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화 (83/90)

가을이 오랜만에 의찬의 가게로 향했다.

얼마 전 발리로 포상 휴가를 다녀왔던 가을이 의찬의 선물로 산 컵 세트를 전해 주기 위해서였다.

의찬에게 선물을 전해 주고 저녁에는 태준을 만나 저녁을 함께할 생각이었다.

가을이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바 테이블 안에 있던 의찬이 고개를 돌렸다.

“여~~ 정 감독. 오랜만이야?”

반가워하는 의찬에게 손을 들어 보인 가을이 테이블 위에 쇼핑백을 올려놓았다.

“뭐야?”

“선물.”

입으로 ‘오~~’ 하던 의찬이 빠르게 쇼핑백에서 선물을 꺼내 포장지를 뜯었다.

“이야, 정가을이 역시 넌 내 친구야. 완전 내 취향이잖아.”

의찬이 컵 세트를 황홀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가보로 물려줄 게 또 생겼네.”

피식 웃던 가을이 의찬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살 좀 쪘다?”

“요즘 아주 맛있는 피자집을 발견해서 매일 먹는 중.”

의찬은 한 가지에 꽂히면 이성을 잃는 스타일이었다.

“어디 건데?”

“오메가 피자라고, 내가 나중에 한번 쏠게.”

“어? 그거 서준이가 선전하는 거네.”

“맞아 그거. 하, 그 여드름 성성하던 녀석이 그렇게 꽃돌이가 될 줄 누가 알았냐.”

‘거기에 네가’에 나오는 서준이 가을을 쫓아다녔던 후배라고 하자 의찬은 의술의 힘인 거냐며 믿을 수 없어 했다.

“이번에 찍는 것도 걔가 주인공이지?”

“어.”

‘거기에 네가’를 시리즈로 만들어 달라는 성화가 빗발치자 시즌2 형태로 드라마를 제작하기로 결정이 난 상태였다.

주인공 역에는 동일하게 서준과 보라가 캐스팅되었다.

“역시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해. 그렇게 너 괴롭히던 김 감독이나 최고은이 한 방에 훅 가는 거 봐라.”

의찬이 가을이 좋아하는 무알코올 칵테일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얼마나 고소한지, 내가 요즘 비빔밥에 참기름을 안 넣어.”

“들기름 넣잖아.”

“오~~역시 내 친구.”

가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얼마 전, 김 감독과 4부작을 함께했던 조연출이 김 감독에게 대본으로 얻어맞는 영상이 올라오며 갑질에 관련된 기사가 실렸다.

거기다 스태프들에게 막말을 하는 장면까지 추가로 올라오며 김 감독은 세간의 뭇매를 맞았다.

‘사과는 하지만 난 잘못한 게 없다. 이 바닥이 원래 그렇다’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난 김 감독의 해명 글에 사태는 더 악화되었고 김 감독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졌다.

김 감독이 대표로 있는 ‘은봉 필름’에서 제작하는 영화에도 다른 잡음이 생겨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해 제작이 무산되었다.

최고의 위치에 있었을 땐 그 성격을 참던 사람들이 이번 일로 하나둘 김 감독을 비판하며 몰아세웠다.

그래도 끝까지 잘못을 인정하지 않자 김 감독 주변엔 남아 있는 사람이 없었다.

최고면 다른 건 무시해도 된다던 김 감독의 말로였다.

“이거 색깔 예쁘다.”

“역시 그렇지? 맛은 더 죽여.”

의찬이 얼른 먹어 보라는 듯 눈짓을 하자 가을이 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대었다.

“어때?”

“오~~~좋은데?”

“이번에 새로 개발한 레시피야.”

“이름은?”

“치얼 포 유.”

“치얼 포 유?”

“너도, 가영이도. 좋은 사람 만나는 거 보니까 잘 키운 딸 보내는 아빠 같은 마음이랄까? 새로운 미래에 대한 응원 같은 거랄까.”

얼마 전, 드라마를 끝내고 의찬을 만났을 때 태준과 사귄다는 얘기를 하자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며 언제 얘기하나 싶었다던 의찬이었다.

태준과 가을만 몰랐지, 이미 주변 사람들은 두 사람이 사귀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가을이 오묘한 색의 칵테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도 그렇고 가영이도 그렇고. 의찬이 곁에 있어서 큰 힘이 되었다.

그걸 알기에 남녀 사이에 이성은 존재할 수 없다던 태준은 의찬만큼은 이해해 주었다.

“이건 무알코올 버전이고. 알코올 버전도 있어.”

“그건 다음에.”

“참, 약속 있댔지.”

“넌?”

“나 뭐.”

“여자 안 만나?”

“좋은 여자 생기면 만나야지.”

의찬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이 오빠 걱정하지 말고, 대표랑 알콩달콩 재밌게 잘 놀아.”

“나보다 생일도 늦으면서 오빠는 무슨.”

“예, 누나. 한 잔 더 드릴까요?”

의찬의 말에 가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저녁.

가영과 명석이 작은 카페를 찾았다.

오늘도 역시 태준이 일찍 퇴근을 하라고 지시했고 명석은 주차장에서 어김없이 가영을 만난 상태였다.

명석이 두 번째 데이트를 하자고 연락을 하면 가영은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다가 주로 이런 식으로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가영은 우연히 만난 건 카운트하면 안 된다고 우겨 아직 두 번째 데이트를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의도가 뻔히 보여 오늘 명석은 가영을 데리고 카페를 찾았다.

명석이 무슨 말을 할까 싶어 긴장한 가영이 손만 만지작거리며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언제까지 할 셈이죠?”

“네? ……뭐, 뭘요?”

“퇴근 시간 기다리는 거요.”

“네에?? 무슨 말씀이신지 잘…… 저는 진짜 방송국에 올 일이 있어서…… 그런 건데요.”

가영의 말이 뒤로 갈수록 작아졌다.

다 알고 있다는 듯 빤히 바라보는 명석의 눈을 피해 가영이 고개를 아래로 푹 내렸다.

“정가영 씨.”

“……네.”

“앞으론 이러지 마요.”

명석의 말에 가영의 눈가가 그렁하게 차올랐다.

“이런 식으로 만날 필요 없습니다.”

결국 굵은 눈물을 뚝 흘린 가영이 고개를 들어 명석을 바라보았다.

“……왜요? 이제, 이제 저…… 안 만나 주실 거예요?”

“…….”

“내가 이래서…… 질렸어요? 그래도 아직 두 번은 남았는데…… 그건 훌쩍…… 만나 주면 안 돼요?”

훌쩍이는 가영의 모습을 보던 명석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앞으론, 언제든 전화해요.”

명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가영이 눈물이 맺힌 커다란 눈만 깜빡거렸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우연을 가장할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

여전히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가영을 향해 명석이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나랑 사귀자는 뜻이에요.”

눈을 껌뻑이던 가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네에??????”

가영의 우렁찬 목소리에 카페 안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자 명석이 자주 있는 일인 듯 평온하게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그…… 그러니까 지금 오, 오빠랑 사…… 사,”

“사귀기 싫어요?”

“아뇨!!!!!!”

맹렬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앉는 가영을 보며 명석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자신의 마음을 모르고 헤매던 태준과는 달리, 명석은 금세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귀엽다고 느꼈던 가영이 어느 순간부터 사랑스럽게 보였다.

명석이 망설였던 이유 중 한 가지는 아홉 살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좋다며 이런 식으로 만남을 유지하려는 가영을 보니 진지한 만남을 이어 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그럼 이제 오빠랑 내가…… 연인이…… 된 거죠?”

명석이 고개를 끄덕이자 가영이 또다시 눈물을 뚝 흘렸다.

“왜 울어요.”

“너무 좋아서요. 훌쩍.”

가영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아 냈다.

“걱정하지 마세요, 오늘은 안 번지는 거 발랐어요.”

연신 울면서도 마스카라에 대한 걱정을 얘기하는 가영의 모습에 명석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이제 오빠 옆에…… 앉아도 돼요?”

명석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가영이 냉큼 일어나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두근. 두근. 두근.

가영이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눌러 낼 때 명석이 티슈로 가영의 뺨을 닦아 주었다.

그 탓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가영이 ‘꿀꺽’ 요란한 소리로 침을 넘겼다.

“이…… 이건 그러니까 배가 너무 고파서…… 그래서 그런 거거든요.”

가영은 둘러댄 말이었지만 명석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밥 먹으러 갈까요?”

평소와 달리 부드러워진 명석의 목소리에 가영의 심장이 또다시 뛰었다.

얼마 뒤.

가영과 명석이 자주 가던 일식집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저희 두 명, 어???”

가영이 누군가를 발견한 듯 반가운 얼굴로 큰 목소리를 냈다.

“형…….”

태준과 가을이 앉아 있는 테이블을 향해 ‘형’까지 얘기한 가영이 그대로 명석을 돌아보았다.

“……형제가 어떻게 되세요?”

느닷없는 가영의 질문에 명석이 진지하게 대답을 했다.

“위로 누나 한 분 계십니다.”

“아아, 그렇구나.”

어색한 연기를 하던 가영이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 언니~! 이런 데서 다 보네?”

가영이 빠르게 가을의 앞으로 다가와 어색한 연기를 이어갔다.

“가영아! 여긴 어쩐 일이야?”

가을이 어색한 연기에 동참했다.

“난 밥 먹으러 왔지. 근데 이분은 누구셔?”

“아아, 이분은 방송국 대표셔.”

“안녕하세요! 가을 언니 동생 정가영입니다!”

가영을 따라 명석이 테이블로 다가오자 명석을 올려다본 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명석이 다 아는 것 같은데.”

태준의 말에 가영이 놀라서 명석을 돌아보았다.

명석은 전혀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이 없어 보였다.

“합석해도 되죠?”

잠시 뒤.

태준과 가을, 맞은편으로 명석과 가영이 나란히 앉았다.

“언제 알았어?”

태준의 목소리에 명석이 태연한 모습으로 앞에 놓인 초밥을 집었다.

“대표님이 자꾸 퇴근하라고 할 때부터요.”

“그래?”

“야근을 시키면 시켰지, 빨리 가라고 하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

“그럴 때마다 가영 씨를 만나는데,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않습니까?”

명석의 말에 세 사람이 어색하게 침묵했다.

“그럼 제 동생인 건 어떻게 아셨어요?”

“정 감독님이 예쁘고 착한 동생이 있다고 소개해 주신다고 할 때부터요.”

“…….”

“정가을, 정가영.”

명석이 가을과 가영을 번갈아 바라보며 안경을 슥 올렸다.

“모르는 게 이상하죠.”

명석이 망설인 이유 중 하나는 이것이었다. 가영이 가을의 동생이라는 것.

혹시 그로 인해 서로 불편함이 생길까 봐 잠시 고민을 했던 명석이었다.

마치 탐정같이 명쾌하게 대답하는 명석의 모습을 입을 벌리며 바라보던 가영이 물개 박수를 쳤다.

“와, 와, 역시 우리 명석 오빠. 완전 멋져~~.”

그 모습에 가을이 고개를 저으며 앞에 놓인 초밥을 집자 태준도 초밥 하나를 집으며 명석을 쳐다보았다.

“알면서 왜 말 안 했는데.”

“어디까지 하시나 보려고요.”

“즐긴 건 아니고?”

태준의 말에 명석이 슬쩍 가영을 돌아보다 다시 고개를 돌렸다.

“뭐, 조금?”

그 행동에 태준이 바로 눈치를 챘다.

“둘이 사귀기로 한 거야?”

“네에~~!! 우리 이제 사귀어요!!”

명석이 대답할 새도 없이 빠르게 대답한 가영이 냉큼 명석의 팔짱을 꼈다.

“큼.”

괜히 기침 소리를 낸 명석이 앞에 놓인 초밥을 들어 빠르게 입에 넣었다.

“오늘부터 1일이에요~~.”

“진짜 잘됐다.”

“축하해 처제.”

행복해하는 가영의 모습에 태준과 가을이 눈을 마주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얼마 뒤.

화기애애한 식사 자리가 끝나고 가볍게 술을 마시기로 한 네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앞을 제대로 보지 않던 네다섯 살쯤 된 여자아이가 점원과 부딪혀 넘어지려 하자 태준이 빠르게 아이를 안았다.

저도 모르게 한 행동에 태준은 말할 것도 없이 가을도, 명석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머 감사합니다.”

아이 엄마가 인사를 하며 데려갈 때까지 태준은 아이를 안고 있었다.

“대표님, 괜찮으세요?”

멍하게 서 있던 태준이 가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여자아이를 안고 있던 내내, 아무런 증상이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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