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5화 (75/90)

친구를 대신해 인터넷 AS 출장을 온 선호가 집 밖과 서재를 오가며 한참이나 작업을 했다.

어젯밤 내린 낙뢰로 뭔가 잘못됐는지 금방 끝날 것 같던 작업이 쉽게 끝나지 않았다.

와이파이가 끊겨 CCTV가 되지 않자 어쩔 수 없이 AS를 신청했던 정기는 내내 선호의 곁을 감시하듯 서 있었다.

Rrrr-

정기가 선호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예…… 아 그거요?”

잠시 망설이던 정기가 옆에 있는 혜경에게 전화를 하고 온다는 표시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실내는 에어컨을 가동하고 있었지만 밖을 오가느라 더위를 느낀 선호가 혜경을 돌아보았다.

“죄송한데 물 한 잔만 주실 수 있을까요?”

혜경이 주방으로 간 후, 선호는 연신 컴퓨터를 보며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 PC로 신호를 확인했다.

“아, 이게 왜 이러지.”

컴퓨터를 향해 손을 뻗던 선호가 바닥에 떨어진 볼펜을 집기 위해 몸을 숙였다.

그때 책상 옆에 조그만 버튼이 달린 걸 발견했다.

경찰대 수석에 빛나는 선호의 촉이 내내 이상하던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것 때문이었다는 걸 직감했다.

어딘가 감시를 하는 것 같던 정기와, 불안한 눈빛을 하고 있던 혜경.

그 이유가 여기에 있으리라 확신한 선호가 조심스럽게 버튼을 눌렀다.

이상한 걸 느끼면 그대로 두지 못하는 게 선호의 성격이었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실수로 눌렀다고 둘러댈 생각이었다.

‘지이잉-’

버튼을 누르는 순간 드라마에서나 볼 것 같은 일이 눈앞에 일어났다.

서재 한쪽 책장이 옆으로 밀리며 철문이 나타나자 선호가 습관적으로 무기가 될 만한 걸 집어 바지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 넣었다.

주방 쪽에서 혜경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걸 확인한 선호가 빠르게 철문으로 향했다.

금고에서나 사용하는 지문 인식 버튼이 달린 철문이었다.

“뭘 감췄길래 이런 걸 쓰지.”

곳곳에 CCTV가 지나치게 많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도 이상했다.

평소 남들보다 범죄에 관한 감이 좋은 선호였다. 이 집안의 묘한 분위기는 분명 여기서 비롯된 것이리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아직 경찰도 아닌 데다 무턱대고 남의 집을 조사할 수는 없어 몸을 돌린 순간.

‘와장창.’

지레 겁을 먹은 혜경이 서재에 있던 커다란 화병으로 선호의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에 피를 흘리며 비틀거리던 선호가 쓰러지자 그 소리에 놀란 정기가 빠르게 뛰어왔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이, 이 사람이 여길, 여길 보고 있어서…….”

“미쳤어? 그렇다고 사람을 이렇게 만들면 어떻게 해!”

“여길 보고 있었다구!”

“철문만 본다고 뭐가 보여? 어차피 아무것도 안 보이는데 왜!”

“어떻게 하지? 죽었나 봐.”

정기가 선호에게 다가가 코에 손을 대었다.

“안 죽었어.”

“이제 어떻게 해.”

“일단,”

“저 안은 안 돼.”

“뭐?”

“저 안엔 우리 태준이가 있잖아. 태준이가 있는 곳에 이렇게 피를 흘리는 남자를…….”

순간 눈이 휙 돌아간 정기가 쓰러진 선호를 둘러메고 철문 비밀번호에 지문을 인식했다.

철문을 열고 계단을 내려가면 한 번 더 철문이 나오는, 두 사람의 지문으로 인식이 되는 이중문이었다.

“안 돼! 안 된다니까!!!”

‘철컹.’

듣기만 해도 끔찍한 문소리와 함께, 정기가 이마에 피를 흘리고 있는 선호를 바닥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 모습에 혜경이 경악하며 앙칼진 소리를 냈다.

“다시 들고 나가! 여긴 우리 태준이가,”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든 건 너야!”

“당신이 전화하러 나가지만 않았어도 됐잖아!”

거칠게 머리를 털어 낸 정기가 선호의 조끼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빼낸 후 급한 대로 끈을 가져와 그의 두 팔을 묶었다.

“뭐야 이건.”

선호의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본 정기가 거친 욕을 내뱉은 후 머리를 헝클였다.

“경찰 반지를 끼고 있잖아!”

“경찰이야?”

정기가 선호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경찰이라기엔 너무 어려 보였다.

“경찰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뭔데, 왜 경찰 반지를 끼고 있는 거야?”

“그러게 적당히 둘러댔으면 될 일을 이렇게 키워!”

“그럼 어떻게 해, 그러다 들켰으면 우리 태준이는! 태준이를 빼앗기면 어떻게 해!”

“박혜경! 널 사랑하는 건 나야! 저 자식이 아니라고!”

“태준이만 볼 수 있으면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정신 차려!”

한참이나 언성을 높이던 정기가 가져온 끈으로 선호의 다리를 마저 묶은 후 혜경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선호를 지하에 두고 나간 후, 두 사람은 1층에서 맹렬히 다투는 중이었다.

등을 진 채 쓰러져 있는 선호를 향해 태준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이봐요…… 정신 차려요……. 이봐요……!”

태준이 아무리 불러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던 선호가 얼마 지나지 않아 의식을 차렸다.

“아…… 머리야.”

힘겹게 일어나 앉는 선호의 모습을 보던 태준이 그의 이마에 흐른 피를 보고 눈이 커다래졌다.

“……!!”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몇 번 흔들던 선호가 뿌옇게 된 시야에 몇 차례 눈을 깜빡이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야 이게…….”

손과 다리가 묶여 있고 거기다 목에까지 긴 줄이 채워진 태준을, 선호가 기막힌 얼굴로 바라보았다.

한눈에 봐도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수척하고 파리한 모습이 꽤 오래 이곳에 갇혀 있었던 것처럼 보였다.

“하, 이것들이 사람을 가둬 놨을 줄은 몰랐네.”

돈이나 다른 재물을 숨겼을 거라고 생각했던 선호가 태준의 모습을 살폈다.

“괜찮아요?”

태준이 괜찮다는 듯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이나 선호를 향해 정신을 차리라고 소리쳤던 태준은 목이 깊게 잠겨 있어 소리를 내기도 힘겨운 상태였다.

태준의 모습을 보던 선호가 마치 자신이 아픈 듯 잔뜩 인상을 썼다.

“사람을 어떻게 이렇게…….”

선호가 분노를 누르며 자신의 조끼 주머니를 살펴보았다.

주머니에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자 휴대폰을 빼앗겼다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휴대폰을 그냥 둘 리가 없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상황에서도 선호는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여기 얼마나 있었어요?”

“……며칠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형인가? 아니면 동생? 몇 살이에요?”

“……스물둘…….”

“형이었네. 일단 형이라고 부를게요.”

이런 상황일수록 평범한 얘기로 안정을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는 선호가 개인적인 걸 계속해 물었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난…… 강태준.”

“내 이름은.”

선호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박선호예요.”

태준의 상태를 살펴보던 선호가 그 후에 몇 가지를 더 물어본 후 몸을 일으켰다.

“힘들겠지만 여기 주머니에서 커터 칼 꺼내서 나한테 줄 수 있겠어요?”

선호가 자신의 바지 주머니를 고개로 가리켰다.

혹시 몰라 습관처럼 챙겨 둔 커터 칼이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다 잘될 테니까.”

매사 긍정적인 선호가 태준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꽤 고생한 끝에 태준은 선호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커터 칼을 집어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둘 다 손이 뒤로 묶여 있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커터 칼을 손에 쥔 선호가 능숙하게 칼을 쥐고 끈을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선호는 곳곳에 설치된 CCTV를 둘러보았다.

와이파이 수리를 끝내지 못했으니 CCTV가 작동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연신 끈을 자르던 선호가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가을이가 기다릴 텐데.”

“……가을이……?”

“내 동생이요. 잔소리가 엄청 심하거든요.”

“…….”

“벌써부터 귀가 따가워지려고 하네.”

음식도, 물도 제대로 먹은 게 없어 입술이 말라 버린 채 힘겹게 버티고 서 있던 태준이 이곳에 갇히고 처음으로 연한 웃음을 지었다.

“어쩌다 이렇게 갇혀 있게 됐는지 몰라도, 자세한 건 여기서 나가면 해요.”

비닐로 된 끈에 묶여 있던 터라, 얼마 지나지 않아 손이 자유로워진 선호가 이내 다리마저 풀어냈다.

태준의 몸에 있는 것들은 모두 열쇠가 필요한 것들이라 풀어 줄 수가 없었다.

가볍게 몸을 풀던 선호가 식탁 의자를 집어 들었다.

그러곤 문 옆에 서서 냉철하게 경우의 수를 따졌다.

남자 혼자 들어 왔을 경우, 여자 혼자 들어 왔을 경우, 두 사람이 함께 들어 왔을 경우.

상황에 맞게 상대를 제압한 후 태준의 몸에 묶인 것들을 풀게 하고 이곳을 빠져나간다.

머릿속으로 계획을 짜던 선호가 태준을 돌아보았다.

태준의 몸에 있는 것들을 풀게 해 이곳을 함께 나가는 건 무리가 있어 보였지만 일단은 할 수 있는 한 해 볼 생각이었다.

지문 인식으로만 열리는 문이 가장 문제였지만, 커터 칼로 위협을 가하면 충분히 해 볼 만했다.

만약 상황이 좋지 않으면 일단 이곳을 빠져나가 신고를 한 후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

“어떻게든 해 보겠지만 여의치 않으면 나가서 신고하고 다시 돌아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서 있는 것도 버거운 태준에게 믿을 사람은 선호뿐이었다.

태준이 의자를 들고 문 옆에 서 있는 선호를 천천히 바라보았다.

선호가 입고 있는 조끼에 통신사 로고가 보였다.

자신 때문에 상관도 없는 선호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자 태준이 힘겹게 목소리를 냈다.

“상황 되면…… 무조건 도망쳐요.”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태준을 보던 선호가 자신감 어린 표정을 지었다.

“나만 믿어요. 이래 봬도 내가 경찰대생이거든요.”

얼마간의 긴장감이 흐르다 ‘철컹’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저 새X 죽여 버릴 거야!!”

“안 돼!!!”

이성을 잃은 듯 커다란 흉기를 손에 든 정기가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한 명이 보이지 않아 정기가 놀란 순간, 선호가 들고 있던 의자를 그의 머리 위로 내려쳤다.

그 바람에 정기가 충격으로 크게 휘청거리며 흉기를 놓치자 혜경은 순간적으로 당황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문을 닫을 정신도 없이 잔뜩 흥분한 채 들어온 탓에 철문은 환하게 열려 있었다.

이대로라면 선호는 그대로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버틸 힘도 없이 서 있던 태준이 죽을힘을 다해 소리쳤다.

“당장 여기서 나가!!!”

하지만 선호는 망설임 없이 정기에게 달려들었다.

정기가 흉기를 들고 온 걸 본 이상 태준을 그대로 두고 혼자만 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게 선호와 정기의 몸싸움이 시작됐다.

몇 차례 아슬한 상황이 있었지만 싸움 실력으론 선호가 월등해 금세 정기를 제압해 갔다.

선호가 자신을 위해 싸우는 모습만 지켜봐야 하는 태준은 무력함에 미칠 지경이었다.

정기를 돕기 위해 어설프게 다가온 혜경을 한주먹에 해결한 선호가 정기를 바닥에 눕혔다.

그 위를 누르고 앉아 팔을 뒤로 꺾은 선호가 혹시 싶어 정기의 옷을 뒤지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들 때였다.

“으윽…….”

조금 전 화병으로 맞은 곳에 무리가 온 선호가 현기증에 몸을 비틀거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은 정기가 선호를 밀치고 일어나 한쪽 구석에 떨어져 있던 흉기를 집어 들고 태준에게 달려들었다.

원하던 혜경을 갖게 되자 이젠 태준을 향한 질투로 점점 미쳐 갔던 정기였다.

“안 돼~!!!”

빠르게 달려간 선호가 정기를 잡아채는 순간, 정기의 손에 있던 흉기가 선호의 가슴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본 태준이 고통에 찬 신음 소리를 냈다.

“으으…… ”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던 태준이 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선호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는 모습을 보던 태준이 이내 칼날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아아아악.”

자신을 위해 싸우던 선호가, 자신을 위해 죽어 가는 모습을.

태준은 그렇게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현재.

모든 기억이 떠오른 태준이 점점 가빠오는 숨에 하얗게 얼굴이 질려 갔다.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박선호가.”

도저히 안 되겠는지 명석이 휴대폰을 꺼내 119를 부르려는 순간.

컥컥거리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던 태준이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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