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말에 태준이 망설임도 없이 501호 현관문 손잡이를 잡았다.
“잠, 잠깐만요.”
가을이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듯 태준을 막아섰다.
“십, 십 분 뒤에 오시면 안 될……까요?”
“괜찮은데.”
“……뭐가요?”
“집을 치우려는 거 아닌가?”
태준의 말에 가을이 괜히 눈알을 부산스럽게 굴렸다.
“그게 아니라 씻……으려고요.”
들어오라고 해 놓고 씻어야 한다는 말을 뱉어 내자 제 목적이 뭔지 들킨 것 같아 가을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그 모습에 태준이 가을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속살거렸다.
“같이 씻으면 되죠.”
“아, 아뇨! 그건 좀…… 아닌 거 같아서, 어쨌든 10분 뒤에…… 오세요.”
“그러고 나서 잠들려고.”
“아뇨…….”
“아니에요?”
“……네.”
“진짜?”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준이 느슨히 입술을 올렸다.
“자면, 오늘은 깨울 거예요.”
“네에…….”
들어오라고 해 놓고 한껏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 태준이 가을의 입술에 다시 한번 입을 맞췄다.
“빨리 올게요.”
고개를 끄덕인 가을이 빠르게 현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왔다.
매번 태준이 자고 가라고 하거나, 자고 가겠다고 하거나, 함께 있자는 얘기를 했었지 자신이 먼저 들어오라는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후아…….”
술이 오르는 듯 가을이 연신 뺨을 가볍게 찰싹찰싹 두들겼다.
술기운을 빌어 용기를 낸 말에 잠시 숨을 고른 가을이 빠르게 욕실로 들어갔다.
‘쏴아아-’
501호와 502호 욕실 바닥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샤워를 끝낸 가을이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후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 낼 때,
‘딩동-’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길게 숨을 내뱉은 가을이 현관문을 열자 태준이 샤워를 끝낸 모습으로 한 손에 샴페인을 들고 서 있었다.
샤워를 하며 진정됐던 가을의 마음이 다시 요란해졌다.
태준이 자신의 집에 몇 차례 왔었지만 그럴 때마다 떨림은 쉽게 가시질 않았다.
“들어……오세요.”
가을의 말에 태준이 성큼 안으로 들어왔다.
태준이 다가오자 은은한 샴푸 향이 코끝을 스쳤다.
막 씻은 태준에게서 늘 나던 향기였지만 언제 맡아도 두근거림이 가시지 않았다.
가을이 그제야 태준의 손에 들린 샴페인 종류를 확인했다.
“어? 그거 제가 좋아하는 샴페인이네요?”
“내일 마시려고 했는데, 가볍게 한 잔 어때요?”
“좋아요.”
샴페인을 작은 소파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태준이 능숙하게 싱크대 서랍장에서 잔을 꺼내 들고 얼마 전 가을이 큰마음을 먹고 구매한 겨자색 소파에 앉았다.
그 곁으로 가을이 다가와 앉자 태준이 샴페인 뚜껑을 열고 잔에 따랐다.
가을이 샴페인 잔을 들자 태준이 잔을 들어 부딪쳤다.
유리잔이 부딪치는 맑은 소리가 거실에 울렸다.
샴페인을 반쯤 마신 가을이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아- 맛있다.”
알코올이 조금 첨가된 달콤한 과일 맛이 나는 샴페인이었다.
가을의 반응에 흡족해하던 태준이 한 잔을 비워 내고 미처 말리지 못한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털어 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가을이 술기운을 빌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얘기를 꺼냈다.
“근데 오늘요.”
“음?”
“왜 그렇게 멋있게 하고 출근하셨어요?”
무슨 말인가 싶어 태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회장실에요.”
“회장실에, 뭐가요?”
잠시 입술을 우물거린 가을이 작은 목소리를 냈다.
“임 비서님 빼면 여자 비서들이잖아요.”
무슨 소린가 싶어 눈을 가늘게 뜨던 태준이 이내 가볍게 웃어 보였다.
“신경 쓰여요?”
태준이 회장에 취임하고 회사 내 여직원들 사이에선 한차례 난리가 났었다.
회의를 할 때면 태준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여자 임원들이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였고 그가 구내식당을 이용하면 그 모습을 보려고 여직원들이 몰려들었다.
딸을 둔 정·재계 인사들은 태준이 ‘STN’ 대표 자리에 있을 때보다 더욱 그를 탐냈다.
태준에게 애인이 있는 걸 알면서도 자신들의 딸과 연결해 주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럴 때마다 태준은 단호하게 애인이 있다는 걸 강조해 왔다.
태준은 지금 당장이라도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연출 일에 매진한 후에 결혼을 하고 싶다는 가을의 뜻을 따르는 중이었다.
결혼을 하든 안 하든 전폭적으로 그녀를 지지해 줄 생각이었지만 이제 겨우 28살인 가을이 일에 더 매진하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과 결혼하면 ‘세양 가’의 안주인으로서 의무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그걸 모르지 않는 태준은 결혼을 서두르지 않고 가을이 좀 더 자유롭게 일을 하길 바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가을과 결혼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죠. 다들 예쁘고…….”
“내 눈엔 정가을이 제일 예쁜데.”
“그래도 오빠랑 제일 오래 있으니까…….”
술이 올라 속마음을 얘기하는 가을의 모습을 태준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남자 비서로 둘까요?”
“진짜요?”
태준이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자 놀렸다는 걸 깨달은 가을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런 가을의 입술을 살짝 잡았다 놓은 태준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별걱정을 다 해.”
“…….”
“정가을밖에 모르는 사람한테.”
태준이 가을의 뺨을 어루만지다 천천히 귓불을 매만졌다.
태준의 손길에 가을의 몸이 움찔 떨리자 귓불에서 지분대던 손이 그대로 목선을 따라 목덜미로 이어졌다.
“자고 가도 되죠?”
“주무시고…… 가시게요?”
“들어오라고 했으면,”
태준이 가을의 입술 앞으로 바짝 고개를 숙였다.
“끝까지 책임을 져야지.”
가을의 입술을 살짝 깨문 태준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밀고 들어왔다.
달콤한 애플 향이 입 안에 맴돌자 태준이 더 깊게 가을의 혀를 당겨 제 안에 감쌌다.
가을의 부드러운 입술을 물고 핥으며 마음껏 입 안 곳곳을 누비던 태준이 이내 베이비로션 향이 묻어 난 가을의 목으로 입술을 옮겼다.
“으응…….”
태준이 입술이 닿을 때마다 가을의 숨소리가 점점 달궈졌다.
가을이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그녀를 품에 안고 조심스럽게 소파에 눕힌 태준이 입맞춤을 이어 갔다.
가을이 입고 있는 쨍한 녹색 티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부드러운 살을 쓸어내리던 태준이 그대로 티셔츠를 위로 올려 벗겨 냈다.
그 바람에 정신이 든 가을이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몸을 가렸다.
“바, 방으로 가서,”
“거기까지 못 참아요.”
몇 걸음만 가면 되는 곳인데 태준이 그대로 몸을 숙여 가을의 몸 곳곳에 입을 맞췄다.
“으응…… 그래도 방에…… 으읏.”
멈출 생각을 하지 않고 온몸을 지분거리는 태준의 머리를 가을이 슬며시 밀어내자 태준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대로 소파에서 밀어붙일 것 같았던 태준이 가을을 안아 들고 큰 방에 있는 침대로 향했다.
한 손으로 이불을 치워 내고 가을을 침대에 눕힌 태준이 갈급한 키스를 이어 갔다.
스스로 짐승이라고 얘기하는 그답게 사랑을 나눌 때의 태준은 평소의 모습과 달리 거친 면모를 보였다.
능숙하게 가을이 걸치고 있는 모든 옷을 사라지게 만든 태준이 잘 알고 있는 가을의 몸 곳곳을 공략했다.
그때마다 가을의 입에서 참을 수 없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뽀얀 피부에 걸맞게 마시멜로처럼 푹신하고 보드라운 감촉은 언제나 태준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입에 닿으면 사르르 녹는 솜사탕처럼 가을은 아찔할 만큼 달콤했다. 그 탓에 곳곳에 입을 맞출 때마다 태준은 그녀의 몸을 더 깊이, 더 끊임없이 탐했다.
한참이나 가을을 애태운 태준이 입고 있던 자신의 옷을 모두 벗어 냈다.
달뜬 숨을 내뱉으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가을을 태준이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각오, 됐죠?”
가을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준이 각오를 하라고 한 날은 절대 그대로 가을을 놓아주지 않는 날이었다.
정신없이 몰아치고 나서도 몇 번이나 가을을 품에 안는 괴력을 보이는 시간이었다.
가을에게 다가온 태준이 부드럽게 파고들자 가을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천천히 힘을 싣던 태준이 조금씩 몰아치기 시작하자 가을의 탐스럽고 긴 머리카락이 아름답게 넘실거렸다.
가을이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지 잘 알고 있는 태준이 자세를 취해 몰아붙이자 가을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달뜬 목소리가 나왔다.
“하아…… 태준 오빠…….”
욕망에 젖은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이 순간이 태준이 미치는 시간이었다.
고조되던 가을의 숨소리가 울음소리에 가까워지다 이내 파르르 몸을 떨며 맥없이 풀어졌다.
온몸에 폭죽이 터지듯 격렬한 감각이 쓸고 간 후 가을이 기진맥진할 때 아직 힘이 넘치는 태준이 가을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그렇게 가을을 천천히 어루만지며 또다시 온몸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들던 태준이 점점 가을을 몰아칠 준비를 했다.
각오하라는 태준의 말처럼 둘만의 요란한 시간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 왔다.
* * *
‘거기에 네가’ 2부를 촬영하는 중에 예상하지 못한 행운이 찾아왔다.
가을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자 세계적인 톱스타 차도진이 특별 출연을 하게 된 것이었다.
정찬 CP가 친분이 있던 도진을 만났을 때, 도진은 ‘거기에 네가’ 시즌 2에 흥미를 보였다.
그 모습에 정찬 CP가 특별 출연을 권유했고 마침 얼마 전 영화 촬영을 끝내고 쉬고 있던 도진이 오케이를 한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식사 자리를 겸하는 미팅룸에 정찬 CP와 가을, 작가가 도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내가 그냥 슬쩍 던져 봤는데 도진이가 오케이를 하지 뭐야.”
정찬 CP는 내내 자신의 공을 피력하는 중이었다.
“제가 차도진 배우님이랑 촬영을 하게 될 줄 몰랐어요.”
가을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를 만난다는 설렘에 연신 앞에 놓인 물을 홀짝였다.
디링-
가을이 메시지 음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지금 도착했어요.]
가을이 도진과 미팅이 있다고 하자 태준은 투자자의 입장으로 반드시, 이 미팅에 참석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STN’에서 제작을 진행했지만 투자는 ‘세양 그룹’에서 이뤄졌다.
태준이 하도 강경하게 나와 가을은 도진의 매니저에게 전화해 참여 사실을 알렸다.
‘내 마음이 불타요~ 그대에게 불타요~ 화상 입은 내 마음~♬’
정찬 CP가 벨소리에 휴대폰을 들었다.
“여보세요? ……아 그래? 알았어.”
정찬 CP가 통화를 끊고 가을과 작가를 돌아보았다.
“도진이 일정이 늦게 끝나서 10분 정도 늦을 것 같다네.”
“네!”
가을이 괜찮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똑똑.’
노크 소리에 이어 ‘드르륵’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온 건 오늘따라 더 멋있게 갖춰 입은 태준이었다.
“강 대표 왔어?”
“오랜만에 뵙네요.”
태준이 정찬 CP와 작가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가을의 옆에 다가와 앉았다.
“바쁘지 않으세요?”
“시간 조절 잘하고 왔어요.”
어떤 배우에게도 관심이 없는 가을이 가장 좋아하는 배우라는데. 무슨 일이 있든 이 자리에 참석하고 싶었던 태준이었다.
가능하다면 촬영 시간에 맞춰 촬영장에도 가고 도진이 참석하는 회식에도 참여할 생각이었다.
어젯밤 차도진이 특별 출연을 하게 됐다며 얼굴을 붉히던 가을의 모습을 본 후로 그 생각은 더 강해졌다.
가을이 물을 마시고 내려놓는 모습을 보던 태준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그렇게 긴장되나?”
“네? 아, 네. 아니, 조금?”
태준을 의식한 가을이 횡설수설하자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순간,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