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 눈을 번쩍 뜬 태준이 소파 등받이에서 튕기듯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하아…… 하아…….”
온몸에 소름과 함께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몽롱해서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을 보고 있던 사람이 가을이 보여 줬던 사진 속 박선호의 얼굴이라고 느껴졌다.
박선호라니.
숨을 몰아쉰 태준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박선호의 사건을 알게 돼서 이런 꿈을 꾸는 건가.
얼굴을 타고 흘러내리는 식은땀을 손으로 닦아 낸 태준이 마음을 진정시키며 숨을 골랐다.
대체 왜 이런 꿈을 계속 꾸는지.
두근거림이 쉽게 진정되지 않아 연신 불규칙한 숨소리를 내던 태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단순히 꿈인 걸까.
그렇다기엔 같은 장면이 반복되는 게 어딘가 이상했다.
거기다 조금씩 진행되는 것처럼 같은 장면이 반복되다가 다른 상황으로 이어졌다.
“박선호…….”
선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자꾸만 어딘가가 욱신거렸다.
태준이 소파 등받이에 기대며 식은땀을 닦아 낼 때, 휴대폰 메시지가 울렸다.
디링-
[지금 문 앞이에요.]
가을의 메시지를 확인한 태준이 숨을 한번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덜컹.’
502호 문 앞에 서 있던 가을이 태준을 보고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가을에게 연락이 오면 데리러 갈 생각이었던 태준이 빌라까지 혼자 온 가을을 보며 꾸짖는 표정을 지었다.
“왜 혼자 와요. 연락하라니까.”
“그러려고 했는데요, 깜빡 졸다 일어나니까 동네에 도착해서 금방 걸어왔어요.”
태준이 혼내듯 가을의 머리를 가볍게 ‘콩’ 때렸다.
“위험하게.”
“매번 오던 길인데요.”
“아무래도 차가 있어야겠네.”
“아뇨! 필요 없어요.”
강하게 손사래 치는 모습을 보며 걱정 어린 표정을 짓던 태준이 가을의 손을 잡았다.
“그러니까 나 있을 때는 혼자 걸어오지 말아요.”
“네.”
“앞으로 촬영 늦게 끝날 땐 내가 데리러 가면 안 되나.”
“대표님 힘드시잖아요.”
“가을 씨 걱정하는 게 더 힘들어요.”
“음, 상황 봐서요.”
매번 데리러 오면 태준이 힘들 것 같아 가을이 에둘러 말하곤 밝게 웃어 보였다.
그 미소를 보자 태준은 조금 전 꿈으로 떨렸던 마음이 사그라든 기분이었다.
“잠깐 들어왔다 갈래요?”
살짝 몸을 돌리며 고개를 까닥이는 태준의 얼굴을 가을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대표님 혹시…….”
“음?”
“무슨 일 있으세요?”
평소와 다를 게 없었지만 어쩐지 태준의 모습이 이상한 것 같아 가을의 얼굴에 걱정이 묻어났다.
“궁금하면 잠깐 들어왔다 가요.”
태준이 얼른 들어오라는 듯 고개를 까닥이자 가을이 현관으로 들어섰다.
얼마 전 큰마음 먹고 산 검은색 운동화를 벗고 거실에 들어서자 태준이 다가와 가을을 당겨 안았다.
“오늘 고생했어요.”
“고생은요. ……근데 무슨 일인데요?”
“보고 싶어서.”
“…….”
“참느라 혼났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요……?”
“응. 아무 일도 없어요.”
“……진짜죠?”
“진짜.”
한참이나 가을을 안고 있던 태준이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피곤할 테니까, 차 한잔만 하고 가요.”
“네.”
가을이 식탁 의자를 꺼내 앉는 사이 태준이 무선 주전자에 물을 올렸다.
“첫 촬영은 어땠어요?”
“아직 실감이 잘 안 나요. 일정이 빠듯해서 정신없이 찍긴 했는데 잘했는지도 모르겠고.”
“잘했을 거예요.”
“대표님은 뭐 하고 계셨어요?”
“가을 씨 기다렸죠.”
“그 전에는요?”
“가을 씨 생각했고.”
“……그 전에는요?”
“두 가지 무한 반복.”
태준이 미소 지으며 가을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고 나머지 한 잔을 들고 맞은편에 앉았다.
“가을 씨는 바빠서 내 생각도 안 했겠네.”
“아니에요! 했어요.”
“얼마나?”
“많이요.”
태준이 식탁에 팔을 괸 채 느슨히 입술을 쓸어 올렸다.
“벌을 줘야 하나, 상을 줘야 하나.”
“……네?”
“내 생각 한 건 좋은데, 일할 때 다른 생각을 하면 쓰나.”
장난기 가득한 태준의 얼굴을 보던 가을이 말을 바꿨다.
“예의상 한 말인데, 솔직히 너~무 바빠서 대표님 생각할 시간이 없었어요.”
“그래요?”
태준이 가을의 눈에서 입술까지 느슨히 훑어내렸다.
“그럼 지금부터…….”
“…….”
“내 생각만 하게 해야겠네.”
“큼.”
노골적인 태준의 시선에 가을의 얼굴이 홧홧해졌다.
“농담.”
“…….”
“피곤할 텐데 얼른 쉬어야지.”
안심한 건지, 섭섭한 건지 가을이 뜨거운 찻잔을 들어 ‘후- 후-’ 열심히 차를 식혔다.
“은서준은 어때요?”
“서준이요?”
“이상한 행동 하면 바로 얘기해요.”
태준이 앞에 놓인 찻잔을 들며 말을 이었다.
“잘라 버리게.”
단호한 태준의 모습에 가을이 쿡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르면 안 되는데. 걔가 연기를 정말 잘하거든요. 장담하는데, 배우로 확실하게 성공할 거예요.”
“내 앞에서 지금, 다른 남자 칭찬하는 건가?”
“남자 아니고, 배우요.”
“배우에도 성별은 있으니까.”
“질투가 심하시네요.”
가을이 약 올리듯 혀를 내밀자 그 모습이 귀여워 웃어 보인 태준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다.
“박선호한테 소원은, 잘 빌고 왔어요?”
“네.”
“무슨 소원 빌었는지…… 물어봐도 되나.”
가을이 시선을 내린 채 찻잔을 매만졌다.
“제발 좀 나타나라고요.”
“…….”
“선호 오빠는 약속을 정말 잘 지켰거든요.”
찻잔을 보던 가을이 연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그런가, 이번엔 정말…… 제 소원을 들어줄 것 같아요.”
가을의 말을 듣고 있던 태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난 박선호예요.]
어째서 지금 박선호가 꿈에 나온 걸까.
가을이 빌었던 소원 때문인 건가.
불안함에 흔들리던 태준의 눈동자가 찻잔을 향했다.
* * *
아침 7시. 슈트 위에 코트를 챙겨 입은 태준이 출근을 하기 위해 산장 빌라를 나섰다.
두툼한 코트를 챙겨 입었는데도 아침 바람은 매서웠다.
뺨 위에 차가운 무언가가 와 닿자 태준이 허공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위로 어젯밤 기상청이 예보한 첫눈이 떨어져 내렸다.
흩뿌리듯 내리던 눈은 금세 함박눈으로 바뀌었다.
‘드르륵.’
창문이 열리는 소리에 태준이 고개를 들자 5층 창문에 선 가을이 놀란 얼굴로 하늘을 보고는 태준에게 거기 있으라는 손동작을 보냈다.
잠시 뒤, 잠옷 위에 긴 패딩을 걸친 가을이 빠르게 1층 현관문을 열었다.
“첫눈이에요!”
“그러게. 첫눈이네.”
가을을 향해 웃어 보인 태준이 아침이라 부어 있는 가을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왜 벌써 일어났어요.”
“어, 그게…… 잠깐 눈이 떠졌는데 대표님 가실 시간이 된 것 같아서 출근하시는 거 보려고요.”
“추운데. 전화를 하지.”
긴 코트 차림으로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 태준의 모습이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여 가을의 두근거림이 커졌다.
“첫눈이니까…… 같이 맞고 싶어서요…….”
가을이 쑥스러운 표정으로 웃어 보이자 태준이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서로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두 사람 머리 위로 흰 눈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렸다.
함께 첫눈을 맞고 싶다는 생각에 정신없이 내려왔던 가을이 함박눈을 맞고 있는 태준의 모습이 너무 설레 괜히 현실적인 얘기를 꺼냈다.
“차 엄청 막히겠어요.”
“그러게요.”
태준이 양 볼이 빨개진 가을을 애틋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출근하기 싫다.”
“대표님도 드디어 정상적인 직장인이 되어 가네요.”
가을이 가볍게 박수를 치자 태준이 슬며시 미소 지었다.
“10시에 스튜디오 촬영이죠?”
“네.”
“다행이네, 오늘 꽤 추운데.”
“첫눈 맞으면서 촬영하는 게 더 좋은데 아쉬워요.”
하늘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가을 보던 태준이 몇 걸음 다가가 그녀를 품에 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자다가 나가요.”
“다 잤어요.”
“다크서클 진해질라.”
“매력 포인트라면서요.”
“그러니까. 더 매력적이면 곤란해서 그래요.”
가을이 태준의 품에 안긴 채 쿡쿡거렸다.
따듯한 태준의 품에 안겨 있던 가을이 시동이 걸려 있는 차를 발견했다.
“어? 운전기사분 와 계셨어요?”
“7시니까.”
첫눈에 흥분해 운전기사가 와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했던 가을이 냉큼 태준의 품에서 떨어졌다.
“얼른 가 보세요.”
물끄러미 가을을 보던 태준이 고개를 숙여 ‘쪽’ 입을 맞췄다.
찬기가 묻은 촉촉한 가을의 입술이 마치 달콤한 샤베트 같아 한 번 더 입을 맞춘 후 태준이 숙였던 몸을 일으켰다.
“기사님 보시는데…….”
“괜찮아요.”
태준의 운전기사는 명석의 삼촌 중 한 명이었다.
철저하게 태준의 편이라 두 사람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흘릴 일은 없었다.
“감기 걸리겠다. 얼른 들어가요.”
“조심히 가세요.”
손을 흔들어 보인 가을이 아쉬움을 숨기고 산장 빌라 안으로 들어가자 그 모습을 보던 태준이 차로 향했다.
‘STN’ 대표실 안.
“권기수 씨, 한국으로 온 지 며칠 됐답니다.”
이상한 꿈을 처음 꾼 후.
태준은 명석에게 교통사고 당시 상대 운전자였던 권기수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끔찍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시에도 행방을 알 수가 없어 연락조차 하지 못했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권기수를 찾아보라고 지시한 후 태준도 그를 찾기 위해 노력했다.
꿈과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는 건 한 달간 기억이 사라진 그때. 그 사고뿐이었다.
당시 사고 기록에는 적혀 있지 않은 다른 일이 있었는지, 혹시 기수에게는 그 사고 이후 특별한 증상이 없는지 만나서 확인을 해야 했다.
예전 인적 사항만으로 기수가 어디에 있는지 찾아내기가 어려워 꽤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간신히 그의 SNS를 찾아 프랑스로 유학을 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리고 SNS를 통해 현재 그가 한국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오늘 오후에 시간 괜찮은지 약속 잡아 봐.”
“예.”
권기수가 승낙하지 않는다면 태준은 오늘 무작정 레스토랑을 찾아가 그를 만날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표님, 원래 꿈 안 꾼다고 하셨잖아요.”
“응.”
언제나 눈을 감으면 깰 때까지 반듯하게 누워 있다가 그대로 일어나던 태준이었다.
“박선호 사건을 알게 돼서 그런 꿈을 꾸는 걸 수도 있습니다.”
“음. 나도 그렇게 생각하긴 하는데.”
가을에게 선호에 관한 얘기를 듣고 나서부터 꾼 꿈이었다.
하지만 계속 반복되는 것이나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자꾸만 묘한 기분이 들었다.
꿈을 꾸고 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만큼 끔찍한 것도 단순한 꿈이라기엔 어딘가 이상했다.
“피곤하시면 오늘은 좀 일찍 들어가서 쉬세요.”
“괜찮아.”
“무리하지 마시고요.”
명석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태준이 괜찮다는 듯 연하게 웃어 보였다.
디링-
메시지 음에 명석이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빠~ 첫눈 오는데 내 생각은 안 했어요? 난 오빠 생각 이~~~만큼 하는 중.]
가영이 첫눈 사진과 함께 귀마개가 달린 모자를 쓰고 찍은 셀카를 보내왔다.
놀이공원을 다녀온 후, 자기한테 설레느라 눈 뜨고 보니 집이라던 가영의 메시지가 생각나 명석이 슬쩍 한쪽 입술 끝을 올렸다.
왜 그렇게 자기가 좋다는지 모르겠지만 매 순간 자신을 보며 눈을 빛내는 가영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호러 탐험대에서 가영의 손을 다시 잡은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무서워하지 않는 게 뻔히 보이는데 연신 비명을 지르며 어설프게 안겨 오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누구 메시지야?”
“예?”
“무슨 메시진데 그렇게 빤히 보나 싶어서.”
“아닙니다.”
디링-
이번엔 태준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울렸다.
[비밀지령: 명석 오빠를 빨리 퇴근시키시오.]
가영의 메시지였다.
“오늘 일찍 퇴근해.”
태준이 고민도 없이 곧바로 지령을 수행했다.
밑도 끝도 없는 태준의 말에 명석이 안경을 올렸다.
“갑자기요?”
다른 일엔 철두철미한 태준은 이런 일엔 요령을 부릴 줄을 몰랐다.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할 일은 하고 퇴근해야죠.”
태준이 아무 이유 없이 일찍 퇴근하라는 성격이 아님을 알고 있는 명석이 어딘가 의심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으로 스케줄을 체크했다.
“오전 11시에 강찬영이 비자금 때문에 만든 페이퍼 컴퍼니와 관련해 전은수 대표와 약속이 잡혀 있습니다.”
승무원에게 사 준 아파트 자금이 수상해 찬영의 뒤를 조사하다 결국 ‘세양 홈쇼핑’과 관련해 거액의 비자금을 ‘페이퍼 컴퍼니’를 만들어 빼돌렸다는 증거를 잡은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진성 의원이 받은 거액의 돈이 어디서 들어왔는지도 곧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권기수 씨는 약속 잡는 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응.”
명석이 인사를 하고 나가자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STN’ 문제나 찬영, 미연의 일은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는데.
자꾸만 떨려 오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은 점점 커졌다.
늦은 저녁.
태준이 레스토랑 단독 룸에서 당시 교통사고 운전자였던 기수와 마주 앉았다.
“벌써 10년이나 지난 일로 왜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네.”
시간이 없어서 만나지 못한다는 얘기에도 불구하고 명석이 집요하게 만날 것을 요구해 어쩔 수 없이 시간을 낸 기수였다.
자신이 있는 곳을 알고 있으니 만남을 피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 짧게 얘기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이렇게 멋대로 사람 연락처를 캐내질 않나, 있는 곳을 알아내질 않나. 이런 거 다 불법인 거 알죠?”
“죄송합니다. 제가 사정이 좀 급해서 무례를 범했습니다.”
기수가 앞에 놓인 물을 한 잔 마시고 내려놓았다.
마음 같아서는 불법임을 더 강조하고 싶었지만 떳떳한 입장이 아니라 그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대체 뭐가 궁금해서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굽니까?”
“당시 사고가 났던 상황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하, 이거 참. 10년이나 지난 걸 어떻게 일일이 기억하고 삽니까.”
“대략적인 거라도 부탁드립니다.”
태준의 말에 잠시 머뭇거리던 기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그게, 내가 주방 보조 일을 할 때라 며칠간 밤을 새워서, 졸음운전을 했습니다.”
기수가 생각을 더듬어 보듯 가늘게 눈을 뜨며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골목길에서 내려오다가 깜빡 졸았는데 눈을 떠 보니까 그쪽 차가 눈앞에 보여서 멈춘다는 게 실수로 액셀을 밟아서 운전석을 박았어요.”
태준이 특유의 위압감을 뿜어내며 기수의 눈을 흔들림 없이 응시했다.
“보험사 직원은 왜 현장에 나오지 않았습니까.”
“내 과실이 100%라 직원이 와서 볼 것도 없었고. 그냥 접수만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요?”
기수가 당시를 떠올리듯 눈을 굴리며 슬며시 팔짱을 꼈다.
“그리고 뭐, 차는 앞 범퍼만 나가서 다행이었는데 그쪽이…….”
순간 자신의 눈을 피한 기수가 미묘하게 눈동자를 굴리는 걸 태준이 알아차렸다.
잠시 말을 멈췄던 기수가 슬쩍 눈치를 보다 입을 열었다.
“그쪽이 머리에 충격을 받았는지 의식이 없어서 뭐, 구급차 오고, 차 견인되고 그랬던 것 같네요.”
고개를 끄덕거리던 태준이 경계심을 풀기 위해 일상적인 얘기를 꺼냈다.
상대의 긴장을 풀게 하는데 이것만큼 좋은 방법은 없었다.
“요리하신 지는 오래되셨습니까? 얘기 들어 보니 요리 솜씨가 아주 뛰어나시다던데.”
갑자기 왜 요리 얘기를 꺼내나 싶었지만 기수가 자부심을 드러내며 대답했다.
“오래됐죠. 유학도 그래서 간 거고. 내가 또 요리론 어디서 뒤지지 않으니까.”
태준이 사람의 마음을 무장해제 시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얘기가 끝난 후에 식사를 좀 할까 싶은데 추천해 주실 만한 요리가 있습니까?”
태준의 미소에 경계심이 옅어진 기수가 자신이 가장 자신 있는 요리를 추천했다.
그 이유를 묻는 태준에게 기수는 요리에 대한 설명을 해 주었다.
태준이 얘기를 경청하자 기수가 자부심을 얻어 설명을 이어 갔다.
눈에 띄게 긴장하던 기수가 요리에 대한 얘기를 하며 경계심을 풀자 태준이 슬쩍 사고 얘기로 돌아갔다.
“그런데 경찰서에 신고는 왜 안 하셨습니까?”
구급차가 올 정도의 상황이었다면 경찰서에 신고를 왜 안 했는지 궁금했던 태준이었다.
“신고하고 말 것도 없었어요. 큰 사고도 아니었고, 서로 연락처 주고받았는데 뭐 경찰 부를 일이 있나.”
순간 태준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연락처를, 주고받았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