이 한 말을 흉내 냈다.

배시시 웃는 가을의 모습에 태준이 저도 모르게 무장해제 되었다.

“이런 게 조련당한다는 건가?”

“조련이요?”

“명석이가 그러던데, 처제한테 조련당하는 기분이라고.”

“아하하. 그래요?”

그때 화장실을 다녀오던 정찬 CP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아이고, 또 길에서 한세월이네. 톱스타도 참 힘들어.”

사람들이 점점 더 몰려들자 도진이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불렀다.

곁에 있던 덩치 큰 남자가 도진에게 향하는 모습을 보던 가을이 팬심이 묻어난 목소리를 뱉었다.

“어쩜 저렇게 다정하게 웃으면서 사인을 해 줄까요?”

“그지? 그래서 차도진이지.”

도진을 보던 정찬 CP가 말을 이었다.

“근데 도진이 화나면 엄청 무서워.”

“그래요?”

그때 누군가 불쑥 세 사람 앞에 다가왔다.

도진이 불렀던 덩치 큰 남자였다.

“안녕하세여~.”

세 사람 앞에 커다란 몸집에 흡사 조폭처럼 생긴 남자가 어울리지 않게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분명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이 더 무서워 보이는 남자였다.

“저 도진이 형 매니전데여~.”

“아, 안녕하세요.”

가을이 도진의 매니저인 진철을 향해 가볍게 고개 인사를 건넸다.

작은 눈을 반짝거리는 진철의 모습에 태준도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감독님이랑 대표님이 무슨 배우 같으셔서 깜짝 놀랐어여.”

“나보고는 며칠 굶은 산적 같다더니.”

정찬 CP의 말에 가을이 웃음을 참으려는 듯 손으로 슬며시 입을 막았다.

“아이참, 그건 제가 취해서 그런 거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여.”

“취중 진담 몰라? 근데 진철이 너 살 좀 찐 거 같다?”

진철이 멋쩍은 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외모는 명석의 삼촌들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데 하는 행동은 귀여운 반전 매력의 소유자였다.

“제가 요즘에 오메가 피자라구여, 엄청 맛있는 거 발견해서 자주 먹거든여.”

“그 피자 맛있나? 우리 딸도 그거 자주 먹던데.”

“엄청여~ 아참, 그거보다 도진이 형이 먼저 카페 들어가시라구 하셔서여. 저 앞에 ‘카페 엠’ 아시져? 거기 제 이름으루 예약해 놨으니까 들어가 계세여.”

태준과 가을, 정찬 CP에게 꾸뻑 인사를 한 진철이 몸을 돌렸다.

Rrrr-

휴대폰 벨소리에 진철이 빠르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예, 초은이 누나. 형이여? 지금 사인해 주고 계셔가지구여.”

통화를 하며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도진에게 다가가는 진철을 보던 가을이 슬쩍 웃어 보였다.

“뭔가 귀여운 분이네.”

“저 친구가 생긴 건 저래도 아주 착해. 자자, 우리끼리 먼저 가자고.”

정찬 CP가 카페로 향하자 가을과 태준도 몸을 돌렸다.

“근데, 정말 시간 괜찮으신 거죠?”

가을의 말에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일정은 아니라 조절해 뒀어요.”

가을이 슬며시 미소 지으며 태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왜 그렇게 봐요?”

앞에 가는 정찬 CP를 힐끔 쳐다본 가을이 손으로 입을 살짝 가리며 작은 목소리를 냈다.

“좋아서요.”

한쪽 입술을 올린 태준이 고개를 숙여 가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나도.”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두 사람이 카페로 향했다.

* * *

늦은 저녁 의찬의 BAR 안.

은은한 재즈가 나오는 가게 안은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바 테이블에 앉은 여자들은 의찬이 마음에 드는지 연신 이것저것 묻는 중이었다.

“사장님은 애인 없어요?”

“아쉽게도 혼자네요.”

그 말에 여자들끼리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어떤 여자 좋아하세요?”

“음, 웃는 게 예쁜 사람이요.”

“다른 건요?”

“잘 웃고, 씩씩하고, 매사 긍정적이고…….”

‘딸랑.’

그때 가게 안으로 가을과 태준이 들어오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어? 정가을, 연락도 없이 웬일이야?”

“손님 많네?”

의찬이 태준과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가을을 돌아보았다.

“저쪽에 자리 하나 있어.”

잠시 뒤.

창가 쪽 자리에 앉은 가을과 태준을 향해 의찬이 칵테일 두 잔을 가져다 내려놓았다.

의찬이 만든 ‘치어 포유’ 무알코올 칵테일이었다.

“촬영하고 온 거야?”

“응.”

“차도진 촬영은?”

의찬 역시 가을과 마찬가지로 도진의 팬이었다.

도진이 특별 출연을 한다고 하자 사인받으러 촬영장에 가야 한다고 난리를 치던 의찬은 사정이 생겨 촬영장에 오지 못했다.

“낮에 다 끝났어.”

가을이 자랑하듯 휴대폰을 꺼내 도진과 찍은 사진을 보여 주었다.

“와, 미쳤다. 사람이야?”

감탄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보던 의찬이 자체발광하고 있는 태준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뭐 안팎으로 이런 사람들만 보니. 그래서 내가 아직도 네가 준 걸 못 먹고 있어.”

“응?”

“오징어 말이야. 동질감을 느껴서 먹을 수가 있어야지.”

태준의 이모가 종종 보내 주는 오징어를 얼마 전 의찬에게 나눠 준 가을이었다.

“왜 이래. 가영이가 너 손님들한테 엄청 대시 받는다고 하던데.”

“그건 대표님 같은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봐라, 여자들이 누굴 보고 있는지.”

의찬의 말에 가을이 슬쩍 주변을 둘러보자 여자 손님들이 모두 수군거리며 태준을 보고 있었다.

“사장님!”

아르바이트생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던 의찬이 다시 가을에게 고개를 돌렸다.

“필요한 거 있으면 불러.”

“응. 얼른 가 봐.”

태준에게 가볍게 인사를 한 의찬이 빠르게 카운터로 향했다.

새벽부터 시작된 촬영이 오후쯤 끝나자 태준과 함께 저녁을 먹다가 의찬의 얘기가 나와 들른 참이었다.

태준과 가볍게 잔을 부딪친 가을이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어때요?”

“음, 좋네.”

“의찬이가 딸 키운 아버지 같은 마음으로 만든 거래요.”

가을의 말에 태준이 칵테일로 시선을 내렸다.

“저랑 가영이를 키운 느낌이라나? 특히 가영이한테는 오빠처럼 듬직했거든요.”

태준이 바 테이블에서 손님들과 얘기를 하며 칵테일을 만드는 의찬을 바라보았다.

“좋은 친구를 뒀네.”

“그러니까요.”

가을이 미소 지으며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내려놓자 태준이 가을의 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까 보여 준 사진, 나도 봐 봐요.”

“응? 사진이요?”

“차도진이랑 찍은 사진.”

도진이 촬영을 하는 날 직접 촬영장에 오겠다던 태준의 계획은 계속된 회의에 이뤄질 수 없었다.

“아. 그거.”

가을이 휴대폰을 꺼내 태준에게 건넸다.

가을이 도진에게 머리를 기울이고 도진은 가을의 어깨에 손이 닿지 않게 매너 손을 하고 찍은 사진이었다.

“너무 기울인 거 아닌가.”

가을의 머리가 도진 쪽으로 한껏 기울어져 있었다.

틈만 나면 사소한 걸로 질투를 하는 태준이었지만 가을은 그 모습이 마냥 좋았다.

“팬심을 속이질 못해서요. 저절로 기울어져서 혼났어요.”

“삭제.”

태준이 삭제하는 시늉을 하자 가을이 빠르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빠르게 태준은 휴대폰을 들고 있는 손을 올려 가을의 손을 차단했다.

“삭제했어요?”

“글쎄. 어떻게 했을까.”

“안 돼요. 그거 한 장인데.”

여전히 휴대폰을 높게 들고 있는 태준이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가을이 달라는 듯 양손을 앞에 내밀자 태준이 웃음기를 지우고 사뭇 진지한 표정을 했다.

“그럼 오늘 한남동.”

“네에?”

아침 일찍 출장을 가야 하는 태준이 한남동으로 같이 가자고 졸라 가을은 오늘만큼은 혼자 산장 빌라로 가겠다고 단호하게 얘기했던 참이었다.

“어떻게 할래요?”

“내일 피곤해서 어쩌시려고요.”

“왜 피곤하지?”

태준의 말에 당황한 가을이 부산스럽게 눈을 굴렸다.

“……아니에요?”

“뭐가요?”

자신들의 대화가 들릴 리도 없는데 괜히 신경이 쓰여 가을이 정신없이 칵테일을 만들고 있는 의찬과 손님들을 둘러보다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그니까…… 그거요…….”

당황하는 가을이 귀여워 빤히 보던 태준이 입술을 올렸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대로 상체를 숙인 태준이 빤히 가을을 응시한 채 조용히 속삭였다.

“안고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

“아이, 진짜아.”

가을이 얼굴이 빨개져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얼른.”

“알았어요.”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자 태준이 그제야 휴대폰을 건넸다.

도진과의 사진이 그대로 있는 걸 본 가을이 안도의 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삭제 안 할 거면서.”

“그걸 왜 해요. 기념인데.”

가을을 향해 웃어 보인 태준이 앞에 놓인 칵테일을 한 번에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가자.”

“벌써요?”

“시간이 부족해서.”

속살거리는 목소리에 얼굴이 홧홧해진 가을이 태준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사랑하고, 사랑받는 이 순간들이 더없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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