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식이 없었다던 태준과 연락처를 주고받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실수를 깨달은 기수가 빠르게 말을 정정했다.
“아아, 다른 교통사고랑 헷갈렸네. 그쪽은 구급차에 실려 갔지.”
날카로운 태준의 눈빛을 피하며 기수가 앞에 놓인 물잔을 들었다.
“이게 워낙 오래되기도 했고, 내가 교통사고를 낸 게 한두 번도 아니고.”
태준이 당황하는 기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기수가 말한 당시의 사고 내용은 문규와 정열의 얘기와도, 보험사고 기록과 병원 진료기록과도 같았다.
교통사고 후 의식이 없는 상태로 병원에 실려 와 며칠을 깨어나지 못한 사고.
‘타닥, 타닥.’
태준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천천히 테이블을 두드리자 그 모습에 잔뜩 긴장한 기수가 마른침을 삼켰다.
태준이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 기수를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더 있을 것 같은데.”
혹시 태준이 모든 걸 기억하고 있나 싶어 눈치를 살피던 기수가 바쁜 척 시간을 확인하며 몸을 일으켰다.
“난 할 얘기 없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여기까지니까 앞으로 다시 찾아오지 마요.”
기수가 빠르게 룸을 나가는 모습을 태준이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순간. 사고에 관해서도, 어떤 증상이 있는지도, 물어볼 필요가 없어졌다.
왜 거짓말을 했을까.
기수의 반응으로 볼 때 사고 당시 자신은 의식이 있던 게 분명해 보였다.
문규와 정열의 얘기도, 모든 기록에도. 자신이 의식이 없었다고 되어 있어 의심해 보지 못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깊은 생각에 잠긴 태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 * *
‘세양 그룹 안.’
태준이 문규를 만나기 위해 회장실로 향했다.
이틀 전 기수를 만나고 난 후 태준은 보험회사에 당시 사건을 조사한 기록을 다시 찾았다.
오래전에 출력을 해 둔 내용과 달라진 부분이 있나 확인했지만 여전히 그 기록에는 태준이 쓰러진 채로 구급차를 타고 실려 가 병원에 입원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었다.
혹시 싶어 보상에 관련된 기록도 함께 찾아보았다.
당시엔 보상과 관련된 건 중요하지 않아 태준은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선 알아볼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보상 내역엔 차 수리비를 비롯해 한 달간의 입원과 연관된 부분이 적혀 있었다.
권기수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라면 모든 기록이 조작됐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어 담당 보험직원을 알아보았다.
담당 보험직원은 몇 년 전 퇴사해 지방으로 이사를 간 상태였다.
몇 번이나 연락을 취해 봤지만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이 강경해 어쩔 방법이 없었다.
그날의 진실이 뭔지, 숨기고 있는 게 뭔지 알기 위해 태준은 정열을 찾았다.
운전자가 자신에게 연락처를 줬다는 얘기를 하며 당시 의식이 있었음을 밝히자 정열은 10년 전 일이라 운전자가 기억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대답만 할 뿐이었다.
혹시라도 사실을 제대로 얘기해 줄까 싶어 정열부터 만났던 태준은 결국 문규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시각.
문규는 정열에게 걸려 온 전화를 받고 있었다.
“태준이가 그때 얘길 물었단 말이야?”
-운전자를 만나고 온 모양입니다.
“……!! 입조심 하라고 돈까지 쥐여 줬건만!”
-아마도 실수로 얘기를 꺼낸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문규가 이마에 손을 짚은 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대체 이제 와서 왜…….”
태준이 병원에서 깨어나 당시의 기억을 잃자 문규는 교통사고의 보험 담당자를 찾았다.
혹시라도 언젠가 태준이 사고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교통사고가 있던 날 태준이 사라져 사건은 ‘피해자 연락 두절’인 상태로 남겨져 있었다.
사건을 그대로 종결시킨 후 담당자에게 거액의 돈을 주고 태준이 쓰러져 병원에 온 것처럼 기록을 수정한 후 보상에 관한 부분도 바꿔 놓았다.
종결을 낸 상태에서 기록만 바꾼 것이기 때문에 보험 회사나 운전자인 기수에게 문제가 될 일은 없었지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더 치밀하게 바꾸도록 지시했다.
기수에게도 기록을 바꾸는 문제로 거액의 돈을 건네며 이 일에 대해서 절대 발설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다.
병원 진료 내역 역시 담당 의사에게 손을 써 태준이 의식이 없이 들어와 한 달을 입원해 있었다고 바꿔 놓았다.
그 뒤 유학을 갔던 태준이 얼마 뒤 한국에 왔을 때, 당시 진료 내역을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왜 갑자기 그때 사고를 확인하는지는 몰라도 모든 곳에 손을 써 둔 상태니 다른 의심은 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10년이나 지난 지금, 태준이 운전자를 찾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던 문규가 권 집사에게 운전자를 만나 보라는 지시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할 때 인터폰이 울렸다.
‘삐-’
-회장님, 강태준 대표님 오셨습니다.
예감하고 있던 듯 문규의 미간이 한껏 좁아졌다.
“나중에 전화하마.”
정열과의 전화를 끊은 문규가 인터폰을 눌렀다.
“들어오라고 해.”
문규의 말이 끝나고 곧바로 태준이 회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냐.”
“바쁘지 않으시면 잠시 시간 좀 내주세요.”
차 두 잔을 내어놓은 비서가 회장실을 나가자 태준이 기다렸다는 듯 용건을 꺼냈다.
“10년 전 제 교통사고,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말이냐.”
“아버지한테 다 듣지 않으셨어요?”
이미 정열에게 연락을 받았을 거라 생각한 태준이 문규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슨 소리 하는지 모르겠구나.”
태준과 문규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그때 교통사고, 분명 제가 쓰러진 채로 입원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병원 기록도 그렇게 되어 있고.”
“그게 왜.”
“제가 얼마 전 당시 운전자를 만났습니다.”
문규가 계속 얘기하라는 듯 고개를 낮게 끄덕이자 태준이 정확하게 들은 것처럼 일부러 강조해서 얘기를 꺼냈다.
“그분 말씀으론 저와 연락처를 주고받았다고 합니다.”
“쯧쯧- 10년이나 지난 일이다. 사람 기억을 어찌 믿어. 기록을 믿어야지.”
“기록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치자면야 사람의 기억은 온전할까.”
한 치의 밀림도 없이 두 사람의 눈빛이 부딪쳤다.
“후계를 포기하더니 요즘 시간이 많은 게야? 다 지난 일을 왜 찾아보고 다니누.”
태준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은 가을이 아니면 아무와도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가을을 반대하는 문규에게 이미 후계 자리도 포기하겠다고 얘기한 상태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이 증상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판단을 끝낸 태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통사고가 있던 후로 제가…….”
잠시 말을 멈춘 태준이 결연한 표정으로 문규를 응시했다.
“여자를 만질 수가 없습니다.”
“……뭐??”
태준이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문규에게 꺼내 놓았다.
여자와 몸이 닿으면 공황장애가 생기는 것, 그로 인해 기절했던 일부터 ‘계약 짝사랑’에 관한 부분을 제외하고 가을과 접촉할 때는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까지 모두 털어놓았다.
얘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점점 굳어지던 문규가 소파 등받이에 ‘털썩’ 몸을 기댔다.
“어떻게…… 어떻게 그런 일이.”
이마를 짚은 채 관자놀이를 꾹 누르는 문규의 눈빛이 깊은 상념에 잠겼다.
여자가 얼마나 두렵고 무서웠으면, 그런 말도 안 되는 증상이 다 생겼을까.
왜 진작 얘기하지 않았냐고 하려던 문규가 말을 꾹 집어삼켰다.
가을이라는 존재가 있지 않았다면 자신은 태준이 생각한 것처럼 대를 잇지 못하는 그를 후계에서 제외했을 게 분명했다.
연신 관자놀이를 누르던 문규가 낮은 목소리를 냈다.
“그래서 가을 양을 그렇게 쫓아다닌 게야?”
“아닙니다. 그것과 상관없이 좋아하는 거예요.”
“어째서 그 아이와는 괜찮을꼬…….”
“그래서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가을과는 아무런 증상이 없는 이유. 꿈에서 나온 박선호. 기억을 잃은 한 달.
이 모든 게 어쩌면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준아.”
“예.”
“때로는 모르는 게 나을 때도 있는 게야.”
이상 증상까지 얘기했는데도 문규의 뜻은 확고했다.
“여기서 그만둬라. 네가 기억을 잃었다면, 다 그 뜻이 있는 게 아니겠냐.”
말없이 문규를 바라보던 태준이 천천히 목소리를 냈다.
“대체…… 뭘 숨기고 계신 거예요.”
태준의 눈빛을 마주 보던 문규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날 일에 대해선 더 할 말이 없구나. 그만 나가 봐라.”
잠시 긴 숨을 내쉬던 태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문규에게 인사를 건네고 회장실을 나갔다.
“후우…….”
비틀거리던 문규가 간신히 책상을 짚고 버텨 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책상을 짚은 문규의 손이 조금씩 떨려 왔다.
‘띵-’
[1층입니다.]
태준이 임원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향했다.
주차장으로 가기 전 찬 바람에 머리를 식히고 싶어 걸음을 서둘렀다.
솔직하게 얘기해 줄 거라는 기대는 없었지만 문규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건 확실했다.
‘탁.’
출입문 앞에 다가섰을 때 누군가 휴대폰을 보고 걸어가다 태준의 어깨를 부딪쳤다.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는 남자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태준이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죄송합니다.]
태준의 머리에 잊고 있던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떠오른 기억에 태준이 출입문에 손을 짚었다.
‘희망 병원’ 안, 그때처럼 누군가 태준의 어깨를 부딪치고 사과를 건넸었다.
태준의 기억이 그때로 향했다.
[강태준 님 안으로 들어오세요.]
10년 전 교통사고 후. 도서관으로 향하던 길에 아무래도 머리가 아파 ‘희망 병원’을 찾았다.
교통사고가 있었다는 얘기를 하자 의사가 MRI를 권유했고 그날 태준은 검사를 받은 후 다시 도서관으로 향했다.
“후우…….”
출입문을 짚은 태준의 손이 떨려 왔다.
10년 만에 떠오른 그때의 기억.
예상대로 자신은 그 당시 의식이 있던 상태였다.
“분명 도서관으로 갔는데…….”
그 후의 기억은 여전히 없었다.
갑자기 찾은 단편적인 기억에 두통이 몰려온 태준이 그대로 밖으로 향했다.
“30분만 쉬고 갈게요~”
한강 공원 촬영 현장에 서준의 팬클럽이 보낸 커피차가 도착하자 가을이 잠시 촬영을 멈췄다.
추위에 몇 시간 동안 이어진 촬영을 강행한 스태프들이 뜨거운 커피를 한 잔씩 들고 저마다 휴식을 취했다.
현장을 지휘하는 가을은 카리스마와 함께 따듯함을 겸비해 현장 분위기는 언제나 화기애애했다.
가을이 커피차로 향하기 전 인증샷을 찍고 온 서준이 커피 두 잔을 가져와 한 잔을 가을에게 건넸다.
“이거 드세요.”
“고마워.”
가을과 서준이 그 자리에 선 채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며 조금씩 마셨다.
“뭐 안 좋은 일 있어요?”
“응?”
“생각이 많아 보이길래.”
“내가?”
근래 들어 태준의 모습이 신경 쓰여 촬영을 하고 시간이 생길 때마다 생각에 잠겨 있던 가을이었다.
촬영이 아니면 언제나 시선이 가을에게 향하는 서준이 그 모습을 알아차렸다.
“대표님이랑 싸웠나?”
“아니.”
“그럼?”
“아무 일도 없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지만 서준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머리로는 가을을 포기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마음으로는 그게 되지 않았다.
아무렇지 않은 척 촬영에 관련된 메시지를 보내고 가을에게 답변을 받을 때마다 설레었다.
가을에게 칭찬받고 싶어서 연기도 더 혼신을 불태웠다.
잘했다고 웃어 줄 때마다 마음이 지끈거릴 만큼 좋았다.
앞뒤 재지 않고 직진만 하는 성격이었지만 이미 가을에게 애인이 생긴 시점에 다가설 수는 없었다.
다 아는데도. 마음은 쉽게 꺼지지 않았다.
뜨거운 커피를 홀짝이며 여기저기서 웃고 있는 스태프들을 바라보던 서준이 낮은 목소리를 냈다.
“대표님이…… 잘해 줘요?”
“응.”
“……잘됐네.”
가을을 향해 웃어 준 서준이 스타일리스트가 다가오자 걸음을 옮겼다.
Rrrr-
태준의 전화에 가을이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통화 가능해요?
“지금 쉬고 있어요.”
-그럼 주차장으로 잠깐 올래요?
“여기 와 계세요?”
-전세 버스 옆에 차 세웠어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은 가을이 혁진에게 잠깐 볼일을 보고 온다고 일러둔 후 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태준의 차를 발견하자 주변을 한번 살펴본 가을이 보조석에 올랐다.
“어쩐 일이세요?”
“지나던 길에 들렀어요.”
“진짜요?”
“아니.”
태준이 가을을 당겨 안았다.
“보고 싶어서 왔어요.”
태준의 따듯한 온기가 차가웠던 가을의 몸으로 옮겨졌다.
“저도 보고 싶었어요.”
자꾸만 밀려오는 불안감에 태준이 가을의 머리를 당겨 품에 안았다.
“회사에 무슨 일 있으세요?”
“아뇨.”
“뭔가 있는 거 같은데…….”
“아무 일도 없어요.”
박선호와 자신이 어떤 연관이 되어 있을 것 같다는 얘기를 가을에게 꺼낼 수가 없었다.
불안감의 실체가 좀 더 명확해지면 그때 가을에게 얘기할 생각이었다.
Rrrr-
패딩 주머니에 넣어 놓은 가을의 휴대폰이 울리자 태준이 품에서 가을을 놓아주었다.
“누가 이렇게 방해를 하나.”
태준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가을 역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런 게 다 연출자의 숙명…….”
웃으며 발신자를 확인하던 가을의 표정이 일순 굳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