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영은 이미 넋이 나가 전화를 받을 생각조차 못 했고, 미연은 눈치를 보며 수신 거부를 했다.
위이이잉-
미연이 수신 거부를 하자마자 또다시 진동이 울렸다.
“받아 봐라.”
문규의 목소리에 미연이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작은 목소리를 냈다.
“내가 나중에 전화할게.”
찬영의 일을 미연에게 알리는 찬영의 비서 목소리가 수화음을 타고 흘러나왔다.
-사모님, 큰일 났어요.
“무슨 일인지 몰라도 나중에,”
-지금 검찰에서 나온 사람들이 우르르 대표님 방으로 들어갔어요.
“뭐야……??”
미연이 놀라서 얼굴이 하얗게 질릴 때 권 집사가 집 안으로 들어왔다.
“회장님.”
“무슨 일이야.”
“지금 ‘세양 홈쇼핑’ 대표실에 검찰이 왔답니다.”
“뭐??”
“아무래도 공금횡령 때문에 수사가 들어간 것 같습니다.”
얼굴이 하얗다 못해 얼이 나간 찬영은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대체 어디서 새어 나간 게야!”
“감사팀 김우석이라는 직원이 내부 고발을 했답니다.”
김우석은 ‘세양 그룹’ 감사팀 팀장으로 찬영이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공금을 횡령할 수 있게 알려 준 사람이었다.
그 후 찬영의 비자금을 관리하며 돈독한 사이를 유지하다 점점 그에게 자신의 몫을 더 많이 요구해 왔다.
찬영의 문제를 조사하던 태준이 김우석의 존재를 알고 그가 빠져나갈 수 없는 협박으로 내부 고발을 하게 만들었다.
뛰어난 연기력의 소유자답게 태준은 그럴 줄 몰랐다는 듯 걱정이 묻어난 표정 연기를 선보이는 중이었다.
“할, 할아버지 잘못했어요. 저…… 저 앞으로 절대 안 그럴게요. 저 좀 살려 주세요.”
기본적으로 멘탈이 약한 찬영은 이 상황을 버티기 어려웠다.
“쯧쯧쯧-.”
문규가 관자놀이를 깊게 누르며 인상을 썼다.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검찰이 움직인 일에 손을 쓰긴 늦은 일이었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문규가 휴대폰 목록에서 ‘이도일 검사장’을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한참이나 신호만 갈 뿐 상대가 전화를 받지 않자 직접 가는 게 낫다고 판단한 문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검으로 가지.”
“예.”
권 집사와 함께 문규가 현관으로 향하자 정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혹시라도 문규가 흥분할까 싶어 함께 대검으로 갈 생각이었다.
문규와 정열이 현관을 빠져나가자 거실엔 태준, 미연, 찬영만 남았다.
오늘 문규가 부른 게 찬영의 일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지 이 자리에서 후계를 발표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태준이 넋이 나간 찬영과 생각에 잠긴 미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연은 찬영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태준의 눈치가 보여 말을 참고 있는 중이었다.
-디링
태준이 명석에게 온 메시지를 확인했다.
[강찬영과 관련된 기사, 내일 오전 중에 나가게 조치했습니다.]
문규가 검사장을 만나 사건을 은폐하거나 축소할 것을 예상해 태준은 기사를 흘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생했다.]
[이진성 의원 일은 곧 기사 나갈 겁니다.]
[응.]
미연의 오빠인 진성에게 흘러간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 누구에게 받은 건지 이미 모든 증거와 조사를 끝낸 두 사람이었다.
넋이 나가 있는 찬영의 모습을 표정 없이 바라보던 태준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너지?”
찬영의 목소리에 태준이 시선을 내렸다.
“네가 할아버지한테도 이르고, 검찰에도 찌른 거 다 알아.”
“내가 왜?”
찬영이 죽일 듯 태준을 노려보았다.
“날 끌어내리고 싶으니까. 내가 걸리적거리니까!”
“아니.”
“…….”
“난 널, 한 번도 경쟁자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찬영이 모멸감에 손을 움켜쥐었다.
“……다 너 때문이야. 이렇게 된 건. 다 너 때문이야, 강태준.”
찬영이 짓씹는 목소리를 내며 태준을 매섭게 올려다보았다.
“착각하나 본데.”
핏줄이 터져 눈가가 과하게 붉어진 찬영을 내려다보며 태준이 싸늘한 목소리를 냈다.
“네가 이렇게 된 건 내 탓이 아니라, 네가 한 행동 때문이야.”
태준과 찬영의 눈빛이 매섭게 맞부딪쳤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하던 미연이 일단 찬영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엄마만 믿어. 너 검찰에 가게 엄마가 그냥 두지 않아.”
위이잉- 위이이잉-
그사이 찬영의 슈트 재킷에서 연신 진동음이 울렸다.
맞잡은 주먹을 파르르 떨던 찬영이 비명을 질렀다.
“으아아아악!”
찬영이 얼굴을 감싼 채 악을 지르자 미연이 놀라 찬영의 팔을 잡았다.
“찬영아!”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찬영이 미연의 팔을 매섭게 쳐 내며 원망에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뭐?”
“그놈의 태준! 태준! 태준!”
“…….”
“태준이보다 잘해야 해! 태준이를 이겨야 해! 태준이보다 뭐든 해내야 해!!! 태준이한테 지면 안 돼!!!!”
고함을 지르던 찬영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내뱉었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엄마가 이렇게 낳아 놓고 어떻게 저놈을 이기란 말이야!!”
“강찬영, 진정하고 엄마 말,”
“이게 다 엄마 집착 때문이잖아.”
이미 정신이 나간 찬영은 스스로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였다.
“엄마가 애란인가 뭔가 하는 그 여자한테 집착해서 그런 거잖아!”
찬영의 입에서 ‘애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태준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얘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럴수록 정신을 똑바로,”
“나 다 알아요, 엄마.”
“……뭐?”
찬영이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하며 미연을 내려다보았다.
“아버지가 그 여자랑 헤어지게 만든 거, 다 엄마 짓이잖아.”
미연이 말릴 새도 없이 찬영이 말을 이었다.
“그 여자한테 아버지랑 헤어지라고 협박하고 괴롭히고, 행실 나쁜 여자로 만들어서 할아버지한테 거짓말하고.”
“강찬영! 너 조용히 안 해?”
미연이 태준을 의식해 찬영의 입을 막아 보려 했지만 찬영은 제어되지 않았다.
애란이 정열과 헤어지게 된 이유가 미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된 태준의 주먹에 힘이 실렸다.
“저 말이, 사실입니까?”
서늘한 태준의 목소리에 미연이 애써 아무렇지 않게 태준을 돌아보았다.
“찬영이 얘가 잘못 알고 있는 거야.”
“…….”
“방해한 건 네 엄마야. 정열 씨 좋아한 건 내가 먼저니까. 애초에 네 엄마는 이쪽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었고.”
찬영이 모든 사실을 밝혔는데도 미연은 고상함을 잃지 않았다.
“어찌 됐든 너한텐 손해 볼 게 없잖니. 이렇게 ‘세양 가’ 손자가 돼서 회사를 차지하게 됐으니 말이야.”
순간적으로 지은 비틀린 미소를 재빨리 되돌리며 미연이 우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는 제 본색을 쉽게 드러내지 않았다.
위이이잉-
휴대폰 진동 소리에 발신자를 확인한 미연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오빠, 내가 지금,”
-미연아, 큰일 났다.
슬쩍 태준의 눈치를 본 미연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무슨 일인데.”
-이혜선이랑 있었던 일 기사로 터졌다.
“뭐????”
이혜선은 진성이 2년이나 데리고 있던 수행비서이자 내연녀였다.
내년 선거를 앞두고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자 평소 집착이 심했던 혜선이 돈을 요구해 왔다.
성실한 이미지로 높은 지지를 받던 진성이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사회적으로 매장이 될 건 뻔한 일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혜선이 몇십 억이라는 거액을 요구하자 진성은 관계를 다시 이어 가려 했다.
하지만 이미 마음이 변한 혜선은 돈을 주지 않으면 이 사실을 공개한다고 협박했다.
당장 그런 큰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 진성이 미연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가족 일이라면 끔찍한 그녀로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가지고 있는 현금을 쓰면 혹시 문규나 정열이 알게 될까 봐 미연은 미술품을 구매하고 판매하는 과정을 조작해 현금을 만든 후 진성에게 전달했다.
혹시 추적이 될까 싶어 대포통장으로 건넨 미연이었다.
진성과 혜선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다면, 자신이 연관돼 있다는 사실 역시 밝혀질 게 뻔했다.
“대체 어쩌다! 그 여자가 제보한 거야?”
-아니. 걔는 절대 아니라는데. 익명으로 제보가 된 모양이야.
통화를 하던 미연이 태준과 눈이 마주쳤다.
“일단 끊어 봐.”
고상함을 유지하던 조금 전과 달리 미연이 표독스러운 제 표정을 드러내며 태준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꾸민 짓이야?”
그 모습이 찬영과 너무도 닮아 있어 태준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맞구나?”
긴장감이 어린 미연과 달리 태준은 여유 있는 모습으로 팔짱을 꼈다.
“두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닮았나 싶네.”
“……”
“그 어머니에, 그 아들. 같달까.”
태준의 도발에 이성을 잃은 미연이 온전히 제 모습을 보였다.
“그래, 네 엄마랑 똑같은 그 눈빛.”
미연의 입술에 그동안 보지 못했던 사악한 미소가 걸렸다.
“사람을 우습게 보는 눈빛이 아주 마음에 안 들었어.”
“…….”
“주제도 모르고.”
태준이 제 모습을 보이는 미연을 향해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주제?”
“가진 것도 없으면서 넘볼 사람을 넘봐야지. 네 엄마가 그렇게 욕심이 많고 독하니까 너도 그런 거야. 네 말대로 엄마나, 아들이나. 똑같은 건 너희 모자야.”
“욕심이 많은 건, 당신 얘기 아닙니까.”
“하! 내가 조용히 숨어 살라고 했는데, 결국 그이한테 연락한 거 보면 돈 욕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니?”
태준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그래서, 사경을 헤매는 내 어머니한테.”
태준의 눈에 살기가 맴돌았다.
“차라리 그냥 죽으라는 얘길 했습니까?”
“어차피 죽을 거였으니까!!”
“…….”
“내가 받아 주지 않았으면 넌 절대 ‘세양 가’에 들어오지 못했어! 피도 안 섞인 그 여자의 자식을 내가 품고 키워 준 공도 모르고.”
태준이 비틀린 표정을 지었다.
“고작 10살이었던 나한테, 어머니와 같이 죽으라고 하던 당신이.”
움켜쥔 손에 핏기가 사라진 태준이 음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슨 공이 있다는 거지?”
당장이라도 미연의 목을 조를 듯 태준이 다가서자 미연이 흠칫하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가, 강찬영.”
“…….”
살의가 묻어나는 태준의 눈빛에 찬영의 도움을 받으려 불렀지만 그는 소파에 앉아 불안하게 손톱만 물어뜯고 있었다.
“강찬영!!”
“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던 찬영이 뭔가를 보고 놀라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에 뭔가 싶어 같은 쪽으로 시선을 돌린 미연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여, 여보…….”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정열과 문규가 현관으로 이어진 거실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