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3화 (73/90)

가을과 가영이 작은 카페를 찾았다.

어제 가을의 부친인 대원이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며 가영과 함께 얼굴 한번 보자는 연락을 해 와 나온 참이었다.

앞에 앉은 대원의 얼굴을 외면한 채 가영이 비스듬히 앉아 다리를 꼬았다.

나오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던 가영은 가을의 설득으로 함께 자리에 나온 상태였다.

가을 역시 17살 때 자신을 두고 일본으로 떠나 고등학교 졸업식 때 얼굴 한 번 비친 게 다인 대원이 반가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곧 미국으로 이민을 가 돌아오지 않는다며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부탁하는 대원의 말을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관심을 주진 않았지만 그래도 17살 때까진 함께 살았던 아버지였다.

대원이 삐딱하게 앉아 있는 가영을 바라보았다.

“많이 컸네.”

가을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만났던 가영은 15살이었다.

“7년이나 지났으니까 많이 컸겠지.”

“미안하다.”

“난 이런 게 진짜 싫어. 그동안 관심 없었으면 쭉 일관되게 없을 것이지. 자식들 머리 다 크고 나면 그제야 미안하네, 어쩌네. 그런 얘기 해서 뭐 해?”

가을이 슬쩍 눈치를 주자 가영이 팽하니 대원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언제 미국으로 가세요?”

“다음 주 목요일에.”

잠시 침묵이 이어진 후 가을이 입을 열었다.

“이혼하셨다는 얘기, 고모한테 들었어요.”

“그렇게 됐다.”

“아주 연례행사야.”

가영이 몸을 비스듬히 돌려 앉은 채로 한겨울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스 자몽차를 빨대로 요란하게 빨았다.

“미국엔 무슨 일로 가시는데요?”

“지금 하는 사업이 그쪽에서 자리를 잡아서 갑자기 그렇게 결정이 났다.”

가을과의 짧은 대화 후 또다시 정적이 흘렀다.

“둘 다 만나는 사람은 있고?”

대원의 질문에 가영이 냉큼 입을 열었다.

“관심도 없으면서 그런 걸 왜 물어요?”

“……내가 결혼식 때 손을 잡아,”

“아우, 생각만 해도 싫어! 아버지 손 잡고 식장 들어가는 건 다 유대 관계가 있어야 울컥하고 감격이고 그런 거지. 쌓아 놓은 정이 없는데 그런 건 왜 신경 쓴대?”

대원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가영이 넌, 여전하구나.”

7년 전에도 가영은 졸업식장에 왔던 대원을 향해 중2의 예민함에 삐딱함을 얹어 한참이나 날카로운 말을 퍼부었었다.

“아빠도 안 변하는데, 나라고 뭐 변할까.”

가영의 마음이 모친인 영숙을 만났을 때 자신의 심정과 같을 거라 생각한 가을이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다.

연신 앞에 놓인 커피잔만 만지작거리던 대원이 입을 열었다.

“같이 식사라도 하면 좋을 텐데.”

“제가 일이 바빠서요.”

“미투.”

잠시 정적이 흐르다 대원이 입을 열었다.

“그래, 나중에 연락하마.”

“건강하세요.”

짧은 인사를 끝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대원이 카페를 나섰다.

“어이없어, 진짜.”

그 모습을 보던 가영의 눈가가 그제야 그렁해졌다.

말은 모질게 했지만 7년 만에 본 부친이었다.

평소 입버릇처럼 낳아 주기만 한 부모는 필요 없다고 하던 가영이었지만 엄마나 아빠의 사랑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곁에는 가을이 있고, 오빠처럼, 아빠처럼 혼내고 챙기는 의찬이 있어 외롭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부모님이 주는 사랑과는 별개의 것이었다.

“언니, 기분도 꿀꿀한데 매운 거 먹으러 가자.”

가영이 눈물을 참듯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가을을 돌아보았다.

누구보다 가영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가을이 팔을 벌렸다.

“이리 와.”

눈가가 그렁한 가영을 당겨 안은 가을이 등을 도닥였다.

“가영아.”

“응.”

“사랑해.”

“나도 우리 언니 무지하게 사랑해.”

가영이 몸을 비비며 가을을 더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참이나 가영의 등을 도닥이던 가을이 가영을 품에서 놓아주었다.

“매운 떡볶이 먹으러 가자.”

“콜이지!”

서로를 보며 웃던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섰다.

얼마 뒤.

촬영이 없는 날이라 태준의 점심시간에 맞춰 ‘STN’ 근처에서 기다리던 가을이 태준과 함께 식당으로 들어왔다.

명석이 갔었던 일식집 안은 맛집의 위용을 뽐내듯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초밥 세트를 주문하고 기다리는 사이 만석이 돼 몇 명의 사람들이 발길을 돌렸다.

“대표님.”

“…….”

“대표님.”

“응?”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아, 미안해요.”

선호와 자신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하느라 태준은 요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얼마 전 진료기록을 썼던 담당 의사를 만나 어떻게 된 건지 추궁해 봤지만 자신은 있는 그대로를 썼을 뿐이라는 답변만 했다.

‘희망 병원’은 문규의 처가에서 운영하는 병원이었으니 문규가 입김을 넣었다면 추궁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혹시 뒷돈을 받은 정황이 있는지 알아봤지만 10년이나 지난 일이라 조사에 어려움이 있었다.

태준이 걱정을 지워 내고 평소 모습처럼 미소 지었다.

“아버님 만나고 온 건 어떻게 됐어요?”

“다음 주에 미국으로 가신대요.”

“처제는 뭐래요.”

태준에게 이미 가영의 호칭은 처제였다.

“이제 와서 관심 갖지 말라고요.”

너무도 가영다운 말이라 태준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기분이 좀 이상해요.”

가을이 시선을 내린 채 말을 이었다.

“어릴 때도 자주 본 적이 없던 아버지고, 오늘도 7년 만에 만난 건데…… 아주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뭐랄까, 마음이 좀 휑한 것 같달까.”

“우리가 미국으로 가서 찾아뵈면 되죠.”

“글쎄, 반갑지 않으실 거예요.”

가을이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왼손 약지에 반지를 끼고 계셨거든요.”

여자가 있을 땐 언제나 약지에 반지를 끼고, 헤어지거나 이혼을 하면 반지가 사라지던 대원이었다.

사업 때문에 미국으로 간다고 얘기했지만 분명 여자 때문임을 가을은 알고 있었다.

어쩐지 이번에는 대원이 미국에서 돌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가방에 넣어 온 작은 선물을 꺼내 태준에게 건넸다.

“선물이에요.”

예상하지 못한 선물에 태준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풀어 봐도 돼요?”

가을이 고개를 끄덕이자 태준이 쇼핑백에서 선물을 꺼내 조심스럽게 포장지를 풀었다.

가슴 가운데 빨간 하트가 새겨진 귀여운 곰 인형이었다.

요즘 들어 태준이 기운 없어 보여 심혈을 기울여 고른 선물이었다.

“집에 가시면 가운데 하트를,”

가을의 말과 동시에 태준이 저도 모르게 곰 인형 가슴에 있는 빨간 하트를 꾸욱 눌렀다.

‘대표님 힘내세요!’

가을의 목소리가 곰 인형을 통해 흘러나왔다.

“으앗! 집에 가서 눌러 보시라니까요.”

당황한 가을이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가을의 응원에 태준의 얼굴에 설렘이 가득한 미소가 걸렸다.

“예상도 못 했네.”

태준이 또 눌러 보려는 걸 가을이 저지했다.

“그만요!! 혼자 계실 때 누르세요.”

“고마워요.”

부끄러움에 얼굴이 빨개진 가을을 보며 태준이 장난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다 좋은데 한 가지가 마음에 안 드네.”

“네? 어떤 게요?”

“이거, 다시 녹음 되는 거예요?”

“그건 그런데…….”

“그럼 다시 해 줘요.”

태준이 빨간색 하트가 가을을 보게 곰 인형을 돌렸다.

“태준 씨, 힘내세요. 혹은,”

“…….”

“태준 오빠, 힘내세요. 아니면,”

“…….”

“오빠, 힘내세요. 같은?”

“…….”

태준이 어서 하라는 듯 손에 든 인형을 흔들어 보이자 가을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갛게 물들었다.

“여, 여기서요?”

“여기서.”

“…….”

“얼른.”

태준에게서 곰 인형을 건네받은 가을이 입술을 달싹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잠시만요!”

가을이 쏜살같이 달려 화장실로 향했다.

자신을 피해 녹음을 하러 가는 가을을 태준이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좇았다.

10여 분 뒤 화장실에서 나와 다시 자리에 앉은 가을이 태준을 빤히 응시했다.

“곰 인형은 방송국 들어가실 때 드릴게요.”

“지금 주지.”

“안 돼요. 대표실 들어가셔서 혼자 계실 때 누르세요.”

“알았어요.”

“약속해요.”

“약속.”

“어기면, 이제부터 내 동생이에요.”

“하하, 알겠어요.”

그사이 초밥 세트가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많이 먹어요.”

“네. 대표님도요.”

서로를 향해 미소를 짓던 두 사람이 초밥을 먹었다.

가을이 자주 가는 ‘STN’ 근처 도서관까지 데려다준 태준이 몸을 돌려 ‘STN’으로 향했다.

몇 걸음 걷다가 가을과의 약속을 깨고 태준이 쇼핑백에 들어 있던 곰 인형을 꺼내 들었다.

세 개 중 어떤 걸로 녹음했을지 궁금해 도저히 대표실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태준이 곰 인형 가슴에 있는 빨간 하트를 눌렀다.

‘사랑해요.’

예상하지 못한 가을의 말에 태준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하, 정말이지…….”

태준이 또다시 빨간 하트를 눌렀다.

‘사랑해요.’

그 자리에 선 채로 태준이 몇 번이나 곰 인형 하트를 눌렀다.

가을의 목소리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태준의 마음이 거칠게 일렁였다.

만약, 박선호 실종에 자신이 연관되어 있다면.

그 일로 가을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면.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었다.

그런 일은 없길 바라지만 그럴수록 이 불안함의 정체가 뭔지 확인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 인형을 조심스럽게 쇼핑백에 넣고 걸어가는 태준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늦은 저녁.

태준이 명석과 함께 선호가 사라졌던 날의 동선을 따라 길을 걸었다.

서울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산으로 둘린 조그만 동네였다.

집들도 주로 단독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고 집과 집 사이에 텃밭이 꽤나 크게 있는 구조였다.

10년이나 지났지만 아직 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아 도시라기보다 농촌의 느낌이 더 묻어나는 곳이었다.

“여기가 박선호가 차를 세워 두었던 장소입니다.”

태준이 명석이 가리킨 골목 쪽을 돌아보았다.

“이 길을 쭉 가다 보면 고장 신고를 한 집이 나옵니다.”

마치 선호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듯이 태준이 천천히 길을 따라 올라갔다.

10여 분을 걸어 올라간 곳에 나온 집은 산 아래 위치한 단독 주택이었다.

“여깁니다.”

명석이 단독 주택을 가리켰다.

“이 집이 박선호가 고장 신고를 받고 왔던 집입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마당 곳곳에 멋들어진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다.

“경찰 수입으로 땅을 사서, 이런 집을 지을 수가 있나.”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곳의 주인인 이정기는 서울지역 지구대에서 근무를 하다 이 동네 지구대로 발령을 받은 후 이곳에 땅을 매입해 집을 지었다.

이정기는 보육원에서 자라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같이 동거했던 여자가 명의를 이정기 앞으로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음.”

‘덜컹.’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맞은편 대문에서 나왔다.

“그럼 생각나는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 주세요.”

푸근한 표정으로 인사를 하는 사람은 특수 강도 사건을 수사 중인 박 형사였다.

“어.”

뒤를 돌던 박 형사가 태준을 발견하자 태준이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뒤이어 박 형사와 명석도 가벼운 눈인사를 주고받았다.

“여긴 어쩐 일이에요?”

“실종 프로그램 관련해서, 박선호 동선을 확인하던 중이었습니다.”

“반장님, 저 좀 급해서.”

박 형사와 함께 온 형사가 화장실이 가고 싶다는 표시를 하며 발을 동동거렸다.

“먼저 가 있어.”

후다닥 뛰어가는 모습을 보던 박 형사가 이내 시선을 태준에게 돌렸다.

“이런 걸 직접 확인할 필요가 있나. 사람 시키면 될걸.”

“눈으로 확인해 둬야, 좀 더 진정성이 묻은 방송이 되니까요.”

“뭐, 일리는 있네.”

박 형사에게 뭔가 얘기를 하려던 순간.

[태준아.]

끔찍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이 귀를 막으며 비틀거리자 명석이 태준의 팔을 잡았다.

“괜찮으세요?”

좀 더 선명해진 여자의 목소리에 태준이 가쁜 숨소리를 뱉어 냈다.

“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아요?”

빤히 올려다보는 박 형사와 눈이 마주치자 태준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괜찮아? 이봐! 이봐!!]

꿈속에서 봤던 그 장소.

[여기!! 이쪽이야!!]

그곳에 박 형사가 있었다.

자신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묻던 박 형사의 얼굴이 떠오르자 태준의 얼굴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그때…… 그때 분명…….”

어딘가 이상한 태준의 모습에 명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형, 괜찮은 거예요?”

순간, 태준의 귀에 벽을 긁는 듯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준아, 넌 영원히 내 거야.]

“으으…….”

태준이 식은땀을 흘리며 거친 숨을 내뱉자 명석이 태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안 되겠어요. 차 가져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세요.”

기다리란 말에 흠칫한 태준의 눈동자가 점점 커다래졌다.

뭔가 떠오른 듯 온몸에 핏기가 사라진 태준이 선호가 마지막으로 갔던 집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가을이가 기다릴 텐데.]

너무도 또렷하게, 선호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태준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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