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준과 박 형사가 휴게실 의자에 자리했다.
곧 현장에 나가야 해서 근처 카페까지 갈 시간이 없다는 박 형사의 말에 캔 커피를 하나씩 들고 휴게실로 온 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실종 관련 특별 기획에 관한 얘기를 얼마간 이어 갔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박 형사가 손에 든 캔 커피를 쭉 마시고 슬쩍 태준을 돌아보았다.
“그런데, 진짜 날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잔뼈가 굵은 형사답게 박 형사가 태준이 찾아온 진짜 의도를 모를 리가 없었다.
“방송국 대표가 자문을 구한다고 일개 형사를 찾아올 리는 없고.”
태준 역시 박 형사가 눈치를 채고 있을 거라 예상해 동요하지 않았다.
“실종 관련 기획은 정말 진행할 생각입니다. 실종 수사팀에도 자문을 구하겠지만 박 형사님도 도움 주셨으면 합니다.”
“그거야 뭐, 어려운 건 아니니까.”
잠시 말을 멈춘 태준이 용건을 꺼내 들었다.
“가을 씨와 함께 갔던 날, 절 알아보시는 것 같던데. 혹시 절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인터넷상에 찬영의 사진은 공개된 것에 반해 태준의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괜한 노출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걸 싫어하는 태준이 ‘세양 그룹’이나 ‘STN’ 관련 기사에 얼굴이 나오는 걸 막은 탓이었다.
그런데 분명 박 형사는 자신이 누군지 아는 표정이었다.
“글쎄, 난 바로 알아본 적이 없는데.”
태준과 박 형사의 눈빛이 마주쳤다.
“아, 혹시 내가 너무 놀라서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네.”
“…….”
“늘 혼자 오던 가을이가 누구랑 같이 왔길래 무척 놀랐거든요.”
“정말 절 본 적이 없으십니까?”
“나 같은 서민이 재벌을 볼 일이 있나. 그날 처음 본 겁니다.”
“정말입니까?”
태준이 진실을 가늠하듯 박 형사의 눈을 놓치지 않고 바라보았다.
“그게 왜 궁금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로 거짓말할 이유도 없고.”
박 형사가 남은 캔 커피를 쭉 들이켜고 자리에서 일어나 빈 캔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난 이제 들어가 봐야겠는데. 요즘 사고가 많아서요.”
박 형사의 말에 태준이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꾸벅 인사한 태준이 몸을 돌려 걸어가는 모습을 보던 박 형사가 슬며시 인상을 구겼다.
‘탈칵.’
태준이 차에 올라 안전벨트를 맸다.
박 형사를 만나고 나니 자신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다.
아무리 베테랑 형사라고 해도 찰나의 눈빛을 숨길 수는 없었다.
명석이 조사해 온 바에 의하면 박 형사는 10년이 넘게 ‘도담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한국에 온 지 2년이 채 되지 않은 자신이 도담 경찰서에 근무하는 박 형사와 만났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운전석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한참이나 생각에 잠겨 있던 태준이 이내 시동을 걸었다.
‘세양 그룹’ 사장실 안.
잠시 자리를 비운 사장실 안에 미연이 들어왔다.
평소 정열을 찾아올 때면 통화를 하고 왔던 미연이 운영하고 있는 미술관 문제로 나왔다가 약속도 없이 정열을 찾아왔다.
진성의 문제로 머리가 아파 스트레스를 받고 있던 미연은 얼마 전 미술관에서 주최하는 부부 동반 모임에 평소 참여하지 않던 정열이 함께해 기분이 한껏 들떠 있었다.
요즘 들어 평소보다 정열이 자신과 함께해 주는 시간이 많았다.
무뚝뚝하고 말이 없는 정열이었지만 근래에는 이것저것 물어봐 주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잦았다.
뒤늦게 정열이 자신에게 마음을 주는 건가 싶어 하루하루 행복한 마음이 든 미연이었다.
“차 내어 올까요?”
미연을 따라 들어온 비서의 목소리에 미연이 고개를 돌렸다.
“차 좋지. 부탁할게요.”
“다른 것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미연이 비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채운 흰 블라우스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치마. 하나로 깔끔하게 올린 머리. 연한 화장이 돋보이는 이십 대의 팽팽한 피부.
“좋을 때네.”
“네?”
“아니에요.”
미연이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나가 보라는 손짓을 하자 비서가 꾸벅 인사하고 사장실을 나갔다.
아무리 시술을 받고 치장을 해도 젊음은 이길 수가 없었다.
정열에게 사랑받기 위해 늘 단정하게 모습을 꾸미고 가꾸던 세월을 떠올리던 미연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단아한 느낌이 강조된 네일아트와 고가의 반지. 하지만 어느덧 손에는 깊은 주름이 져 있었다.
잠시 씁쓸한 미소를 짓던 미연이 이내 생각을 떨쳐 냈다.
이제라도 정열이 자신을 봐 준다면 지나간 세월쯤은 묻어 둘 수 있었다.
아직 제 나이로 보지 않는 피부와, 외모를 자신하며 미연이 소파로 향했다.
그사이 비서가 차 한 잔을 놓고 나가자 정열을 기다리며 차를 마시던 미연이 늘 정열이 앉아 있어 보지 못했던 책상으로 다가갔다.
이런저런 정열의 물건들을 만져 보던 미연의 눈에 작은 열쇠가 꽂혀 있는 책상 서랍이 보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 정열이 깜빡 잊고 잠그지 못한 게 분명해 보였다.
뭘 넣어 놨길래 잠그고 다니는 걸까.
슬쩍 문을 쳐다본 미연이 조심스럽게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얇은 책 한 권과 만년필이 든 케이스가 전부였다.
“뭐야. 이런 걸 왜 잠그고 다녀.”
혹시 싶었던 미연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서랍을 닫았다.
그러다 문득, 다시 서랍을 열어 책을 펼친 미연의 손이 덜덜 떨려 왔다.
[사랑을 담아 정열 오빠에게. 내 생각이 날 때마다 읽고, 쓰길. -애란.]
책과 만년필은 언젠가의 애란이 선물해준 것인 듯했다.
떨리는 손으로 책을 넘기자 활짝 웃고 있는 빛바랜 애란의 사진이 보였다.
미연의 입에서 ‘으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죽은 여자를 아직도…….”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불태우고 싶은 마음을 누르며 미연이 다시 책을 서랍에 넣어 두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마음을 누르며 미연이 소파에 다가가 앉았다. 죽어서까지 정열의 마음을 가져간 애란이 너무 미웠다.
독기 가득한 표정으로 미연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정열이 애란을 잊지 못해도, 죽은 여자가 정열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탈칵.’
사장실 문이 열리고 정열이 들어오자 미연이 언제 그랬냐는 듯 참한 미소를 지었다.
“연락을 하고 오지.”
“같이 점심하고 싶어서 들렀는데. 당신 바쁘면 그냥 가도 돼요.”
“음,”
정열이 함께 들어온 비서를 돌아보았다.
“호텔 M 한정식이 괜찮다고 했던가.”
“예, 사장님.”
“거기로 30분 뒤, 예약해 두지.”
“알겠습니다.”
정열이 소파로 다가오는 모습을 보며 미연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괜히 바쁜데 저 때문에 시간 내시는 거 아니에요?”
“나도 아직이야. 한식당 괜찮지?”
“네.”
정열이 미연의 맞은편에 앉았다.
잠자리를 갖게 돼 책임감에 한 결혼. 그렇게 미연을 애란으로 착각한 관계에 찬영이 생겼다.
미연에게 여자로서의 감정은 없었지만 늘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애란이나 태준에 대해서 늘 이해한다는 말만 할 뿐, 미연은 싫은 소리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문규가 태준을 ‘세양 그룹’ 회장 자리에 앉힐 것이라는 건 짐작하고 있는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일선에서 물러나 미연과 함께 조용한 곳에 머물며 지낼 생각이었다.
애란을 사랑하는 마음을 지울 수는 없겠지만 평생을 자신의 곁에 있어 준 미연을 위해서 남은 인생은 그녀와 함께할 생각이었다.
“당신한테는 미안한 게 많아.”
“아니에요. 저야말로 내조가 부족해 늘 죄송한걸요.”
“나온 김에 점심 식사하고 가볍게 드라이브라도 하고 들어가지.”
“어머, 드라이브요?”
“단풍이 제법 든 모양이야. 그동안 그런 것 하나 챙기질 못했네.”
방금까지 애란에 대한 질투로 들끓던 미연이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저런 추억의 물건 따위. 없애면 그뿐이었다.
결국 이렇게 정열의 옆을 차지한 건 자신이었다.
미연의 얼굴엔 자신이 이겼다는 웃음이 걸려 있었다.
* * *
오랜만에 쉬는 토요일, 명석은 가영과 첫 번째 약속을 잡았다.
뭘 하고 싶냐는 명석의 질문에 가영은 기다렸다는 듯 놀이공원을 얘기했다.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궁금한 마음에 명석이 승낙을 하고 오전 10시에 만나기로 한 상태였다.
집 근처까지 데리러 간다는 명석의 말에 가영은 만나러 가는 길의 설렘을 갖고 싶다며 중간 지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거기다 명석이 기다려야 할 가게 상호명을 보내왔다.
차 안에 있지 말고 꼭 거기 서 있으라는 얘기를 강조했다.
첫 번째로 함께할 장소가 놀이공원인 만큼 명석은 편안한 청바지에 흰 티셔츠. 그 위에 베이지색 후드점퍼를 걸쳤다.
늘 보이는 반듯한 회사원 이미지가 아닌, 대학생 같은 느낌이 물씬 묻어나는 차림이었다.
평소와 달리 하루가 재밌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명석은 어딘가 모르게 살짝 마음이 들떴다.
시간이 날 때면 태준과 등산을 가거나, 태준과 운동을 하거나, 태준과 술을 한잔하거나. 대부분의 여가를 태준과 보냈다.
혼자인 시간엔 책을 읽거나, 좋아하는 복싱을 하거나, 태준과 마찬가지로 건전함 그 자체인 삶이었다.
가영과 만나기로 한 장소 근처에 차를 세워 둔 명석이 약속한 가게 앞으로 향했다.
디링-
[첫 데이트 인사 방법을 고르시오. 1번, 2번, 3번.]
가영에게 온 메시지였다.
생각지도 못한 질문에 입꼬리를 늘린 명석이 답변을 보냈다.
[보기는 없습니까?]
디링-
[숫자만 고르시오.]
가게 앞까지 다다른 명석이 잠시 고민하다 숫자를 골랐다. 왜 골라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가영이 말한 대로 숫자를 골라 메시지를 보냈다.
[3번.]
명석이 메시지를 보내자마자 가영의 목소리가 크게 들렸다.
“오빠!!”
한참 떨어진 곳에서 청바지에 여성스러운 블라우스, 가벼운 재킷을 걸치고 머리를 길게 늘어트린 가영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명석이 손을 들려는 순간 ‘와다다다’ 빠르게 달려온 가영이 스파이X맨처럼 명석의 목에 팔을 두르고 다리는 그의 몸에 감은 채 찰싹 매달렸다.
가영이 힘껏 뛰어와 거미처럼 딱 매달렸는데도 명석은 전혀 미동도 없었다.
“…….”
혹시 명석이 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그대로 자신을 받아 주자 가영의 심장이 정신없이 뛰었다.
거기다 힘껏 달려 매달렸는데 한 발자국도 밀려나지 않는 강인한 체력이 섹시하게 느껴졌다.
“달려가 안기기. 오빠가 고른 거예요.”
“1번은?”
“달려가 업히기.”
“2번은?”
“달려가 뽀뽀하기.”
“…….”
애초에 정상적인 방법은 없는 인사 종류였다.
명석이 2번이 아님을 다행으로 생각할 때 사람들이 명석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가영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가영이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자 차마 가영의 몸에 손을 대지 못한 명석이 그대로 꿈쩍도 하지 못하고 서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지금 심장 뛰는 소리 들려요?”
“…….”
가영이 꿈틀대며 명석의 목을 더 당겨 안았다.
“오빠 때문에 고장 났나 봐.”
“……그래서, 언제 내려올 생각이에요.”
“내려가기 싫은데…….”
“그럼, 이러고 걸어요?”
“걸을 수 있어요?”
“걷는 건 어렵지 않은데. 꼭 그래야 하나, 싶어서요.”
“그럼 딱 다섯 발자국만요.”
가영의 말에 명석이 손도 대지 않은 채 흔들림 없이 다섯 걸음을 걸었다.
그제야 가영이 명석의 몸에서 떨어져 내려왔다.
혹시 가영이 내려다 다칠까 싶어 손을 뻗었던 명석이 이내 손을 거뒀다.
“와아~ 오빠 체력 장난 아니네. 난 무슨 전봇대에 매달린 줄?”
가영이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넘기며 해맑게 웃었다.
예측하기 힘든 가영의 행동이 어이가 없으면서도 귀여워 명석의 입술이 슬쩍 올라갔다.
“뛰어와서 몰랐는데, 슈트 차림 보다가 이렇게 보니까 완전 더 멋있어. 아무도 못 보게 주머니에 넣어서 다니고 싶다.”
“……그만 가죠.”
명석이 주차한 곳으로 몸을 돌리자 가영이 연신 미소를 지으며 따라왔다.
얼마 가지 않아 명석과 가영이 차에 올랐다.
내비게이션을 켠 후 안전벨트를 하려던 명석이 슬쩍 가영을 돌아보았다.
“안전벨트 해요.”
“안 해야지~”
명석이 왜 안 하냐는 표정으로 가영을 보았다.
“영화 보면 안전벨트 안 하는 여자한테 남자가 해 주잖아요. 가까이 왔다가 얼굴이 딱! 눈빛이 딱! 입술이 딱! 그런 거 해 보고,”
가영이 배시시 웃으며 명석을 돌아본 순간, 명석이 불쑥 가영의 앞으로 다가왔다.