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차장으로 향하던 길에 검사장이 성북동 근처라며 문규의 자택으로 온다고 해 집으로 돌아왔던 두 사람은 찬영이 미연에게 하는 말부터 모든 걸 들었다.
그동안 숨겨 온 미연의 본모습을 확인한 문규의 얼굴에 분노가 서렸다.
“권 집사.”
“예, 회장님.”
“검사장한테 전화해서, 오지 말라고 해.”
문규가 몸을 돌려 방으로 향하자 찬영이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
“하, 할아버지 저는요. 제 일은 해결해 주셔…….”
매섭게 돌아보는 문규의 모습에 흠칫 놀란 찬영이 겁에 질려 다시 소파에 주저앉았다.
노기가 가득한 문규의 얼굴과 다르게 정열의 얼굴엔 허망함이 묻어 있었다.
자신이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이었다.
그런 정열의 모습에 미연이 거칠게 손을 떨었다.
미연의 머릿속엔 정열을 붙잡을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내가 다 설명할게요,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정열이 아무 얘기도 하지 말라는 듯 손으로 미연의 말을 저지했다.
무슨 얘기를 듣는다 한들, 미연과 태준이 나눈 대화가 사실일 것이었다.
지금까지 정열은 애란이 헤어지자고 한 이유가 그저 문규와 여옥의 반대가 힘들어서 그랬다고만 생각했다.
어린 태준이 미연을 멀리한 이유는 그저 제 엄마가 그리워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이렇게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을까.
죽어 가는 애란을 보면서 아무것도 해 줄 수가 없어서 정열은 매일 밤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걸 느껴야 했다.
이해한다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걸 다 알고 있다며 미연은 오히려 자신을 위로했었다.
그렇게 애란을 찾아가 상태를 살피고 태준을 받아들인 미연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느꼈던 정열이었다.
“어떻게…… 사람이 어떻게…….”
정열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혼잣말을 뱉어 냈다.
죽어 가던 애란과, 어린 태준에게 그런 말을 한 것도 모르고 마음을 주진 못해도 고맙고 미안해 남은 생은 미연을 위해 살려고 했었다.
참을 수 없이 치솟던 분노의 마음은 이내 더할 수 없이 차가워졌다.
“여보…… 내 말을…….”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다는 듯 다시 손을 들어 보인 정열이 몸을 돌려 밖으로 향했다.
싸늘한 정열의 눈빛에 모든 게 끝났음을 느낀 미연이 맞잡은 손을 덜덜 떨었다.
미연이 가장 두려운 일은 정열의 곁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단 한 번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봐 주지 않던 정열이 근래 들어 따듯한 눈빛으로 바라봐 줘서 그것만으로 미연은 행복했다.
이제라도 사랑받으면서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에 들떴던 미연이었다.
그 희망이, 스스로 해 온 일 때문에 모두 끝이 났다.
머리가 멍해진 미연이 이내 현실을 깨달았다.
정열과 헤어지면 이제 다시는 이런 호화스러운 생활도,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미연은 정열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하지만 그가 재벌이라는 것 역시 그녀에게 중요한 부분이었다.
태준이 회장이 되더라도 정열이 있고, 찬영이 있으니 자신이 ‘세양 그룹’의 사모님인 건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껏 누려 온 부와 명예, 권력을 한순간에 잃는다고 생각하자 미연의 이성이 날아갔다.
모든 것을 잃게 된 것에 대한 화살이 태준에게 향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미연이 매섭게 태준에게 달려들자 곁에 있던 권 집사가 빠르게 미연의 손을 낚아챘다.
그 모습을 보며 태준이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이제 다 끝났습니다.”
태준을 노려보던 미연이 이내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태준의 말대로 모든 건 끝이 났다.
넋이 나간 미연의 곁에서 찬영이 연신 제 머리를 손으로 쥐어뜯었다.
“나 이제…… 나 이제 어떻게 해. 난, 나는…….”
오랜 세월 자신을 괴롭혀 왔던 찬영과 미연의 마지막을 지켜보던 태준이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성북동을 빠져나왔다.
* * *
늦은 오후.
퇴근을 서두른 태준이 ‘송학 주점’으로 향했다.
얼마 전 방송된 4부작 페스티벌은 예상보다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
세 작품 중 가을이 연출을 맡은 ‘네가 거기에’가 가장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며 큰 화제를 낳았다.
서준의 애절한 연기와 함께 감정을 살려 낸 뛰어난 연출이 돋보인다는 평과 함께 1회 방송이 끝난 후 2회에선 두 배에 가까운 시청률을 보이더니 4회에선 동 시간대 방송 중이던 미니시리즈를 앞질렀다.
드라마계를 이끌 새로운 배우와 연출자의 탄생이라며 매스컴에서도 연일 호평이 이어졌다.
경쟁사였던 ‘BSC’에서 방송했던 김 감독의 4부작과 ‘거기에 네가’의 방송 시간이 겹쳐 모두가 김 감독의 작품에 기대를 걸었지만 결과는 가을이 맡은 작품의 압승이었다.
그걸 보여 주듯 김 감독이 맡은 작품의 1회 시청률은 ‘거기에 네가’를 앞질렀지만 4회에 가서는 현저하게 떨어졌다.
김 감독에게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연출이 오히려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혹평이 쏟아졌다.
Rrrr-
가을의 전화에 태준이 차량용 이어폰을 착용했다.
“여보세요.”
-대표님! 어디쯤 오셨어요?
“거의 다 와 가요.”
-도식 감독님이 대표님 어디쯤인지 확인해 보라고 하도 난리라서요.
가을의 말을 증명하듯 ‘강 대표~ 얼른 와~’ 하는 도식의 목소리와 함께 시끌시끌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한 10분이면 도착할 거예요.”
-네! 아 참, 조금 전에 할아버지께 전화 왔었어요.
“또?”
-드라마 잘 보셨다고요. 언제 대표님이랑 만나서 맛있는 거 사 주신대요.
손녀같이 살가운 가을에게 푹 빠진 문규는 툭하면 맛있는 거 사 주겠다, 옷을 사 주겠다, 해 가며 가을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세한 건 이따 얘기해요. 운전 조심하세요~!
태준이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전화를 끊었다.
정차 신호를 받으며 무심히 창문을 바라본 태준의 눈에 뉴스가 나오는 전광판이 보였다.
찬영은 ‘세양 홈쇼핑’ 공금횡령 및, 불법 도박으로 검찰의 조사를 받았다.
미연은 정열과 이혼 소송을 하며 진성과 함께 검찰 조사를 받았다.
자신의 집안에 절대 이혼은 없다던 문규는 미연에게 속아 온 세월을 한탄하며 이혼에 앞장섰다.
정열은 합의 이혼을 바랐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며 미연이 버티는 중이었다.
숨겨 온 미연의 본성을 알게 된 문규와 정열은 모든 걸 알고 견뎌 온 태준에게 미안해하면서도 왜 진작 말하지 않았냐고 책망했다.
확실한 증거 없이 얘기했다면 믿기 힘들었을 거라고, 미연 역시 오히려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라고.
철저히 본 모습을 숨겨 온 미연에게 대응하기 위해선 후계를 물려받는 일뿐이었다고 태준은 얘기했다.
그 과정에 불법을 저지른 두 사람의 행동을 제대로 밝혀야 했다고 하자 두 사람은 이해를 하면서도 이렇게 된 상황을 안타까워했다.
특히 정열은 충격이 심해 한참이나 병원을 오갔다.
미연과 찬영을 조사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었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세양 그룹’은 여전히 문규가 맡고 있었다.
세간을 들썩거리는 사건을 겪는 와중에 회장이 바뀌는 혼란까지 줄 수는 없었다.
그룹의 안정을 위해서 당분간 문규가 회장 자리에 있는 게 낫다는 판단이었다.
그렇게 태준의 후계 문제는 당분간 뒤로 미뤄지게 되었다.
얼마 뒤.
주차장에 차를 세운 태준이 송학 주점으로 향했다.
3월로 접어들어 낮에는 포근했지만 저녁은 아직까지 제법 쌀쌀했다.
“어, 대표님. 오랜만이네요.”
흰색 티셔츠에 흰 모자, 짙은 네이비색 카디건을 걸친 서준이 매니저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다 태준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지금 가는 겁니까?”
“예. 스케줄이 있어서요.”
드라마 속에서 서준이 노래를 하는 장면은 며칠이나 화제성 1위에 오르며 은서준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켰다.
뛰어난 연기력과 함께 외모, 노래 실력 등으로 인기를 누리며 서준은 여느 미니시리즈 주인공 못지않게 큰 인기를 누리는 중이었다.
가을에 대한 마음을 접기는커녕 몇 달 동안 가을과 붙어 있어 속만 끓여야 했던 서준은 일부러 많은 스케줄을 잡고 있었다.
몸이 바빠지면 마음이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였다.
노력을 하고 있는데도 가을에 대한 마음을 접는 게 마음대로 되지 않아 태준이 올 시간에 맞춰 일부러 자리를 나왔다.
자신에겐 전혀 틈이 없던 가을이 태준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게 마음이 쓰려 더 이상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밴으로 향하던 서준이 걸음을 멈추고 태준을 돌아보았다.
“참, 일러둘 게 있는데.”
서준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선배가 대표님 때문에 힘들어하면 바로 공격할 거니까, 그렇게 아시라고요.”
그 말에 태준이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그럴 일 없을 텐데.”
“와, 짜증 나.”
서준이 목덜미를 누르며 피식 웃어 보였다.
“그럼 다음에 봬요. 갑니다.”
서준이 밴으로 향하자 태준도 서둘러 송학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태준이 안으로 들어서자 혁진과 함께 수저를 들고 랩을 하고 있던 가을이 빠르게 태준에게 다가왔다.
“오셨어요!”
가을의 말과 동시에 안에 있던 스태프들이 저마다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이야, 역시 강 대표 오니까 안이 환~~~해지네. 민 감독 생각은 어때?”
도식이 조명감독을 돌아보자 조명감독이 엄지를 들어 보였다.
여전한 사람들의 모습에 미소 지으며 태준이 자연스럽게 가을의 옆자리로 향하자 지영이 빠르게 자신의 잔과 젓가락을 들고 자리를 이동했다.
그 과정에서 지영은 태준과 몸이 닿지 않게 조심했다.
태준이 가을을 제외한 여자들에게 유독 결벽증이 심하다고 둘러대 현장에서나 회식에서나 여자 스태프들은 태준을 조심스러워하며 가까이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며 얼큰하게 술이 올라가던 가을이 태준의 귀에 뭔가 속닥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여러분!”
가을의 목소리에 스태프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제가 오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결연한 표정을 한 가을을 향해 도식과 혁진, 지영이 각자의 말을 뱉어 냈다.
“오 뭐야, 뭔데? 좋은 일이야?”
“누나 어디 스카우트 되셨어요?”
“언니~ 나도 불러 주는 거 알죠?”
가을이 입술을 달싹이며 ‘큼큼’ 소리를 내자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어깨에 가볍게 팔을 두르며 목소리를 냈다.
“저희, 사귀고 있습니다.”
태준의 말이 끝나자 가을이 넙죽 고개를 숙였다.
“속여서 죄송해요! 그게 촬영에 집중을 하고 싶…….”
예상과 달리 평온한 스태프들의 반응에 가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을 때 도식이 젓가락으로 앞에 놓인 파전을 집어 간장에 푹 찍었다.
“난 또 뭐라고. 두 사람 사귀는 거, 내 카메라도 알아.”
도식에 이어 지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알고 있어요!”
“사내 연애~ 비밀 연애~ 우리는 아는데, 두 사람만 비밀. 카메라도 알고, 조명도 알고, 지미집도 알고, 모두가 아는데 두 사람만 비밀~ 모르는 척하는 건 이제 한계~”
혁진의 랩에 이어 여기저기서 다들 알고 있었다는 분위기를 풍기자 가을이 머쓱해서 머리를 긁적였다.
“알고 계셨어요?”
“그걸 어떻게 모르나. 강 대표만 오면 눈이 반짝반짝하는데.”
“맞아요. 두 분 눈에서 꿀이 떨어지는데 부러워서 혼났어요.”
“늦었지만 축하해, 강 대표.”
태준이 미소를 보이며 도식을 향해 슬며시 고개 인사를 했다.
“내 공이 컸던 거 알지?”
도식이 워크숍에서 서준을 마크한 공을 얘기하듯 목에 힘을 주었다.
“잘 압니다.”
“언제 한번 거하게 쏘라고.”
태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가을을 바라보자 여기저기서 ‘오오오~’, ‘눈빛 봐’, ‘저러는데 어떻게 몰라,’ 등등 저마다 한 소리씩 뱉어 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어쩐지 부끄러움이 몰려온 가을이 목덜미를 쓸며 밖으로 향했다.
2층에 있는 화장실에 다녀온 가을이 막 건물 입구에서 나올 때였다.
몇 명의 사람들과 근처 호프집으로 가던 김 감독과 시선이 마주치자 가을이 인사를 건넸다.
“먼저들 가 있어.”
일행을 뒤로하고 김 감독이 가을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뒤풀이 하는 건가?”
“네.”
“시청률 잘 나와서 기분이 좋겠어.”
“감독님 드라마도 잘 봤습니다.”
그저 인사일 뿐이었는데 가을에게 졌다는 생각에 심사가 꼬인 김 감독이 삐딱하게 받아들였다.
“한 번 잘했다고 우쭐하긴.”
자신이 밀던 후배를 제치고 가을이 연출을 맡은 순간부터 김 감독은 내내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데뷔 작품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으며 명감독으로 추앙을 받은 김 감독의 자존심은 견고한 탑과도 같았다.
인성이니 뭐니 하면서 사람들이 욕을 해도 이 분야에서 정상을 찍었으니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다들 그런 자신의 밑에서 버티지 못할 때 뭐든 척척 알아서 해내고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는 가을을 좀 더 옆에 두고 일을 하고 싶었다.
가을을 아예 밀어줄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이 밀어준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추천으로 연출 자리를 맡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좀 더 곁에 두고 부리다가 입봉의 기회를 주고 생색을 내고 싶었던 계획이 틀어져 내내 부아가 끓었다.
그래서 주제를 알게 하려고 일부러 경쟁 방송사에 가서 굳이 같은 시간대로 4부작을 맡았는데.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다.
자신이 가을 때문에 ‘STN’에서 쫓겨났다는 소문이 도는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특별히 해명하지 않았다.
그 문제로 가을이 맡은 작품이 캐스팅 난항을 겪는다는 것도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을에게 자신과의 차이가 얼마나 큰지 느끼게 해 주려던 계획은 결과가 오픈되고 실행할 수 없게 되었다.
높은 시청률이야 작가, 연출가, 배우의 합으로 이뤄진 부분이라고 해도, 연출 부분에서 가을이 맡은 작품이 더 호평을 받아 냈다.
“이번에 잘했다고 다음에도 그러리란 법 없는 거, 잘 알지?”
“네, 잘 압니다.”
“시청률이 높았다고 네가 나한테 이겼다고 생각하면,”
“감독님은 아직도…….”
가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작품으로 봐 주시질 않네요.”
“뭐……?”
“전 이번에 감독님이 하신 드라마 작품으로 봤습니다. 아직도 배울 게 많고, 감독님에 비해 한참이나 부족하다는 거 잘 알아요.”
“…….”
“이번 작품 하나로만 감독님의 실력을 평가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요. 그만큼, 감독님 실력은 최고이시니까요.”
차가운 바람에 휘날리는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가을이 진심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연출가는 존경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현장을 지휘하고, 스태프들을 통솔하고, 배우나 작가와 끊임없이 소통하고. 그 많은 사람을 한배에 태워 끌고 가야 하는 사람이니까요.”
가을의 말을 듣고 있던 김 감독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난 그럴 자격이 안 된다는 건가?”
가을과 김 감독의 눈빛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맞닿았다.
“전, 감독님이 존경받는 분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존경하지 않는다는 뜻을 돌려 얘기한 가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가을이 몸을 돌려 ‘송학 주점’으로 향했다.
가게 문을 열자 스태프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가을이 안으로 들어가자 그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김 감독이 문이 닫힌 송학 주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스태프들의 밝은 웃음소리였다.
지금 이 순간 김 감독은 작품으로도, 연출가로서도 완벽하게 가을에게 패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