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 들어갑니다.”
‘탁-!’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거기에 네가’ 시즌 2 촬영이 시작되었다.
11월에 들어선 계절이 촬영 장소인 공원을 아름답게 물들여 놓았다.
스튜디오 촬영보다 야외 촬영이 많아 힘이 들었지만, 주요 배우는 물론이고 스태프들 역시 전에 일하던 사람들이 모여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가을빛으로 물든 고혹적인 분위기 속에서 주인공인 서준과 보라가 서로를 마주 보자 스태프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숨을 죽였다.
짧은 대사 후 키스 신으로 이어지는 촬영이었다.
“널 만나기 위해 숱한 시간을 헤맸어.”
“잊지 않고 와 줘서 고마워요.”
서준이 보라에게 키스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이자 어디선가 ‘꺄-’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컷!”
소음 때문에 NG가 나자 스태프 한 명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조용히 좀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서준의 인기는 나날이 올라 야외 촬영을 할 때면 몰려드는 사람들 때문에 한두 번씩 일대 소란이 벌어졌다.
구경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막을 수는 없는 일이라 스태프들이 조용히 해 줄 것을 부탁했지만 가끔 이렇게 NG가 발생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서준은 스태프들에게 사과를 하며 미안해했다.
그 탓에 촬영에 관한 얘기를 SNS에 올릴 때면 서준은 현장에선 조용히 해 달라는 글을 빼놓지 않았다.
스태프가 현장을 정리하는 사이 조금 전 촬영을 모니터링하던 가을이 자리에서 일어나 서준과 보라에게 다가갔다.
“이쪽으로 서 있는 것보다 조금 더 나무를 등지고 서 있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가을이 서준과 보라가 서 있어야 할 방향을 수정하며 위치를 알려 주었다.
“여기서 서준이가 다가가고, 보라는 서준이가 다가올 때쯤 고개를 조금만 기울이면 어때?”
“이렇게요?”
보라가 가을이 알려 준 대로 자세를 취해 보였다.
“아니, 좀 더 살짝 이쪽으로.”
“이렇게요?”
“아니, 그것보다 조금만 더 올려 봐.”
가을의 지시에 이리저리 자세를 취하던 보라가 예쁜 키스 신 각도를 찾지 못하고 가을을 돌아보았다.
“감독님이 시범을 좀 보여 주시면 안 돼요?”
“내가??”
“전 느낌을 통 못 잡겠어요.”
가을이 잠시 망설이자 서준은 아무런 말 없이 가을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래 그럼. 나 잘 봐 봐.”
가을이 서준을 바라보자 그가 한껏 낮아진 목소리를 냈다.
“해요?”
“응.”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준이 앞으로 다가와 섰다.
깊어진 서준의 눈동자가 가을을 빤히 응시하다 천천히 다가왔다.
덤덤한 척했지만 가을을 보는 서준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서준이 가까이 다가올 때쯤 가을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저도 모르게 가을의 입술로 시선을 내린 서준이 가을의 얼굴 바로 앞까지 다가오자 두 사람의 입술이 닿을 만한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봤지?”
그 순간 가을이 보라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살짝 들어서 기울이는 거.”
“네, 해 볼게요.”
“자, 그럼 촬영 다시 갈게요!”
가을이 자리로 돌아가자 서준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떨림이 진정되지 않는 듯 서준이 가을을 돌아보았다.
“감독님, 잠깐만 쉬고 가죠.”
“아, 그럴까?”
가을의 말에 곁에 있던 혁진이 큰 목소리를 냈다.
“잠깐 쉬고 갑니다!!”
스타일리스트가 챙겨 준 긴 카디건을 입은 서준이 자리를 이동하자 좀 전의 상황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매니저가 빠르게 다가와 속삭였다.
“너 인마, 괜찮다며.”
“괜찮은 줄 알았지.”
무리하게 스케줄을 잡는 서준이 걱정돼 매니저가 일을 줄이려고 하자 서준은 가을을 잊으려고 한다는 말을 털어놨었다.
얼핏 눈치는 채고 있었지만 확실하지 않아 아무 말 하지 않았던 매니저는 그 뒤로 과할 정도로 많은 스케줄을 잡아 주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서준은 가을에 대한 마음을 정리해 갔다.
혹시라도 ‘거기에 네가’ 시즌 2를 촬영하면 서준이 다시 흔들릴까 봐 매니저는 출연을 고사하라고 권유했었다.
하지만 서준은 어떻게 주인공이 안 나올 수 있냐며 한사코 출연을 고집했다.
회의와 대본 리딩 등을 하면서도 전처럼 가을을 보는 게 힘들지 않아 이제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을 하며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지자 사그라들었던 마음이 고개를 들었다.
“애인까지 있는데 정리가 그렇게 안 돼?”
“애인이 있든 없든, 정가을은 정가을이니까.”
“하여간, 이렇게 순정파인 걸 누가 알까.”
“…….”
“차라리 확 빼앗아.”
그 말에 서준이 피식 웃었다.
“그것도 어느 정도 확률이 있어야 하는 거지.”
머리를 식히려는 듯 찬 바람을 맞던 서준이 몸을 돌려 스태프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가을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떨림이 멎지 않은 손을 꽉 움켜쥔 서준이 자신에게 하는 주문 같은 말을 뱉었다.
“걱정하지 마. 촬영 다 끝나면, ……괜찮아질 거야.”
몇 시간 뒤.
촬영을 끝낸 배우들과 스태프들이 ‘명랑 호프’에서 회식을 가졌다.
요 며칠 빠듯한 스케줄을 이어 가던 중, 장소 협찬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내일 하루 일정이 빈 상태였다.
“누나, 사랑은 대체 뭘까요?”
얼마 전 여자친구와 크게 싸운 혁진이 가을의 옆에 앉아 연신 술을 마셨다.
“잘못은 걔가 했는데 왜 매번 내가 사과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가을이 그런 혁진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속 다 버린다. 안주라도 좀 먹으면서 마셔.”
혁진의 맞은편에 앉은 지영이 맥주를 쭉 들이켜고 내려놓았다.
“그래서 더 사랑한 사람이 죄인이란 말이 있는 거야. 어쩌겠어, 더 사랑한 네 탓이지.”
“언제는 못생긴 게 죄라더니.”
“내가 언제?”
“못생긴 게 죄라면, 난 무기징역이라며.”
“내가 잘못했다.”
지영이 사과하듯 잔을 들자 혁진이 잔을 부딪치고 쭉 들이켰다.
두 사람이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을 마시는 동안 가을은 태준과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저 때문에 퇴근 못 하시는 거예요?]
가을의 회식이 끝낼 때까지 태준은 회사에서 일을 하겠다고 한 상태였다.
[아뇨. 어차피 일할 거였어요.]
[힘들어서 어떻게 해요.]
[괜찮아요. 가을 씨 얼굴 보면 힘이 날 거라.]
태준의 메시지에 가을이 하트를 들고 있는 이모티콘을 보냈다.
가을이 태준과 한창 메시지를 주고받을 때 밖에 있던 서준이 안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자리에 스태프가 앉아 있어 갈 곳을 잃은 서준이 어쩔 수 없이 비어 있는 가을의 옆자리에 앉았다.
누군가와 열심히 메시지를 주고받는 가을을 보던 서준이 고개를 돌렸다.
묻지 않아도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태준과의 메시지를 끝내고 고개를 들었던 가을이 그제야 옆에 앉은 서준을 쳐다보았다.
“어? 언제 이쪽에 왔어?”
“선배가 휴대폰 속에 들어가려고 할 때부터.”
머쓱하게 웃은 가을이 앞에 놓인 술잔을 들다 뭔가 생각난 듯 서준을 돌아보았다.
“아참, 의찬이가 전에 피자 쿠폰 준 거 고맙다고 언제 가게 한번 놀러 오래.”
얼마 전 가을이 의찬의 얘기를 하며, 그가 오메가 피자를 좋아한다는 말을 하자 광고모델로 있는 서준이 연말이라고 받은 여러 장의 피자 쿠폰을 가을에게 건네주었다.
“가게가 어딘데요.”
“한국대 근처.”
“뭐. 생각해 볼게요.”
디링-
가을이 메시지 음에 휴대폰을 확인했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태준의 메시지인지 가을이 휴대폰을 보며 미소 짓자 서준이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따라 반쯤 마시고 내려놓았다.
태준에게 짧은 답장을 보낸 가을이 닭강정을 하나 집어 서준의 그릇에 놓아주었다.
“너도 진짜 안주 없이 마시더라.”
서준이 한눈에 봐도 맛있게 보이는 닭강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이거예요?”
“응?”
“이렇게 안주가 많은데, 왜 이거냐고.”
“너 닭강정 좋아하잖아.”
“……알았어요?”
“알았지. 같이 회식한 게 몇 번인데.”
“감독님.”
누군가 맞은편에서 다가와 말을 걸자 가을이 고개를 돌렸다.
멍하니 닭강정만 내려다보던 서준이 혼잣말을 뱉었다.
“진짜 미친놈이네.”
이런 거 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심장이 떨리는 자신이 짜증 나 고개를 털던 서준이 남은 맥주를 쭉 들이켰다.
“정 감도오오옥~~”
술이 얼큰하게 오른 도식이 새우 과자를 들고 가을의 앞으로 다가왔다.
“오랜만에 새우 과자 게임 어때?”
“안 돼요.”
술을 자제하고 있던 가을이 강하게 사양했다.
게임을 하다 보면 승부욕이 생겨 멈추지 못했고 그러다 보면 늘 취하던 가을이었다.
“내일 오랜만에 쉬는 날인데, 내 소원이야. 하자. 응?”
“…….”
“몇 판만. 으응?”
최대한 귀엽게 눈을 깜빡이는 도식을 보던 가을이 마음이 약해져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뒤.
“태준 오빠아아아~~~.”
삼선 호프에서 나오자마자 가을이 태준에게 뛰어가 안겼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어? 나 얼마 안 마셨어요.”
가을의 뒤로 도식이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며 비틀거리며 나왔다.
“나 잘 걷는다니까? 봐, 이렇게 잘 걷는데?”
도식이 이리저리 휘청거리며 걷는 모습을 태준이 한숨을 쉬며 바라보았다.
삼선 호프 안에는 게임에 참여했던 서준과 혁진, 지영이 술에 취해 테이블에 엎어져 있었다.
“태준 오빠아아아, 우리 이제 집에 가요.”
술에 취한 가을이 방긋방긋 웃을 때 멀쩡한 스태프 몇 명이 나와 태준에게 넙죽 인사를 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여기는 저희가 처리할 테니까, 감독님 먼저 모시고 가세요.”
“괜찮겠어요?”
“그럼요, 하루 이틀도 아닌데. 능숙하게 처리 가능합니다!”
술을 마시지 않는 몇 명의 스태프가 언제나 회식 뒤처리 담당이었다.
“그럼, 수고해요.”
“오빠아~~.”
연신 안겨 오는 가을을 부축한 태준이 주차장으로 향했다.
태준의 차가 막힘없이 차도를 달렸다.
“와아아, 시원해.”
보조석에 앉은 가을이 술을 깨려는 듯 창문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감기 걸려요.”
“조금만요.”
태준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가을을 바라보았다.
“술 좀 깨고 갈까요?”
“저 다 깼어요~”
가을이 발개진 얼굴로 태준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조금만 마시려고 했는데 게임 하다 보니까요. 기분도 좋고, 사람도 좋고. 그냥 좋아서요.”
“잘했어요.”
가을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얼마 전 가을은, 친할머니인 복순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경로당을 나가 자기 손녀가 드라마 PD라며 자랑하고 다닌다는 얘기를 고모에게 전해 들었다.
집에서는 ‘거기에 네가’를 녹화해 계속 그것만 보는 중이라고 했다.
애정을 받고 자라진 못했지만 그래도 복순이 있어 가을은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받을 수 있었다.
그 점은 부모인 대원과 영숙보다 나았다.
태준과 함께 복순을 찾아갔을 땐 그를 보자마자 연신 고맙다고 우는 바람에 가을은 그런 복순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가을은 모친인 영숙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다.
태준을 만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게 된 후 영숙을 조금 더 이해해 보려는 노력을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영숙은 자신의 전화를 반기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가영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재혼한 남자가 재산 문제로 영숙의 자식인 가을, 가영과 연락을 하는 걸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노력해도 영숙과의 관계는 좁혀지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한 가을은 엄마라는 존재를 완전히 지워 냈다.
부친인 대원 역시 미국으로 간 후엔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끝까지 자신들의 인생만 챙겼고, 가을과 가영을 외면했다.
또다시 상처를 입을까 봐 태준이 걱정을 했지만 가을은 아프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동생, 좋은 친구, 좋은 사람들. 자신의 곁에는 소중한 사람들이 많았으니까.
태준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가을은 더 이상 그런 감정이 두렵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 진짜 진짜 좋다.”
가을이 바람에 머리를 날리며 태준을 돌아보았다.
부드럽게 웃어 보인 태준이 가을의 손을 잡자 과자 냄새가 그의 후각을 자극했다.
“새우 과자 게임 했네.”
“네에~ 도식 감독님이 하자고 졸라서요.”
배시시 웃던 가을이 술에 취해 느리게 입을 열었다.
“오늘도 많이 바빴어요?”
“조금.”
몇 달 전 ‘세양 그룹’ 회장에 취임한 태준은 정신없는 날을 보내는 중이었다.
태준이 빠진 ‘STN’은 전문 경영인을 통해 운영되기 시작했고 ‘세양 홈쇼핑’ 대표 자리 역시 전문 경영인이 맡고 있었다.
찬영은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재산을 한 푼도 받지 못한 채 ‘세양 홈쇼핑’ 물류 팀에서 일하는 중이었다.
문규가 재산을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선언한 후 돈이 얼마나 귀한지 알아야 한다며 찬영을 업무가 가장 많은 팀으로 보낸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은 미연은 정열과 이혼을 하지 않겠다고 버티다가 조금이라도 위자료를 받기 위해 도장을 찍어야 했다.
문규가 이대로 버티면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압력을 넣은 탓이었다.
그렇게 찬영과 미연은 생전 처음 겪는 상황에 매일매일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일선에서 물러난 문규는 권 집사와 함께 그동안 가 보지 못한 국내 여행을 다니는 중이었다.
어느새 산장 빌라에 도착한 태준이 차 문을 열고 나와 보조석 문을 열었다.
“조심해요.”
차에서 내린 가을이 냉큼 태준을 끌어안았다.
“으음, 좋은 냄새.”
“난 새우 과자 냄새만 나는데.”
그 말에 몸을 떼어 내려 하자 태준이 가을을 당겨 안았다.
“농담이에요.”
한참을 안고 있던 태준이 가을을 놓아주었다.
“걸을 수 있겠어요?”
“다 깼다니까요.”
가을이 배시시 웃으며 빌라 현관으로 향하자 태준이 그 옆을 따라와 가을을 부축했다.
천천히 계단을 오를 때마다 켜지던 센서 등이 마지막으로 5층에서 켜졌다.
마주 잡은 가을의 손을 엄지로 쓸어내리던 태준이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들어가서 푹 쉬고, 내일 일찍 502호로 와요.”
내일 하루 휴식을 취하는 가을과 함께 있기 위해 태준은 업무를 몰아서 해 두었다.
태준의 말에 가을이 잠시 대답을 하지 않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오빠…….”
“응?”
“피곤……하세요?”
태준의 목소리가 깊게 내려앉았다.
“아니.”
“그럼…….”
가을이 마주 잡은 손을 보다가 고개를 들어 태준을 바라보았다.
“……들어오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