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병원’ VIP 1인실 병실 안.
문규와 정열이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태준을 가슴 아프게 내려다보았다.
태준이 쓰러졌다는 명석의 연락을 받고 두 사람 모두 사색이 된 채 병원으로 달려왔다.
“결국…… 이 녀석이 기억을 한 게야.”
태준이 어쩌다 쓰러졌는지 명석에게 전해 들었지만 문규와 정열은 이 일에 선호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선호가 사망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현장에 나간 박 형사를 대신해 두 명의 형사가 정기의 집을 찾았다.
정기가 경찰이라는 점 때문에 형사들은 정기의 집을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확인된 동선이 이곳이라 형식상 하는 거라며 대충 안을 둘러보던 형사들이 집을 나갔다.
선호의 휴대폰을 CCTV가 고장 난 골목까지 들고 갔다가 꺼 버린 탓에 형사들은 그가 수리를 하고 돌아갔다는 정기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자 정기는 낙뢰 때문에 근처 CCTV가 고장이 난 게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사흘 뒤, 차를 몰고 가던 정기는 평소 차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동네 골목에 몇 대의 차가 올라가는 걸 목격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집으로 향하는 형사들이라고 생각한 정기가 서둘러 혜경에게 전화했다.
하지만 도망가라는 정기의 말에 혜경은 마지막까지 태준의 곁에 있겠다는 뜻을 전했다.
혜경이 잡혀 조사를 시작하면 자신이 공범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질 게 뻔해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던 정기는 과속으로 가드레일을 박고 아래로 추락했다.
“으으…….”
신음 소리를 내던 태준이 눈을 떴다.
“태준아!”
“태준아.”
문규와 정열이 동시에 태준의 이름을 불렀다.
초점을 잃은 태준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정기가 과속으로 추락한 그 시각. 혜경이 태준에게 다가왔다.
앙상하게 말라 숨만 쉬고 있는 태준의 뺨을 혜경이 연신 어루만졌다.
이제는 피할 기력조차 없는 태준은 분노를 담아 혜경을 노려보기만 할 뿐이었다.
[태준아.]
혜경이 마지막으로 태준의 모습을 눈에 담듯 이마에서부터 턱까지 천천히 태준의 얼굴을 훑었다.
[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남아서 날…… 영원히 기억해 줘.]
태준이 입술을 달싹일 새도 없이, 혜경은 태준의 앞에서 목숨을 끊었다.
그날, 그 끔찍했던 장면이 떠오른 듯 불안하게 요동치던 태준의 눈동자가 이내 까무룩 뒤로 넘어갔다.
“으으으윽.”
태준이 거칠게 몸을 떨자 병실을 뛰쳐나간 문규가 서둘러 의사를 불렀다.
“정 교수!! 정 교수!!!!”
의사와 간호사들이 우르르 들어와 태준에게 진정제를 투여하자, 안정을 찾은 태준은 다시 잠이 들었다.
10년 전 태준은 지금보다 더한 증상을 보였었다.
20여 일을 감금당했다가 발견된 후 병실에서 깨어난 태준은 10여 일을 심각한 발작 증세를 보였다.
그렇게 온전히 의식이 돌아왔을 때, 태준은 그날의 기억을 모두 잃어버렸다.
또다시 그런 모습을 보일까 봐 문규는 내내 태준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바랐다.
당시의 상황을 떠올린 문규의 눈동자가 깊게 잠겼다.
태준의 실종을 비밀리에 수사하던 그때, 수사에 진척이 없자 형사들은 처음부터 사건을 되짚었다.
태준이 사는 빌라를 찾았던 형사의 눈에 우편함에 꽂혀 있는 전기세 고지서가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가져갔는지 태준과 혜경의 우편물에만 전기세 고지서가 꽂혀 있었다.
매월 15일경 나오는 고지서가 그대로인 걸 보면 며칠간 집을 비웠던 것 같아 마침 빌라에서 나오던 주민에게 근래 혜경을 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며칠 전에 이 앞에서 잠깐 보긴 했어요.]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은 없었습니까?]
[글쎄요. 아, 평소엔 잘 웃지 않는 여자가 뭐 좋은 일이 있는지 연신 웃고 가더라고요.]
[평소엔 웃지 않았습니까?]
[아유, 얼마나 쌀쌀맞았는데. 301호 총각 만날 때만 웃고 다녔어요]
그 말에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 형사가 혜경의 동선을 쫓았다.
혜경이 운영하는 미술관을 찾은 형사가 손님인 척 직원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보았다.
얼마 전부터 혜경이 미술관에 잘 나오지 않는다는 직원의 얘기에 의심은 점점 짙어졌다.
그렇게 동선을 쫓다 혜경이 다니는 헬스장을 찾았다.
태준이 나오는 날에만 헬스장에 나왔다는 트레이너의 말에 확신을 가진 형사들이 혜경의 집으로 향했고, 경찰청장의 허락을 얻어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곳 안방 벽면에 몰래 찍은 듯한 태준의 사진이 가득히 붙어 있는 걸 발견했다.
혜경을 용의자로 확정한 형사들이 추적 끝에 정기의 명의로 된 도담시에 위치한 집을 찾아냈다.
그렇게 도담시에 온 형사들이 정기의 집 대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가려고 할 때, 선호 사건으로 근처를 조사하던 박 형사가 그 모습을 목격했다.
무슨 일 때문에 남의 관할에 와서 이러냐며 박 형사가 제지하자 형사들은 어쩔 수 없이 박 형사와 함께 혜경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열려 있는 철문으로 내려가 태준과 사망한 혜경을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이 박 형사였다.
정기의 집 2층 방에서는 벽면에 가득 붙어 있는 감금된 태준의 사진이 발견되었다.
컴퓨터에도 낙뢰의 영향으로 CCTV 녹화가 끊기기 전까지의 태준의 영상이 보관되어 있었다.
모든 걸 보고받고 충격에 빠진 문규는 기억을 잃어버린 태준을 위해 빠르게 사건을 덮었다.
어차피 범인이 사망해 수사를 진행할 수 없는 사건이었다.
박 형사를 비롯해 비밀 수사를 하던 형사들, 희망 병원 의사를 포함해 이 일을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사건을 함구하는 대신 거액의 돈을 전달했다.
그리고 이 일이 주목받지 않게, 정기는 교통사고로, 혜경은 자살로. 빠르게 사건을 마무리한 후 선호의 사건을 키우게 했다.
선호가 태준을 구한 은인임을 몰랐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다.
“후우…….”
태준을 내려다보던 문규가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내가 이래서…… 이래서 불안했던 게야.”
태준이 기억을 모두 잃은 후 심리 치료를 받게 할 것인가를 두고 문규와 정열은 긴 상의를 했었다.
그러다 혹시라도 태준의 기억이 되살아나 잘못될까 봐 두려운 마음에 이대로 두자는 결론을 내렸다.
이미 끝난 일이었다.
기억을 잃어버릴 정도로 끔찍했던 사건을 굳이 되살릴 필요는 없었다.
그게 태준을 위해 최선이라는 판단이었다.
문규가 비틀거리자 정열이 빠르게 문규를 부축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태준이, 괜찮을 겁니다.”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든 태준의 모습을 두 사람이 아프게 내려다보았다.
명석에게 연락을 받고 ‘희망 병원’으로 달려왔던 가을은 [면회 금지. 절대안정] 표시에 태준을 만나지 못했다.
그대로 돌아갈 수가 없어 가을이 휴게실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곁으로 다가온 명석이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강의 얘기를 가을에게 전했다.
태준이 선호의 사건과 뭔가 연관이 되어 있는 것 같다는 말에 가을이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대표님이 선호 오빠랑 어떻게요……?”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선호의 실종이 태준과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니.
맞잡은 가을이 손이 덜덜 떨려 왔다.
무슨 일이 있었길래 쓰러지기까지 했을까.
그동안 이상해 보였던 태준의 모습이 이것 때문이었다고 생각하자 가을의 마음에 불안감이 엄습했다.
* * *
밤새 기절한 듯이 잠들어 있던 태준이 새벽 무렵이 되어서야 눈을 떴다.
하얀 천장, 링거대에 걸린 여러 가지 수액들, 팔에 꽂힌 바늘. 천천히 시선을 내린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한바탕 나쁜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었다.
자신에게 생긴 일. 그로 인해 선호가 사망한 것까지.
사실이 아니었으면 싶던 일들이. 사실이었다.
왜 자신에게 여자에 대한 이상 증상이 생겼는지, 왜 선호가 실종 상태가 되었는지. 모든 게 분명해졌다.
‘탈칵.’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명석이 깨어난 태준을 보고 빠르게 다가왔다.
“형!”
문규가 병실에 남는다고 고집을 부려 명석은 집으로 돌아갔다가 조금 전 병원에 도착한 상태였다.
“괜찮아요?”
어젯밤 명석은 10년 전 일어났던 사건을 문규에게 모두 전해 들었다.
군대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태준의 곁을 지킨다고 약속해 놓고 이런 일이 있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명석은 한참이나 괴로워했다.
얼마나 두렵고 끔찍했으면 기억을 잃어버렸을까 싶어 집으로 돌아간 후 터지는 눈물을 참지 못한 명석이었다.
눈가가 그렁해진 명석이 태준을 끌어안았다.
“아무것도 모르고…… 하…… 미안해요.”
자신을 안고 있는 명석의 등을 태준이 가볍게 ‘툭툭’ 쳤다.
“괜찮아.”
입술을 꽉 깨문 채 태준을 안고 있던 명석이 몸을 일으켰다.
“다…… 기억이 난 거죠?”
태준이 고개를 끄덕이다 천천히 입술을 떼어냈다.
“가을 씨는…… 왔다 갔나……?”
“회장님께서 면회 사절을 지시하셔서 병실엔 못 오셨어요.”
“…….”
“형 깨어날 때까지 휴게실에 있겠다고 하셨는데, 제가 어젯밤에 집까지 모셔다드렸습니다.”
태준이 깊은숨을 내쉬었다.
지금 태준에게 무서운 것은 자신을 쓰다듬던 그 여자가 아니었다.
박선호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을 가을에게 얘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가을을 다시는 보지 못하게 된다면.
이대로 떠나간다면…….
주먹을 움켜쥐던 태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
“태준아!”
선잠에서 깬 문규가 허둥대며 태준에게 다가왔다.
“내 새끼, 괜찮은 게야?”
혹시 태준이 다시 기억을 잃었나 싶어 문규가 조심스럽게 태준의 모습을 살폈다.
“무슨 기억이라도 난 게야……?”
태준이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문규를 올려다보았다.
갑자기 가을을 반대하며 유언장까지 운운한 이유가 이제야 이해가 되었다.
문규가 어떤 마음으로 거짓말을 했을지. 행여 자신의 기억이 돌아올까 노심초사했을 문규의 모습이 마음 아팠다.
“기억, 다 났습니다.”
“……!!”
“괜찮아요.”
태준이 걱정하지 말라는 듯 연하게 웃어 보이자 문규의 눈가가 붉어졌다.
마냥 어린 스물두 살의 손자가 아닌, 서른두 살의 남자가 된 태준의 손을 문규가 소중히 감싸 쥐었다.
“그래, 너만 괜찮으면 됐다. 너만 괜찮으면 돼.”
주름이 깊게 진 손으로 자신의 손을 연신 쓰다듬는 문규를 보던 태준이 결연한 눈빛을 지었다.
“할아버지. 명석아.”
태준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태준에게 향했다.
“말씀드려야 할 게 있어요.”
깊게 숨을 뱉어 낸 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박선호에 관한…… 얘기입니다.”
그날 저녁.
좀 더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말을 뒤로하고 퇴원을 한 태준은 산장 빌라 앞에서 가을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태준에게 선호에 관한 얘기를 들은 문규와 명석은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묵묵히 얘기를 듣던 두 사람이 돌아가고, 태준은 이 사실을 가을에게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동안 병실을 나서지 못했다.
지금 촬영이 가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었다.
촬영이 끝난 후 얘기를 할까도 생각했지만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지금 이대로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건 가을을 기만하는 일이었다.
태준이 몇 번의 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할 때, 빠르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빌라 현관문이 열렸다.
“대표님!”
그사이 수척해진 태준의 모습을 보자마자 가을이 빠르게 다가와 태준을 끌어안았다.
“괜찮으세요? 괜찮은 거죠?”
자신에게 안겨 있는 가을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태준이 주먹을 그러쥔 채 손을 거뒀다.
이대로 가을을 안는다면, 영영 사실을 숨기고 싶을지도 몰랐다.
“좀…… 걸을까요?”
태준의 목소리에 가을이 안았던 팔을 풀어냈다.
어딘가 이상한 태준의 분위기를 눈치챈 가을이 입술을 깨물었다.
태준이 말하려는 얘기가 뭔지 알수 없어 두려움이 몰려왔지만 퇴원하자마자 이렇게 수척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걸 보면, 피해서는 안 될 얘기라고 생각했다.
태준이 몸을 돌리자 가을이 그 옆을 따라 걸었다.
카페 안은 숨이 막힐 것 같아 태준은 가을과 함께 전에 갔던 놀이터로 향했다.
긴 의자에 가을과 나란히 앉아 있던 태준이 얘기를 꺼내기가 힘든지 한참이나 말없이 주먹만 그러쥐었다.
박선호가 죽은 것도.
가을이 박선호를 10년이나 기다려야 했던 것도.
모든 게 자신의 탓이었다.
최소한 기억만 잃지 않았어도 가을은 그 긴 세월 동안 선호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얼마나 원망할까. 얼마나, 내가 싫어질까.
“무슨 얘긴데…… 그렇게 힘들어하세요.”
가을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태준이 물끄러미 가을을 바라보았다.
이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박선호에 관한…… 얘기예요.”
예상했던 대로 선호의 얘기가 나오자 가을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태준이 힘겹게 자신이 겪은 일을 얘기하는 동안 노을이 진 하늘이 어둠으로 바뀌어 갔다.
태준의 얘기를 듣는 동안 가을은 눈가가 그렁해진 채 울음을 참아 냈다.
이런 일을 겪었을 태준이 너무 안쓰럽고 불쌍해서. 가을은 말할 수 없는 감정이 복받쳤다.
태준이 자신이 하려던 가장 중요한 말을 천천히 꺼내 들었다.
“그때…… 날 구하려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태준의 말에 뭔가를 직감한 가을의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
“그 남자는,”
태준이 깊게 숨을 내쉰 후 힘겹게 말을 이었다.
“나 대신…… 흉기에 찔려…… 사망했습니다.”
“……!”
태준의 말에 떨리는 손을 맞잡은 가을이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설마 그 남자가…….”
“……박선호예요.”
“!!!!”
머리를 뭔가로 얻어맞은 듯 멍해진 가을이 태준을 바라보았다.
“선호 오빠가…….”
“…….”
“……죽었어요?”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듯 가을은 그저 멍하니 태준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모습에 태준이 가슴을 쥐어짜는 통증을 느꼈다.
“미안해요…….”
“…….”
태준의 대답에 가을의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할 수 있는 건 신원 불명의 사체를 확인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러면서도 가을은 늘 선호가 아니길 바랐다.
죽었을지 모른다고, 살아 있기 힘들다고, 남들이 그렇게 얘기해도 아니라고 믿고 싶었다.
마음 한편에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어디선가 잘살고 있을 거라고, 사정이 있어서 못 오는 거라고 그렇게 믿고 살아온 가을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그것도 태준의 입에서 들은 선호의 사망 소식에 가을은 충격에 빠져 눈물조차 흐르지 않았다.
그런 가을의 모습에 온몸이 타들어 가듯 아파 왔지만 태준은 차마 가을을 위로해 줄 수가 없었다.
한참이나 넋이 나간 듯 앉아 있던 가을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럼, 그럼…… 선호 오빠는…… 어디 있어요……?”
“박선호가 어딨는지…….”
“…….”
태준이 핏줄이 서 빨개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알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