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장비를 챙겨 야간 산행에 오른 가을이 산 정상에 도착했다.
제일 빠른 코스로 올라가면 2시간가량이 걸리는 산이었다.
어제 가영은 명석이 퇴근을 빨리할 수 있게 해 달라거나, 명석에게 은근하게 자신의 칭찬을 해 달라는 둥, 태준에게 비밀 지령을 잔뜩 내렸다.
그 지령은 가을에게도 이어졌다.
명석을 만날 일이 있으면 은근하게 동생이 착하다, 예쁘다, 등 명석이 관심을 보일 만한 얘기를 흘리라는 지령이었다.
가영다운 발상이 귀여우면서도 짠하게 느껴졌다.
가영이 좋아하는 사람이 명석이었다니.
자신이 보아 온 명석은 우직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런 명석이라면 가을은 적극적으로 응원해 줄 생각이었다.
잔뜩 격양돼 비밀 지령을 내린 가영은 결국 태준의 연락처까지 받아 냈다.
가영이 애교 섞인 목소리로 ‘형부’라고 하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태준은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하라는 얘기를 잊지 않았다.
필요한 게 생기면 정말 태준에게 연락할 가영이라 가을은 쓸데없이 연락하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 두었다.
그렇게 태준이 돌아간 후 어떻게 만났는지 얼마나 만났는지 등등을 추궁하는 가영에게 몇 시간이나 시달려야 했다.
‘쏴아아’
산 정상에 선 가을이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았다.
오늘은 드디어 가을이 연출가로 첫발을 내딛는 첫 촬영이 있는 날이었다.
가을이 선호와 한 약속을 위해 산에 오른다고 하자 태준은 함께 가자고 했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가을은 혼자 있고 싶었다.
‘언젠가 네가 꿈을 이루면, 내가 소원을 들어줄게.’
선호가 했던 약속에 소원을 빌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가을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 소원을 빌기 위해 7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비록 선호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이렇게 선호에게 소원을 빌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 자꾸만 눈가가 붉어졌다.
새벽 6시가 되었지만 11월의 산은 어둠으로 물들어 있었다.
정상에 선 가을이 간절함을 담아 두 손을 꼭 맞잡고 눈을 감았다.
‘선호 오빠. 나 드디어 연출자가 됐어. ……잘했지?’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가을의 몸을 쓸고 지나갔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내 앞에 나타나 줘.’
간절한 마음을 담아 소원을 빈 가을이 한참이나 그렇게 서 있었다.
몇 시간 후.
‘거기에 네가’ 첫 촬영은 야외 공원에서 시작되었다.
곳곳에 커다란 나무들과 정자가 어우러진 고즈넉한 공원이었다.
기합을 잔뜩 넣은 가을이 스태프들과 함께 전세버스를 타고 오전 11시가 지나 촬영지에 도착했다.
가을이 선호에게 소원을 빌고 산에서 내려온 시간은 이미 8시가 넘어 태준은 출근을 한 뒤였다.
출근하자마자 가을에게 전화를 건 태준은 첫 촬영인데 얼굴을 보고 오지 못했다며 한참이나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태준과 통화한 후 긴장감에 연신 찬물로 세수를 한 가을은 촬영장에 갈 때마다 늘 하던 파이팅을 몇 번이나 외치고 집을 나섰다.
스튜디오 촬영을 할 때 카메라를 잡은 적은 많았다. 하지만 조연출로 촬영을 할 때와 자신의 이름을 걸고 하는 촬영은 전혀 달랐다.
전세버스에서 내린 가을이 스태프들과 함께 공원으로 들어서자 공원에는 태준이 보낸 커피차가 발 빠르게 도착해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감독, 정가을.’
조 감독에서 감독으로 바뀐 문구와 함께 더욱 존재감이 짙은 색으로 제작된 [‘STN’ 대표, 강태준] 문구가 보였다.
“이야~ 오랜만에 강 대표가 보내는 커피차 보니까 반갑네.”
도식이 빠르게 다가가 커피를 주문하자 스태프들이 일반적인 커피차가 아닌 고급 커피 브랜드로 보내온 커피차로 우르르 향했다.
“강 대표, 사람이 일관성이 있어. 아주 좋아.”
“대표님 취향 존중. 이러다 제 입맛도 고급이 되겠어요.”
“나도 취향 한결같은 남자가 좋더라~~.”
혁진과 지영이 서로를 바라보며 엄지를 들어 보였다.
“정가을 감독님이 누구세요~~!”
굵직한 남자의 목소리에 가을을 비롯한 사람들의 시선이 몰렸다.
커다란 꽃바구니를 든 남자가 두리번거리며 다가오자 여기저기서 ‘오~~~’ 하는 감탄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전데요.”
가을의 목소리에 남자가 커다란 꽃바구니를 전해 주었다.
“뭐야, 뭐야? 대표님이 보낸 거예요??”
지영이 가을의 곁으로 쏜살같이 다가왔다.
한 손으로 들기도 벅찰 정도의 무게에 가을이 꽃바구니를 바닥에 내려놓고 안에 있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첫 촬영 축하해요. 태준.]
‘STN’ 대표 강태준이 아니라, ‘태준’이라는 글자에 가을의 심장이 묘하게 일렁였다.
“대표님이에요?”
“응? 아, 응.”
“어머 어머 어머~~ 로맨틱해라아아아~”
지영이 아예 주저앉아 꽃향기를 맡자 커피를 손에 든 스태프들이 또다시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와 꽃다발을 구경했다.
“어유, 이게 대체 얼마짜리야? 이거면 송학 주점 한 달은 가겠어.”
“어디 꽃집 털었나?”
도식과 혁진이 한 손에 든 커피를 홀짝이며 비싸 보이는 꽃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근데 어쩌나. 우리 정 감독, 이런 거 안 좋아하는데.”
“그러니까요. 가을 누나, 아니 감독님은 이런 거보다 실용적인 건데.”
“무슨 소리예요. 그래도 이럴 땐 꽃이죠. 그죠?”
지영의 말에 가을이 슬쩍 웃어 보였다.
평소 꽃 선물은 돈이 아깝다고 생각하던 가을이었지만 이 순간엔 기뻤다.
Rrrr-
태준의 전화에 가을이 슬쩍 눈치를 보며 자리를 이동했다.
“여보세요.”
-첫 촬영, 축하해요.
“꽃까지 보내실 줄은 몰랐어요.”
-나름 서프라이즈였는데. 괜찮았어요?
“생각도 못 했어요.”
-마음을 전할 게 꽃밖에 없어서 그런 거니까 이해해 줘요.
쓸데없는 돈지랄을 싫어하는 가을을 염려해 한 말이었다.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알고 있는 가을이 웃음기가 밴 목소리를 냈다.
“오늘은 기념비적인 날이니까, 특별히 봐드릴게요.”
-고마워요.
속살거리는 태준의 목소리에 가을의 뺨이 붉어졌다.
-점심 때쯤 그쪽으로 갈게요.
“무리해서 오시진 말고요.”
-스케줄 빼놔서 괜찮아요. 이따 봐요.
통화를 끝낸 가을이 괜히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커피차로 향하자 어느새 도착한 서준이 뒷짐을 진 채 가을에게 다가왔다.
“감독님.”
늘 선배라고 하던 서준이 이제는 호칭을 제대로 했다.
“이거요.”
서준이 꽃다발을 가을에게 건넸다.
“뭐, 저 꽃바구니랑 비교되긴 하는데. 어쨌든 축하의 의미니까 받아 줘요.”
잠시 망설이던 가을이 꽃다발을 받았다.
“고마워.”
가을을 향한 마음을 애써 눌러 내고 있는 서준이 괜히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스케일이 다르긴 하네. 역시 사귀는 사이라…….”
가을이 잽싸게 손을 뻗어 서준의 입을 막았다.
“조용히 해.”
입술에 닿은 가을의 손에 장난스럽던 서준의 눈빛이 바뀌자 가을이 서둘러 손을 치워 냈다.
“……이런 거에 설레면 내가 미친놈인데.”
가을이 뭐라고 하려는 순간, 두 사람 곁으로 도식이 다가왔다.
“이야~ 은 배우도 정 감독 입봉 축하하는 거야? 이러면 내 손이 무척 부끄러워지는데 말이야.”
“감독님은 전에 축하 많이 해 주셨잖아요.”
“그래, 우리 정 감독은 이런 꽃보다 파전을 더 좋아한다고. 그런 의미로 오늘 끝나고 송학 주점 콜?”
“아뇨.”
깔끔하게 거절한 가을이 커피차로 몸을 돌렸다.
잠시 뒤.
탁-
슬레이트 소리와 함께, 가을이 카메라를 잡았다.
첫 신은, 다른 세계에서 살던 남자 주인공이 공원 한가운데 나타나 혼란을 겪는 장면이었다.
순조롭게 서준의 단독 신을 끝내고 여자 주인공인 보라의 촬영을 기다리며 서준이 가을과 함께 모니터링을 했다.
그사이 태준이 촬영장에 도착했다.
한껏 촬영에 몰두한 가을이 카메라만 응시할 때 서준이 멀리에서 다가오는 태준을 발견했다.
“여기에서 이 동작 말인데요.”
서준이 일부러 가을의 얼굴 쪽으로 바짝 몸을 기울이자 그 모습을 본 태준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사귀는 걸 알았으니 포기하겠지 했는데.
일을 하고 있는데 방해할 순 없어 태준이 팔짱을 낀 채 속만 끓였다.
“잘라 버릴 수도 없고.”
“누굴요.”
그 곁으로 다가와 선 명석이 태준의 시선 끝에 있는 서준을 쳐다보았다.
서준이 가을의 옆에 바짝 붙어선 채 모니터링을 하고 있었다.
“당분간은 두 사람이 붙어 있는 시간이 아주 많겠어요.”
태준이 뭔가를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 서준을 노려보았다.
“지방 촬영도 있던데.”
“…….”
“선후배 사이니까 이 기회에 더 가까워지겠네요.”
명석의 말에 팔짱을 낀 태준의 손에 점점 힘이 실렸다.
모니터를 보던 가을이 뭐라 뭐라 하자 동작을 확인하려는 듯 서준이 가을에게 가벼운 스킨십을 했다.
그 모습을 보는 태준이 질투심에 활활 불타올랐다.
“저 자식 손을 당장! ……후우.”
웬만한 일에는 동요하지 않는 태준이 초조한 모습을 보이자 그 모습에 웃음이 나와 고개를 돌렸던 명석이 이내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스태프 한 명이 가을에게 다가와 뭐라고 얘기하자 가을이 고개를 돌렸다.
살짝 손을 들어 보이는 태준을 향해 반가운 표정을 지었던 가을이 이내 표정 관리를 했다.
“잠깐만.”
서준에게 양해를 구한 가을이 태준에게 향했다.
“언제 오셨어요?”
가을이 다가와 태준과 명석을 돌아보자, 명석이 꾸벅 인사를 건넨 후 자리를 벗어났다.
“방금 왔어요.”
가을이 표정을 숨기기가 어려운지 괜히 대화 없이 ‘큼.’ 기침 소리만 냈다.
“잘돼 가요?”
“네, 현장 분위기가 좋아서 다행이에요.”
“그래 보이네.”
“여기 공원 정말 예쁘죠?”
사랑이 가득 담긴 눈으로 태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감독님~!”
누군가 가을을 찾는 소리가 들렸다.
“얼른 가 봐요.”
“죄송해요, 첫 촬영이라 정신이 좀 없어서.”
“나도 들어가 봐야 해요.”
무심히 고개를 돌린 태준의 눈에 이쪽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서준이 보였다.
“집에서 봐요.”
태준이 고개를 숙여 가을의 귀에 속삭이자 서준이 휙 몸을 돌려 어디론가 향했다.
그날 밤.
거실 벽에 걸린 시계가 오후 11시 30분을 가리켰다.
야외 촬영을 끝낸 가을을 데리러 간다고 하자 전세버스가 집 근처를 지나가니 그때 내리면 된다는 연락이 왔다.
집 근처에 다다라 연락을 하겠다는 가을의 말에 태준은 잠시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중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TV를 볼 때 잠이 든 적이 없던 태준이 자꾸 쏟아지는 졸음에 목을 돌리며 어깨를 주물렀다.
소파 테이블 위에 놓아둔 물 한 잔을 마시고 내려놓은 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내일 아침 서울에는 첫눈 소식이 있겠습니다. 평년보다 기온이 크게 떨어져 강풍을 동반한 첫눈이 예상되는데요, 이번 추위는 이번 주까지 이어지다가 다음 주 목요일쯤 기세를 꺾을 것으로…….]
일기 예보를 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태준이 이내 잠이 들었다.
그렇게 또다시 악몽이 시작되었다.
사방이 막힌 넓은 공간.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
소리가 들리진 않지만 여전히 누군가 다가오고 있는 것 같은 소름 끼치는 기분.
그 느낌이 들기 시작하자 잠이 든 태준의 몸이 움찔 떨려 왔다.
‘철컹.’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이번엔 바닥에 ‘쿵’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자세히 보이진 않아도 그게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어 누군가 두런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들고…… 우리 태준이가,]
[일을 이 지경…… 너야.]
[당신이…… 않았…… 되잖아.]
남자? 여자? 몸이 물속에 있는 듯 말소리가 웅웅거려 알 수가 없었다.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한참을 다투는 듯한 느낌이 들다가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소리와 함께 물속에 몸이 붕 뜬 것 같은 감각이 이어졌다.
그 상태로 자신이 뭔가를 끊임없이 얘기하고 있다는 느낌이 이어지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머리야.]
눈앞에 어떤 남자가 힘겹게 일어나 앉는 모습이 보였다.
……!!!
피??
일렁임에 제대로 보이진 않았지만 태준은 남자에게 묻은 것이 피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꿈이야.
웅얼 웅얼…….
말을 하고 있다고 느껴질 뿐 잘 들리지 않던 남자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려왔다.
[여기 얼마나 있었어요?]
[……며칠이나 있었는지…… 모르겠는데.]
힘겹게 입을 여는 자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지? 누군데 나랑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몽롱한 느낌에 웅웅거림이 섞여 속이 울렁이는 기분이었지만 대화의 내용은 명확하게 들렸다.
[형인가? 아니면 동생? 몇 살이에요?]
[……스물둘…….]
[형이었네. 일단 형이라고 부를게요.]
남자였나? 누군데 날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꿈에서 보이는 남자가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난…… 강태준.]
어떤 상황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지만 무의식중에 태준의 몸이 떨려 왔다.
[내 이름은.]
눈앞에 있는 남자가 환하게 웃는 모습이 보였다.
[박선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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