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9화 (79/90)

며칠 뒤, 국과수에서 발견된 유골이 박선호가 맞다는 검사 결과가 나왔다.

10년이나 지나 DNA 검사가 쉽지 않아 검사 결과가 나오는 데까지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가을은 가영과 의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전했다.

그 얘기를 들은 가영은 밤새 가을을 안고 울었고, 의찬은 묵묵히 얘기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여 주었다.

선호의 사건은 ‘10년 전 실종되었던 경찰대생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라는 헤드라인을 달고 보도되었다.

비록 가해자를 처벌하진 못하더라도 늦었지만 자신을 살리고 죽은 선호를 위해서 사건의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태준의 뜻을 따른 것이었다.

피의자가 사망하면 공소권이 없을 뿐만 아니라, 검찰 역시 불기소 처분을 내린 후 수사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태준의 사건과 관련돼 뇌물을 건넨 것 역시 10년이 지나 공소시효가 끝난 상태였다.

보험회사의 기록을 바꾼 것 역시 공소시효가 지나 있었다.

이 일이 공개된다면 법적인 부분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비난 탓에 회사에 영향이 갈 수 있었지만 문규는 태준의 뜻을 따랐다.

파장이 크더라도 책임질 부분은 책임지고 끔찍했던 사건을 세상에 알려 그 과정에서 희생된 선호의 존재를 밝히는 게 맞는 일이었다.

그렇게 이 사건의 피해자이자 목격자인 태준의 진술로 혜경과 정기가 저지른 범죄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로 인해 세간은 발칵 뒤집혔다.

혈연이 없던 정기에 비해 혜경의 가족들은 고인을 모독했다며 소송을 하겠다는 뜻을 비쳤지만, 당시 사진과 CCTV의 존재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경찰에게 인도받은 선호의 유골은 화장을 하고,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납골당 VIP실에 안치되었다.

모든 과정을 함께한 박 형사가 돌아가고 납골당엔 태준과 가을만 남았다.

절차대로라면 유족에게 인도를 하고 수습을 해야 했지만 선호의 부친과 모친은 가을에게 알아서 하라는 뜻을 비쳤다.

혹시 나중에라도 다른 말을 할까 싶어 가을은 태준이 시키는 대로 확실히 문서로 작성해 두었다.

그렇게 가을은 남보다 못한 선호의 부모를 대신해 유골을 수습했다.

가을이 환하게 웃는 20살의 선호 사진과 그동안 선호가 받아 왔던 용감한 시민 감사패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어쩌면 선호 오빠가…….”

슬며시 태준을 올려다본 가을이 다시 선호의 사진을 보며 말을 이었다.

“대표님을 보내 준 게 아닌가 싶어요.”

‘가을아, 네가 만날 남자는 오빠가 골라 줄게. 알았지?’

생각해 보면 그랬다.

선호를 향해 제발 나타나라고 간절히 바라다 쓰러졌던 날.

흐릿한 가을의 눈앞에 나타났던 건 태준이었다.

모든 일정이 꼬였던 태준이 그 시간에 가을을 발견한 것도.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이 가을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것도.

자신의 곁을 지켜 줄 태준을 보내 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선호가 이어 준 인연에 운명처럼 사랑에 빠진 거라고.

두 사람은 그렇게 생각했다.

“정말 끝까지 동생 바보라니까.”

가을의 말에 태준이 사진 속 선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을이가 기다릴 거라고 했어요.”

“…….”

“잔소리가 심한 동생이라고. 박선호가 그러더라고요.”

태준의 말에 눈가가 붉어진 가을이 이내 웃어 보였다.

이제 선호를 생각하며 눈물 흘리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가을이었다.

좋은 추억만 생각하며 더 많이 웃고 행복해하는 게 선호가 바라는 일이라고 믿었다.

“잔소리는 자기가 더 많이 했으면서.”

가을이 선호의 사진을 보며 가볍게 눈을 흘기자 그 모습을 보며 태준이 연하게 미소 지었다.

가을이 선호의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마워. 소원 들어줘서.”

선호에게 소원을 빌었던 날, 가을은 선호가 태준의 꿈에 나왔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 얘기를 들은 가을은 선호가 소원을 들어주러 태준의 꿈에 나왔다고 생각했다.

가을과 선호를 번갈아 보던 태준이 자신의 오른손가락에 낀 반지를 보았다.

평생 지켜 주겠다고 가을에게 약속했던 선호의 경찰 반지였다.

태준이 경찰 반지를 낀 손으로 가을의 손을 꽉 잡았다.

가을에게 아빠이고 오빠였던 선호의 마음에, 가을을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얹어 그렇게 평생 그녀의 곁을 지켜 주겠노라고.

태준은 선호에게 약속했다.

* * *

‘세양 그룹’ 회장실 안.

아침 일찍 선호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에 다녀온 문규와 정열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선호를 태준의 사건을 덮는 데 이용했던 문규는 선호를 위해 해 줄 게 없는지 고심했다.

VIP실에 안치한 것 말고 해 줄 게 없어 선호의 가족에게 어떤 보상이라도 해 주려던 문규는 태준이 전한 선호의 가족 얘기에 그 뜻을 버렸다.

세상에 그런 부모가 다 있냐며 한참이나 분개하던 문규가 두 사람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성화를 부리자 태준은 한참이나 문규를 말려야 했다.

‘삐-’

-회장님, 강태준 대표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잠시 뒤 태준과 가을이 안으로 들어왔다.

태준과 함께 회장실로 오라고 했다는 말에 최대한 단정한 옷으로 갖춰 입고 나온 가을이었다.

나란히 앉아 있는 문규와 정열의 시선이 자신에게 몰리자 가을이 바짝 긴장했다.

얼마 뒤, 테이블에 네 개의 찻잔이 놓였다.

이미 태준은 문규와 정열에게 가을과 사귀고 있다는 얘기를 전한 상태였다.

정열은 벌써부터 며느리밖에 모르는 시아버지 같은 눈빛으로 가을을 바라보았다.

“바쁜데 괜히 시간 낸 건 아닌가 모르겠네.”

“아닙니다.”

“우리 태준이랑 만나 줘서 고마워요.”

부드러운 정열의 미소에 가을이 따라 웃어 보였다.

선호의 일로 문규와 정열은 가을에게 몇 번이나 고마운 마음을 내비쳤다.

가을을 부른 것도 그 얘기를 전하려 한 것이었다.

태준과 가을의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문규가 입을 열었다.

“태준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더니, 왜 마음이 변한 게야?”

“아…… 저 그러니까 처음엔 그랬는데 대표님이 워낙 잘해 주시기도 하고 또…… 자상하셔서요.”

“그럼, 그럼. 우리 태준이가 날 닮아서 아주 자상하지.”

문규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린 가을 양이라면 언제든 환영이니까 태준이랑 다투지 말고 이왕이면 결혼까지 해 줬으면 좋겠는데.”

“할아버지.”

태준의 목소리에 문규가 손사래 쳤다.

“안다, 알아. 내가 마음이 급해서 그런 게야. 늙은이 하루가 어디 니들이랑 같은 줄 알아. 안 그러냐.”

문규가 지원사격을 요청하듯 정열을 돌아보았다.

“연애랑 결혼은 다르니까, 연애 실컷 하고 결혼해도 늦지 않아.”

바람과 달리 정열이 다른 말을 뱉자 문규가 가늘게 눈을 떴다.

“아버지 건강하시잖아요.”

“쯧쯧- 늙은이 건강은 자신하는 게 아니라니까.”

“이번에 건강검진에서,”

“큼, 어쨌든 내 뜻은 그러니 그렇게 알도록 해.”

문규가 빠르게 정열의 입을 막았다.

이번 정기검진에서 나이에 맞지 않는 건강을 자랑한 문규였다.

그 모습에 태준과 가을이 슬며시 마주 보며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 후로도 결혼 계획과 자녀계획까지 끝없는 질문과 요구를 하던 문규가 회의 시간을 알리는 권 집사의 등장에 두 사람을 보내 주었다.

‘탈칵.’

가을을 보조석에 태우고 문을 닫은 태준이 운전석에 올랐다.

“대표님이 아버님을 많이 닮으셨어요.”

“음?”

“눈빛이 엄청 그윽하시더라고요.”

태준이 다정한 미소를 지었다.

“가을 씨가 마음에 들어서 그런 거예요.”

“그, 그런가…….”

“나도 가을 씨가 좋아서 그런 거고.”

그 말에 가을이 쑥스러운 듯 목덜미를 누르며 웃어 보였다.

태준이 거치대 위에 올려진 곰 인형을 바라보았다.

곰 인형을 세울 수 있게 특별히 제작해 만든 거치대였다.

“곰 인형, 몇 개 더 필요한데.”

“왜요??”

“집에도 두고, 회사에도 두고, 곳곳에 두고 가을 씨 목소리 들으려고요.”

“……그냥 전화하면 되는데.”

“촬영 때문에 통화 못 하면 이걸로 들어야 하니까. 응? 몇 개만.”

태준이 떼를 쓰듯 쳐다보자 가을이 좋으면서도 괜히 퉁퉁한 목소리를 냈다.

“좀 참으면 되지…….”

“못 참아요.”

태준이 비스듬히 몸을 돌려 가을의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듣고 있어도 계속 듣고 싶으니까.”

사랑이 담긴 눈빛으로 그윽하게 바라보는 태준의 모습에 가을이 살며시 입술을 떼어 냈다.

“……사랑해요.”

“…….”

사랑한다는 말은 곰 인형에서 듣던 태준의 눈동자가 커다래졌다.

가을이 쑥스러움을 뒤로하고 한 번 더 고백하듯 태준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사랑해요…….”

그 말에 태준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가을의 뺨을 쓸어내렸다.

“나도 사랑해요.”

지그시 가을을 바라보던 태준이 고개를 돌리며 가을에게 다가왔다.

입술과 입술이 맞닿고 서로를 갈망하는 키스가 이어졌다.

한참이나 가을의 혀를 놓아주지 않던 태준이 입술을 뗐다.

이내 가을의 턱선을 따라 입을 맞추며 올라가던 태준이 다시 목선을 타고 입을 맞추며 내려왔다.

“으응…….”

태준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저릿한 열기가 퍼져 가을이 얕게 신음을 뱉어 냈다.

가을의 목에서 입술을 지분거리던 태준이 다시 천천히 입을 맞추며 올라가 가을의 입술에서 멈췄다.

“오늘 한남동으로 같이 가요.”

입술에 태준의 더운 숨결이 닿자 가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데리러 갈게요.”

“……네.”

대답을 확인한 태준이 또다시 가을의 입술을 덮쳤다.

* * *

‘STN’ 비서실 안.

‘삐-’

태준의 호출에 명석이 인터폰을 눌렀다.

“예, 대표님.”

-잠깐 들어와.

자리에서 일어난 명석이 빠르게 대표실 문을 열었다.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퇴근해.”

“……예?”

시간을 잘못 알고 있나 싶어 명석이 대표실 벽에 걸린 시계를 쳐다보았다.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오늘은 일찍 들어가.”

또다시 밑도 끝도 없이 퇴근하라는 태준의 말에 명석이 뭔가를 생각하다 입을 열었다.

“왜요?”

“요즘 야근하느라 힘들었잖아.”

“하루 이틀 일인가요.”

“……아무튼 퇴근해. 당장.”

어딘가 석연치 않았지만 명석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 대표실 문을 닫았다.

명석이 나간 걸 확인하자 태준이 가영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명석이 지금 퇴근.]

조금 전 명석이를 퇴근시켜 달라는 가영의 비밀 지령을 받은 태준이었다.

지난번엔 할 일은 해야 한다며 명석이 야근까지 하고 퇴근하는 바람에 가영의 지령은 이뤄지지 않았다.

거기다 근래 선호의 일 뿐만이 아니라 태준이 하지 못했던 일들을 대신 처리하느라 매일같이 야근에 주말도 없이 일만 했던 명석이었다.

디링-

[굿! 형부 감사해요 ♡]

가영의 메시지에 피식 웃은 태준이 이내 서류를 넘겼다.

매사 진지하고, 선비 같은 명석에게 어디로 튈지 모르는 가영이가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가을과 둘이 만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명석이 혼자 식사를 하는 게 신경 쓰였던 태준은 그가 가영을 만난다면 마음이 한결 놓일 것 같았다.

[띵- 지하 3층입니다.]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만을 기다리며 기둥 뒤에 숨어 있던 가영이 그 소리에 바짝 긴장했다.

태준을 통해 명석이 차를 세워 둔 위치를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명석이 안에서 나오자 가영이 괜히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앞으로 나왔다.

“어?? 명석 오빠?”

너무 긴장한 탓에 뒤에 목소리가 음 이탈을 했지만 가영은 당황하지 않고 빠르게 명석에게 다가갔다.

“와아. 이런 데서 다 보고. 신기하네요?”

명석의 직장이니 충분히 만날 수 있는 일임에도 가영은 마치 외부에서 만난 것처럼 오버하며 반가워했다.

방실방실 웃고 있는 가영을 보던 명석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차 가져왔어요?”

“네? 아뇨. 여기까지 잘못 내려와서 이제 막 올라가려던 참이에요.”

“……3층까지?”

“네!”

어딘가 심하게 수상했지만 명석이 모른 척 넘어갔다.

“그럼 볼일 보고 가요.”

“볼일 다 봤어요!!! 저 지금 막 1층으로 나가서 집에 가려고 했거든요. 오빠는 퇴근하시는 거예요?”

가영이 연습이라도 한 듯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대답했다.

“예. 퇴근했습니다.”

“잘됐다! 그럼 어디 가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을래요?”

“두 번째 데이트하자는 소리죠?”

“아뇨!!!!!”

가영이 강하게 부정했다.

“이건 우연히 만난 거잖아요. 이걸 카운트하면 안 되죠! 카운트는 서로 약속을 잡고 만나는 거죠. 오늘 같은 건 그냥 지극히 우연일 뿐이잖아요?”

가영의 목적은 이것이었다.

카운트를 세지 않으면서 자연스럽게 명석을 만나 시간을 갖는 것.

그 속셈을 모르지 않았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명석은 모른 척 넘어갔다.

“그러죠, 그럼.”

가영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가영이 냉큼 명석의 옆에 다가와 섰다.

“전에 먹은 초밥?”

“가죠.”

명석이 걸음을 옮기자 가영이 따라 걸으며 슬쩍 눈치를 살폈다.

“오빠…….”

“예.”

“소, 손잡아도 돼요……?”

그 말에 명석이 우뚝 걸음을 멈추고 가영을 돌아보았다.

“여긴 무서운 게 없는데.”

가영이 눈을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차가 많아서…… 어디서 튀어나올지 모르고 또 갑자기 나오면 놀라기도 하고 또…….”

가영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명석이 잡으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떨리는 표정을 감추지 못한 가영이 냉큼 명석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손을 잡은 채 두 사람은 떨림이 묻은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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