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8화 (78/90)

선호의 시신이 옮겨지고 혜경의 집엔 폴리스 라인이 쳐졌다.

온몸이 물기로 뒤덮여 한참이나 마음을 추스른 가을이 경찰들과 뭔가 얘기를 하고 돌아선 박 형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박 형사님.”

“어, 가을아.”

가을이 힘든 와중에도 박 형사를 향해 90도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습니다.”

박 형사가 가을의 어깨를 툭툭 쳤다.

“내가 한 게 뭐 있나. 네가 고생했지.”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가을을 아프게 보던 박 형사가 말을 이었다.

“국과수 넘겨서 정확한 DNA 검사도 해야 하고. 시간이 좀 걸릴 거야. 결과 나오고 박선호 유골 인도되면, 그때 보자.”

“……네.”

가을을 보던 박 형사가 곁에 서 있던 태준을 보며 ‘큼.’ 소리를 내자그가 할 말이 있다는 걸 느낀 태준이 명석을 돌아보았다.

“명석아. 가을 씨랑, 차에 먼저 가 있어.”

명석이 가을과 함께 주차된 곳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던 박 형사가 걱정이 짙게 밴 목소리를 냈다.

“저 녀석…… 많이 힘들 겁니다.”

“…….”

“박선호가 죽지 않았다고 끝까지 믿고 싶어 한 녀석이니까.”

가을의 뒷모습을 아프게 지켜보고 있는 태준을 향해 박 형사가 고개를 돌렸다.

박 형사가 둘 사이를 모르는 척 에둘러 얘기를 꺼냈다.

“저 녀석이랑 무슨 사이인지 모르겠지만 옆에서 많이 챙겨 줘요.”

태준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고 있는 박 형사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현장에 나가다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생겨요.”

“…….”

“경찰이라는 직업이 그렇거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목숨을 걸어요.”

“…….”

뭔가를 생각하는 박 형사의 눈빛에 슬픔이 번졌다.

“강력반에 오고 얼마 안 됐을 때 사건 하나가 크게 터졌어요.”

그때를 생각하는지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박 형사가 괜히 주변으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때 파트너였던 선배가 나 대신 칼을 맞아서…… 돌아가셨거든.”

내내 가을이 걸어간 방향만 바라보고 있던 태준이 고개를 돌려 박 형사를 쳐다보았다.

“세월이 이렇게 지났어도 와이프가 임신을 했다고 웃던 선배 모습이 눈에 훤해요.”

“…….”

두 사람 사이에 잠시 흐르던 침묵을 깨고 박 형사가 입을 열었다.

“숨이 넘어가면서도 선배가 그럽디다.”

“…….”

“넌 괜찮냐고.”

슬픔을 참고 있는 박 형사의 눈동자가 빨갛게 물들었다.

“박선호 그 친구. 유독 의협심이 강해서 더했을 거예요.”

“…….”

“별수 있나.”

“…….”

“남겨진 사람은…… 힘내서 사는 수밖에.”

투박한 말투로 묵묵히 진심을 전한 박 형사를 향해 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말씀…… 감사합니다.”

슬며시 고개 인사한 태준이 걸음을 옮겼다.

“저, 그리고 말인데…….”

박 형사의 목소리에 태준이 고개를 돌렸다.

“모른 척한 건, 미안했어요.”

당시 지하에 갇혀 있던 태준을 제일 먼저 발견한 박 형사는 어떻게 된 상황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사람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은 범인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지만, 그들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그날 밤, ‘세양 그룹’ 측에서 사건을 발설하지 않는 대가로 거액의 돈을 제시했다.

금전적으로 힘이 들었던 박 형사는 그 유혹에 흔들렸다.

피의자가 모두 사망해 공소권이 없는 사건이었다.

거기다 그때 봤던 태준의 눈빛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 그 돈이 아니더라도 박 형사는 사건을 수면에 올릴 생각이 없었다.

이 사건이 알려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 태준이 받을 2차 피해가 걱정되었다.

그렇게 ‘세양 그룹’ 측의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결국 돈을 돌려주러 권 집사를 만났던 박 형사는, 태준이 기억을 잃었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그래서 태준이 찾아왔을 때, 박 형사는 이 사실을 얘기하지 않은 것이었다.

이 사건에 선호가 연관되어 있을 줄은 모르고 그저 태준이 끔찍한 기억을 찾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괜찮습니다.”

박 형사를 향해 다시 고개 인사를 전한 태준이 몸을 돌렸다.

지금 태준의 마음이 어떨지 누구보다 잘 아는 박 형사가 그런 태준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얼마 뒤.

태준과 가을이 뒷좌석에 나란히 앉아 묵묵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금은 서로가 서로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명석 역시 그런 마음을 알기에 아무런 말 없이 운전만 하는 동안 어느새 차가 산장 빌라 앞에 섰다.

같이 있어 주겠다고 얘기하지 못하는 태준과, 같이 있어 달라 말하지 못하는 가을이 아무런 말 없이 앉아만 있자 명석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저는 잠시…….”

명석이 자리를 피해 차 문을 열 때, 가을이 먼저 말을 꺼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인사를 건넨 가을이 차 문을 열고 산장 빌라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태준은 가을의 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어 태준이 주먹을 꽉 쥔 채 시선을 돌렸다.

“형.”

“……응.”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모르겠다.”

가을을 보면, 그때의 일을 잊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눈앞에서 선호가 쓰러지는 걸 매일 보게 될지, 몰랐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두려운 일은 가을을 보지 못하는 일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이렇다고 무작정 가을을 잡을 수는 없었다.

“내가…… 가을 씨를 잡아도 될까.”

“…….”

“떠나지 말라고 붙잡아도…… 되는 걸까.”

자신 때문에 가을이 힘들다면 욕심을 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명석 역시 태준에게 어떤 말을 해 줄 수가 없었다.

선호의 죽음, 10년을 기다린 세월.

그걸 감당하고 있을 가을이 어떤 마음일지, 섣불리 그 마음을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산장 빌라에 정차해 있던 태준의 차가 골목을 빠져나갔다.

5층 베란다 창문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을은 태준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차가운 바람 때문에 몸이 떨려 왔지만 가을은 그저 멍하니 텅 빈 골목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야외 촬영을 비롯해 스튜디오 촬영이 한참 이어졌다.

태준과는 며칠째 연락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전 가을은 태준을 감금했던 여자가 어떻게 죽었는지 명석에게 전해 들었다.

태준은 10년 전 사건과 선호가 구해 준 얘기만 했을 뿐이라 그 뒤에 주범이었던 여자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지 못했던 가을이었다.

듣고만 있어도 소름이 끼쳐 몸이 떨릴 지경이었는데, 당시 태준은 어땠을지 상상도 가질 않았다.

몇 달 전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태준의 모습도 이 사건 때문에 그랬던 게 확실했다.

이대로 태준을 만난다면. 태준은 선호 때문에 자책하며, 끔찍했던 순간에서 벗어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선호가 태준을 구하다 목숨을 잃은 건 사실이지만 그건 태준의 탓이 아니었다.

태준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더라도 선호는 그런 상황이 되면 자신의 몸을 던질 사람이라는 걸 가을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어떤 게 태준을 위하는 길인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며칠째 판단이 서지 않았다.

서로를 보고 있으면 상처가 아물지 않을 게 뻔했다.

자신이 곁에 있으면 태준이 평생 자책하게 될까 봐, 가을은 그게 무서웠다.

“컷! 수고하셨습니다.”

가을의 목소리에 여기저기에서 ‘수고하셨습니다’ 소리가 들리며 배우와 스태프들이 분주히 인사를 나눴다.

“정 감독, 수고했어.”

“감독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애들 몇 명이랑 삼선 호프 갈 건데, 갈래?”

“아뇨, 오늘은 빼 주세요.”

가을이 연하게 웃어 보였다.

힘든 일을 겪었으면서도 가을은 평소처럼 밝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언제는 참석한 것처럼 얘기하네. 담엔 꼭 같이 가는 거야.”

“네.”

도식이 자리를 벗어나자 가을이 감독이라고 쓰인 전용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했다.

아직 선호의 DNA 결과가 나오지 않아 유골을 인도받지 못한 상태였다.

“선배.”

서준의 목소리에 가을이 고개를 들었다.

촬영이 시작하면 ‘감독님’, 촬영이 끝나면 ‘선배’. 호칭을 칼같이 지키고 있는 서준이었다.

“응, 왜?”

“요즘 왜 그래요?”

흰 롱패딩을 걸친 서준이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고 가을을 내려다보았다.

“신경 쓰이게.”

평소처럼 웃고 있는 가을이었지만 늘 가을의 모습을 보고 있던 서준은 이번에도 어딘가 다른 가을의 모습을 눈치채고 있었다.

“고민이 뭔데요.”

“그런 거 없는데.”

“없긴. 갑자기 살이 빠졌을 때부터 이상하던데.”

선호의 시신이 발견되고 며칠 뒤 촬영이 재개되자 그사이 핼쑥해진 가을은 사람들에게 피곤해서 그렇다고 둘러댔었다.

“정말이야. 아무 일도 없어.”

물끄러미 가을을 내려다보던 서준이 가을의 옆에 있는 자신의 전용 의자에 앉았다.

“애태우는 방법도 여러 가지네.”

무슨 소린가 싶어 가을이 서준을 돌아보자 곁에서 힘이 되어 주고 싶은 마음을 숨긴 채 서준이 괜히 불퉁한 목소리를 냈다.

“힘들면 얘기도 좀 해 주고 해야 도움을 주지.”

가을이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앞만 바라보았다.

잠시 말이 없던 서준이 앞만 본 채 입을 열었다.

“머리 복잡할 때 내가 하는 방법, 알려 줄까요?”

입술을 달싹이며 고민하던 가을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 감아 봐요.”

분주하게 현장을 정리하는 스태프들을 슬쩍 돌아보던 가을이 서준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바람에 살며시 흩날리는 머리카락, 긴 속눈썹, 콧대를 따라 붉은 입술까지.

눈을 감고 있는 가을의 얼굴을 애타는 눈빛으로 보던 서준이 마음을 누른 채 덤덤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선배가 하고 싶은 걸 떠올려 봐요.”

“…….”

“했어요?”

“……응.”

“그럼 지금 당장 선배가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려요.”

“…….”

“생각했어요?”

“응…….”

“그럼 이제, 눈 떠요.”

가을이 천천히 눈을 뜨자 서준이 메이크업 박스 위에 올려 둔 커피를 들며 말을 이었다.

“그게 답이에요.”

“…….”

“머리에 바로 생각났던 거.”

“…….”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머릿속에 떠오른 그것만 생각해요.”

서준이 커피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게 가장 단순하고, 확실한 해답이거든.”

매니저와 함께 밴으로 향하는 서준을 보던 가을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눈을 감으면 생각나는 건 언제나 한 가지뿐이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가을이 혁진에게 몇 가지 전달 사항을 얘기한 후 빠르게 현장을 벗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으로 어떻게 되더라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은 하나였다.

‘STN’ 대표실 안.

가을이 그대로 비서실로 들어가자 명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감독님.”

“대표님 안에 계세요?”

“예.”

박 비서가 태준에게 인터폰을 하려 하자 명석이 손을 들어 제지했다.

“그냥 들어가 보세요.”

태준이 지금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눈에 훤한 명석이 일부러 그 모습을 보게 하려고 인터폰을 막았다.

‘똑똑.’

가을이 짧게 노크를 하고 대표실 문을 열었다.

책상 의자에도, 소파에도, 태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분명 안에 있다고 한 태준이 보이질 않자 당황하던 가을이 뭔가가 생각난 듯 조심스럽게 책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가을의 짐작대로 태준은 책상 아래 앉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모습을 아프게 보던 가을이 조용히 목소리를 냈다.

“……대표님.”

당연히 명석일 거라고 생각했던 태준이 가을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왜 이러고 계세요…….”

무서운 게 있으면 사방이 막힌 공간에 숨어 있던 가을이 이제는 숨어 있는 태준의 앞에 다가와 앉았다.

“……뭐가 무서워서.”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아프게 가을을 보던 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날…… 떠날까 봐.”

“…….”

그사이 수척해진 태준이 가을을 보며 연하게 미소지었다.

“……그게 무서워서.”

가을이 자신을 떠날까 봐 불안하고 두려워 태준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불이 켜진 가을의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하고 싶은 건 한 가지뿐인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미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무서운 일이 있을 때마다 가을이 하는 방식대로, 몸을 숨길 수 있는 책상 밑에 앉았다.

하지만 이렇게 앉아 있어도 가을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괴로움에 마음이 터지려 할 때, 자신의 눈앞에 가을이 나타났다.

태준이 어떤 마음으로 이렇게 앉아 있었을지 짐작하고 있는 가을이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내가 곁에 있으면 대표님이 힘들 거예요.”

“…….”

“그때 일이 계속 생각나서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끔찍했던 기억이 자꾸 떠올라서 상처가 아물지 않을지도 몰라요.”

태준이 말없이 그저 가을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런데요.”

잠시 시선을 내리며 입술을 말아 물던 가을이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한 번만 이기적으로 굴게요.”

“…….”

“더디게 아물어도 상처는…… 언젠가 아무니까.”

가을의 눈가가 그렁하게 차올랐다.

“힘들 땐 대표님 손을 잡으라고 하셨잖아요.”

“…….”

“저 지금 되게 힘들거든요.”

“…….”

“그러니까 지금…… ,”

가을이 태준을 향해 천천히 손을 내밀었다.

“대표님 손을…… 잡고 싶어요.”

눈가가 빨갛게 올라온 채 가을의 손을 바라보던 태준이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았다.

따듯한 온기가, 숨길 수 없는 마음이. 마주 잡은 손에 그대로 전해졌다.

맞잡은 손을 바라보던 가을이 떨리는 눈빛으로 태준을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애타는 마음을 담아 태준의 입술에 살며시 입을 맞췄다.

그 입맞춤을 받은 태준이 가을의 뺨을 어루만지다 깊은 키스로 이어갔다.

지금 이 순간.

서로를 향한 마음 말고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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